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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pdf 자료중 사우디 고용의무제도, 역사, 세제개혁, 수소 관련 내용만 아래에 내용 붙임.
사우디 정부는 약 1,340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 수를 줄이고, 사우디 내국인을 위한 일자리 창출을 위해 사우디인 고용의무제도(Saudization)를 강력하게 추진 중
- 그러나 기업들은 사우디인에 비해 생산력이 높고 임금이 낮은 외국인 노동자를 여전히 선호하며, 사우디인이 선호하는 일자리
(사무직)와 외국인이 다수 종사하는 일자리(노동, 단순 노무직)가 달라서 사우디인 고용의무제도가 얼마나 효과를 낼지 미지수
- 2022.9월부터 시즌성 테마파크 70%, 가족용 엔터테인먼트 센터 100%로 자국인 고용 비율을 인상하는 등, 지속적인 자국민 의무
고용 강화 정책으로 인한 외국인 일자리 비율이 점차 감소할 것으로 예상
- 최근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동반한 가족에 대해 적지 않은 금액의 체류세를 부과하여, 외국인 가족이 재정부담으로 인해
상당수 출국하는 상황
1. 고대·중세
가. 이슬람의 고향, 사우디아라비아의 기원
•아랍 민족의 발상지는 중앙아라비아와 북아라비아이며, 사우디 아라비아 동부에는 기원전 4000~5000년 전에 이라크 남부에서
이주한 부족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
- 기원전 약 500년경 나바트인(Nabateans)들이 메데인 살레(Madain Saleh, 사우디 타북(Tabuk) 남쪽 160km 지점)를 주요 거점으로 기원후 1세기까지 아라비아 반도 북부를 통치
•고대부터 홍해 연안 대상로를 따라 대상인(Caravan)을 상대하는 정착 도시가 활성화되었고, 예언자 모하메드가 메디나를 근거지로 7세기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면서 사우디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
- 609년 메카에 거주하던 꾸라이쉬(Quraysh) 家의 모하메드가 알라(Allah)의 계시를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전달받아 612년부터 알라를 유일신으로 설교하면서 이슬람을 전파하기 시작
- 622년 모하메드가 메카에서의 박해를 피해 추종자들과 메디나로 옮긴 것을 히즈라(Hijra, 또는 Hijrah)라고 하며, 이 해를 이슬람의 원년으로 선포. 아랍어에서 Hijra는 “a severing or ties of kinship or association”을 의미
- 예를 들어 2023.9.1.은 히즈라력으로 Safar 16, 1445 AH, Safar는 히즈라력으로 연중 두 번째 달. 히즈라력의 첫날은 그레고리력의 622. 7.16. CE.
나. 중세 정치 약사
•570 메카에서 모하메드 탄생
•622 모하메드, 메카에서 메디나로 본거지 이주 (히즈라 원년)
•632 모하메드, 메디나에서 사망, 초대 칼리파 아부바크르 취임
•634 제2대 칼리파 오마르 취임
•644 오마르 피살, 제3대 칼리파 오스만 취임
•656 오스만 피살, 제4대 칼리파 알리(모하메드 사촌이자 사위) 취임
•661 알리 피살, 우마위야 왕조(Umayyad Caliphate: 661~750 CE) 시작
•711 이슬람군, 북아프리카 및 인도 서북 지역 정복
•750 우마위야 왕조 패망, 압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 750~1517) 시작
2. 근 대
가. 사우디 제1왕국(1727~1818)
•사우디 정부는 2022년 사우디 제1왕국 건국일을 기존의 1744년에서 1727.2.22.로 해석 발표
