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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 시간
김백겸 ∣ 파란시선 0062 ∣ B6(128×208) ∣ 152쪽 ∣ 2020년 8월 30일 발간 ∣ 정가 10,000원 ∣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지구 양피지에 쓴 천일야화
“김백겸은 사피엔스가 지배하는 지구의 한구석에서 우주를 상상하는 시(인)의 꿈을 펼치고 있다. 우주를 산책하는 사피엔스는 “영겁의 한순간을 사는 특권”(「괴물, 스페이스」)을 누린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산책자(혹은 산보자)는 지구 변방의 작은 도시인 세종시를 거닐며 끊임없이 “천억 태양이 춤추는 은하수”(「괴물, 스페이스」)를 넘본다. 시인은 레고 조각을 가지고 노는 게이머에 “괴물, 스페이스”를 비유한다. 우주의 창조자인 게이머는 레고 조각으로 세계 형상을 만들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삶과 죽음을 한 몸에 담고 있는 게이머(신이라고 말해도 좋다)를 상상함으로써 시인은 시적 우주로 뻗어 나가는 길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김백겸이 상상하는 시 세계는 “양자 도약 사건들이 지금 현재를 울울창창하게 수놓고 있는 2020년 4월 20일 세종시 반곡로 14, 107동 302호”(「평행우주에서 다른 나(Self)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에서 사방 우주의 방대한 세계로 펼쳐져 나간다. 먼지 하나가 거대한 우주를 떠받치는 세계를 떠올려 보라. 먼지 하나에는 온 우주가 주름처럼 차곡차곡 접혀 있다. 먼지에서 흘러나온 수많은 길들이 우주를 낳고, 우주에서 흘러나온 수많은 길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먼지를 낳는다. 하나의 길은 수많은 길로 이어지고 수많은 길은 다시 하나의 길로 이어진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길과 길이 만나 새로운 길들로 이어지는 ‘양자 도약’의 이치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곳에 사는 ‘내’가 숨을 내쉬는 순간, ‘나’는 온 우주와 호흡을 같이하는 우주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시인은 불사를 꿈꾸는 인간의 욕망을 “스스로 증식해서 불사를 복사하는 바이러스”(「율도국」)로 표현한다. 불사를 향한 인간의 욕망은 증식에 목숨을 건 자본의 논리와 정확히 닮았다. 영생을 꿈꾸는 순간 인간은 스스로 증식해서 숙주인 생명나무를 죽이는 바이러스가 될 수밖에 없다. “죽음이 없으므로 사랑의 고통도 없고 그래서 불안도 없는 바이러스는 로봇 군대처럼 오직 증식이 목표”(「율도국」)인 생명 세계를 만들어 낸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인간의 삶을 옥죄는 이 시대에 스스로 바이러스가 되려는 호모 데우스의 헛된 열망을 김백겸은 우주를 산책하는 시인의 열정으로 풀어내려 한다. 호모 데우스가 불사를 꿈꾼다면, 우주의 산책자는 죽음을 꿈꾼다. 죽음을 통해 삶으로 되돌아오는 생명의 역설은 바로 이 자리에서 피어나는 것이다.”(이상 오홍진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김백겸 시인은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비를 주제로 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山 하나> <북소리> <비밀방> <비밀정원> <기호의 고고학> <거울아 거울아>, 시론집 <시적 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와 시인들> <시를 읽는 천 개의 스펙트럼> <시의 시뮬라크르와 실재라는 광원>을 썼다. <지질 시간>은 김백겸 시인의 여덟 번째 신작 시집이다.
■ 추천사
“네가 앉은 지구-생명나무를 문명의 톱으로 잘라 자본의 화덕에 연료로 던지려 하는구나”(「사피엔스」).
