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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金 學 成*
I. 문제 제기―개념과 범주화의 면에서 II. 서민가사의 담론기반 III. 서민가사의 미학적 특성 IV. 맺는 말
* 성균관대 어문학부 교수.
I. 문제 제기―개념과 범주화의 면에서
조선후기의 우리 문학사를 기술함에 있어서 임․병 양난 이후 ‘서민의식의 성장’이라는 말은 문학사를 풀어 가는 핵심어(key word)이자 화두로 자리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문학사의 전개가 중세의 봉건적 징후를 떨쳐내면서 근대문학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으로 설정되고 그것을 추동하는 힘을 서민층에서 찾아 그들을 문학사의 새로운 담당층으로 설명하려는 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라 할 것이다. 이러한 문학사의 전개방향은 가사문학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조선전기의 양반사대부를 중심으로 창작․향유되어 온 가사와 세계관적으로나 미의식에 있어서 대립 혹은 차이를 보이는 조선후기 작자불명의 일련의 가사작품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왔다. 즉 이들 가사의 작자층이 중간층 이하 서민층이거나, 서민의식을 반영하였다고 보아 ‘서민가사’로 유형을 설정하고 거기에 탈중세적 혹은 반봉건의식의 성장이라는 가치를 부여하여 작품의 의미를 찾으려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서민가사는 이와 같이 문학사의 전개방향에서 근대문학을 향한 새로운 담당층의 출현이라는 문학사 기술상의 요구에 부응하여 설정되었던 관계로 그 개념과 범주화에서부터 문제점을 내재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서민가사의 유형화를 본격적으로 시도하여 연구의 토대를 마련한 김문기의 다음과 같은 개념 규정을 보면 그 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서민가사란 서민이 짓거나 ‘서민적 사고방식’, 즉 서민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이룩된 가사를 뜻한다. …… 그렇다면 서민적 사고방식이란 무엇일까?…… 결국, 양반적 사고가 관념적이고 인습적인 데 비해 서민적 사고는 현실적이고 경험적이며, 양반적 사고가 보수적이고 폐쇄적인데 비해 서민적 사고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며, 양반적 사고가 긍정적이고 순종적인 데 비해 서민적 사고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서민가사는 중인 이하 양민 및 천민들이 직접 지어 향수했거나 서민의 현실적․경험적이고 진보적․개혁적이며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지어진 가사라 할 수 있다.1)
양반적 사고와 서민적 사고의 이와 같은 양항대립에 의한 이분법적 파악은 조선후기의 역사적 주역을 서민층 및 그들과 의식이 통하는 일부 계층에서 찾으려는 근대적 가치관이 작용한 것으로 그 실상과는 거리를 가지는 도식적 이해라는 혐의를 받기 십상이다. 필자 역시 초기 연구에서 서민가사를 양반사대부가사와 대립되는 양항대립적인 구도로 파악하여 이해한 바 있는데2) 이러한 민중사관적이고 도식적인 이해방식으로는 이른바 서민가사라고 하는 유형의 실체에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근자에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조선후기 역사의 중심부에서 선도 역할을 한 서울에 거주하는 경화사족들이나, 현실의 경험을 중시하고 실용적 사고를 가짐으로써 관념론적 성리학에 반기를 들고 나온 실학파들은 상당수가 양반사대부층임에도 불구하고 위의 이분법적 이해에서 나열한 양반적 사고보다는 서민적 사고(현실적․경험적․비판적․진보적․개혁적 성향)에 더 가까운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벽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문기를 비롯한 서민가사 유형을 설정한 논자들은 실제 작가가 신분적으로 서민이냐 아니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봄으로써 이런 문제를 피해 가는 길을 터놓고 있기는 하다. 예컨대 유탁일은 조선후기 ‘서민의 의향’이 투영된 일련의 가사 작품을 ‘서민성 가사’라 하고, 서민들이 향유했던 가사들이 ‘서민 또는 서민 신분에 가깝거나 그들을 대변하는 士들’에 의해 쓰여진 것3)이라 하여 양반사대부층 작가까지 포괄하고 있다. 김문기도 서민가사가 서민적 사고를 드러내되, 서민적 사고는 ‘사고의 주체인 인간이 서민이냐 아니냐에 구애받지 않는다. 양반도 서민적 사고를 할 수 있다’는 논리를 수용함으로써 양반층까지 확대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다. 윤석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갑민가>․<노처녀가> 등을 ‘평민가사’로 지칭하면서 그 작가층을 집권세력에서 제외된 한미한 양반(곧 殘班) 또는 일정한 지식수준을 지닌중인 또는 평민이라 보았다.4)
그러나 신분관련 용어인 서민가사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신분계급을 파기하고 양반사대부층이 지은 가사까지 모두 포괄하는 열린 개념으로 사용한다면 용어와 맞지 않는 측면을 드러내고 있어 서민문학 이해에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으므로 윤미선은 ‘서민화지향가사’라는 용어로 바꿔 사용하고 있다.5) 그러면서 그는 ‘작품에 드러나는 의식과 세계관이 서민화를 지향하며, 이를 작품에서 표현과 관련하여 서민미학에 기반하여 형상화하고 있는 일련의 작품들’로 범주화한다고 했는데, ‘서민가사’라는 용어보다는 유연성을 가지나 이 역시 ‘계급지향적’ 요소를 떨치지 않고 있어 이른바 서민가사라는 유형이 갖는 탈신분적 성격과는 여전히 맞지 않는 용어라는 문제점을 지닌다. 기왕에 서민가사 혹은 서민화지향가사로 지정된 가사는 뒤에서 밝히겠지만 대부분 신분계급과는 무관하게 상층의 고급문화적 요소와 하층의 서민문화적요소를 통합하여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 거주하는 불특정 다수집단인 대중에 의해 여항-시정문화적 요소로 재창조된 성향을 갖는 것이어서6) 서민화 지향이라는 일방통로로 그 성격을 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용어개념보다 더욱 문제되는 것은 과연 서민가사라는 범주 설정이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표시하는 견해들이 속속 제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서민가사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거창가>나 <합강정가> 같은 현실비판가사의 작자층이 당대현실에 비판적인 서민층이 아니라 ‘지방 하층사족층’이라는 견해7)가 제출됨으로 해서 그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어 김대행에 의해 실제 가사 텍스트에 구현된 주제나 언어 운용능력, 향유의 시간적․경제적 여유 등으로 볼 때 양인이나 천인 같은 ‘서민’이 이런 소양과 능력을 갖춘 계층이라 하기 어려우므로 ‘중인계층’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는 견해8)가 나오기도 했다. 작자층을 중인층으로 단일화해서 보는 것 역시 신분계층에 얽매인 견해여서 여전히 문제지만, 서민층이 아닐 것이라는 판단은 설득력을 갖는다 할 것이다. 설령 서민의 극히 일부가 가사를 창작하고 향유할만한 문화적 소양과 자질을 갖추어 창작-향유하는 사례가 구체적으로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그럴 경우 이미 서민의 문화취향이나 서민화 지향과는 거리가 멀어졌다고9) 할 수 있어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의문점에 그치지 않고 최근에 강경호는 ‘서민가사’라는 용어의 개념과 범주설정의 모호성을 비판하고, 그 사상적 기반이나 내용적 특질에서 ‘서민성’에 근간을 둔 것이 아니라는 점, 작자성이 상실되고 다양한 이본을 파생하며 향유된 이들 텍스트가 시정-도시문화권에서 일반대중들로부터 대중성을 획득하며 향유된 ‘시정․대중적 성격의 가사’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들어 서민가사의 실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10)
서민가사의 개념 문제가 흔들리고 있는 만큼 그것을 구체적으로 범주화하는 일도 역시 문제를 안고 있다. 김문기는 서민가사의 하위범주로 크게 음영가사와 가창가사로 나누고 가창가사는 12가사, 잡가, 판소리 허두가사로 나누어 이들에서 ‘4음보 연속체’라는 형식 요건을 갖춘 경우는 모두 서민가사로, ‘분련체’인 경우는 잡가로 처리하여 실제 잡가로 다뤄야할 많은 작품들을 가사에 포함시키는 문제점을 보였으며, 판소리 허두가(단가)도 광대라는 천민이 부르고 형식요건을 갖추었다고 보아 가창가사로 다루는 문제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잡가와 판소리 단가는 가사와는 변별되는 각각의 장르 정체성을 갖는 별개 장르들이므로 가사의 범주에서 당연히 제외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사설의 조직원리나 음악적 특성에서 가사와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서민가사에 대한 이러한 의문들에 유의하면서 우선 가사의 장르적 특성과 그 문화적 기반의 변화에 따른 담론 기반을 명확히 하고 그 바탕 위에서 이런 유형의 가사가 갖는 미학적 특성을 살펴보는 데 목표를 두기로 한다.