•1744년 사우디 중부 나즈드 지역(수도 리야드 주변)의 통치자 모하메드 빈 사우드(1726~1765)는 엄격한 종교 생활을 주장한 이슬람 종교학자 모하메드 빈 압둘와합(1703~1792)을 받아들여 제휴하고, 초기 이슬람 시대로 돌아가자는 원리주의를 대의명분으로 사우디 왕국을 확장
- 부족 지도자인 모하메드 빈 사우드가 와하비즘을 기반으로 제정 일치의 신정 체제를 지향하고, 이러한 종교와 정치의 결합을
바탕으로 아라비아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
초기 약 40년 동안 사우드가의 영토는 디리야(Diriyah) 근처에 한정되었지만, 1780년대부터 사우드가의 군대가 아라비아 반도를 정복, 성지(聖地)인 메카(1801), 메디나(1805) 및 헤자즈 지역의 지배권을 획득하면서 아라비아 반도의 부족들을 통합
- 그러자 당시 아라비아 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이 위협을 느끼고, 이집트에 파견된 총독 모하메드 알리에게
성지 메카 탈환을 지시해 1811년 이집트 군대가 디리야로 진군
- 7년간의 전쟁 끝에 사우드 왕국은 영토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수도 디리야도 완전히 파괴되면서, 1818년 알 사우드 가문의 아라비아 반도 통치 종식
와하비즘
•18세기 중엽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현한 이슬람 복고주의 운동이자 사회·정치 운동으로 사우디 왕국 건국이념의 기초이자, 근대 이슬람 부흥운동의 효시로, 제창자인 압둘와합의 이름을 따서 서방이 ‘와하비즘(Wahhabism)’이라 명명한 것이며, 당사자들은 이러한 용어를 거부
•압둘와합은 이슬람 4대 학파 중 하나인 한발리 학파(Hanbali School)에 기초하여 오로지 이슬람의 근본인 꾸란과 순나에 따른 정통 이슬람 사회를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 기독교의 마틴 루터의 16세기 개혁 주장과 취지가 일부 유사
•운동의 확산을 위해 사우디 왕조와 연합했으므로, 사우디 역사에서 왕정 체제 정당성의 기반이 되는 사상으로서도 기능
나. 사우디 제2왕국(Emirate of Najd, 1818~1891)
•살아남은 사우디 왕가 구성원들과 와하비즘 추종자들(Wahhabis)의 지도력을 물려받게 된 투르키 빈 압둘라 빈 모하메드(1755~1834)는 디리야가 함락되자마자 사막으로 도망쳐 나와 유랑 생활을 하며 세력을 확대
•1843년 파이살 이븐 투르키가 ‘나즈드 토후국(Emirate)’이라고도 불리는 사우디 제2 왕국의 기반을 구축
- 19세기 접어들어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이 약화된 틈을 타 영토와 세력을 확장
- 제2왕국은 제1왕국에 비해 영토도 좁고 극단적인 종교 활동(성지 파괴 등)을 하지 않아 외부의 반감을 사지는 않았으나, 약 70년
동안 통치자(이맘)가 총 14번 바뀌는 등 알 사우드 가문 내 분쟁과 갈등이 지속
•오스만 제국이 사우드 부족의 오랜 경쟁자인 하일(Hail) 지역의 알 라쉬드(Al Rashid) 부족을 지원하여, 알 사우드 가문은 알 라쉬드 가문과의 전쟁에서 패배
- 결국 알 사우드 가문은 쿠웨이트로 망명
다. 사우디 제3왕국(1902~현재) 초대 국왕, 이븐 사우드
•제2왕국이멸망하면서쿠웨이트로망명한마지막이맘압둘라흐만의 아들 압둘아지즈 빈 압둘라흐만 알 사우드(Abdulaziz bin Abdulrahman Al Saud)는 1902년 26세의 나이로 63명의 동지들과 함께 리야드의 마스막 성(Masmak Fortress)에 진입, 제3 사우디 왕국(Kingdom of Saudi Arabia) 건국의 기반을 마련
- 1902.1.13. 새벽 압둘아지즈와 그 군사들은 마스막 성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 귀가하려던 이븐 아즐란을 습격하여 성내로 쫓아들어가 죽이고 알 사우드가의 귀환을 천명
- 소수 병력만으로 리야드 전투(Battle of Riyadh)라 불리는 쟁탈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라마단 기간 중 야간 식사와
