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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불어온 봄의 기운이 세상을 가득 채울 때, 그 미세한 흐름을 감지했던 사람들로 겨우내 한산했던 거리가 복작거렸다.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과 더불어 나뭇가지에 피어오르던 새순들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홍매화의 개화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소식을 접한 사람들로 인해 표를 끊기 위한 사람들의 발걸음들이 모여 장사진을 이뤘다. 창호 개방 행사와 더불어 사람들 사이에 이미 그 명성이 자자한 창덕궁 홍매화의 개화 소식까지, 사람들의 주된 시선들은 이미 후원 입구 주변으로 쏠려 있었다.
경복궁 동쪽에 창경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던 영역. 사람들의 시선이 상대적으로 미치지 못했던 가장 깊숙한 곳에도 봄의 향연이 고풍스러움을 배경 삼아 자연이 선사하는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선사했다. 북악산 응봉 자락을 사유한 채, 뻗어나가는 봄기운이 한가득 담겨 있던 곳. 이곳에 깃든 지난 시간들이 자아낸 분위기들이 사뭇 궁금해졌다. 바로 인정전 영역으로 들어가지 않고, 궐내각사를 통해 들어가는 우회로를 택했다. 조금이라도 더 그 수려했던 순간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1. 실질적 정궁
1997년, 서울 곳곳에 퍼져있는 다른 구역들에 비해 잘 보존된 전각들로 인해 창덕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오르게 됐다.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은 채 오늘 날 수많은 사람들이 찾으며 시간이 갈수록 그 아름다움의 깊이를 더하고 있었다. 창성하고 덕이 가득하리라 했던 이곳은 경복궁이 복원되기 전까지 조선의 실질적 정궁으로 자리하며 조선 전기와 후기에 각각 경복궁 그리고 경희궁과 함께 양궐 체제를 공고히 했다. 세조 시대 때 확장된 창덕궁의 후원과 더불어 헌종의 검소함을 엿볼 수 있었던 낙선재의 모습까지. 그만큼 왕들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했던 만큼 다른 궁궐 전각들이 행여나 질투는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실권을 장악한 태종 이방원은 한양으로의 환도를 천명했지만, 경복궁으로 회귀하기를 꺼려해 이궁의 개념으로 창덕궁 공사를 명한다. 이후 태종 5년 창덕궁 공사가 끝난 뒤, 이방원은 이곳으로 이어한 뒤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전까지 치세를 이어갔다. 이후, 세종은 경복궁에 집현전을 크게 짓고 치세를 잇게 되는데, 상대적으로 창덕궁의 중요성이 덜해지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그의 뒤를 이은 왕들이 주로 창덕궁에 기거하며 518년의 역사 중 약 250여 년의 시간을 이어가게 된다.
이후, 1592년에 벌어진 두 차례의 왜란으로 인해 한양에 자리한 궁궐 전각들이 모두 불타 자라 지게 되는데, 조명연합군이 한양을 수복한 뒤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전쟁의 참혹함과 더불어 전소되고 사라진 궁궐터의 황량함 뿐이었다고 전한다. 이후, 한양으로 이어해 오늘날 덕수궁 자리에 기거하며 궁궐 복원 계획을 논하게 되는데, 경복궁 복원 공사는 천문학적인 비용으로 인해 결국 뒤로 밀리고 창덕궁의 복원이 결정된다. 결국 1613년 7년의 창덕궁 복원 공사가 완료가 되며, 정동 행궁에 머물던 광해군은 드디어 창덕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왜란 당시 분조를 이끌던 세자 시절, 선조와 신료들의 끝없는 견제 때문이었을까? 항상 정통성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광해군은 재위 시절 경희궁을 비롯해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인경궁과 자수궁 공사를 무리하게 진행하며 결국 백성들과 신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이 문제는 인조반정으로 귀결된다. 이후, 이괄의 난 까지 더해지며 왜란 이후 가까스로 복원된 창덕궁 전각들은 다시 한번 불타 사라졌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인조 때 가까스로 인정전 권역을 제외한 나머지 전각들에 대한 복원이 완료된다.
이후, 창덕궁은 약 250여 년 동안 조선의 정궁으로서 그 역할에 충실하게 된다. 반면,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기 전까지 경복궁 터는 수풀이 우거진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기록을 찾아보면 한양 내부에 호랑이들을 포함해 각종 맹수들의 서식지로 전락했다고 전한다. 경복궁이 복원된 뒤, 잠시 창덕궁은 주인 없는 빈 공간으로 잊히는 듯했으나,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를 당하게 되고 난 뒤 순종이 창덕궁으로의 이어를 선택 다시금 그 마지막의 순간에 주요 무대로 역사의 무대에 자리하게 된다.