1) 김문기, 서민가사연구 형설출판사, 1983, 14∼20면. 2) 김학성, 「조선후기 시가에 나타난 서민적 미의식」, 한국인의 생활의식과 민중예술 ,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1984, 271∼292면. 3) 유탁일, 「조선후기가사에 나타난 서민의 의향」, 연민 이가원박사 육질송수기념논총 , 범학도서, 1977, 64면. 4) 윤석산, 「평민가사연구―작자층을 중심으로」, 한국학논집 16,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1989, 13∼17면. 5) 윤미선, 「조선후기 서민화지향가사의 운율적 변주와 그 의미」, 이화여대 석사논문, 1996, 15면. 6) 여항-시정문화의 탈신분적 성격에 대하여는 김학성, 「18․19세기 예술사의 구도와 시가의 미학적 전환」, 한국시가연구 11, 한국시가학회, 2002, 10∼17면. 7) 고순희, 「19세기 현실비판가사 연구」, 이화여대 박사논문, 1990. 8) 김대행, 「가사 양식의 문화적 의미」, 한국시가연구 3, 1998, 409∼414면. 9) 강경호, 「서민가사의 실체성 연구」, 성균관대 석사논문, 2002, 8면. 10) 강경호, 앞의 논문 참조.
Ⅱ. 서민가사의 담론 기반
주지하다시피 17세기 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면 가사 장르는 그 이전 시기의 양상과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한 현상은 가사뿐이 아니라 시조를 비롯한 다른 장르에도 두루 나타나며, 문학 뿐 아니라 예술․문화 전반에 걸쳐 패러다임을 바꾸는 전면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18세기부터 급격하게 상업도시로 발달한 서울을 중심으로 자유롭게 예술과 문화를 즐기는 여항-시정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이에 따라 도시인의 유흥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는 서비스업의 발달, 시정인들 사이에서 신분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여가생활에서 다양한 상품화된 유흥을 즐기는 가운데 상층의 고급문화와 하층의 민속문화가 상호 교류하며 새로운 여항-시정 문화를 창조해내는 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판소리의 도시 공연과 흥행, 만횡청류 곧 사설시조의 본격적인 향유, 야담과 소설의 성행 등도 신분과 계급을 초월하는 불특정 다수집단의 취미와 기호가 반영된 것이다.
이러한 여항-시정의 대중문화적 기류는 그러한 문화 내지 문학 텍스트들을 마치 시정의 상품처럼 수요와 공급의 ‘유통’ 관계로 전환시키는 탓에 텍스트 자체를 향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것을 누가 지었는지, 향유 대상은 누구여야 하는지가 중요하지는 않게 된다. 李鈺(1760∼1813)의 희곡 東廂記의 첫머리에 부친 金申賜婚記 題辭의 다음 말을 유념해보자.
아이 종이 저자에서 돌아와 들은 것을 이야기해 주는데,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듣고 “기이하도다. 거룩하도다! 그리고 나의 한가로움을 물리칠 수 있겠다”라고 하고 , 몸을 일으켜 붓을 놀려 한편의 희곡을 지으니 손이 조금 풀리고 눈이 조금 맑아짐을 느꼈다. …… 행여 관객이 계신다면 사건이 혹 거짓인가 묻지 말 것이며, 또한 모름지기 작자가 누구인지도 묻지 말 것이다. 다만 한가함을 해소하는데 소용이 된다면 또한 반나절의 도움은 될 것이다.11)
이에 따르면 동상기 의 작품 소재는 아이 종이 저자거리에서 들어 온 이야기로, 1791년 왕명(정조)에 의해 노총각 金禧集과 노처녀 申氏의 혼인이 성사된 일을 듣고 사흘 만에 완성했다는 것인데, 성무경에 의하면 이 작품은 삼설기 소재 <노처녀가2>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온 곳이 상당히 발견된다는 것이다.12) 그리고 이덕무에 의해 「김신부부전」이란 전기로도 지어진 바 있는 당대 저자거리에 널리 알려진 화제거리로 이런 ‘화제 중심 텍스트’는 이옥의 말대로 작자가 누구인지를 따져 물을 일은 아니고 다만 한가함을 해소하는 ‘재미거리’로 향유하면 되는 것이다.13) 여항-시정의 화제거리를 단형서사체로 엮은 야담의 작자를 알 필요가 없고, 만횡청류의 작자를 굳이 밝힐 필요가 없으며, <노처녀가> 같은 가사 작품도 작자를 드러낼 필요가 없었던 관행은, 텍스트 그 자체를 향유하면 되었던 탓이다.
굳이 이들 텍스트의 작자를 따져 들어가면 일부 중인 이하 서민층의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개의 경우 경화사족14) 같은 양반층으로 판명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만횡청류의 경우 이정보보다 한 세대 앞선 경화사족층인 이덕수(1673∼1744), 이광덕(1690∼1748)이 사설시조를 주로 얹어부르는 농․낙․편의 작품을 다수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15) 그들의 사설시조 작품이 다수 만횡청류에 실렸을 가능성이 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설시조 작가라는 상상을 하지 못해왔던 것도 작자를 문제삼지 않는 ‘텍스트 중심 향유’라는 관행 탓일 터이다. 역시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김춘택(1670∼1717)의 사설시조가 만횡청류의 570번과 578번 작품으로 실려 있음에도 그 작자의 정보를 후대의 가집인 병와가곡집 에서야 확인할 수 있는 것도 경화사족층의 만횡청류 창작-향유(익명으로)를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여항-시정의 저자거리에서 소재를 취해와 텍스트화한 이 시대의 많은 작품은 신분과 계급을 초월하여 향유한 것이어서 텍스트에 투영되어 있는 의식이나 사고, 어법이나 표현의 특징을 가지고 그 작자의 신분계층을 추정한다는 것은 판단의 오류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할 것이다. “간밤의 자고간 그놈 아마도 못이져라…”나, “즁놈이 졈은 사당년을 얻어…”, “一身이 사쟈이 물것계워 못 살니로다…” 같은 사설시조 작품이 병가, 해일, 해주 등에 역시 경화사족인 이정보의 작품으로 분명히 제시되어 있음은 차치하고, 다음의 가사 작품에서 그 점을 확인해 보자.