단식이 시작되는 즈음의 느슨한 분위기를 노렸던 것이 주효했다는 게 전반적인 평가
•압둘아지즈는 제1왕국 건국 당시 대의명분이었던 와하비즘의 기치 하에 30년간 각지의 부족들과 전쟁 또는 연대의 과정을 거쳐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 서방에서는 그의 이름을 ‘이븐 사우드(Ibn Saud)’로 통용
- 1925년 메카와 메디나가 포함된 헤자즈 지역을 통치하던 샤리프 하심(Hashim) 가문을 축출하면서 명실상부 아랍·이슬람 세계의
주요 지도자가 되는 계기 마련
- 1927년 젯다 조약으로 영국의 국가 승인을 획득해 1932. 9.23. 국명을 ‘사우디아라비아왕국’으로 선포
•이븐 사우드라고 불리는 초대 국왕은 1953년 사망하기까지 사우디 왕국을 통치했으며, 22명의 아내와 45명의 아들(이중 36명이 장성)을 둠
근대 정치 약사
•1727 사우디 제1왕국 건국
•1744 모하메드 빈 사우드는 모하메드 빈 압둘와합의 망명을 받아들이고 제휴하여 정통 이슬람 원리에 입각한 사회
개혁운동을통해사우디제1왕국의기반을강화및확장
•1811~1818 모하메드알리이집트총독,사우드-압둘와합세력진압
•1843~1865 파이살 이븐 투르키가 제2사우디 왕국의 기반을 구축하였으나, 1865년 파이살 사후 내분으로 급격히 세력
약화
•1890 하일 지역의 알 라시드가(알 사우드가의 라이벌)가 오스만 제국의 지원 하에 리야드 점령
•1902 건국의 아버지 이븐 사우드가 리야드 탈환
•1917 이븐 사우드는 자신을 나즈드의 술탄으로 선언
•1924 메카 점령
•1925 젯다 점령
•1926 이븐 사우드, 헤자즈 왕국 선포
•1927 젯다 조약으로 영국의 승인 획득
•1929 이크완(Ikhwan) 반란군 진압
•1932 나즈드 및 헤자즈를 통합, 국명을 ‘사우디아라비아왕국 (Kingdom of Saudi Arabia)’으로 개칭
•1938 미국 회사(CASOC : California-Arabian Standard Oil Co.)가 동부 지역(Dhahran)에서 석유 생산에 성공(유전 이름 :
Dammam No.7)
•1945 아랍연맹 및 국제연합(UN) 가입(원 가맹국)
3. 현 대
가. 「사우드」 2대 국왕, 「파이살」 3대 국왕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의 건립자인 압둘아지즈 국왕이 1953년 사망하자, 그의 45명의 아들 중 둘째 아들(생존하는 최고령의 아들)이자 그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 사우드가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초대 국왕의 아들들이 형제들 간에 왕위를 승계하는 시대 시작
- 그러나 사우드 국왕의 무능과 파이살 왕세제(이후 3대 국왕) 로의 권한 이양을 둘러싸고 왕가 내부 분열
- 1964.10월 파이살 왕세제와 그의 편에 선 압둘라 왕자(당시 국가방위군 사령관, 이후 6대 국왕)가 이끄는 국가방위군이 사우드 왕의 궁궐을 포위하여 퇴위 압력을 가하였고, 결국 1964.11월 사우드 왕은 파이살 왕세제에게 양위
- 폐위당한 사우드 왕은 소련과 가까웠던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의 보호를 받으며 복위를 꿈꾸었으나 실패하고, 파이살 왕세제가 왕위 계승
1953년 행정 포고령(Royal Decree) 발표)
•왕정 체제가 정착됨에 따라 사우디는 현대 국가들이 관심을 갖는 조세·국경 문제 등에 대해 행정 포고령으로 유사 헌법 체제(Quasi-constitutional system)를 만들어 적용
- 모든 공법은 꾸란과 순나 내에서 정당성을 지니는 것으로 간주하며, 지금까지 샤리아가 사우디 법 체계의 근간
•1953년 포고령이 발표되면서 각료회의(Council of Ministers) 창설, 1950~1960년대 대규모 정부 조직 개편
- 통신·교육·농업·보건·상무·공업 분야 등 20개 정부 부처 신설
- 제도적으로 국왕의 정책 결정은 각료회의 의결에 근거해야 함.
