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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25장 은혜를 원수로 갚다
매초풍이 몸져 눕자 황약사는 육승풍의 처를 시켜 병구완을 하게 하고 자기도 아형과 함께 병문안을 했다. 스승이 와도 매초풍은 말 한마디 없이 창 밖만 보고 있었다.
아형은 매초풍의 그런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황약사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매초풍을 살살 달래 주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황약사는 불쾌한 표정으로 방에서 휙 나가 버렸다.
아형은 혼자 매초풍의 침대맡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호심장에서 '아형'이라는 공예품을 만들어 하녀에게 내다 팔게 하던 일과 치음, 미화, 병묘 세 공자들이 자기를 따르던 일, 그리고 태호방 방주인 필소해와 총타주 학 영감이 자기에게 폭행을 가하던 일 등등 지금까지 겪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아형은 매초풍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처녀 하나에 사내 백이 따른다는 말이 있지. 너처럼 예쁜 처녀한테는 나보다 더 많은 사내들이 따를 텐데, 도화도엔 사내가 너무 적구나. 명년쯤 내가 사부님께 여쭈어서 중원에 보내 주마. 바람 쐬면서 중원 구경도 하고, 그러면서 사람을 찾아보는 거야. 어때, 너도 좋지?"
그래도 매초풍은 대답이 없었다.
아형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마음 굳게 먹고 몸조리 잘해라. 내일 또 오마."
아형이 집으로 돌아오자 먼저 와 있던 황약사가 일어서며 말했다.
"당신이 수고가 많군. 그런 일에까지 나서지 않아도 되는데……."
"사부님 때문에 제자가 병이 났는데 부인이란 사람이 모른 척할 수 있어요? 마음을 달래 줘야지."
그리고는 한숨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존심이 강한 아이라서 잘못하면 당신한테 평생 원한을 품을지도 몰라요."
"원망하려면 자기 자신을 원망해야지, 왜 나를 원망하겠소?"
황약사는 힘들어 보이는 아형을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자꾸 나다니지 마오. 그러다가 우리 아기가 다치겠소."
그가 아형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아형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딸을 낳아도 당신같이 꾀 많은 장난꾸러기를 낳을 것 같아요."
황약사는 허허 웃으며 아내를 포근하게 안아 주었다.
밤이 되었다.
매초풍의 방으로 살금살금 다가간 진현풍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창호지에 구멍을 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육승풍의 처가 매초풍과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에 육승풍의 처가 일어섰다.
"아이가 걱정돼서 난 이만 가야겠어."
육승풍과 곡영풍은 황약사의 허락을 얻어 가솔을 이끌고 도화도에 옮겨 와 살고 있었는데, 육승풍에게는 관영(冠英)이라는 어린애가 있었다.
"그럼 그만 가 보세요. 아이가 울면 어떡해요."
육승풍의 처는 급한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진현풍은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매초풍의 방으로 들어섰다. 매초풍은 벽을 보고 누워 있었다. 진현풍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못 들었는지 그녀는 깊은 잠이 든 사람처럼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진현풍은 그녀를 부르려다 말고 한동안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얇은 속옷 차림으로 머리를 흐트러뜨린 채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매초풍은 몹시 육감적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진현풍의 가슴이 쿵쿵 뛰면서 숨이 가빠졌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목 안이 타는 듯 말라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사매, 몸은 괜찮아?"
매초풍은 대답이 없었다. 진현풍은 한참을 기다리다가 할 수 없이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사형, 잠깐만!"
갑작스런 소리에 깜짝 놀라서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뒤를 돌아보니 매초풍이 침대에 앉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진현풍은 멀쩡히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너무나 반가워서 입가에 활짝 웃음을 띄우며 다가갔다.
"사매, 깨어났군. 난 자는 줄 알고 그냥 가려고 했지."
매초풍은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했다.
"사형, 전에 사형이 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나요?"
진현풍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그것은 예전에 진현풍이 매초풍에게 그녀를 업신여기는 놈은 죽여 버리겠다고 호언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바로 사부님이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다신 날 찾아오지 말아요. 사부님한테 잘 보여서 도화도에서 제일 큰 제자가 되세요."