(생략)
이 작품의 작자를 누구인지 모르는 채로 텍스트 자체만을 가지고 작자를 추정할 경우, 앞에서 거론한 양반적 사고와 서민적 사고를 양항대립으로 보는 기준에 따른다면 서민적 사고를 서민적 어법으로 표현한 영락없는 서민가사로 판정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상보는 이 작품의 해설에서 ‘서민가사’로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16) 타지에서 온 늙은 할아범이 늙은 할멈의 옷가슴에 손을 넣어보려고 수작을 건네는 장면이나 이들의 티격태격하는 사랑싸움은 양반적 사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니 서민적 순박성과 인정세태의 모습을 물씬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작자는 한산이씨 명문거족의 사대부인 이운영(1722∼1794)으로 한양에 거주하면서 형조정랑․면천군수 등 내외직을 거친 경화사족층에 해당한다. 계서야담 의 작가 이희평이 그의 조카였던 점과 경화사족층 일반의 문화취향을 감안할 때17) 그는 여항-시정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향유했을 것이고, 앞에 인용한 <임천별곡>을 비롯하여, <순창가>․<착정가>․ <세장가> 등 여항-시정의 생활이나 서민취향의 가사작품을 다수 남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서민가사로 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같은 시대에 경화사족층들은 또 민요취향의 한시 작품을 대거 창작-향유하게 되는데18) 이들의 민요취향 한시를 서민한시라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조선후기의 시조나 가사 작품을 텍스트의 언어적 표현이나 거기 나타난 의식이나 사고만 가지고 작자의 신분층을 추정한다는 것은 ‘판단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너무나 큰 것이다. 탈신분적 성향의 담론을 신분계급과 연관시켜 이해하려는 자체가 텍스트의 실체와 어긋나는 접근법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조선후기에 출현한 여항-시정 담론을 담은 일군의 탈신분적 성향의 가사를 묶어 유형화하고자 할 때는 신분 계급적 용어에서 자유롭지 못한 ‘서민가사’라는 용어를 버리고 ‘여항-시정가사’라는 용어로 대치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11)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역주, 이옥전집 2, 소명출판, 2001, 322면. 여기서 작품의 제목 ‘동상기’에 주석을 달면서 가람본을 제외한 모든 이본에 중국의 유명한 희곡 西廂記를 의식하여 ‘東廂記’라고 되어 있지만 그 말은 작품과 아무런 의미 연관이 없으므로 혼인을 의미하는 東床을 취해 ‘東床記’로 제목을 붙여 놓았는데, 이는 잘못으로 보인다. 이옥의 동상기가 4장의 한문희곡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가 공감해 마지않던 김성탄의 評點 및 개작을 거친 서상기가 4장의 한문희곡으로 되어 있어 동상기가 서상기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조윤제, 국문학사 , 탐구당, 1974, 326∼327면 참조. 12) 성무경, 「노처녀 담론의 형성과 문학양식들의 반향」,『한국시가연구』15, 한국시가학회, 2004, 176∼180면. 13) 물론 작가 이옥을 상정하고 텍스트를 바라보면, 거기에는 여성을 랜즈로 삼아 ‘眞情’에 도달하려는 이옥만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맛볼 수는 있다. 14) 사족층 가운데 누대에 걸쳐 서울에 세거하면서 관료의 지위를 누리고 상업유통적으로 가장 발달된 경화의 문물을 공유하는 문화적 동질집단을 가리키며, 향촌사족과 대응되는 개념이다. 당색은 주로 노론계이며 정조대에 이들의 견제 세력으로 등장한 남인계도 포함한다.
15) 이에 대한 상론은 신경숙, 「18․19세기 가집, 그 중앙의 산물」, 한국시가연구 11, 2002, 33면 참조. 16) 이상보, 18세기 가사전집 , 민속원, 1991, 36면에서 이 작품을 “지은이가 70세 때인 정조 16년(1792)에 지은 가사이니, 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의 사랑을 희학적인 대화체로 나타낸 서민가사이다.”라고 소개했다. 17) 경화사족층의 문화취향에 대한 상론은 남정희, 「18세기 경화사족의 시조향유와 창작양상에 관한 연구」, 이화여대 박사논문, 2002를 참조. 18) 이에 대한 상론은 이동환, 「조선후기 한시에 있어서의 민요취향의 대두」, 한국한문학연구 3, 한국한문학연구회, 1978 참조.
그러면 여항-시정문화 담론과 연관된 일련의 가사 작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타당한 접근법에 이를 수 있을까? 여항-시정가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텍스트에 표현된 언어를 단어의 의미차원이나 순수하게 발화상황과 관련시키는 화용론적 층위의 ‘담화’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문화적 실천 층위의 ‘담론’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담론은 어떤 사물이나 사상을 지시하는 ‘언어’와 대비되는 ‘행위’ 개념으로, 담론에 참여하는 개인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삶과 의식에서 의미를 만들고 재생산하는 사회적 문화적 제도적 과정을 포괄하는 개념으로,19) 텍스트가 생성되고 향유된 맥락 위에서 그 의미의 다양화와 역동적인 기능을 파악하는 시각을 마련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러한 담론이 가능했던 사회-문화적 기반이 먼저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이덕수․이광덕․김춘택․이정보 같은 경화사족이 만횡청류의 사설시조를 다수 지어 향유하고, 이운영 같은 역시 경화사족의 관료가 서민적 취향과 어법의 가사 작품을 다수 남길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그러한 여항-시정 담론을 가능하게 했던 담론기반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18세기를 전후하여 이른바 서민가사라 불러왔던 여항-시정 담론을 담은 가사 작품이 어떻게 출현할 수 있었던가, 그 담론 기반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인간 성정의 자연스런 분출 혹은 인간본성의 추구가 경화사족층을 중심으로 한 天機論의 이론적 지원에 힘입어 가능했다는 것이다. 종래 인간본성의 추구는 조선시대 양반적 관념의 굴레에 얽매여 있던 서민층이 이 시대에 와서 의식의 각성을 통해 기존관념에 도전하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그 이론적 바탕은 사족층에서 찾을 수 있다. 예컨대 그 싹은 이미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인 ‘남녀의 정욕’이 성인의 가르침인 ‘分別 倫紀’(예교)보다 우선한다는 허균의 발언( 澤堂集 참조)에서 찾아지지만, 그보다 본격적인 논리의 뒷받침은 널리 알려진 바 있는 마악노초 이정섭(경화사족에 해당함)의 만횡청류에 대한 옹호론에 잘 드러나 있다.
情을 따라 발하는 것은 우리말로써 표현하여 읊조리는 사이에 유연히 사람을 감동시킨다. 里巷의 노래에 이르러 腔調가 비록 바르게 다듬어지지 못했으나 무릇 그 즐거움과원망, 탄식하고 미쳐 날뛰며 거칠게 구는 모습과 태깔은 각각 자연의 眞機로부터 나온 것이다.( 靑丘永言 後跋)
라고 한 바에서 드러나듯이 ‘자연의 진기’ 곧 천기론에 입각한 가치평가가 그것이다. 또한 만횡청류 같은 화제중심 노래의 담론 현장이 里巷 곧 여항-시정 문화 공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둘째, 경화사족층의 민족어 노래 곧 시조․가사․민요 같은 국문시가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입론은 역시 경화사족층인 김만중과 홍만종을 거쳐 홍대용에게서 심화된다. 이에 대하여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김만중이 서포만필 에서 “여항간에 나무하는 아이나 물 긷는 아낙네가 서로 화답하는 노래는 비록 천박하지만, 진실과 거짓을 따지면, 학사․대부의 이른바 詩나 賦보다 낫다.”라고 한 발언을 필두로, 홍만종의 순오지 에서 국문시가를 다루는 데에서 나타나는 자주의식20)에 잘 드러나 있다. 특히 후자는 가사문학(長歌라 지칭)을 중심 대상으로 세상에 널리 회자되고 있는 가치의 발견이 주목된다. 그리고 홍대용의 大東風雅 序에서 천기론을 바탕으로 한 국문시가의 가치론이 이론적으로 심화되어 드러난다. 즉 ‘歌는 情의 발현’이고, ‘歌는 말로 이루어지’며, ‘歌는 참됨을 나타낸다’라는 가요관은 국문시가에 대한 가치평가와 함께, 민족문학론의 진수를 보여준다 할 수 다.21) 이러한 민족문학론의 기류에서 경화사족층이 서민취향의 혹은 일상적 구어체의 담론으로 국문시가를 창작하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라 할 수 있다. “즁놈이 졈은 사당년을 얻어…” 같은 비속한 일상어를 구사하는 사설시조를 이정보가 짓고, 앞에서 인용한 순수구어체의 <임천별곡> 같은 가사작품을 이운영이 지은 것이 그 좋은 보기가 된다.
셋째, 실학파들과 경화사족층을 중심으로 현실적․실질적․실용적 지향의 리얼리즘적 기풍이 팽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화벌열 가문인 박지원의 연암그룹 사유방식에서 잘 드러나듯이 주자주의적인 절대적 세계관과 관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식의 상대성과 현실주의적 사고를 보여줌이 그러한 사례일 것이다. 그 대표격인 박지원(1737∼1805)의 「嬰處稿序」를 보면 “만약 중국의 수법을 본뜨고 한당의 문체를 답습하려한다면, 우리는 수법이 고상할수록 뜻이 실제로 비속하게 되고, 문체가 한당과 비슷할수록 말은 더욱 거짓이 되는 결과를 볼 뿐이다. …… 우리나라의 방언을 문자로 옮기고, 우리나라의 민요를 운율에 맞추기만 하면 자연히 문장이 이루어지고 眞機가 발현된다.”라고 한 데서 진보적․실질적 사고를 읽을 수 있다. 현실 모순의 폭로와 비판에 의한 리얼리즘 정신은 다산 정약용의 사회시같은 한시에서 한층 극렬하게 드러난다.22) 19세기에 작자미상의 ‘현실비판가사’가 다수 출현될 수 있었던 문학내적 기반도 이러한 현실모순의 개선 정신과 상관될 것이다.
