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 뿌리 찾기
엄영아
남편 나이 12살, 6.25 동란이 터졌다. 아버지를 따라 피난을 떠난 남편은 이천 외할머님 댁에서 2년을 보냈다.
서당에서 훈장으로부터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배우던 일, 허리에 누룽지를 차고 산에 나무를 하러 다니던 일, 논밭을 뛰어다니며 메뚜기를 잡아 볏짚에 끼워 허리춤에 매달고 오면 할머니께서 들기름과 소금을 뿌려 볶아주던 기억, 동생들을 데리고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를 빼서 소금을 뿌려 구워 먹든 일. 곤지암과 이천, 여주에서의 어릴 적 추억은 늘 남편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번 한국 여행은 외가 쪽 뿌리 찾기를 꼭 하기로 약속하였다.
서 권사님이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뿌리 찾기를 도와주고 싶다고 하여 권사님과는 경강선 판교역 여주방향 1-1에서 만나기로 했다. 우리부부는
종로3가역에서 전철을 타고 판교역에서 서권사님울 만나 다시 경강선을 타고 곤지암으로 갔다. 곤지암역에 도착하여 유명한 구일가든 소머리국밥집으로 갔다.
안개비가 오락가락한 쓸쓸한 날씨에 곤지암 소머리국밥을 먹으니 온몸이 따뜻해졌다. 국밥이 나에게 말하는 듯하다. "내가 조선의 국밥이다."라고. 뽀얀 국물도 깨끗하며 우리의 입맛에 꼭 맞았다. 맛이 아주 깔끔하고 깍두기 맛이 명품이다.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니 곤지암 거리는 짙은 안개에 싸였다. 다리 아래 넓은 개천은
물이 맑은 곳이다.
작년에 서 권사님이 친구들과 하이킹 중에 약쑥을 뜯은 곳이라고 했다. 나는 걷다가 길에서 돌 2개를 주워 남편 손바닥에 얹어주며 뿌리 찾기의 의미를 되새겼다.
외할머님 댁 이천으로 가기 위해 다시 경강선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 이천역에 내려서 택시를 잡았다. 남편이 기억하는 ‘이천 도봉리와 외할머님 성씨인 구 씨’ 오직 두 가지 정보만 있을 뿐이다.
택시 기사가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사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요. 구 씨 성을 가진 남편의 외할머님 댁을 찾고 싶은데 이천 도봉리만 알고 있어요." 기사님은 잠시 생각하다가 “도봉리 마을회관으로 가면 되겠네요” 하면서 도봉 1리 마을회관으로 갔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모이는 곳인 마을회관에서 구 씨 성을 가진 분이 있는지 물어보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그런데 하필 토요일이라 문이 닫혀있었다. 다시 도봉 2리 마을회관으로 가려고 차를 돌렸다. 그때 호박과 가지를 담은 소쿠리를 들고 길가에 서 계신 80세 정도로 보이는 할머니가 수레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가가서 할머니께 “혹시 이 근처에 구 씨 성씨를 가지신 분이 사시나요”하고 물었다. 여기서 가까운 거리라면서 선 뜻 그 집의 위치를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할머니께서 알려 준 대로 찾아 나섰다. 초입에 도로 가운데 60대 초반의 남자가 셀 폰을 보고 서 있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혹시 이 동네에 구 씨 성을 가지신 분이 사시는가요?” 하고 물어보니 그분이 경계의 눈빛으로 “무슨 일로 그러시는데요?”하고 물었다.
“우리는 미국에서 왔습니다. 핏줄을 찾기 위해 12살 때 피난 왔던 외할머니님 댁을 찾으려고 합니다”라고 하니 남편에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하여 남편이 "엄기호입니다"하니 자기도 엄 씨라고 하며 반가워했다. 남편과 얘길 나눠보니 이름 첫 자에 ‘진’ 자 돌림은 족보를 따져 먼 조카뻘 되는 친척이었다.
조카뻘 되는 친척이 어디로 전화를 건 후 우리를 데리고 갔다. 남편이 찾는 시어머님의 집안 구자경 외 8촌이라 했다. 감격스러웠다. 다 같이 집안 식구 이름을 맞추어 보니 혈육임이 확실했다. 6.25 때 메뚜기를 잡아먹으며 같이 놀던 4살 아래 동생이라 했다. 서로 세월의 주름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남편은 눈가가 젖었다. 나도 울었다.
구자경 집 안으로 들어가 구 씨, 엄 씨 그들과 우리 부부는 맞절로 기적적인 만남의 감격을 나누며 64년 전의 추억을 나누었다.
처음 시집와 문안 인사드리러 에움길로 왔던 시할머니댁. 남편 뒤를 따라 조심조심 들어섰던 싸리문은 없어지고 지금은 담장을 쌓고 대문을 만들어 놓았다. 나지막하던 초가지붕은 푸른색 기와를 올리고 집 내면은 고쳐가는 중이라 지붕 아래는 비닐로 가려놓았다. 이제는 이 집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 고치는 중이라고 했다. 내가 밟았던 마당은 흙마당 그대로였지만 마당 가운데 서 있던 감나무는 없었다. 감으로도 맛있고, 곶감으로도 맛있고 차로도 맛있던 그 감나무도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방문만 열고 내다보시던 팔순 되신 할머니. 싸리문 사이로 들어오던 손자며느리를 손을 흔들며 반기시던 모습이 손사이로 구름을 붙잡은 것 같아 보였다.
우리가 대청마루로 올라가니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방 밖을 나오셨다. 큰절을 올리니 내 손을 붙드시고 "앵두 같은 입술, 반달 같은 눈썹"하시며 춤을 덩실덩실 추시던 모습이 기억나서 그리움에 또 한 번 눈물이 솟구쳤다.
집터 위에 핀 노란색, 분홍색 들꽃이 고즈넉하고 애잔하다.
방 한 곳은 벼를 추수하여 방바닥에 가득 널어놓았다. 마당의 흙을 집어 남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감격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천으로 뿌리 찾기의 장소 선택에서부터 곤지암을 들린 거, 이천역에서 만난 택시기사님, 도봉리 1리 마을회관 앞길에서 만난 할머니, 구자경 집 초입 길 가운데 서 있던 조카뻘 되는 엄진용이 보통 때는 한 번도 길거리에 나오지 않는다는데 그날은 아들이 온다고 해서 나왔다고 말했을 때 우리는 소름이 끼쳤다.
뿌리 찾기의 과정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넓고 막막한 도시로 변한 시골 아닌 시골, 이천 땅에서 만남의 준비가 미리 각본을 짜놓은 것처럼, 가는 곳곳마다 완벽하게 계획된 사람들을 예비해 놓으신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올 때의 그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퍼즐 맞추듯 단 한 번에 핏줄과 터를 찾은 영화에서나 보던 기적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벌어졌다.
그것도 단 한 번에.
(10/14/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