진현풍은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고 묵묵히 눈물만 흘렸다. 매초풍은 사부님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고 있지만, 그가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부님을 죽일 순 없었다. 그들 두 사람의 목숨을 구해 주고 제자로 거두어 준, 평생의 은인인 사부님을 죽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무공으로 보아도 사부님을 죽일 수 없지만, 설령 자신의 무공이 사부님보다 강하다 할지라도 그럴 순 없었다.
진현풍은 눈물을 그치고 말했다.
"사매, 밤이 깊었으니 난 이만 돌아가겠어.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무술을 익혀야 하거든."
그 말에 매초풍은 코웃음을 쳤다.
"흥! 한평생 해 봐요. 사부님 발뒤꿈치나 따라가나."
진현풍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매초풍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사부인 황약사는 무학백가(武學百家)를 모조리 섭렵했으며 장법검식(掌法劍式)까지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수시로 독창적인 절기들을 창안해 내고 있으니 평생을 바쳐 그를 따라가도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맞아, 누구도 사부님의 무공을 따를 순 없을 거야. 사매도 말했잖아, 남제, 북개, 서독도 우리 사부님보다는 못하다고."
진현풍이 힘없이 대답하자 매초풍은 침대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못 따라가긴 왜 못 따라가요? 사부님도 결국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데 우리라고 왜 못하겠어요?"
그러더니 매초풍은 진현풍에게 다가와 그 희고 매끄러운 손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눈썹이 좀 처져서 그렇지, 이만하면 당신도 꽤 잘생긴 얼굴이에요."
진현풍은 매초풍에게서 풍기는 여인의 향기에 취해 꼼짝도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매초풍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자, 진현풍은 그녀를 밀어 버린다는 것이 그만 그녀의 젖가슴을 만지고 말았다.
그는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진 채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난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러나 매초풍은 그에게 좀더 몸을 밀착시키며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 그러면 어때요?"
그러더니 희고 긴 팔로 진현풍의 목을 끌어안았다. 매초풍은 진현풍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입김에 혼이 나간 진현풍은 화들짝 놀라 겁먹은 소리로 외쳤다.
"사매, 이 손 놔!"
도화도 무공에 적지 않은 부분이 동자공(童子功)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황약사는 매초풍과 진현풍, 풍묵풍 세 제자들의 이성 교접을 엄금했다. 황약사는 진현풍과 매초풍에게 둘이 만약 남녀간의 정을 통한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엄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매초풍은 사부님의 엄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진현풍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매초풍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사형, 정말 날 좋아해요?"
매초풍이 방긋 웃으며 물었다. 그리고는 진현풍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의 볼이며 머리칼에 입을 맞추더니 진현풍의 품에 머리를 기대었다.
난생 처음 여자에게 이런 입맞춤을 받아 본 진현풍은 가슴이 활랑거리고 다리가 떨려서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사매, 이러지 마……."
그러나 매초풍은 요염하게 웃으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사형, 내 말을 안 들으면 소리칠 거예요."
"안 돼, 이러면 안 돼."
"왜, 사부님이 무서워요?"
그 말을 하며 매초풍은 깔깔 웃었다.
진현풍은 머리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사부님이 두려웠다.
매초풍은 침대에 걸터앉더니 속옷까지 모두 벗었다. 그녀는 희디흰 알몸을 보이며 모로 누워 진현풍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리 와요."
그녀의 알몸을 쳐다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진현풍은 그녀의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눈을 떴다. 매초풍의 긴 머리칼이 침대에 드리워졌고, 그녀의 봉긋한 젖가슴이 탐스러운 꽃송이처럼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진현풍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녀에게 다가가 그 젖가슴을 살며시 만져 보았다.
그러자 매초풍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그의 손을 잡았다.
"왜 그러고 있어요? 좀 대담해지란 말예요."
결국 두 사람은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대개 남녀간의 정사란 잠깐의 쾌락을 맛보는 것으로 끝나게 마련인데, 더구나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는 후회와 원망이 남는 법이다. 진현풍과 매초풍의 경우도 그랬다.
진현풍은 매초풍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매초풍이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형, 내 부탁 하나 들어 줄래요?"
매초풍의 말에 진현풍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매초풍의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사형, 우리 여기서 달아나요. 달아나서 같이 살아요."