김백겸 시인은 ‘환상성’을 ‘사실(리얼)’로 만드는 데 천부적인 기질을 지닌 시인이다. 그의 시편들은 첫 장부터 현재의 인류는 양자 컴퓨터가 슈퍼 계산력으로 만든 매트릭스라는 이름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인류 문명사를 진단하고 기계문명에 갇힌 인류의 미래를 우울히 예견한다. 그러면서 ‘죽음이 없으므로 사랑도 고통도 없는 바이러스’인 ‘탐욕으로 오염된 인간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세계를 벗어나는 꿈을 꾼다(「율도국」). 그리고 그는 러시아 수학자의 말을 빌려 “인생의 부는 ‘단위 시간당 경험의 질 곱하기 시간’이라고” 단언하고 있다(「플루토의 선물」).
지금 이 꿈을 꾸고 있는 시인은 스스로를 ‘은퇴 백수’라고 지칭한다. 동서고금을 통한 지적 편력으로 “인간 기호”를 탐색하는 자다(「지질 시간」). 그는 끊임없이 자기 복제를 이루고 있는 우주적 ‘밈’의 세계에서, 그러니까 보르헤스의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 이제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산책자로 자신을 규정하며, 동서고금을 막론한 우주과학적인 상상력과 철학과 종교와 신화와 인류 문화사에서 길어 온 독서 편력으로 오늘의 현실을 진단하고 있다(「은퇴 백수」). 그런 그는 죽림칠현의 페르소나가 되어 인류 속세의 지식을 사랑하는 딜레탕트가 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우주 변환 리듬인 율려(律呂)이기도 하다(「탱고 사설」).
이 율려의 리듬 같은 눈부신 지적 편력으로 이루어진 시편들을 보며, 시인의 아름다운 ‘압화’ 같은 우주적 상상력의 깊은 사유가 빚어내는, 독보적인 시의 세계에 찬사를 보내며 독자들의 동참이 있기를 권유해 본다.
―김신용(시인)
■ 시인의 말
NAVER 사이버공간에는 한글 텍스트로 쓰인 시들이 있네
시들의 저자가 혹시 전생의 학인이었던가?
학인은 인공동면에서 꿈 깬 미이라 인생처럼 이상한 눈물을 흘리리라
로제타석의 비문 같은 기호의 난독에서
시란 이데아의 푸른 장미를 상기하는 스무고개임을 문득 깨달았기에
■ 저자 약력
김백겸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비를 주제로 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山 하나> <북소리> <비밀방> <비밀정원> <기호의 고고학> <거울아 거울아> <지질 시간>, 시론집 <시적 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와 시인들> <시를 읽는 천 개의 스펙트럼> <시의 시뮬라크르와 실재라는 광원>을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괴물, 스페이스 – 11
하늘 문학 – 12
지질 시간 – 14
사피엔스 – 17
타임머신, 구운몽 – 20
평행우주에서 다른 나(Self)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 22
율도국 – 25
홍루몽과 아웃 오브 아프리카 – 28
제2부
석류 – 35
들판의 백합, 타우마제인 – 36
창백한 달, 포세이돈의 인장(印章) - 38
아름다워라, 푸른 비단 한 자락 – 39
코스모스, 태양의 딸들은 아름답다 – 40
스타벅스 로고 – 41
금강, 스틱스 – 42
바람의 언덕 – 43
구월의 장미 – 44
길고양이는 유령처럼 길 한가운데 앉아 있다 – 45
겨울이 지나가니 초록 궁전의 여름이 왔다 – 46
밤하늘 눈썹에는 눈물 같은 별들 – 47
붓꽃과 향어가 있는 세종호수 – 48
임도(林道)를 걷다 – 49