•국왕이 모든 사항을 결정하는 기존의 전통 체제에서 정치권력의 권한을 일부 제한하는 제도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
•사우디아라비아의 근대적인 정치체제는 파이살 국왕 재위 기간에 수립 되고 조직
- 건국 초기, 압둘아지즈 초대 국왕 통치 기간까지도 사우디왕국은 현대적 의미의 행정제도와 중앙집권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전통 이슬람 사회
- 파이살 국왕은 대내적으로 기본법 및 지방통치 규정 제정, 사법기구 설립, 경제개발 추진, 사회보장제도 실현 등을 추구하여 제도적 측면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근대화를 이룩
- 대외적으로는 인접한 아랍 국가들과의 유대를 강화하면서 사우디의 국제적 지위 향상에 공헌하였으며, 특히 제3차 중동전쟁(1967)을 계기로 1973년 OPEC의 석유 금수 조치 주도
나. 「칼리드」 4대 국왕, 「파흐드」 5대 국왕
•1975.3월 파이살 국왕이 조카에게 암살당하자, 이복동생 칼리드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국정에 열중하지 않았고 1982.6월 심장병으로 사망함에 따라 그의 이복동생 파흐드 왕자가 제5대 국왕으로 추대
•파흐드 국왕은 이슬람 수호자로서 대내외적 위상을 강조하기 위해 1986년 사우디 국왕으로서는 최초로 ‘두 성지의 수호자(Custodian of the Two Holy Mosques)’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동 칭호는 신조어가 아니며, 역사 속에서 1517년 이래 다수의 이슬람 통치자들이 사용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사우디 동부 지역 시아파 반정부 시위 및 메카의 이슬람 대사원 점령 사건 등 사우디 왕정에 대한 불만이 조직적으로 나타나자, 파흐드 국왕은 현 왕정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1992.3월 사우디의 정부 체계, 국정자문회의(Majlis Al Shura) 및 지방 행정 등을 규정한 통치기본법(Basic Law of Governance – 83개 조항) 제정에 관한 칙령을 공포
- 사우디 정부는 왕정 체제가 정통성을 갖는 최상의 체제임을 강조함으로써 왕정에 대한 변화 요구와 도전을 사전에 차단하고, 1992년 기본법(Basic Law)에 근거한 국왕 칙령을 통해 부자 간 왕위 계승을 허용함으로써, 왕위 계승 방법을 확대
이란 이슬람 혁명과 사우디아라비아
•이란의 이슬람 혁명
- (요약) 1979.2월팔레비왕조의왕정체제를무너뜨리고이슬람성직자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지도하에 이슬람 공화제 체제를 수립한 혁명
- (배경) 친미 노선의 팔레비 왕조는 대외적으로 이란을 OPEC 및 중동 지역의 주도적 국가로 성장시키고, 대내적으로 백색 혁명(1963) 등의 개혁 조치를 단행하였으나 부패 탈피에 실패하고, 국민 대다수는 친미 노선을 비굴한 외세 의존으로 이해, 이슬람 성직자들의 반발을 사는 등 1970 년대 후반 이란 내 대규모 반정부 시위 발생
- (결과) 이란 역사상 최초로 민중봉기를 통해 지도자 교체 및 종교지도자가 최고 지도자가 되고, 선출된 지도자는 그의 지도를 받는 이슬람공화국 수립
•1979년 사우디 동부 시아파 반정부 시위와 메카 이슬람 사원 점령 사건
- 유전 지대가 밀집해 있는 사우디 동부 지역에 집중 거주하는 시아파의 반정부 시위와 수백 명의 원리주의 광신도들의 메카 이슬람 대사원 점령 사건 발생