넷째, 18세기 이후 경화사족층을 중심으로 문학의 ‘세속화 취향’이 심화되어 갔다는 데 있다. 이러한 경향은 시정에서의 삶의 다양한 양태와 인간군상을 형상화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조선전기에 道心을 구현하기 위해 ‘雅’를 추구하던 것과는 패러다임을 달리하는 심미적 지향으로 ‘俗’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 것을 말한다. ‘속’은 직설․솔직함․비속함․참신함으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다시 광기(狂)․기이함(奇)․재미(趣)로 나눌 수 있다.23) 이 가운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재미’ 곧 ‘풍취’이다. 조선 후기 문학의 세속화 경향은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대종을 이루기 때문이다. 소설․야담․전․패사소품 등이 그런 경향을 농후하게 보이고, 일부의 사설시조(송실솔이 불렀다는 <黃鷄曲> 등)․가사문학(대중취향의 가창가사)에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된다.
다섯째, 텍스트의 향유문화가 개인적․국지적 수준에서 집단적 공유의 대중화된 문화로 급격한 변화를 이루었다는 데 있다. 이는 이 시기의 텍스트가 私的 담론에서 여항-시정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공동담론화’하는 특성을 보여줌을 의미한다. 따라서 작자가 누구인지 알 바 아니며, 문화의 집결․교환․뒤섞임이 이뤄지는 도시를 중심으로 텍스트의 작자성 상실은 더욱 관례화 되고, 탈신분적․탈계급적 지향의 텍스트가 많이 나타나게 된다. 조선후기의 가사 작품이 대부분 작자불명으로 나타나는 현상도 이러한 공동담론으로서의 향유 관행의 변화와 연관된다 할 것이다.
또한 텍스트 향유의 대중화는 ‘가창문화’의 경우, 다양한 성향의 텍스트 혹은 레파토리의 개발을 가능하게 했고, 공급이 수요자의 문화취향에 맞추어 이루어졌으며, 이에 따라 기존의 텍스트들은 古調의 그것으로 밀려나고, 新調․新飜․新聲․今調 등으로 지칭된 새로운 텍스트들이 탄력을 얻어 널리 향유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경향의 텍스트화가 시조 가집의 출현 및 가집 附記 가사로 구체화된다.
19) 김학성, 「가사의 정체성과 담론 특성」, 한국 고전시가의 정체성 ,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2, 239면. 20) 조동일, 한국문학사상사시론 , 지식산업사, 1978, 226∼227면 참조. 21) 신동현, 「홍대용과 本居宣長 歌論의 민족문학관 비교 연구」, 서울대 석사논문, 1994, 9∼72면. 22) 이에 대한 상론은 송재소, 다산시 연구 , 창작사, 1986, 57∼92면 참조. 23) 장파(유중하 등 역),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 푸른 숲, 1999, 359∼365면.
Ⅲ. 서민가사의 미학적 특성
앞에서 든 다섯 가지의 담론 기반은 이른바 서민가사 곧 여항-시정가사의 미학적 특징을 결정짓는 중요한 터전으로 작용한다. 이제 그러한 담론 기반을 염두에 두고 해당 가사의 미학적 특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여항-시정가사의 미학적 특성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장르적․유형적 정체성에 부응하는 접근 시각이 우선적으로 요청된다. 가사의 장르적 정체성을 가능케 하는 진술 특성으로 크게 두 가지 원리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심수경이 견한잡록 에서 가사를 평할 때 사용한 용어와 홍만종이 순오지에서 가사의 評語로 제시한 ‘鋪敍․備錄․說盡․鋪張․歷擧․盛論․備述․備說’ 등의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펼쳐 서술하거나, 갖추어 기록하거나, 곡진하게 서술하거나, 펼쳐 벌이거나, 자취가 드러나도록 역력히 들거나, 풍성하게 논하거나, 빠짐없이 진술하거나, 자세히 풀어 말하거나’ 하는 특징을 보이는 것이다. 이 가운데 대표성을 띠는 것으로 ‘역거’를 선택하여 이들의 의미를 총합하는 대표 용어로 사용코자 하며 이것을 일러 가사의 진술 특성의 하나인 ‘歷擧의 원리’라 칭하고자 한다.
‘역거’는 하나하나 그 자취가 또렷하게 드러나도록 조목조목 들어 서술하는 것으로, 그렇게 서술하자면 펼쳐 서술하지 않을 수 없고, 갖추어 기록하지 않을 수 없고, 곡진하게 또 풍성하게 서술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거의 원리’는 가사의 양식적 특징인 교술(전술 혹은 주제적 양식이라고도 함)의 진술 특성이자 시학적 원리라 할 수 있다.
가사의 진술특성으로 지정할 수 있는 다른 하나는 ‘계도의 원리’를 들 수 있다. 가사가 <오륜가> 계열의 교훈가사로까지 나아가든, <상춘곡>처럼 정서적 미감을 서술해 나가는 정도에 머물든, 그 어느 쪽이거나 일정한 청자를 설정하여 직접적으로 교시적 목소리를 드러내든가, 아니면 함축적 청자로서 배면에 숨기든가 하여 기본적으로 가사가 ‘계도의 담론’임을 감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바로 ‘계도의 원리’를 진술특성으로 한다는 근거다. 이는 가사의 본질이 실존적 성향의 인격적 서술자인 ‘나’의 목소리로 진술되므로 작가가 서술에 책임을 지며 서술의 신빙성을 동시에 확보하는24) 방향으로 서술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사는 李基慶(1756∼1819)이 <낭유사>의 창작동기를 밝히면서한 언급에서 잘 드러나듯이 ‘소리(시조․가사 같은 시가작품을 지칭)가 性情을 감발시켜 풍속교화에 일조한다’는 생각을 가사 작가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계도의 원리’를 진술특성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다. 그것은 곧 가사 작가로 하여금 교양적 인격에 바탕한 ‘문화적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사가 문학인 한, 일정한 미감을 드러내려는 문학적 형상화를 본질적으로 지향하므로, 교훈가사 같은 목적성을 갖는 유형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성정의 감발이나 풍속교화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텍스트 표면에 드러내기보다 텍스트 내면에 잠복해 둔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가사의 두 가지 서술 원리는 ‘4음4보격 연속체’라는 가사의 율격 미학과 너무도 잘 부합된다. 성기옥이 4음4보격의 율격 양식적 특성으로 지정한 “4보격 특유의 유장한 율동감을 가장 자연스럽게 조성할 수 있어 차분하고 정리된 생각이나 흐트러짐이 없는 안정된 정서 혹은 분별력을 앞세우는 감정상태나 교시적인 토운의 두드러짐”25)을 가사의 진술이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안정된 정서나 유장한 율동감은 ‘역거의 원리’를 통해 잘 드러나고, 흐트러짐 없는 분별력이나 교시적 토운은 ‘계도의 원리’를 통해 잘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오면 사회-문화의 패러다임이 바뀌어 가사의 담론기반이 앞에서 언급한 대로 다섯 가지 측면에서 달라짐에 따라 가사의 서술원리도 상당한 변화를 보이게 된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변화는 가사의 향유문화가 개인적․국지적 범위에 머물던 것이 불특정 다수의 공동문화담론으로서 크게 확대됨에 따라 여항-시정의 대중미학적 특질을 반영하는 담론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가사의 서술원리도 ‘역거의 원리’와 ‘계도의 원리’로만 일관되지 않고 여기에 대중미학의 특질인 ‘재미(멋스러움, 풍취)의 원리’가 결합되는 변화를 보인다. 이에 따라 율격미학에서도 변화를 보여 ‘4음4보격’의 단순한 연속으로는 여항-시정인의 미감을 자극하지 못하므로 율격이 조성하는 멋스러움, 즉 율격의 파격적 美(재미)를 위해 여러 다양한 모습의 ‘율격적 변주’를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26)