시간의 비단뱀이 남기고 간 허물의 무늬는 아름답다 – 50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 - 51
붓 천 자루에 벼루 백 개 – 52
제3부
동창(東窓)과 동창(凍瘡) 사이 – 55
쿠바 버전 이솝 우화 – 57
목포의 눈물 – 59
꽃들은 시간에 창백하게 말라 가네 – 61
은퇴 백수 – 63
플루토의 선물 – 66
환상 제국 붉은 여왕 – 69
탱고 사설 – 73
현실은 괴로웠으나 환상은 높고 화려하다 – 78
은퇴 백수가 세종시 국책연구단 건물 사이에서 커피를 마시다 – 82
제4부
검은 새 – 89
은하수공원 – 91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 94
애석해라, 부귀를 햇빛 한 줌과 바꾸다니 – 98
하이델베르크 환상 – 103
이태리포플러 – 107
캐논 계산기 – 109
이집트 환상 – 111
궁궁을을(弓弓乙乙)로 날아가는 새들의 나라 – 116
칼리 여신을 사랑함 – 120
해설 오홍진 우주를 산책하는 시(인)의 역설 - 126
■ 시집 속의 시 세 편
지질 시간
야훼가 진흙에 숨을 불어넣어 창조한 인간 기호―아담
로마인들이 흙이라는 뜻으로 부른 인간 기호―호모
불가에서 인간은 대지로 돌아가 적정(寂靜)을 얻는 존재라는 뜻으로 기록한 열반 기호―니르바나
흙의 인간이 문명 기호로 쓴 지구 양피지에는 천일야화 같은 이야기들이 있다
B.C. 1만 년 전 충적세의 온화함 속에서 인류는 신석기 농업혁명을 시작했다는 기록
잉여농산물이 도시를 만들고 왕과 군대와 관료와 세금과 정복 전쟁과 노예를 만들어서 인류 불평등이 시작되었다는 기록
마약과 술이 인간 뇌를 자극해 진화의 오랜 잠 속에 갇혀 있던 에고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깨어나고 인류는 세상의 영토를 기호와 숫자의 지도에 가두기 시작했다는 기록
종교와 예술과 과학의 가설들이 팽창을 시작해서 밈(meme) 스토리들이 DNA처럼 대대손손 인간 뇌에서 떠돌아다녔다는 기록
자본과 기술이 인간세를 축복해서 70억 인구가 하늘의 별처럼, 일억 가지의 상품이 바닷가 모래알처럼 넘쳐 났다는 기록
세계 각국에서 생산된 식품이 입맛에 맞춘 종류대로, 세계 디자이너들이 재단한 옷이 패션에 따른 종류대로, 화물선과 수송기로 나라의 항구와 공항마다 도착했다는 기록
인간 호기심이 컴퓨터와 휴대폰과 게임기를 제조하였으니 역사 이래 모든 지식과 재화에 대한 관리 정보가 마이크로 칩의 메모리로 들어갔다는 기록
지상에서는 도로와 철도가 문명의 동맥과 정맥처럼, 하늘에서는 구글 검색 네트워크가 정보의 거미줄처럼 뻗어 나갔다는 기록
문명의 특이점에서 딥러닝으로 무장한 AI가 출현하였는데 이로부터 시작된 기계문명 창세기가 빛의 속도로 굴러갔다는 기록
호모 에렉투스―흙으로 돌아가 일부 뼈만 남았다
호모 사피엔스―네안데브탈렌시스는 멸종하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크로마뇽인과 북경원인으로 갈려 유전자를 전달했으나 모두 흙으로 돌아갔다
호모 파베르―도시와 문명을 건축했던 도구 인간도 흙으로 돌아갔다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도 흙으로 돌아갔다
호모 데우스―전지전능의 과학 지식과 기술 능력으로 스스로 신의 위치에 오른 인간도 흙으로 돌아갔다
세상의 모든 인류가 가이아 여신-칼리의 집으로 귀환했다 ***
밤하늘 눈썹에는 눈물 같은 별들
기억한다
문고리가 있는 창호지에 햇빛이 오자 단풍잎들이 꽃잎처럼 불타면서 탱자 울타리 아래 맹꽁이 소리가 콘트라베이스처럼 흘러나오던 순간의 기쁨
갑천변에는 억새 숲이 자랐는데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발소리에 청둥오리가 물소리가 깊은 어둠 속으로 도망가는 순간의 기쁨
