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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번에 있었던 학내 소요사태를 간략하게 예로 들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학생들이 잘 따르는가요?”
“제가 좀 엄한 편이라...”
옆에 아내가 없었다면 강이수에 관한 얘기를 털어놓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아니었다. 의사가 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아내한테 적잖은 의구심을 심어줄 수도 있어 대뜸 장인구를 떠올릴 것이다.
잠시 후 의사가 짤막하게 진단을 내렸다.
“심각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겠어요. 환자분께서 다소 신경이 예민해서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마음을 항상 느긋하게 갖는 게 좋겠어요. 아침에 가벼운 운동도 하시고...지속적으로 하세요.”
그가 나를 ‘환자’로 분류하는 순간 몸이 바다 심연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의사가 환자라고 판단하면 나는 틀림없이 환자다. 다른 과 의사가 아닌 정신과 전문의가 그렇게 분류했다면 나는 이미 정신질환에 근접해 있는 셈이다.
나는 기분이 나빴다. 그뿐만 아니었다. 혈관에 뜨거운 피가 흐르지 않을 ‘아우슈비츠 감시관’의 진단을 신뢰하기가 싫었다.
그의 판단은 상식적이었다. 내 증세는 신경이 예민해서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고, 그래서 마음을 느긋하게 가져야 하고, 가볍게 운동하는 게 좋다는 진단이었다.
그건 내가 이미 결론 냈던 자가진단과 다를 게 없었다. 전문의-그것도 권위자-가 내린 결론이 고작 그것뿐이라 실망했다.
젠장. 나도 정신과 의사 하겠다.
나는 아내를 따돌릴 목적으로 주차장을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아내가, 약 타야 한다면서 발을 굴렀다. 나는 그때까지도 부아가 치밀어 “당신이나 먹어!”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기어이 아내를 떨어뜨린 채 혼자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려고 하자 또 무릎이 떨렸다. 가슴까지 떨리면서 마치 바늘이 두피를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그 바늘로 ‘아우슈비츠 감시관’의 얼굴을 난자하지 못해 안달이 솟았다.
학교로 가면서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연구실에 와서도 다시 켜지 않았다. 분명히 퍼부을 아내의 잔소리가 지레 싫었다. 사려 깊지 못한 여자의 하찮은 판단 때문에 의사 앞에 앉아 있었던 시간이 부끄럽고 한심스러웠다. 결코 권위자일 리가 없을 것 같은 의사 앞이라 더 화가 났다.
저런 의사는 수용소의 감시관이 딱 어울리겠어.
나는 마치 어떤 내기에서 이긴 것처럼 마음이 가볍고 몸도 훨씬 가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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