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미포마을 인동 장씨 남산파 미포 문중
미포는 해운대 동남쪽에 위치한 와우산 자락의 포구이다. 와우산은 청사포와 미포 사이에 위치한 산으로, 장산에서 내려다보면 누워 있는(臥) 소(牛)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미포는 그 소의 꼬리에 해당하는 갯가라는 뜻이다.
미포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동 장씨 남산파 후손이 대대로 살고 있었으며, 임진왜란을 전후해 파평 윤씨, 경주 김씨, 단양 전씨가 입향하였다. 마을은 조선 후기까지 동래군 동하면에 속했고, 1914년에는 남면 중동리 미포마을이 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 해운대출장소가 해운대구로 승격되면서 중동 미포마을이 되었다.
미포마을은 미포 오거리에서 동해남부선 폐선 아래 자리 잡은 해안마을이다. 마을 북동쪽으로 달맞이길이 지나가고, 마을 남동쪽으로 해운칠포의 하나인 미포항이 있다. 미포항 주변으로 횟집 50여 군데가 모여 있다. 미포항에는 해운대 앞바다를 지나 동백섬, 이기대, 신선대와 오륙도를 돌아오는 해운대 관광유람선이 있고, 새벽녘이면 오륙도 어장에서 갓 잡아온 어류와 해산물 직거래장터가 열린다. 또한 미포항에서 800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는 바닷물이 들면 허리만큼 물이 찬다고 해서 ‘허리덤’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암초가 있고, 그 위에 APEC 정상회의를 기념해 세워진 연꽃 등대가 있다.
미포마을에는 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속설이 있는데, 3대마다 한 번씩 소가 꼬리를 털어 버리기 때문에 3대 부자가 없고 망하는 가문이 발생한다고 한다. 그래서 3대가 되기 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재물과 가문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올 한해와 다음해에 고기가 잘 잡힌다고 하여 그 다음해에도 고기가 잘 잡힌다는 보장이 없으니 욕심을 부리면 일을 그르친다는 교훈일 것이다.
필자는 해운대초등학교 동기 장무창(인동 장씨 34대. 좌동. 61세), 장진환(인동 장씨 34대. 좌동. 61세)의 도움을 받아 미포마을의 뿌리인 인동 장씨 남산파 미포 문중을 찾았다. 장 씨는 우리나라 성 중에서 9번째로 인구가 많은데, 그 중 인동 장씨는 고려 초 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을 지낸 장금용이 시조이다. 인동 장씨 남산파 미포 문중은 1500년경 울주 언양에서 해운대 미포마을로 이거한 장순이 입향조이다. 인동 장씨 남산파 미포 문중 후손 중 장기석은 1664년(현종 5년) 유학진사의 교지를 받아 인동 장씨 문중의 세거를 떨쳤고, 후손들은 동래향교와 안락서원에 출입하여 장영석은 향교 장의, 장성준은 도유사, 장무준은 안락서원 장의 등을 역임하며 가문의 명성을 알렸다
후손들은 1993년 와우산 기슭(중동 1507-5), 오륙도와 동백섬을 마주보고 있는 배산임수 명당지에 ‘옥운재’라는 재실(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을 건립하였다. 대지 196평에 철근콘크리트 슬라브 3층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정남향이다. 재실 내부의 정면 제단 위 벽면에 교지, 장의 도유사 등의 임명장을 부착해 선조의 공덕과 위업을 자랑하는 명문 가문임을 알리고 있다. 옥운재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후손들이 참여해 향사를 지낸다고 한다.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