밤하늘 눈썹에는 눈물 같은 별들이 떴는데 갑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구름 사이 창백한 얼굴을 내비친 하얀 달빛의 허리를 안고 갔던 순간의 기쁨 ***
궁궁을을(弓弓乙乙)로 날아가는 새들의 나라
용담유사(龍潭遺詞) 궁을가(弓乙歌)의 이상한 문장―‘궁궁을을(弓弓乙乙)’로 날아가는 새여
증산교 태을주(太乙呪)의 주문 속에 날아가는 새여
여동빈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의 깊은 도와 함께 날아가는 새여
날개에 바람을 안고 자연의 비밀을 드러낸 상형문자의 형상으로 날아가는 새여
태을금화종지의 종지는 근본이 되는 깊은 뜻이니 서술어였고
금화는 황금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부사였고
태을이 주어였으나 클 태(太)는 수식어이니 결국 을(乙)이 근본이 되는 깊은 뜻―종지(宗旨)의 주어였지
제목을 번역하면 태을이 황금처럼 빛나는 도의 깊은 뜻
중문학 전공 전영란 교수가 백도백과(百度百科)에서 검색한 태을의 다른 뜻은 태일(太一)이자 태일(泰一)
태일(太一)이라면 왜 태갑(太甲)이 아닌 태을(太乙)로 표현했는가가 학인의 의문
이상한 글자 태을을 설명하기 위해 예언서들과 도가(道家)서들이 이상한 문장들을 동원하고 있었지
현도(玄道)의 비밀을 품고 있는 태을은 무엇인가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아류의 예언서들을 뒤지고
태을주(太乙呪) ‘훔치훔치 태을천상원군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사파하(吽哆吽哆 太乙天上元君 吽哩哆㖿都來 吽哩喊哩娑婆訶)’ 주문을 백 번이나 읽어 보았지
한자어 태을천상원군과 도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산스크리트어 주문의 한자 음사(音寫)
티베트 대명주(大明呪) 옴마니 반메 훔(oṃ maṇi padme hūṃ)의 훔에서 겨우 연결 고리를 찾아
만트라(mantra) 해설들을 비밀첩보원처럼 뒤져 보니
옴(om)은 시바 신이 추는 우주의 춤―파 에너지의 진동이 암흑 어둠에서 일어나는 소리
훔(hūṃ)은 시바 신이 추는 우주의 춤―파 에너지의 진동이 암흑 어둠으로 스러지는 소리
자연의 현도란 우주가 파 에너지의 사인 곡선―태을의 형상인 태극(太極)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었지
인간의 지성, 수학과 물리학은 우주를 양자역학의 파동과 에너지장으로 설명하고 있으니
세계는 파 에너지들이 우주 끝까지 궁궁을을로 섭동(攝動)하고 있는 새들의 나라였네
복잡계에 내재하는 카오스 운동―∞운동에도 파 에너지의 철새들이 궁궁을을로 순환하고 있었네
문고리를 잡은 학인의 생각이 수수께끼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현도가 순백의 금강석으로 빛나고 있는 비밀 방
인간은 마음의 깊은 곳에 세계의 진리를 표상하고 그 속에 있고자 하는 의지의 생명력이 있으나
양자역학을 몰랐던 고대 현자들은 어떻게 우주 실상을 ‘일음일양위지도(一陰一陽謂之道)’로 직관할 수 있었을까
이 비밀 열쇠를 태을로 적어 놓으면 후세 학인이 어떻게 언어의 좁은 문을 지나 태허(太虛)에서 태양처럼 빛나는 현도를 찾아낸단 말인가
새여 날아오라
방황하는 환상의 새들이여 몰려들어라
하루 십만 개의 뇌세포가 죽어 가고 있는 늙은 학인의 시야에
진리의 새 떼들이 깍깍 혹은 끼룩끼룩, 옴마니 반메 훔의 울음처럼 날아가고 날아오는 장관을 보여 달라
늙은 학인에게 레스피기의 새 같은 웅장한 율려(律呂) 음악을 들려 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