- 이란에서 발생한 이슬람 혁명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정 체제를 이스라엘 및 미국과 함께 타도 대상으로 삼았으며, 사우디-이란 간 긴장 관계 조성에 장기간 기여
다. 「압둘라」 6대 국왕, 「살만」 7대 국왕
•2005년 파흐드 국왕 서거로 취임한 압둘라 국왕은 10년간의 집권 기간 동안 2008년 금융위기와 2011년 ‘아랍의 봄’ 여파를 겪으면서도▲왕실 계파 간 화해 ▲점진적인 정치·경제 개혁 ▲왕실 후계 구도의 신중한 접근 ▲미국 등 서방, 아시아 및 아랍·이슬람 국가와의 관계 강화를 통해 안정 속의 변화를 추진
- 2011년 압둘라 국왕은 여성을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포함시키고, 2015년에는 실제 참정권을 부여하겠다는 성명 발표
- 아울러 2005년 조지 부시 대통령과의 합의에 따라 ‘킹 압둘라 장학제도’를 만들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유학 보내기 시작, 사우디
젊은층의 서방 접촉, 특히 미국과의 접촉을 획기적으로 확대하고,교육 수준 향상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
• 2015.1.23. 압둘라 국왕 서거 후 살만 왕세제가 제7대 국왕으로 즉위
- 2017.6월, 살만 국왕은 자신의 여섯 번째 아들이자 세 번째 부인의 장남인 모하메드 빈 살만을 왕세자로 임명
사우디 세제개혁 및 부가세 3배 인상 조치(2020.7월)
• 2017.6월부터는 개별소비세(Selective Tax)를 실시하여 담배와 에너지 음료에 100%, 탄산음료에 50%의 세율을 부과
- 2017.7월에는 외국인 근로자 부담금(Expat Fee)을 도입해 점진적으로 상향 조정
- 2020.7월 개별 외국인 근로자는 부양가족 1인당 매달 400리얄(약 106불)을 부담하며, 사우디 내 활동 기업 역시 외국인 근로자 1인당 매달 800리얄(약 213불)을 부담
• 부가세는 기존 5%에서 2020.7월부로 15%로 인상
- 사우디는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비석유 부문의 수입을 증대시키려는 「사우디 비전 2030」 정책에 따라 2018.1월 GCC 6개 회원국 중 (UAE와 더불어) 가장 먼저 부가세 5% 시스템을 도입했으며,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피해, 정부 재정적자 심화로 수입원이 감소함에 따라 2020.7월부로 부가세 3배 인상(15%)을 단행
• 부가세 3배 인상 조치는 당시 심각한 수준의 저유가 및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로 이중 경제적 충격으로 받은 사우디가 정부 수입 보존을 목적으로 취한 조치로, 동 조치는 심각한 소비자물가 인플레이션을 야기해 최종 소비자들인 일반 시민들의 부담을 크게 가중시킴
- 동 조치는 발효 직후인 2020.7월부터 소비자물가지수(CPI) 급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바, 2020.7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기 대비 6.1% 상승해 VAT 발효 전인 6월 상승률 0.5%와 급격한 대비를 보여주었으며, 발효 후인 2020년 3/4분기에는 소비자물가가 전년 동기 대비 6.0%, 전기 대비 5.7% 급등했으며, 2020년 전체로 보면 전년도 물가상승률 -0.2% 대비 5.3% 라는 이례적으로 높은 물가상승률을 기록
신재생에너지 및 수소 사업 동향
1) 신재생에너지 동향