매초풍의 말에 진현풍은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매초풍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언젠가는 사부님 손에 죽을 거예요……. 하지만 난 이제 당신의 여자가 되었으니 죽을 때까지 함께 있을 거예요."
죽을 때까지 매초풍과 함께 있는다는 생각을 하니, 진현풍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해 봐."
매초풍은 뚫어질 듯이 진현풍의 눈을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형, 나와 함께 큰일을 해 보지 않겠어요?"
"큰일이라니?"
매초풍은 방안에 둘밖에 없는데도 진현풍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둘이 《구음진경》을 훔치는 거예요."
진현풍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농담 하지 마. 설령 《구음진경》을 훔쳐낸다 해도, 며칠 안 가서 사부님께 잡혀 끔찍한 벌을 받을 거야. 죽음보다 더한……."
"무섭단 말이죠? 그러면 나 혼자 달아나겠어요. 《구음진경》을 훔쳐 갖고."
진현풍이 애가 타서 얼른 그녀를 구슬렸다.
"사매, 그러지 말고 이 섬에서 몇 년만 참고 견디자구. 그러면 천하 무적의 무공을 익힐 수 있잖아. 그리고 나서……."
그 말에 매초풍은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당신이 도화도의 대사형이란 사실을 잊고 있었군요."
매초풍은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달라요. 난 그 책을 훔쳐서 달아날 거라구요. 나랑 함께 가기 싫으면 당신은 그저 모르는 척하고 있어요. 우리 둘 사이는 이걸로 끝장이에요."
'끝장'이라는 말이 진현풍의 가슴에 아프게 와 박혔다.
매초풍은 천천히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매초풍이 옷을 다 입을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진현풍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같이 가자구!"
멀리서 기슭을 때리는 파도 소리가 들려 올 뿐 사위는 쥐죽은듯 고요했다. 두 사람은 황약사와 아형의 거처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황약사와 아형은 그 시간까지 앉아서 고금의 문장을 논하고 있었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황약사가 《구음진경》을 서재에 보관해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화도는 외부 사람이 들어오기 힘들고 적의 침략에 대비해 설비도 잘해 두었으므로 사실 그것을 빼앗길 염려는 거의 없었다. 더구나 섬에는 황약사 부부와 제자들, 그리고 벙어리 노복들뿐이었기 때문에 황약사는 《구음진경》을 허술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제자나 노복들 중 그것을 탐내는 자가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창문 밑에 숨어 황약사 부부가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황약사의 무공을 잘 아는 그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숨어서 그들을 엿보았다.
황약사는 아형을 조심스럽게 눕히더니,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진현풍은 황약사 부부가 그토록 서로를 알뜰히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도 매초풍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매초풍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를 의아해 하며 진현풍이 물었다.
"사매, 왜 그래?"
매초풍이 그의 품에 안기며 속삭였다.
"난 안 볼래요."
드디어 방안의 불이 꺼지고, 잠시 후에 고요한 숨소리가 들렸다. 아형의 숨소리였다. 이제 두 달만 있으면 해산을 할 사람이어서인지 숨소리가 좀 틀렸다. 그러나 내공이 정예한 황약사는 잘 때도 기(氣)를 다루고 있으므로 숨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사부님 부부가 깊은 잠이 들 때까지 기다리다가 화랑을 지나 서재로 다가갔다. 진현풍이 서재 창문을 천천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구음진경》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손에 쥔 그는 잽싸게 서재를 빠져 나와 매초풍을 잡아 끌고 그녀의 집으로 나는 듯이 달려갔다.
매초풍의 집으로 돌아와 부랴부랴 펼쳐 보니, 그것은 사부님이 자랑하시던 《구음진경》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그것을 행낭 깊숙이 간직하고는 바닷가로 나갔다. 그들은 거룻배 하나를 몰래 타고 도화도를 떠났다.
이튿날 날이 밝자 황약사가 먼저 일어나 아형을 깨웠다.
"여보, 어서 일어나요. 엄마가 늦잠을 자면 우리 용아도 늦잠꾸러기가 된다구."
황약사는 아형이 그녀처럼 총명하고 예쁜 딸을 낳기를 바랐고, 아형은 남편처럼 다정하고도 늠름한 아들을 바랐다.