이러한 서술원리와 율격미학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이제 여항-시정 가사의 미학적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필자는 여항-시정문화의 변화상을 상업도시의 발달규모와 문화의 성숙과정에 따라 ① 제1단계(17세기에서 18세기 중반까지): 여항가요기, ② 제2단계(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중반까지): 시정가요기, ③ 제3단계(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도시가요기로 나누어 조선후기 시가사의 변화 구도를 제시한 바 있는데27) 이에 따라 그 변화의 특징적 국면을 살펴보는 것이 효율적이라 생각된다. 아울러 가사의 제시형식과 관련된 두 가지 실현태인 ‘들을 거리(可廳)’와 ‘볼 거리(可觀)’로서의 텍스트 실현 양상28)과도 연관지어 이해하면 이 문제에 좀더 선명한 접근이 가능하리라 본다. 가사의 본질적 제시형식은 ‘음영’(볼 거리 겸 들을 거리)이지만 향유상황에 따라 언제든 ‘가창’(들을 거리)으로, 혹은 완독물(볼 거리)로 실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1단계(17세기∼18세기 중반)에서 가사의 변모 양상을 보면 ‘볼 거리’로서는 경화사족층의 천기론과 민족어문학론에 힘입어 시정의 일상어를 주로 구사하여 인간의 본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작품을 산출한다는 데 있다. 이는 박인로의 <누항사>에 보이는 ‘소 빌리는 대목’에서 그 싹을 엿볼 수 있지만 본격적인 것은 앞장에서 인용한 바 있는 이운영의 작품 <임천별곡>에 잘 드러나 있음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대부분의 경화사족이 그러하듯이, 이운영은 유람하고 시 짓고 노래를 즐기는 풍류생활에 익숙한 인물로 그 주위에 풍류와 잡담을 즐기려는 인사들로 들끓은 것 같고 그런 모임을 통해 여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들과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모아 穎尾編이란 잡기류의 책을 2권 펴내기도 했다.29)
24) 성무경, 「가사의 존재양식 연구」, 성균관대 박사논문, 1997, 139∼140면. 25) 성기옥, 한국시가 율격의 이론 , 새문사, 1986, 215면. 26) 그 구체적 양상은 윤미선, 앞의 논문, 24∼112면 참조. 27) 김학성, 「잡가의 생성기반과 사설엮음의 원리」, 세종학연구 12․13,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8 참조. 28) 가사의 본질태는 음영이어서 그것이 중심이 되고, 그 구체적 실현태는 경우에 따라 볼 거리로서 완독물이 되기도 하고, 들을 거리로서 가창물이 되기도 한다. 이에 대한 상론은 김학성, 「가사의 정체성과 담론특성」, 앞의 책 참조. 29) 고순희, 「引喩와 해학의 미학―이운영의 가사 5편」, 이화어문논집 15, 이화어문학회, 1997, 353∼362면.
이같이 여항담론에 익숙한 이운영은 여항의 상여노래를 끌어와 임진왜란때 죽은 칠백의총의 혼을 달래는 「招魂詞」를 짓는가 하면, 민간의 뱃노래를 끌어와 명나라 사행길을 상상적으로 서술한 「水路朝天行船曲」을 짓고, 아이를 어를 때 부르는 민요를 끌어와 「說場歌」를 짓기도 하고, 서울의 서대문 지역에 새로 판 우물에 얽힌 서민의 생활을 읊은 「鑿井歌」를 짓기도 했는데 이 모두가 여항의 서민 정취를 담은 것이라 할 것이다. 이는 특히 앞에서 담론기반으로 거론한 다섯 번째의 세속화 경향과 관련되는 것으로 그의 작품 가운데 <임천별곡>은 81세의 서민 할머니와 70세의 양반 할아범과의 티격태격하는 사랑싸움의 우스개 일화를 다루고 있어 사대부 작가로서는 ‘俗’의 미학―특히 해학미―의 절정을 보여준 것으로 이해된다.30)
여기서 인간의 본성을 자연스럽게 추구하며 서민의 어법으로 서술한 <임천별곡>에 대해 지방의 군수를 몇 차례 지낸 관료로서 민간의 풍속을 살피고 교화의 자료로 삼고자 하는 觀風 차원으로 볼 수도 있으나 작자가 이 작품을 관직에서 물러난 뒤 노년에 지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관풍 차원이라기보다 앞서 이옥의 언급처럼 그저 노년의 웃음거리로 파적이나 하자고 지은 것일 터이다. 그만큼 경화사족층은 여항의 담론에 익숙해 있으며 그것을 적극 향유하는 ‘세속화 경향’을 보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여항간의 담론을 기반으로 세속화된 ‘볼 거리’로서 향유했을 것이며 그 때문에 ‘계도’의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고 대신 ‘재미의 원리’가 중심을 이루게 된 것이다. 거기다 재미로움을 보다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할멈과 할아범의 ‘대화’라는 보다 리얼하고 재미스러운 ‘역거’의 서술기법을 구사하여 조선후기 특유의 서술미학을 선보인 것이라 할 것이다.
한편 제1단계에서 가사는 ‘들을 거리’로서 향유되기도 하는데 그 중심에 경화사족이 있었다. 홍만종이 당대에 세간에 성행한 가사를 중심으로 한 14작품의 장가를 통칭하여 ‘가곡’이라 칭한 것이 그것을 짐작케 한다. 가곡은 들을거리로서 가창물로 향유하는 것이고 그것이 세간에 성행한다 함은 사대부 문화권에서 널리 향유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시대에 서울을 중심으로 사대부 풍류방문화권이 형성되어 단가인 가곡과 함께 장가인 가사를 향유하는 관습이 생겨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당대에 성행한 가사작품 모두가 풍류방문화권에서 가곡과 함께 성창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靑珍에 단가인 가곡과 함께 가집 附記 장가로 올라있는 것이 14작품 가운데 <장진주사>와 <맹상군가>에 그치고, 그것도 온전한 가사 텍스트가 아니라 사설시조 텍스트를 장가 향유의 레파토리로 선택하고 있음에서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12작품은 단가 가곡을 주로 즐기는 풍류방문화권에서 향유하기에는 길이가 너무 길어 부적절했을 것이다.
이 시대 가창문화권에서 주목되는 것은 <춘면곡>이다. 처음에 이 작품도 작자미상의 서민가사로 이해되어 오다가31) 근자에 강진의 진사 이희징(1587∼1673)이 지은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처음에 이 작품은 가사의 본질태인 음영으로 향유되었을 것이나, 그 내용이 대중의 통속적 미감(선정성과 감상성)을 자극하는 남녀의 邪戀을 담은 ‘丈夫의 애끊는 비창곡’이었으므로, 점차 작자를 떠나 가창문화권의 공유담론으로 향유되어 작자미상으로 되면서 장흥․남원 등 남도에서 ‘시조별곡’32)으로 부르던 것이 빠른 속도로 서울 가창문화계에 진입하여 서울의 조강 나루터 색주가에서 불려지는 단계까지 된33)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시대에는 <강촌별곡>․<환산별곡>․<낙빈가> 등 애초에 사대부층 작자에 의해 ‘사대부적 담론’으로 지어진 작품들이 작자를 상실한 채로 혹은 퇴계 같은 인물로 작자가 擬名 되어 초기 사대부 풍류방문화권에서 향유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때 강촌에서의 은둔적 삶이나 낙빈의 삶이라는 텍스트 내용은 더 이상 정치적으로 혹은 이념적으로 진지하거나 심중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저 ‘멋스러운 풍류’로서 고상하게 즐기는 ‘언술의 재미’ 그 자체를 향유하는 것일 따름이다. 따라서 이런 텍스트는 노랫말을 가창으로 멋스럽게 엮어나가는 ‘역거의 원리’와 고상한 풍류로서의 ‘재미의 원리’가 결합한 서술 미학을 보인다 할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제1단계는 볼 거리로서든 들을 거리로서든 인간본성의 자연스런 추구라는 면에서는 여항-시정 담론에 근접해간 것이지만 아직도 사대부 담론의 ‘고상한 풍류’에서 벗어나지 못한 면이 강하게 남아 있으므로 다음의 시정문화담론으로 나아가는 예비단계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제2단계(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인 시정문화기에 이르면 서울을 중심으로 시정인의 생활문화 욕구가 증대되고 이에 따라 잡가라는 새로운 장르의 출현과 판소리의 본격화로 여러 가창문화권이 활발하게 경쟁을 벌이며 그 성격이 상업적으로 변화함에 따라 시정문화에 걸맞는 다양한 음악 환경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위백규(1727∼1789)의 다음 발언을 주목해보자.