•「국가 혁신 프로그램 2020」과 연계되는 「사우디 비전 2030」에 따른 에너지 목표 달성을 위하여 국가신재생에너지프로그램(NREP : National Renewable Energy Program)을 수립했으며, 2024년 27.3GW 및 2030년 58.7GW의 전력을 확보한다는 계획
- 신재생 발전 목표(58.7GW)는 40GW의 태양광발전(PV), 16GW의 풍력발전, 2.7GW의 집광형 태양열발전 CSP: Concentrated Solar Power) 으로 구성
- 2030년까지 연간 에너지 수요의 50%를 재생에너지로 충족하여 17,500만 톤의 이산화탄소와 같은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및 하루 100만 배럴의 원유 절약 효과
•사우디 정부는 「사우디 비전 2030」의 신재생 분야 추진 계획에 따라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프로젝트에 약 1,010억 불, 및 송·배전 사업에 379억 불 투자 계획
- 향후 발주되는 신재생 사업의 30%는 재무부 산하 SPPC(Saudi Power Procurement Company) 주도 경쟁입찰 방식으로, 70%는 사우디 국부펀드(PIF)가 개발자와 직접협상 방식으로 시행할 예정
2) 수소 사업 동향
■ 수소 정책
• (수소 정책) 사우디는 재생에너지 기반의 그린수소 생산 개발 외에도 천연가스 기반의 블루수소 생산에 강점을 가지고 있어
포스트 화석연료 시대의 주요 대안으로 수소 정책 추진
- 광대한 국토와 풍부한 태양광(국토 80% 이상이 사막 지형)을 바탕으로 높은 그린수소 생산 잠재력 및 가스전과 연계한 블루수소생산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적어도 2030년까지 화석연료 기반의 블루수소 생산 비용이 재생에너지원 기반의 그린수소
생산 비용보다 저렴할 것으로 예상
• (강점) 사우디는 청정수소 생산에 잠재성이 높은 국가 중 하나로, 가격경쟁력 있는 청정수소를 생산할 수 있는 자원(천연가스·재생 에너지), 기술(석유가스 경험, 화학 생산 시설) 및 인프라(수소 생산 허브, 수송 네트워크) 보유
- (자원) 사우디는 청정수소 생산에 활용할 수 있는 ▲6조 큐빅미터(CBM)의 천연가스 매장량(세계 8위 규모)뿐만 아니라 풍부한
태양력·풍력 등 재생에너지원 보유
- (기술) 사우디의 청정수소 생산 역량은 25기가톤(Gt)의 이산화탄소 저장 능력, 석유·가스 부문의 수십 년간 축적된
경험 및 세계적 수준의 화학 생산 시설 보유
- (인프라) 주베일·얀부 왕실위원회(RCJY)는 산업도시 내에 수소 전용 수송관 네트워크를 구축 중이며, 첫 네트워크는 2020년
얀부 산업도시에서 운영 중
• (그린수소) 향후 테크놀로지와 그린에너지의 글로벌 허브로 계획한 미래도시 네옴(Neom)은 사우디 수소 에코시스템의 주요한
부문이 될 전망
- 2020년 네옴-Air Products(미국 화학회사)-ACWA Power(사우디 민간기업)는 3자 공동으로 총 50억 불을 투자하여 네옴에 세계
최대 규모의 그린수소 생산 시설을 건설하는 조인트벤처(JV)에 합의해 Neom Green Hydrogen Company(NGHC)을 설립
했으며, 추가로 20억 불을 인프라(예 : 산업용 차량, 공공버스)에도 투자할 예정
- 동 시설에서 2025년부터 하루 650톤의 그린수소 및 연간 120만 톤의 그린 암모니아를 생산할 계획이며. 운송의 경제성을 고려
하여 사우디에서 생산된 그린수소는 암모니아 형태로 전환되어 미국, 유럽 및 아시아 등 해외시장으로 수출할 계획
※ 2023.5월 동 사업의 금융 종결이 이루어짐에 따라 수소플랜트 건설이 가시화되고 있으며, Air Products사와 향후 30년간 생산된 그린 암모니아를 off-take하기로 하는 내용의 협약 체결