아형과 함께 서재 앞을 지나던 황약사는, 서재 창문이 열려 있는 걸 보고 의아하게 여겼다. 무심코 안을 들여다보다가 그는 깜짝 놀랐다. 분명히 어젯밤에 《구음진경》을 책상 위에 두었는데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황약사는 잠시 얼빠진 표정으로 서재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아형, 그 책이 없어졌소."
아형이 방긋 웃으며 대꾸했다.
"또 농담하시는군요."
"아니야. 당신도 찾아봐. 《구음진경》이 없잖소."
그제야 아형도 여기저기 살펴보다가 물었다.
"다른 데 둔 거 아니에요?"
"아니, 난 여기 올려 놓고 손대지 않았소."
황약사는 서재를 뒤집다시피 하며 책을 찾았으나 그것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구음진경》을 도둑맞은 것이다. 황약사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지었다. 상권의 내용을 익히지 않으면 하권의 것을 연결시킬 수가 없어서 자세히 읽지도 않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후회 막급이었다.
황약사는 아형을 집으로 들여보내고 나서 육승풍 둥을 시켜 섬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서재에 늘어선 벙어리 노복들은 황약사가 또 혹독한 벌을 내릴까봐 얼굴이 흙빛이 된 채 벌벌 떨고 있었고, 제자들도 잔뜩 주눅이 들어 사부님의 눈치만 살폈다.
"말해 봐! 누가 내 서재에서 그 책을 가져갔느냐!"
황약사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소리쳤지만 대답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누가 여기서 《구음진경》을 훔쳐 갔느냐? 이실직고하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구음진경》이 없어졌다는 말에 다들 놀라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 보았다.
"육승풍, 왜 말들이 없느냐? 갑자기 벙어리가 되기라도 했느냐?"
황약사는 벙어리 노복들에게 다가가 손짓으로 자기 서재에서 책을 가져갔느냐고 물었으나, 그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잠시 후 나이 지긋한 자가 앞으로 나서더니, 손짓으로 자기들은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으며 서재는 중요한 곳이므로 가까이 가지도 않는다고 했다.
"네가 《구음진경》을 가져갔지?"
황약사는 대력 허패의 멱살을 잡아 비틀며 목을 조였다. 황약사 생각에는 아무래도 벙어리 노복들 중 한 놈이 가져간 듯했다. 이들은 벙어리에 노복 신세였지만 한결같이 담이 큰 자들이었다. 황약사는 손바닥을 대력 허패의 정수리에 올려 놓으며 소리쳤다.
"어느 놈이 《구음진경》을 가져갔는지, 어서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대력 허패와 나머지 노복들은 비록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지만, 황약사의 기색으로 보아 그가 몹시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으나 화가 솟구친 황약사의 눈에는 그것이 모두 거짓으로 보였다.
"너희들 모두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던 놈들이다! 이 섬에 너희들 빼놓곤 외인이 없는데 그 책이 어디로 갔단 말이냐!"
그러면서 황약사는 손바닥을 내리쳤다. 대력 허패의 머리에서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이윽고 칠규(七窺)에서 새빨간 피가 주르르 흐르더니 금방 숨이 멎었다.
그때 들어간 줄 알았던 아형이 놀라 소리쳤다.
"여보!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아요! 내 생각엔 이들이 훔친 것 같지 않아요!"
아형은 무천풍에게 일렀다.
"자넨 어서 가서 진현풍과 매초풍을 불러 오게. 그들이 빠졌어."
그제야 황약사는 그들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잠시 후 돌아온 무천풍이 숨가쁘게 말했다.
"사부님, 두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데도 없어요!"
황약사는 몸을 솟구치더니 단숨에 바닷가로 날아가 고함을 질렀다.
"아……! 아……!"
그는 섬 주변을 날아다니며 계속 고함쳤지만, 섬 주위에 그의 고함소리만 무섭게 메아리칠 뿐 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황약사는 무거운 걸음으로 서재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서재에 묵묵히 서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을 제자로 삼아 가르친 내가 미쳤지!"