창덕궁 뒤편에 자리한 조선 왕비의 공간 대조 존. 그 옆에 딸린 전각 흥복헌에서, 경술국치 직전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리게 됐다. 왕위를 이어받은 순종은 모든 실권을 일본에 뺏긴 뒤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1910년 8월 22일. 흥복헌에서 순종은 조약 체결 위임장에 서명 이후 국새를 찍어 이완용에게 건넸다. 이후 해당 내용은 8월 29일에 공표됨과 동시에 대한제국은 자연스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전각이 머금고 있던 뜻과는 180도 반대되는 사건과 마주한 채 말없이 침통한 마음을 한가득 담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창덕궁의 소유권은 대한제국 왕가가 소유하며 순종이 세상을 뜨기 전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각종 화재로 인해 전소된 전각들의 복원을 위해 경복궁 강녕전과 교태전 등의 전각들을 뜯어 복원 공사가 진행됐고, 1945년 광복 이후 소유권은 미군정에 몰수된 뒤 이후 자연스레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문화재청으로 이관된다. 당시 일본에 거주 중이던 왕실 사람들은 귀국을 바랐지만 정부의 반대에 부딪히게 됐고, 1960년이 돼서야 정부의 배려로 왕실 사람들이(영친왕,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순정효황후) 창덕궁 낙선재와 석복헌에서 거주하게 됐다.
2. 창덕궁 창호 개방
평소에 굳게 닫힌 채 내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3월 말에 찾아왔다. 새로운 봄의 기운을 맞이 하고자 닫혀 있던 궁궐 전각의 문을 연다는 소식을 접했다. 다른 고궁 관련 전문가 분들에게 물어봐도 자주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었기에 일정 사이의 짜투리 시간을 활용해 카메라를 들고 창덕궁을 찾았다. 행사 마지막 날, 평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을 보내기 아쉬웠는지 입장권 구매하는 곳 에서 부터 길게 늘어진 줄들을 바라보며 제대로 볼 수 있을까를 걱정할 수 밖에 없었다. 차분히 차례를 기다린 뒤 그동안 묵혀뒀던 궁금증을 해소하러 틈틈이 시간을 확인하며 희정당 앞으로 달려갔다.
창덕궁 희정당 앞에서부터 시작된 줄은 기념품 가게 앞 까지 이어져 있었다. 경악을 금할 길이 없었기에 급하게 머리를 굴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았던 전각 뒤쪽으로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전각 뒤쪽에도 평소에 닫혀 있던 전각의 문이 활짝 열린 채 봄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들이며 사람들의 발걸음을 환영했다. 베일에 싸인 비밀의 공간은 끊임없는 통로로 화답해 줬고, 반대로 돌아간 덕분일까?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반대편에서 사람들과 눈을 마주친 채 새로운 공간의 모습들을 한껏 탐닉할 수 있었다.
희정당과 대조전 권역으로 돌아와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음에도 어느 정도의 기다림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희정당 앞쪽만큼은 아니었지만 이미 요소요소에 포인트가 될 만한 부분들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고, 잠시나마 '저곳도 괜찮을 것 같은데?' 싶은 곳에 가서 먼저 렌즈를 들이밀고 난 뒤 뒤로 돌아볼 때는 어느새 수많은 사람들이 내 뒤로 장사진을 이뤘다. 덩달아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는 호기심 때문일까? 반대편에서 서로를 마주한 그 모습에서 괜스레 반가움이 전해졌다. 쉼 없이 자리를 지키며 이곳을 오갔을 사람들을 덩그러니 놓인 공간에 그려본다.
게다가 덕수궁과 창경궁을 거닐며 자연스레 들었던 전각 내부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전각 사이사이를 이어주는 미로와 같은 공간을 뒤덮은 기다란 지붕들에 대한 구조도 함께 눈에 담을 수 있어 뜻깊었던 순간들이었다. 이제는 굳게 닫힌 채 다시 베일에 다려졌지만 언젠가 그 공간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순간을 고대해 본다. 프레임에 프레임 그리고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그 깊이가 참으로 매력적으로 와닿았기 때문이다. 직접 그 내부를 걸어볼 수 있는 순간이 있을까? 그럴 기회가 날 찾아온다면 더할 나위 없을 듯하다.
