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패산 정상은 일망무제로 트여 있다. 사패賜牌는 임금이 왕족이나 공신에게 토지 등을 하사하는 일이다. 조선 선조 임금의 여섯째 딸 정휘옹주가 사가(유정랑)로 시집가는 딸을 위해 이 산을 하사했다 한다. 이것이 사패산의 유래다.
집을 나선지 1시간 20여분에 의정부 회룡탐방지원센터에 발을 딛는다.
산문 초입, 용龍이 돌아왔다는, 회룡사回龍寺를 만난다. 조선 왕조 500년 서막이 열린 사찰이다.
龍은 王을 상징한다. 이 사찰은 태조 이성계가 함흥차사(1403, 태종3년) 뒤, 한양으로 환궁하는 길에 이곳에서 수도하던 무학無學을 찾아와 며칠을 머물면서, 회룡사란 절명이 탄생된다. 천년 고찰은 세월의 무게를 벗고 날아갈 듯 현란한 삼원색 단청으로 단장하고 화려하게 행려의 객을 맞이한다.
사찰 앞으로 산문이 나 있다.
√☛. 산행 코스: 회룡탐방지원센터-회룡사-포대능선-사패능선-사패산-범골능선-상상봉-석굴암-원점회귀.
투박한 바위길이 나타나면서 산길은 수시로 옷을 갈아 입고 그 표정을 바꾸며 허름한 행려를 맞이한다.
오늘처럼 고요한 산의 품에 들면 늘 마음이 편안해 진다. 산의 서기瑞氣가 온 몸에 퍼지기 때문일 터.
그러기에 산의 품에 안기면 인간의 욕구나 욕망, 결핍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새소리가 떨어지는 회룡 3목교다. 길을 나선 지 단 몇 시간만에 내가 살았던 세상의 와글거림이 사라진 이곳이 세상의 길이 아닌 것 같다.
이윽고 사패능선 안부에 이른다. 절기상 춘분이 지났는데 아직 마른 나뭇가지를 울리는 바람끝이 맵다.
이곳 능선 사거리에서 의정부 회룡사와 원각사가 있는 송추계곡으로 맞닿아 흐르고, 포대능선을 흘러 도봉산의 주봉과 오봉에 이르며, 사패능선을 따라 정상에 든 뒤, 상상봉을 넘어 범골로 떨어진다.
영겁의 시간이 내려앉은 도봉산 포대능선이 허공과 손을 잡고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흐른다. 저 무궁으로 흐르는 능선을 볼 때면, "늙어 가는 인간만 속절없다"는 허무한 생각의 그늘이 내린다.
목마른 바위 틈새에 生의 뿌리를 내려, 그 命을 받고 살아가는 의연한 소나무 만난다. 이러 땐 억겁을 지고 말없이 묵묵히 살아가는 소나무의 감동이, 내 안의 허무를 희석시키곤 한다.
포대능선 상엔 아직 허연 뼈가루 같은 잔설이 남아 있다. 그곳을 되돌아 다시 사패능선으로 향한다.
겨울산에 반팔티를 입고 가는 젊은이다. 부러운 순간이다. "괜찮아요" 물었더니, "시원하고 좋아요"라는 답이 돌아온다. 요즘의 젊은이 답지 않게 참 후덕하게 와 닿는다.
장구한 세월이 만들어낸 기암이다. 일명 선바위. 오르는 수고를 감내하는 자에게만 산이 내어주는 선물이 아닐까.
햄버거 바위다. 요즘 나는 가끔 서구식 햄버거로 식사를 할 때가 있는데 한끼치곤 제법 속이 든든한데다 편한함을 느낀다.
바위산의 묘미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정상으로 드는 거대한 암릉이다.
사방이 일망무제로 터인 사패산 정상에 선다. 시린 바람이 불어 왔다. 그 시린 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낸다. 누군들 삶에 한번쯤 시린 계절을 건너 온 이 없겠내마는 부디 저무는 여로에 소리없이 지는 꽃잎같은 생의 시간을 빚어냈으면 하는 내 간절한 염원을 그 바람결에 띄운다.
정상석에 기념 사진을 남기려는 산객들의 모습이다. 이른 시간 집을 나서온 저 산객들은 힘든 이곳까지 올라와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얻어갈까 싶다.
둘러보니 겹겹의 능선이 숨 막히게 펼쳐진다. 앞쪽 송추북능선 넘어 포대능선이 마루금을 그리며 도봉산 주봉(선인봉 신선대 만장봉)을 잇고, 도봉주능선이 다락능선을 잉태하며 오봉으로 숨 가쁘게 내달린다. 그 뒤쪽으로 맏형 격인 북산한 주봉(삼각봉)이 우련히 고개를 든다.
랜즈로 당긴 풍경이다. 앞쪽의 도봉산 오봉과 뒷쪽이 삼각산(북한산)이다.
저멀리 수락산과 불암산이 우련하고, 그 앞이 의정부다.
의정부시의 전경 펼쳐지고, 양주시가 좌측 뒤끝에 아련하다.
정상부 바로 밑 축구장 너비엔 못 미칠지라도 꽤 너른 암반이 펼쳐진다.
그 암반 모퉁이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다. 대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나무의 처신과 처세가 인상 깊어 마음이 숙연해진다.
불혹의 다부진 사내 하나가 거대하게 솟은 암장에서 홀로 야영을 하고 있었다. "이 깊은 산 중에서 참 대단하십니다" 했더니, "참 좋지요. 이게 낙입니다"라고 하는 그 사내의 말끝에 삶의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이 산을 내려갈 쯤 사내의 마음도 깃털처럼 가벼워지면 좋으리라.
하산길 7부 능선 쯤에 부츠 한짝이 반듯이 누워 있다.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다른 한짝은 보이질 않는다.
스쳐 가는 장년의 두 남녀가 수상했다. 수상한 그들을 동네방네 외쳐 댈 수도 없는 노릇 이어서, 저만치서 되돌아 쫓아가 뒷모습을 담았다. 공연히 쓸데 없는 짓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란 생각이 스친다.
보루는 삼국시대 석축으로 쌓은 군사시설이다. 1,2보루는 고구려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산길에 기묘한 형상의 바위를 만난다.
자연석에 음각된 설굴암자의 미륵불이다. 보살의 몸으로 도솔천에서 머물다가 미래에 석가모니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다.
석굴암 삼면의 바위에 백범 김구(1879~1949) 선생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이곳 암자는 김구 선생이 상해로 망명하기 전, 한 때 피신했던 곳으로, 해방 후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었을 때도 이곳에 자주 들려 자연을 즐기며 고금을 외상했다, 기록돼 있다.
북한산 국립공원의 가장 북쪽 끝자락에서 단아한 기품의 화강암 봉우리로 솟아 있는 사패산은 도봉산과 함께 서울, 경기도의 북쪽 하늘을 높이 일으켜 세우고 있다. 한나절 그 단아한 기품에 안겨 내 비좁은 속 마음을 부리고, 탁한 도시의 밀림숲으로 발길을 옮긴다.
지상의 모든 산은 세상의 숱한 욕심과 탐욕과 허망한 꿈들과는 아무른 상관 없다. 그 텅 빈 산길 걷다보면 이승에서 어지러운 마음의 결들이 절로 부드러워 지는것을 느끼게 된다. 오늘 산길도 그랬다.
임금이 하사한 산, 사패산 길에서. 2022. 2월 석등.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