황약사는 남은 사람들에게 공연히 화풀이를 해댔다. 그는 원래 성미가 괴팍한 사람이었다. 그 앞에서 무서워하면 더욱 노기충천하여 펄펄 뛰지만, 오히려 대들면 그 기세가 수그러지면서 상대방을 좋아했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들은 잘못도 없이 그저 스승 앞에서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너희들이 오늘은 《구음진경》을 훔쳐 갔으니 내일은 도화도를 차지하려 들겠지. 그리고는 나까지 죽이려 들게야!"
육승풍이 무슨 말인가 하려고 그를 불렀다.
"사부님……."
그러나 황약사는 발을 구르며 더욱 화를 냈다.
"사부님이라니! 너희들은 귀운장의 삼 협객이 아니냐?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내 사부다!"
그 말에 육승풍 둥 셋은 무릎을 털썩 꿇으며 부르짖었다.
"사부님……!"
"듣기 싫다! 난 이제 너희들의 사부가 아니다! 진작부터 내가 너희들에게 도화도의 율을 일렀다. 도화도의 사문을 반역하면 반드시 징벌할 것이라고 말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약사는 육승풍, 곡영풍, 무천풍, 풍묵풍 네 사람의 혈도를 눌러 놓았다. 그리고는 아형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형, 당신은 여기서 나가요."
아형은 가슴을 태우며 간절히 말했다.
"제 말 좀 들으세요. 내가 다시 그것을 묵사하면 되잖아요."
그러나 황약사로서는 아형이 그 책을 다시 묵사한다 해서 수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키운 제자에게 무공의 비급을 도둑맞다니, 이런 절통하고 한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목숨을 구해 주고 제자로 받아들여 먹여 주고 가르친 은혜에 보답을 하기는커녕 원수로 그 빚을 감다니……. 그는 인간이란 존재를 믿을 수가 없었다.
나머지 제자들이 다칠까 봐 걱정스러운 아형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제가 다시 묵사할 테니 이제 들어가세요, 네?"
그러나 황약사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입 좀 다물고 있지 못하겠소?"
벙어리 노복 둘이 아형을 데리고 안채로 들어갔다. 아형은 마지못해 들어가기는 했으나 근심스러운 얼굴로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제자 네 명은 스승에게 혈도를 눌려 말을 하지 못했으므로 표정으로 심중을 표현하고 있었다. 화내는 자, 애걸하는 자, 억울하다는 자……. 그러나 황약사는 그 모든 것을 묵살하고 소리쳤다.
"네 놈들 발에 있는 힘줄을 끊어 버릴 테다. 도화도를 떠나 다시는 날 볼 생각을 말아라!"
황약사는 육승풍의 두 발뒤꿈치의 힘줄을 단번에 끊어 버리더니, 곡영풍과 무천풍에게도 그렇게 했다. 눈물을 뚝뚝 떨구는 어린 풍묵풍은 한쪽 다리의 힘줄만을 끊어 놓았다.
"어서 떠나거라! 내 마음이 변해서 모두 죽여 버리기 전에 서둘러라!"
스승의 손에 다리를 다친 그들은 식구들을 데리고 황급히 도화도를 떠났다.
황약사는 그들이 탄 배가 멀리 사라지자 무거운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아형이 책상 앞에 앉아 《구음진경》을 묵사하고 있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한참 만에야 몇 글자씩 쓰는 것으로 보아 기억을 더듬기가 무척 어려운 모양이었다.
황약사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생각했다.
'지금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중원에 가서 두 연놈을 처치하고 싶지만, 벙어리 노복들만 있는 이곳에 만삭의 아내를 남겨 놓고 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데려갈 수도 없고……. 할수없지. 아내가 해산하고 몸조리가 끝나면 그때 같이 가기로 하자.'
매초풍과 진현풍은 이틀 후에 밀주(密州)에 도착했다. 그들은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 본 후에야 여기서 제남부(濟南府)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왼쪽으로 가면 제남으로 갈 수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익주(益州)에 갈 수 있었다.
진현풍이 매초풍에게 말했다.
"내 생각엔 적어도 서너 달은 아무 일이 없을 것 같아. 사부님은 분명히 사모님이 해산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우리를 잡으러 올 거야. 그러니 지금 최대한 멀리 달아나야 해. 서하(西夏)까지 말이야. 거기 가면 사부님이 우릴 찾기도 어렵게 되지."
