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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서상진 세계잡지연구소장
'민주조선' 창간호 표지. 1946년 4월(서상진 소장본) ⓒ천지일보 2023.03.01.
<民主朝鮮(민주조선)>은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조총련계가 일본어로 만든 종합잡지이다. 그간 여러 이유로 우리나라 잡지사에서 빠져 왔기에 이번에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가 소장한 잡지는 1946년 창간호부터 1949년 9월 통권 31호까지 9권이다. 최종적으로 몇 호까지 나왔는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 당시로는 드물게 31호까지 간행된 것으로 보아 꽤 장수한 잡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민주조선' 창간호 목차(시인 김종한의 유고시 실림)(왼쪽) 및 판권(오른쪽) (서상진 소장본) ⓒ천지일보 2023.03.01.
창간은 1946년 4월 1일인데 창간호에서 특징적인 것을 보자면 문단의 괴짜 시인 을파소 김종한의 유고시 <쾌유기>외 1편이 있다는 것과 재일교포 작가인 김문수가 김종한에 대한 글을 실어 김종한을 회고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발행인: 조진용
○편집인: 김원기
○정가: 2원
○면수: 52면
○발행소: 민주조선사
3호부터 재일교포 소설가 김달수의 편집, 월북문인 조벽암의 글이 눈에 띄고 6호부터는 발행인이 한덕수로 바뀌었다.
1945년 8월에 찾아온 광복은 재일조선인들에게는 ‘귀국의 자유’를 의미했지만 미군이 선박을 통제하고 있던 당시의 조건으로는 재일조선인들이 승선할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에게는 귀국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 각지에서 귀국의 희망을 품고 하카타, 센자기, 사세보 등의 승선지로 모여들었던 조선인들은 길이 막혀 오도가도 못 하고 가진 돈은 다 써버려서 어쩔 수 없이 일본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미 점령군은 1946년 12월까지 돌아가지 않은 자들을 ‘인양(引揚) 포기자’로 간주하고 그해 12월 15일에 인양계획 완료를 발표해버린다. 그로 인해 약 60만의 조선인이 일본 내에 동결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어쩔 수 없이 일본에 남게 된 조선인들은 집도, 절도, 가진 돈도 없는 부랑자와 같은 환경 속에서도 자녀교육에 본격적으로 나서기로 하는데 <민주조선>의 창간도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 관련이 깊을 것이다. 발행인이 조총련의 의장이었던 한덕수로 바뀐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진다.
'민주조선' 1947년 2월호 표지 (서상진 소장본) ⓒ천지일보 2023.03.01.
1947년 2월 2권 8호와 1947년 9월 통권 14호 2회에 걸쳐 소설특집호로 이은직의 소설 <탈피> 김달수와 김원기의 소설, 윤자원의 시 <대동강>과 김우석의 <문학의 해방>, 손인장의 <조선문단의 현상>, 남쪽문인 이주홍의 <역사>, 월북문인 이원조(시인 이육사의 친동생)의 <민족문학 발전과 개관>을 실었다. 형 이육사는 남쪽에서 동생 이원조는 북쪽에서 활동한 문인으로 민족의 아픈 단면을 보여주는 가족사이다.
한덕수(1907~2001, 경북 경산 출신) 그는 누구인가. 재일조총련 의장을 오래 역임했던 그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조선인의 뇌리에는 지진 때 대량학살이 행해졌다는 사실이 즉시 떠올랐다…. 그 때문에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은 자신이 지켜내야 한다.”
일본에서 골칫거리로 전락한 재일조선인들에 대해 남한에서도 전혀 귀국을 고려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 속에서 북송계획은 급물살을 탔고 많은 재일동포가 북송되어 갔다. 그때 동포들에게 북송을 선전하고 이끈 인물이 한덕수다. 그가 1999년 1월 1일 김정일 총비서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신년축하문’을 보냈다고 평양방송이 보도하기도 했다.
'민주조선' 1947년 9월호 표지 (서상진 소장본) ⓒ천지일보 2023.03.01.
'민주조선' 1947년 9월호 목차(시인 이용악의 작품 실림) (서상진 소장본) ⓒ천지일보 2023.03.01.
14호인 1947년 9월호에는 북이 고향인 이용악의 시 1편이 실렸고, 허남기․이은직․박원준․박찬모의 소설과 김태준의 <조선소설사>를 창간호부터 12회에 걸쳐 번역․연재하였다. 15호인 1947년 10월․11월호에는 윤봉구의 <재일조선 청년의 진로>와 소설에 장두식의 <귀향>, 박찬호의 <몸 부락>을 2회 연재로 끝냈다.
1948년 11월호에는 허남기가 조선풍물시 <경주>를 연작시로 발표했고, 홍구의 소설과 월북소설가 안회남의 <夜(야)>와 김달수의 소설 <족보>를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29호인 1949년 7월호에는 북쪽이 고향인 안함광의 <민족문화의 확립 ‘조선’>을 11페이지에 달하는 긴 글로 수록하였다. 31호인 1949년 9월호에는 한덕수의 <조국통일 민주전선>과 홍등의 <남조선 산업의 실태>와 조수리의 소설 <小二黑(소이흑)의 결혼>을 실었다. 이것이 필자가 소장한 마지막 권이다.
<民主朝鮮>은 몇 호까지 나왔을까? 31호까지 나온 것을 볼 때 그 뒤로도 계속 발간되었지 않았을까 싶다. 장수한 것도 대단하지만 그 안에 일본에서의 재일교포의 인식, 남북한의 사회, 경제, 문화 문제와 주변국들의 정세까지를 다룬 점을 특히 높이 평가할 만하다.
'민주조선' 1946년 12월호 무궁화 표지 (서상진 소장본) ⓒ천지일보 2023.03.01.
'민주조선' 1946년 12월호 목차. 이육사의 동생 이원조의 글이 수록됨 (서상진 소장본) ⓒ천지일보 2023.03.01.
월북문인과 북이 고향인 문인과 남쪽문인
한국 정부는 흔히 시인 이용악을 월북문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북쪽 출신인 이용악은 자신의 고향집을 찾아간 사람이 아닐까? 필자의 생각이다. 재일교포 중 조총련계의 글도 함께 실렸던 잡지 <민주조선>. 이렇게 다양한 성향의 글이 실린 잡지를 앞으로 또 볼 수 있을까? 이런 이유로 <민주조선>을 대한민국잡지사에 올리고 연구자들이 연구하는 그날을 기대하여 본다.
당시 남한으로부터도 일본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던 재일조선인들의 사회에서 발간된 이 잡지의 내용을 필자로서는 알 수 없지만 다양한 시각과 목소리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 이상적인 우리의 미래상이지 않을까? 분단이 남긴 상처를 치유해 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시점에서 <民主朝鮮>에 관한 연구가 행해진다면 뜻밖의 시대적 가르침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일의 시작에는 의문부호가 놓여 있기에 필자도 여기에(?) 하나를 붙여놓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