근년에 들어 중대엽 이하의 곡들은 모두 없어지고 나이든 노인들도 세상을 떠나 그것을 말하는 사람조차 사라져서, 세상에 쓰이는 바는 ‘登登曲’이 더욱 심할 뿐이다. 중년에는 나무꾼이나 목동, 장사꾼이나 걸인의 ‘隨魂調’라는 것이 있었는데 장례식에서 죽음을 애도하는 ㉠소리가 처절하게 슬프고 처량하여 듣는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또한 ‘鞠歌’라는 곡이 있어 머리를 흔들고 부채를 치면서 ㉡빠른 절주와 지나친 細聲으로 노래하여 차마 바로 듣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온 나라에서는 상하 가릴 것 없이 입을 열면 이 밖의 다른 노래는 부르지 않으며 이 밖의 다른 소리에는 칭찬의 말을 주지도 않는다. …… 그러나 지금은 ㉢하나같이 빠르고 번거로와 마치 천 개의 몽둥이와 백 개의 지팡이로 그릇점의 옹기나 동이를 어지럽게 부수는 듯하다. 또한 모두가 ‘수혼조’로서 끝마무리를 한다. ……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고 좋다고 하니, ㉣여항의 저 무지한 백성들이야 책할 바 아니지만 관공서의 우두머리까지 모두가 그것을 장려하며 노래채를 내는 데 돈을 아끼지 않으니, 아 심하구나.34)
30) 고순희는 앞의 논문 381면에서 “사건의 해학적 표출을 통해 해학과 풍자를 즐긴다.”라고하여 해학과 함께 ‘풍자’와의 관련도 배제하지 않고 있는데, 풍자와는 무관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허세부리는 양반 할아범의 행위에 대해 풍자로 이해하기에는 그가 이미 너무나 늙은 약자이기 때문에 연민 어린 따스한 시선(해학)이 느껴질 뿐, 약자의 위치에 있는 인물에 대한 싸늘한 비판(풍자)을 느낄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31) 송재소, 「조선후기가사의 한 특징」, 백영 정병욱선생 환갑기념논총 , 신구문화사, 1982, 595면에서 이런 노래가 나온 것은 통치체제의 이완과 민중의식의 성장이란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며 서민가사로 다룬 바 있다. 32) <춘면곡>이 ‘시조별곡’으로 불리었다는 것은 그만큼 탈신분 지향의 대중의 기호에 맞는 빠르고 자극적인 시(용)조의 새로운 악곡에 얹혀 불리었음을 의미하며, 이는 이 노래가 남도라는 지역성을 넘어 대중화의 요건을 갖추어 널리 유행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을 말해준다. 33) 이에 대한 상론은 성무경, 「18․19세기 음악환경의 변화와 가사의 가창전승」, 한국시가연구 11, 한국시가학회, 2002, 55∼56면 참조. 34) 存齋先生文集 권 13, 景印文化社.
도시의 시정문화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향촌 노래문화(위백규는 전남 장흥에 세거함)가 이 정도의 변화상(위백규가 개탄해 마지않는)을 보인다면 18세기 후반에 노래 취향이 얼마나 급속도로 변화되고 있었는가를 이 자료를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변화의 방향은 밑줄 친 데에서 잘 드러나듯이 ㉠처럼 슬프고 처량하여 눈물을 흘리게 하는 ‘感傷性’에 빠지게 하거나, ㉡처럼 빠른 절주와 지나친 細聲을 씀으로 해서 ‘煽情性’을 돋우거나 그 어느 쪽이든 ‘雅의 미학’과는 거리가 먼 ‘俗의 미학’으로 물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에서 잘 드러나는 바대로 ‘빠르고 번거롭고 어지럽게 부수는 듯한’ 통속 미학으로서의 ‘자극성’에 기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에서 드러나듯이 그러한 俗의 미학에 상․하 모두가 신분과 계급을 초월하여 빠져듦으로써 탈신분적으로 ‘대중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가사의 노래문화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가창문화권에서 감지할 수 있다. 우선 남도에서 당시로서는 새롭고 빠른 시조별곡으로 불렸던 <춘면곡>이 서울의 가창문화권에 진입한 이래 어느새 古調가 되어 부르지 않게 되고35), 그보다 더 빠르고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는 新調로 변화되어 갔음이 그것이다. <춘면곡>의 신조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8세기 후반 가집인 靑詠에는 60행(4음보 1행)으로 나타나 있는데, 19세기 전반 가집인 靑六에 오면 13행으로 축약되어 있어 이 차이로 고조는 주로 사설이 길고, 신조는 고조의 사설이 잘려나가 길이가 짧아지는 특징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36) 강이천(1769∼1801)의 「漢京詞」라는 시에서 청루의 호사스런 술자리에서 <춘면곡>이 先唱된다고 한 것도 신조를 부른 정황을 읊은 것일 터이다. 신조는 사설만 짧아진 것이 아니라 리듬이 빠르고 음악적 곡태가 고조에 비해 훨씬 자극적이어서 호사스런 술자리에 어울렸을 것이다. 그러한 사정을 이 시대에 들을 거리로 함께 향유한 바 있는 <상사별곡>과 더불어 생각해 보자.
<상사별곡> 역시 靑詠에는 42행으로 나타나다가 靑六에 오면 15행으로 축약되는데, 이처럼 길이가 크게 줄어듦은 그만큼 사설이 대중성을 타기에 용이하게 되고, 사설 대신 악곡이 더욱 대중의 미감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겠다. 신조 <상사별곡>의 모습은 19세기 초반 계면조 창에 능했던 歌童 공득이가 가창을 전문으로 하는 名院과 靑樓朱門의 기생들의 넋까지 빼어 놓았다는 유한집의 취초유고 라는 자료에 나타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공득이가 불렀던 그 ‘애절한’ <상사별곡>이 ‘애원처창’한 계면조 창법으로 불려졌을 것이라는 견해37)가 타당성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십이가사의 대표격으로 자리잡은 <상사별곡>․<춘면곡>외에 술 권하는 노래인 <권주가>도 호사스런 술자리에서 이 시대에 향유된 것으로 보인다. 심능숙(1782∼1840)의 <西湖曲―名把把詞幷序>에서 그 향유 양상을 알 수 있는데 음악적으로 처절하고 슬픈 곡조에 박자가 정해져 있지 않고 분위기에 따라 부를 수 있어 대중 취향이 농후함으로 시정문화의 가창가사로 애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 역시 古調가 靑詠에 33행의 길이로 실려 있으며(18행 짜리의 신조도 함께 실려 있음), 청육 에는 20행 짜리가 실려 있어 신조임을 짐작케 한다. 사설 내용이 인생의 유한함과 무상함에 대한 애상과 相思의 정까지 함께 담고 있어 슬프고 처절한 곡조와 잘 어울린다.38)
이밖에 유만공의 세시풍요 에 언급된 <황계타령>과 <백구사> 등 잡가에 한층 다가간 십이가사계 가창가사도 이 시대에 들을 거리로서 대중의 애호를 받았는데, 둘 다 아악(정악)의 요성법과 민속악의 요성법을 섞어 쓴다는 점에서 상․하층에 두루 통하는 즉 대중취향에 맞는 향유의 조건을 갖추었다 할 것이다. 또한 <관등가>․<월거리>․<금보가> 등 당대에 유행하던 사설시조나 민요 등에서 끌어와 노랫말을 엮은 편사형 가사들은 서울 시정의 문화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하는 즐거운 웃음과 흥이 묻어나는 들을 거리로서, 시정의 풍류방문화권에서 ‘형성된 가사’들이라는 점에서 역시 대중의 애호를 받아 가집 부기 가사로 오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들을 거리로서의 가창가사는 서술에서 ‘역거의 원리’를 기본으로 하되, 향유자들에 흥미와 자극을 유발하면서 쉽게 수용될 수 있도록 음악적으로는 아악과 민속악을 섞어 쓰며, 노랫말이나 사설 내용으로는 상사․연정․인생무상 같은 보편적이고 애상적인 ‘가벼운’ 주제를 지향함으로써 대중의 애호를 획득한다. 특히 <상사별곡>․<춘면곡>․<백구사> 같은 십이가사 계통의 경우 고조에서 신조로의 빠른 전환은 사설의 길이가 줄어든 만큼 ‘서술의 억제’가 일어나 가사의 내용을 역력히 보여줘야 할 ‘역거의 원리’가 경시되고 대신 음악적 기교화에 의한 풍류의 흥취를 자극하는 ‘재미의 원리’가 중심원리로 되어 대중화 요건을 더욱 잘 갖추게 됨으로서 이 시대에 새로이 출현한 신종 장르인 ‘잡가’의 경계선까지 다가가는 지경까지 이른다. 즉 잡가는 서정 양식이고 이들 가창가사는 교술장르여서 서로 본질을 달리함에도 이 시대 도시대중의 본격적인 가창장르로 부상한 이들 십이가사계의 新調는 사설 길이의 대폭적인 축약에 따른 ‘서술의 억제’(서정 양식의 본질적 특성임)가 저절로 이루어져 서정장르의 경계지점(잡가와의 접점)까지 나아가게 된 것이다.39)
한편 이 시대의 대표적인 ‘볼 거리’로는 <노처녀가2>와 1843년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僧歌> 4편을 들 수 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노처녀가2>는 국문단편소설집 三說記(最古本 방각본은 1848년에 출간)에 <서초패왕기>․<황주목사기> 등 몇 편의 다른 소설과 함께 실려있으며, 가사로 되어 있지만(서두와 말미에는 편집자적 목소리의 산문진술이 덧붙여져 있음) 이들 소설과 담론 성격을 같이한다. 즉 삼설기 의 단편소설들이 “서울의 시정적인 위트나 유머를 지니고”40) 있는 것처럼 <노처녀가2>도 노처녀 형상의 희화화41)로 역시 시정적 유머가 도처에 묻어난다. 이러한 서술 특성은 수사학적으로는 ‘과장된 나열법’으로 나타나는데 과장에 의한 희화화는 ‘재미의 원리’에, 나열법은 ‘역거의 원리’에 바탕한 것이어서 이 작품 역시 여항-시정가사의 특성인 ‘역거’와 ‘재미’라는 두 서술원리의 결합으로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다.