두 사람은 서하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서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고생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드디어 천신만고 끝에 두 사람은 서하의 하주(夏州)에 도착했다.
지칠 대로 지친 매초풍이 말했다.
"어디 들어가서 배를 좀 채우고 가요.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마음을 좀 놓아도 되겠죠."
두 사람은 주점에 들어가 깨끗한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술과 음식을 청했다. 한창 맛있게 먹고 있는데 누군가 주루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층계를 짚는 지팡이 소리가 들려 오더니, 한참 만에야 그 소리의 임자가 나타났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그를 보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1차 화산 무예 시합에 모인 무림의 고수들은 북개 구지신공 홍칠공, 남제 단지흥, 동사 황약사, 서독 구양봉, 중신통 왕중양, 이렇게 다섯 명이었다. 그런데 화산의 무예 시합 후 왕중양은 죽었고 구양봉의 합마공도 흩어지고 말았다 하니, 무림엔 세 명의 고수가 남은 셈이었다. 황약사는 화산의 무예 시합에 갈 때 제자들을 데리고 가지 않았지만, 돌아와서 서독, 남제, 북개, 중신통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해 주었으므로 도화도 사람들은 이 넷을 직접 보기나 한 것처
럼 환히 알고 있었다.
지금 나타난 자는 풀어헤친 머리에 호복을 입었고 발에는 끝이 뾰족한 가죽 장화를 신었으며 손에는 큰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지팡이 위쪽에 악마의 머리 두 개가 새겨져 있는데, 귀에는 금 귀걸이를 달았고, 뻥 뚫린 콧구멍 밑에 피 묻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으며, 퉁방울 같은 커다란 눈은 흉악하게 부릅뜨고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소름 끼치는 것은 지팡이에 새겨진 악마의 눈과 입, 그리고 귀에서 작은 뱀 두 마리가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는 광경이었다. 그
뱀들은 지팡이에 새겨진 악마의 눈에서 기어 나와 귀로 쏙 들어갔다가 다시 입으로 나와 새빨간 혀를 날름거렸다.
그는 다름아닌 노독물 구양봉이었다.
구양봉이 주루에 올라와 보니 주루 안에는 네 사람뿐이었다. 한 탁자에는 시골의 부호처럼 보이는 사람 둘이 마주앉아 권커니자커니 하며 재미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고, 다른 탁자에는 부부인 듯싶은 젊은 남녀가 앉아 조용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구양봉은 커다란 소리로 심부름꾼을 불렀다.
"게 누구 없느냐?"
문가에 서 있던 심부름꾼 셋은 서로 네가 가 보라고 실랑이를 벌였다. 구양봉의 차림으로 보아 괜한 봉변을 당할까 봐 겁이 난 것이다.
그러자 구양봉이 다시 소리쳤다.
"이 놈들! 내가 셋을 세기 전에 오지 않으면 네 놈들 목숨은 없는 줄 알아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 명 모두 구양봉 앞에 와서 머리를 조아렸다.
"나으리, 무슨 분부십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구양봉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안주 네 개를 가져오너라. 남제, 북개, 동사, 중신통, 그리고 좋은 술로 두 항아리만 가져오너라."
그 말에 심부름꾼 셋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 보았다. 이곳은 하주에서 가장 큰 주루였으므로 남방 요리든 북방 요리든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남제니 북개니 하는 요리는 금시초문이었다.
"나으리께서 분부하시는 요리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좀 자세히 알려 주십쇼. 그래야 주방에다 시키는데요."
심부름꾼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구양봉이 다시 소리쳤다.
"네 이 놈!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당달봉사냐?"
"아닙니다. 글자는 꽤 압니다."
"그러면 이걸 봐라!"
구양봉은 젓가락으로 탁자 위에 글씨를 쓰며 말했다.
"이 글자 알지? 남제! 북개! 그리고 이건 동사, 이건 중신통!"
그것을 본 심부름꾼은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예, 예. 알았습니다. 소인이 즉시 대령하겠습니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런 요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들은 목을 빼고 구양봉의 탁자를 보았다. 탁자 위에는 구양봉이 강한 내력을 가지고 새긴 글자들이 보였다. '중신통'이란 글자 다음엔 돼지 염통이 그려져 있었고 나머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우리 사부님은 뭘까?'