3. 창덕궁 홍매화
2010년 5월 1일을 기점으로 창덕궁 후원을 제외한 나머지 전각들에 대한 자유관람이 시작된 뒤, 희정당과 낙선재 그 사이에 자리한 창덕궁의 홍매화는 항상 눈에 담고 싶은 존재가 됐다. 1년에 단 몇 주만 허락된 그 순간에, 그동안의 회포라도 풀 듯, 우리들 곁을 떠나갈 때까지 총 3번 정도 창덕궁을 연이어 찾았던 것 같다. 그 빼어난 자태를 직접 목도했을 때 왜 수많은 사람들이 창덕궁 홍매화를 목놓아 칭찬하는지를 바로 알 수 있었고 어느새 자연이 자아낸 사군자가 색을 한껏 발산하며 사람들의 발걸음을 강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수백 년의 시간 동안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이 나무는 당시 사람들의 모든 순간들을 기억이라도 할까? 그 오래된 시간의 깊이가 낙선재 전각을 배경 삼아 아름다운 자태를 맘껏 뽐낸다. 이곳도 어김없이 사진을 찍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거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자 부지런히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 경주 동궁과 월지 그리고 월정교의 야경을 담기 위해 고군분투했었던 경험 덕분일까? 당시의 경험이 날 강하게 만들어 줬기에 이 정도는 평정심을 유지한 채 오롯이 홍매화의 그 자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양장을 갖춰 입은 뒤 화사한 색감을 배경으로 찰나의 순간을 담았다. 아름답게 빛 나던 선홍빛의 그 자태가 몽글몽글한 게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을 거닐며 최대한 만족스러운 모습을 담기 위해 숨을 참아 가며 순간에 몰입했고, 그 노고에 보답이라도 하듯 홍매화 또한 그 물음에 충분히 응해줬다. 내년 이맘때 내가 이곳을 찾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보다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그 모습들을 바라볼 수 있을까? 그저 프레임에 담아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창덕궁의 봄을 알리는 봄 꽃들을 뒤로한 채 서서히 시들어 가는 녀석들을 배웅하기 위해 창덕궁을 다시 찾았다. 그 순간이 영원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나뭇가지에 테이프라도 감아서 떨어지는 꽃잎들을 붙잡아 매고 싶었지만 한낱 욕심인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넌지시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네며 발을 돌렸다. 나무 아래 소복이 쌓인 꽃잎들은 햇빛을 머금은 채 화양연화의 순간을 선사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머물지 않던 그 자리, 낙화의 그 순간을 담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4. 향유
수백 년 전 그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풍경들은 매주 월요일과 휴궁일을 제외하고 언제든 입장료 3,000원으로 수백 년의 시간을 다채롭게 향유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 참으로 축복받은 순간이라 여겨졌다. 더불어 고궁들을 배경 삼아 대한제국의 황사손이 기획에 참여한 궁중문화충전과 더불어 창덕궁의 밤을 만끽할 수 있는 달빛 기행까지 더욱 풍성한 즐길거리들이 창덕궁의 매력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줬다. 자칫 지루할 수 있거나 관심 밖에만 머물던 문화재가 좀 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매력적인 요소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감사한 일로 다가왔다.
더불어 시기에 따라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공간과 많이 찾지 않는 공간이 극명하게 갈렸다. 그로 인해 고즈넉한 공간들에서 오히려 다른 매려글을 만끽할 수 있었고, 과거 이방자 여사가 기거했다는 곳, 낙선재에는 곳곳에 사람들이 자리를 잡아 따사로이 내려오는 햇살의 손길을 흐뭇한 미소로 한창 반겨줬다.. 검소함을 느낄 수 있었던 그 공간에는 사선으로 들어오는 빛이 고풍스러움을 더욱 부각해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의 색다른 매력을 향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줬다.
창덕궁 전각을 거닐며 즐겼을 시간들을 뒤로했다. 향유하다. 경복궁과 창경궁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가지 않았던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보전된 전각들을 통해 시대의 사람들이 남긴 이야기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게 만들어 줬다. 나 홀로 여행을 통해 오롯이 즐길 수 있었기에 순간을 더할 나위 없이 오감을 활용해 담아올 수 있었다. 뒤이어 다가올 창덕궁 후원의 가을도 벌써부터 목이 빠져라 기대하게 된다. 흘러가는 시간을 뒤로한 채 그만큼 창덕궁의 분위기도 자연스레 고풍스러움을 더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