• (블루수소) 매장량 약 60조m3의 대규모 가스전인 자프라(Jafurah) 가스전(약 1,100억 불에 달하는 대규모 투자를 추진 중)을 활용한 블루수소 생산 추진 중
- 아람코는 2030년까지 최대 연 1,100만 톤의 블루암모니아 생산목표 하에 탄소 포집 및 수소 사업 개발에 매진
- 아람코는 2020.9월 블루수소 파일럿 프로젝트(일본 경제산업성 (METI)의 지원, 사우디 SABIC 및 일본 에너지경제연구소(IEE)와의 파트너십 하에 진행)로 세계 최초로 약 40톤의 블루암모니아 운송(사우디→일본) 실험 실시
• (국제협력) 일본·독일 등 잠재 수소 수요국들과 주요 협력 추진
- (일본) 2020.9월 세계 최초의 블루암모니아 수출 파일럿 프로젝트 이후 꾸준히 일본과 수소에너지 사업에 관한 교류 중으로 수소에너지 인프라 구축과 수소 공급망 확대를 꾀하는 일본은 수소 공급망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 중
- (독일) 사우디 에너지부는 2021.3월 독일 연방경제에너지부와 사우디-독일 양국 간 에너지 협력사업의 일환으로 그린수소
관련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는데, 동 MoU는 유럽 최대의 경제 규모 및 선진기술 보유국과 중동 최대의 에너지 수출국 간 향후 에너지 협력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긍정적 평가를 받음
■ 사우디의 과제
• (시장 참여) 사우디는 호주처럼 수소 생산의 국내 소비보다 해외 수출에 대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만큼 국제수소경제파트너십
(IPHE) 참여 고려
• (국가 정책) 사우디는 수소 관련 대규모 데모(demo) 프로젝트들을 활성화하고, 수소 프로젝트의 다양한 업무들을 조율할 수 있는
‘수소 부문에 특화된, 구체적 정책’ 수립 필요
• (블루수소) 사우디는 블루수소 생산 규모를 한 단계 높이기 위해 CCUS(Carbon Capture, Utilization & Storage)의 중추와 인프라 관련 투자를 늘릴 필요가 있는데, 사우디의 블루수소 관련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탄소저장을 통한 가치 생성을 강조하고,
CCUS를 지원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 고안 필요
• (그린수소) 그린수소 생산·개발을 추진하는 데 있어 재생에너지 기반 전기설비용량(installed capacity)이 적다는 점이 걸림돌인
데다 국내 소비 및 그린수소 생산을 위해 재생에너지 기반 전기설비용량을 단기간에 엄청나게 확장(scaling up)해야 하는
난관에 직면해 있으므로, 초기 그린수소 관련 프로젝트를 이끌어 내고, 관련 인프라를 건설할 수 있도록 사우디 정부는 관련
프로젝트에 대해 단기 정부 인센티브 제공도 고려 필요
• (운송 비용) 수소의 해외 수출 시 수소 생산 비용에 더해 운송 형태별 운송 비용을 고려해야 하는바, 수소의 높은 운송 비용을
고려할 때 그린수소 기반의 최종 제품(end-products)을 수출하는 것이 사우디 국내 산업의 탈탄소화 및 탄소제한 시장인 EU
시장에서 사우디 수소의 경쟁력 향상 가능
• (수자원 확보) 수자원이 귀한 사우디에서 그린수소 생산 시 필수 과정인 수전해(electrolysis)에 필요한 수자원을 확보하고, 해수의 담수화 및 운송 과정에서 상당한 양의 탄소를 발생하는 만큼, 수소가치사슬(hydrogen value chain)의 ‘환경적 영향평가’ 관점에서 수소 생산에 필요한 수자원 계획에 대한 특별한 정책적 고려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