35) 유만공의 「세시풍요」(1843)에 "古調의 춘면곡은 지금 부르지 않으니 황계타령 오열하고, 백구사 토해내네"라는 구절에 그 증언이 보인다. 36) 이에 대한 상론은 김은희, 십이가사의 문화적 기반과 양식적 특성 , 성균관대 박사논문, 2001, 67∼74면 참조. 37) 성무경, 「18․19세기 음악환경의 변화와 가사의 가창전승」, 68면 참조. 38) 김은희, 앞의 논문, 80∼84면. 39) 남훈태평가 (1863)의 잡가편에 십이가사계인 <매화가>와 <백구사>가 잡가인 <소춘향가>와 함께 묶여져 있다는 사실에서 이들이 같은 장르 명칭으로 불려질 정도로 접점지대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0) 김동욱, ‘삼설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 336면. 41) 노처녀 형상의 희화화에 대하여는 최규수, 「<삼설기본 노처녀가>의 갈등 형상화 방식과 그 의미」, 한국시가연구 5, 한국시가학회, 1999, 405∼410면 참조.
그런데, 작품의 전개가 상당히 길고(서두와 말미의 산문진술 제외하고도 총 265행), 노처녀의 소망과 갈등 그리고 해결이 자세히 묘출되고 있어 종래에 가사의 서사화(혹은 서사가사)나 가사의 소설화 단계와 연관하여 논의되어 왔으나,42) 이 작품에 나타나는 서사적 성격의 서술은 장르적 차원의 ‘양식서사’가 아니라 다른 양식(서정이나 교술 등)에도 보이는 ‘기초서사’의 층위에서 다뤄져야함이 밝혀진 바 있다.43) <노처녀가2>에 보이는 서사화는 다름아닌 ‘시정담론화’였던 것이며, 거기에는 이 시정담론화로 인해 ‘역거의 원리’외에 ‘재미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서사화로 오인하게 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승가>는 <送女僧歌>․<僧答詞>․<再送女僧歌>․<僧再答詞>의 4편으로 구성되었는데, 서신 교환형식이 극적 재미를 더해주고 있어 형식 그 자체로 ‘재미의 원리’가 서술원리로 작동되어 있는데다가 남․여승간의 애정 담론을 담았다는 데서 대중의 흥미를 자극하는 볼 거리로 역할을 충분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이 잡가류 가집에는 보이지 않고 고대본 악부 에 실려 있으며, 그밖에 필사본들에 실려 있는 점이 볼 거리로 향유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제3단계(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인 도시문화기에 이르면, 여항-시정가사는 제 1단계시기의 ‘예비단계’와 제 2단계시기의 ‘대두단계’를 거쳐 그것이 본격화되어 성숙되는 ‘본격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 시대에는 도시규모의 더욱 큰 발달과 함께 경제적 능력을 중심으로 사회구성원의 역할과 신분이 더욱 재편되면서, 기존의 계급 중심의 신분 질서가 해체되고 이에 따라 문자언어의 사용과 문화적 교양에의 욕구가 거의 전계층으로 확산되는 중대한 변화를 맞는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어느 때보다 ‘문화에 대한 욕구’가 팽배해 있어서 상․하층을 두루 만족시키는 고급문화예술과 기층문화예술의 혼효에 의한 대중취향문화가 발달했으니 이러한 추세에 힘입어 “뿌리없는 雜謠가 판을 치는”(가곡원류 발문) 잡가 전성시대를 맞게 되고 이에 따라 가사, 특히 들을 거리로서의 가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시대에 ‘고조’와 ‘신조’의 교체가 계속 진행되는 것도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앞 시기에 불려지던 가사가 새로운 도시적 미감과 취향에 맞추다보니 대중의 기호에 맞지 않는 가사들이 도태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밟게되는 것이다. 그리고 앞 시대에 들을 거리로서 가집부기 가사의 흐름 속에 하나 둘 나타나던 십이가사계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 수록빈도수가 늘어나게 되고, 20세기초(정악유지회가 활동한 1910년대)에 이르면 십이가사의 틀이 완성되어 향유되고 傳唱되기에 이른다.44)
가사 가운데 들을 거리의 중심부에 있는 십이가사는 <어부사>․<춘면곡>․<상사별곡>․<권주가> 등에서 보듯 경화사족의 풍류방문화권에서 출발하여 여항-시정의 문화취향을 반영하면서 당대의 ‘시(용)조’ 혹은 ‘신조’로 교체되어 시정의 저변에까지 유행되는 과정을 밟게 되고, <백구사>․<죽지사>․<황계사>․<길군악>․<수양산가>․<매화가>는 시정의 저변에서 만들어져 마침내 십이가사로 레파토리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시정문화의 통속화 과정에서 텍스트의 유기성(작자의 진지한 발화로서의 메시지 전달)에는 관심이 없고, 필자가 ‘잡가’의 담론 특성이자 시학적 원리로 지목한 바 있는 ‘낯익음을 자극하기’45)가 들을 거리의 가사에도 침투하게 되어 텍스트의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즉 시정에서 대중적으로 유행하여 익숙한 시조․사설시조․민요․판소리․고소설 등 기존 텍스트의 단위 사설들, 다시 말하면 기억 속에 유형화되어 암기된 사설들(낯익은 것)을 짜맞추어 대중적 기호를 만족시키기(자극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랫말을 재편하는 통속성을 보여주게 된다.46)
이런 연유로 가사 가운데 대표적 들을 거리로서의 십이가사는 漢詩적인 것(어부사․양양가․죽지사), 가사체와 한시체의 혼합적인 것(권주가), 시조의 노랫말과 관련된 것(백구사․매화사), 판소리의 일부를 수용한 것(상사별곡․황계사), 軍樂에서 유입된 것(길군악) 등 다양한 양상을 보이게 되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텍스트의 유기성은 극도로 해체되고 마침내 ‘역거의 원리’마저 통속미학 지향의 ‘재미의 원리’에 눌려 일부는 분장체 형식(분장으로 인해 서술이 더욱 억제되어 역거의 원리를 제어하는 기능을 가짐)을 보이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한시나 한시체 어구, 시조 등 상층 문화권적 취향을 거부하지 않고 끌어와 향유한다는 점이다. 이는 대중의 통속미학적 욕구의 하나인 ‘문화욕’이 가져온 결과라 할 수 있다.