매초풍은 궁금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창문을 열러 가는 척하고 살금살금 구양봉 뒤로 갔다. 창문을 열면서 슬쩍 고개를 돌려 구양봉의 탁자를 보니, '북개'라는 글자 다음엔 닭이 그려져 있고 '남제'라는 글자 뒤엔 뱀 한 마리가 그려져 있으며, '동사'라는 글자 다음엔 물고기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매초풍은 자기도 모르게 깨드득 웃고 말았다. 스승 황약사가 물고기로 비유된 것이 너무나 우스웠던 것이다. 매초풍이 구양봉 뒤에 서서 웃는 걸 보고 진현풍은 얼른 그녀를 불렀다.
"사매, 얼른 이리 와!"
매초풍이 돌아와 자리에 앉자 진현풍이 목소리를 잔뜩 낮춰 꾸짖었다.
"사매, 저 사람이 누군지나 알고 그러는 거야? 서독 구양봉이란 말이야. 재수 없으면 저자의 손에 비명 횡사한다구."
매초풍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구양봉이 식탁에다 그린 것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진현풍도 빙긋 웃었다. 그러나 그들은 구양봉이 자기들 말을 다 듣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심부름꾼이 구양봉이 시킨 음식들을 가져와 탁자에 놓고 술 한사발을 따라 주었다.
구양봉은 젓가락을 들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 거렁뱅이 홍칠아! 이제부터 너를 먹겠다."
그는 젓가락으로 닭다리를 집어 쭉 찢어서는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는 고기를 뜯으면서 혼자 떠들었다.
"다리 하나를 뜯긴 주제에 무슨 위풍이냐?"
구양봉은 계속 혼자 중얼거리면서 뱀탕 한 사발과 닭 한 마리, 물고기와 돼지 염통을 눈 깜짝할 새에 다 먹어 버렸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구양봉이 음식을 다 먹었으니 일어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닭뼈를 손가락으로 잘게 부수더니 뱀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뱀 두 마리는 팔딱팔딱 뛰어오르며 순식간에 닭뼈를 먹어 치웠다.
구양봉은 사장을 손에 짚고는 진현풍과 매초풍을 쏘아보며 호통쳤다.
"둥신 같은 것들, 이리 오지 못하겠느냐!"
도화도에서 도망친 후 잠시도 걸음을 늦추지 못한데다, 강호의 고수들을 피하느라 마음 편할 날이 없던 두 사람은 기절 초풍하도록 놀랐다. 그러나 이 자리를 피할 순 없었다. 그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구양봉에게 다가갔다.
그 탁자 앞에 가 선 진현풍이 입을 열었다.
"선배님은 누구신지요? 무슨 분부가 계십니까?"
"분부? 그런 소리 말고 내 사장이나 받아라!"
구양봉은 갑자기 사장으로 두 사람의 머리를 내리쳤다. 대단히 절묘한 술수였다. 얼핏 보기엔 앞가슴이나 왼쪽 어깨를 치는 것 같지만, 실은 어디를 내리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진현풍은 얼른 매초풍을 자기 등뒤로 밀고 한 손으로 사장을 막으면서 다른 손으로 뱀 대가리를 쳐냈다.
"하! 요것 봐라."
구양봉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사장을 내려놓았다.
"너희들 도화도에서 왔구나! 황약사의 제자들이냐?"
진현풍과 매초풍은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주저하다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우린 도화도 사람이 아닌데요……."
그러자 구양봉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상하군. 네 장법은 분명히 황약사의 낙영장법이었는데?"
"소생의 사부님은 동해 현의괴객(玄衣怪客)입니다. 사부님과 도화도 도주 간에 교분이 두터워 저도 낙영장법을 좀 배우긴 했지만,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어르신의 웃음을 자아냈을 겁니다."
진현풍이 그럴듯하게 둘러댔다.
'이들은 내가 왕중양에게 합마공을 파(破)당한 후 아직까지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걸 모르는 모양이구나. 이들을 더 건드렸다간 나중에 황약사에게 곤욕을 당할 테니 오늘은 이만 하고 떠나자.'
구양봉은 이렇게 생각하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좋다! 황약사의 제자가 아니라니 나도 볼일이 없다."
구양봉은 사장을 짚으며 주루를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