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를 공부하시는 분들 가운데,
무상[無常]을 절대적인 진리, 즉 진제로 알고 계신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완전한 잘못 알고 있는 것 입니다.
무상[無常]이 정말로 절대적인 진리, 즉 진제라면
그 무엇에도 적용되어져야 하고,
또 당연히 열반에도 무상[無常]이 적용되어져야만 합니다.
만약 열반에 무상[無常]이 적용된다면 어떤 상황이 될까요?
열반이 고통이 됩니다.
왜냐면, 열반이 무상하기에 변하므로 고통이 되어야만 하지요.
이렇게 된다면, 열반이 열반이 아닌게 되어버립니다.
이런 오류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하지요.
그래서 무상[無常]은 속제이지, 진제가 아닙니다.
불교 공부를 할 때,
사성제를 배울 때 반드시 진제와 속제, 즉 진속이제를 같이 배워야 합니다.
진속이제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불경을 본다면,
결코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게 불가능하게 됩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크게 진제와 속제의 측면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진제와 속제, 즉 진속이제를 모르시는 분들은 반드시 제대로 배우셔야만 합니다.
진속이제는 니까야와 대승경전, 둘 다에 나오는 아주 중요한 용어입니다.
대지도론의 내용을 바탕으로,
무상[無常]이 왜 절대적인 진리, 즉 진제가 아닌지에 대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영원함[常]에 집착하는 전도된 중생은 모든 법이 비슷하게 상속(相續)함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이 무상(無常)을 관한다면 이는 대치실단은 될지언정
제일의실단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체법은 자성(自性)이 공하기 때문이다.
게송에 이런 것이 있다.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고 보면
이것을 뒤바뀜[顚倒]이라 한다.
공한 가운데는 무상도 없거니
어디에서 항상함이 있음을 보랴.
- 대지도론/구마라즙 한역/김성구 번역/동국역경원
항상[常]과 무상[無常]은 서로 대치되는 대치법입니다.
그래서 대치실단이라는 용어가 위에 나옵니다.
이렇듯 상대적인 것에서의 진리를 속제라고 부릅니다.
또는 세속제라고도 합니다.
왜냐면, 이 세속에서 적용되는 진리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속의 그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대치되는게 있다는 얘기지요.
달라이라마께서는 이 속제를 설명하시길,
중생들 수준에서의 진리다......라고 하셨습니다. 결코 진정한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속제 그 자체로는 결코 해탈이 불가능합니다.
위에서 용수보살께서 말씀하셨듯이,
무상[無常]은 대치실단, 즉 속제는 될지언정 제일의실단 즉 진제는 되지 못합니다.
왜냐면, 그 모든 것들은 인연화합에 의해서 생겨났고,
그러므로 그 모든 것들 자체에는 어떤 실체가 없어서 텅 빈 공[空]이기 때문입니다.
공[空]이 곧 진제입니다. 절대적인 진리, 진실한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해탈이란 무상[無常] 그 자체로 하는게 아니고,
공[空]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삼해탈문의 첫째가 바로 공해탈문입니다.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고 보면
이것을 뒤바뀜[顚倒]이라 한다.
공한 가운데는 무상도 없거니
어디에서 항상함이 있음을 보랴.
위에 게송의 내용이 아주 중요합니다.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전도된 것입니다만,
다만 속제에서만 해당될 뿐이지, 진제에서는 결코 적용이 안됩니다.
그래서 공 가운데는 무상도 없고 항상도 없다라고 하셨죠.
이걸 이해하는게 아주 중요합니다.
공 그 자체에는 무상도 없고, 또 항상도 없습니다.
왜냐면 무상하다고 따지거나 또는 항상하다고 따질만한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뭘 따질만한것 자체가 없는게 공이지요.
그래서 적멸이고, 공이 곧 열반입니다.
그러니 공은 곧 진제이고, 진제 그 자체엔 따질만한 것 자체가 없으니,
무상이 결코 적용될 수 없습니다. 또 항상도 적용될 수조차 없지요.
마치 하늘이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거나를 따진다면 그건 바보짓입니다.
하늘은 텅비어 있는데, 항상하거나 무상할게 그 어디에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무상[無常]이 열반/공에는 결코 적용이 안되는 속제입니다.
결코 진정한 진리인 진제가 될 수 없지요.
진제인 공은 그 무엇이나 다 적용됩니다. 오류가 없습니다.
왜냐면, 이 세상 온 우주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은 다 인연화합에 의해 생겼고,
그로 인해 존재와 사물등을 포함한 그 모든 것들엔 실체가 없어서 공합니다.
일체가 다 공해서 <일체개공>입니다. 또 <제법개공>입니다.
진정한 진리, 즉 진제는 공/열반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다양한 용어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다시 발췌해보면, 아래의 내용입니다.
온갖 것의 진실한 성품이 무상하다면 행업(行業)의 과보(報)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상을 생멸이라 부르는 허물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썩은 종자는 열매를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즉 행업이 없을 것이요, 행업이 없으면 어떻게 과보가 있겠는가?
지금 온갖 성현의 가르침에 과보가 있음을 착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믿어 받드는 바이니,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이런 까닭에 모든 법은 무상의 성품이 아니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인연 때문에 모든 법이 무상의 성품이라고말할 수는 없다.
곧 일체의 유위법이 무상하며, 고(苦) 무아(無我)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모습을 대치실단이라 부른다.
- 출처 : 상동
위의 내용을 풀이해보겠습니다.
일체 그 모든 것들의 성품/본성이 무상[無常]하다면,
신구의 삼행의 업의 과보도 역시 없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상[無常]하기 때문입니다.
무상[無常]이라는 것은 단멸론입니다. 항상함은 상주론에 해당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과응보를 말씀하셨고,
중생이 현생에 죄를 지으면 내생에 그 과보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근데 무상[無常]하다면, 뒤에 이어지는게 결코 없게 되니까 과보를 못받게 됩니다.
이런 치명적인 오류가 있는게 바로 무상[無常]입니다.
무상[無常]은 단멸론이라,
죽으면 끝이란 얘기고 곧 윤회도 없고 과보도 없다는 의미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무상/고/무아는 속제이지, 진제가 결코 아닙니다.
무상/고/무아는 상대적인 진리, 즉 속제입니다.
그럼 왜 부처님께서는 속제와 진제로 나눠서 말씀하셨을까요?
그것도 반드시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불자라면,
반드시 진속 이제를 제대로 명확하게 알아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