대중의 이러한 문화욕은 앞 시대의 볼 거리 텍스트인 <노처녀가2>에도 작동하여 주인물 노처녀의 인물형상에서 희화화된 병신적인 요소와 과장적 표현을 거세함으로써 시정인의 해학적 기질이나 과장 취향이 사라지고 대신 진지하고 우아한 미적 취향이 자리잡게 됨으로써 이 시대에 <노처녀가1>로 재편되기도 한다.47) 이렇게 재창작된 <노처녀가1>이 사설의 고정성을 보이며 20세기초의 각종 잡가집에 수록되는 현상이 잡가문화권에서 들을 거리로 향유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노처녀가1>의 이러한 미적 취향의 변화는 양반부녀층이 중심이 되는 규방문화권의 미적 취향에도 부합하여 안동․영주 등에서 규방가사와 함께 향유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노처녀가2>에서 <노처녀가1>로의 미적취향의 변화는 볼 거리와 들을 거리의 미학적 지향의 차이를 드러내준다. 즉 볼 거리로 향유될 경우 읽는 재미를 유발하기 위해 해학적 과장법이 중요한 ‘재미의 원리’로 작동하지만, 들을 거리로 향유될 경우는 악곡에 싣는 풍류적 흥취가 ‘재미의 원리’로 작동하여 문화욕을 더욱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또한 이 시대의 여항-시정가사 가운데 들을 거리로는 <노처녀가1>과 함께 사설의 고정성을 보이며 각종 잡가집에 수록되어 있는 <과부가>․<거사가>․<규수상사곡>․<상사진정몽가>․<상사회답가> 등을 들 수 있다.48) 이들 작품이 공통으로 보이는 미적 지향은 역시 대중의 통속적 취향에 부합하는 남녀의 연정과 상사 등 가벼운 주제를 바탕으로 한 감상성과 선정성이 중심을 이룬다.
이 시대의 여항-시정가사로서 대표적인 볼 거리로는 초당문답가 의 작품들을 들 수 있다. 이 텍스트는 볼거리로 향유된 만큼 향유자가 필사하는 과정에서 서술에 적극 개입하여 서술의 유기성을 허물고 작자성을 상실하게 하는 여러 이본을 산출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무려 22종의 이본이 그것을 말해준다.49) 이 많은 이본들이 모두 동일한 향유기반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우선 여자계행 (1917) 같은 이본은 규방문화권에서 향유되고 오륜행록 은 공주의 유생 이기원(1809∼1890)이 필사자라는 점에서 사대부 문화권과 관련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편편기담경세가 (1908)․ 만고기담처세가 (1914) 같은 활자본이 간행된 것으로 보아 여항-시정문화권에서 널리 향유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대중담론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소설의 진술기법이 보인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 외에도 <백발편>에 시정의 문화공간에서 향유된 대표적 가창 텍스트인 십이가사의 가창현장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는 점, <낙지편>에 가창문화권에서 널리 유행된 것으로 보이는 시조와 유사한 대목이 보인다는 점, <지기편>과 <낙지편>에 당시 시정의 대중단편소설인 <삼사횡입황천기>(삼설기에 수록)와 내용 및 표현면에서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는 점 등에서 이들 작품이 여항-시정문화권을 기반으로 산출된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50) 따라서 이 작품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우부가>․<용부가>․<백발가> 같은 작품을 종래 서민가사의 대표격으로 본 것은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초당문답가 작품들은 이처럼 여항-시정가사로 산출된 작품이므로, 그것이 오륜을 포함하고 있는 교훈가사임에도 불구하고 향촌의 사족이나 지방관료의 오륜가사와는 근본적으로 미적 지향을 달리 한다. 후자의 경우 정통 교훈가사인 만큼 ‘역거의 원리’와 ‘계도의 원리’가 서술의 중심원리로 작동하지만 이 작품들은 여항-시정인을 교훈 대상으로 삼는 탓으로 볼 거리로서의 ‘재미의 원리’ ―특히 시정인물 형상의 과장적 희화화를 통한― 가 두 서술원리와 결합하거나 <우부가>․<용부가>에서 보듯 오히려 그것을 압도하는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항-시정의 통속화된 미적 취향에 물들어 있는 시정의 대중에게 정중한 권위의 목소리로 훈계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인 설득과 향유가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이들 텍스트에 드러나는 과장이나 희화화에 의한 골계스런 미적지향도 시정인의 통속미학을 반영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42) 대표적인 논의로 서영숙, 「서사적 여성가사의 연구―노처녀가를 중심으로」, 어문연구 25집, 어문연구학회, 1991 및 서인석, 「가사와 소설의 갈래 교섭에 대한 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1994를 들 수 있다. 43) 최진형, 「가사의 소설화 재론」, 성균어문연구 32, 성균관대 국어국문학회, 1997, 219∼222면 참조. 44) 성무경, 「18․19세기 음악환경의 변화와 가사의 가창전승」, 71면. 45) 김학성, 「잡가의 생성기반과 장르 정체성」, 한국고전시가의 정체성 , 265∼275면. 46) 김은희, 앞의 논문, 151면. 47) 성무경, 「노처녀 담론의 형성과 문학양식들의 반향」, 158∼184면 참조. 여기서 <노처녀가 2>가 <노처녀가 1>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텍스트임을 밝혀 종래의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았다. 48) 이들 작품의 텍스트 전승 양상에 대하여는 강경호, 앞의 논문, 63∼69면 참조. 49) 이본의 다양한 산출에 따른 작자성 상실의 구체적 양상은 육민수, 「조선후기 교훈가사의 담론특성 연구」, 성균관대 박사논문, 2003, 131∼158면 참조. 50) 이에 대한 상론은 육민수, 앞의 논문, 99∼100면 참조.
Ⅳ. 맺는 말
지금까지 조선후기에 소위 서민가사라 불려졌던 작자불명의 가사를 중심으로 그 개념과 범주화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이에 따라 이들 작품들이 일방적으로 서민층이 짓거나 서민의식이 반영되어 서민화 지향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상층의 고급문화적 요소와 하층의 민속문화적 요소를 포괄․통합하여 새로이 산출된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이들 가사의 상당수가 여항-시정인의 의식과 미적 취향을 반영한 것으로 보아 ‘여항-시정가사’라는 이름으로 범주화해야 함을 제안했다.
이어서 그러한 담론이 가능했던 기반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천기론의 이론적 지원에 힘입은 인간 성정의 자유로운 분출, 민족어문학론의 뒷받침에 의한 국문시가의 가치발견, 현실적․실질적․실용적 가치 지향에 따른 리얼리즘 기풍의 팽배, 경화사족층을 중심으로 한 문학의 세속화 경향, 집단적 공유의 공동담론으로 변화한 텍스트 향유문화의 대중화가 그것이다. 이 시대에 많은 가사 텍스트가 작자성을 상실하면서 失名, 擬名, 匿名, 無名化되고 그에 따라 많은 이본들이 파생된 것도 이러한 담론기반과 상관된다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담론기반은 여항-시정가사의 미학적 특징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하는데 그것은 주로 가사의 본질적 서술원리로 작동하는 두 가지―‘역거의 원리’와 ‘계도의 원리’에 새로 ‘재미의 원리’가 결합되는 것으로 나타나되, 후자가 두 본질적 원리를 압도하는 지경까지 나아가기도 함을 살폈다. 즉, 이 ‘재미의 원리’가 여항-시정가사의 미학적 특징을 결정짓는 중심원리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후기에 작자성 상실을 보이는 여항-시정가사는 볼 거리와 들을 거리의 텍스트로 구체화되는데 그 실현 양상은 세 단계의 변화를 보이며 대중적 俗의 미학을 구현해 나간 것으로 보고 그 구도의 체계화를 시도해 보았다.
글을 마치려니 전체적인 흐름의 파악에만 전심하느라 미처 개별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미학적 분석에로까지 나가지 못한 것이 못내 유감이다. 여기서는 큰 틀을 짜보았다는 것으로 자위하고 그러한 세부 작업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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