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03. 15
단점도 제법 있었지만 '타격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거창한 훈장으로 티 나지 않게 덮을 수 있었던, 그래서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무려 5년동안이나 포수부문 골든글러브를 독점했던 이만수야말로 한국프로야구사 최고의 포수 계보에서 단연 첫 자리의 주인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최고의 포수 이만수가 조금씩 지명타자로, 혹은 대타요원으로 밀려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으로부터 김동수라는 또 하나의 걸출한 포수가 홈플레이트를 지배했던 1990년대 중반 사이를 주름잡았던 한국 최고의 포수로 장채근을 떠올리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해태 타이거즈 무적시대를 열며 해마다 시즌을 마무리하는 포옹을 독점했던 것이 장채근이었다는 '기억'을 떠올려도 그렇고, 88, 91, 92년 세 번이나 포수부문 골든글러브를 독차지했다는 '기록'에 비추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좀더 깊은 눈으로 돌아보자면 절대 그냥 스쳐지나갈 수 없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바로 태평양 돌핀스의 안방마님 김동기다.
▲ 태평양 돌핀스 김동기 선수 / ⓒ 한국야구위원회
나란히 1986년에 프로에 입문한 김동기와 장채근, 두 선수 중에서 먼저 한 발 앞서나갔던 것은 김동기였다. 2년차였던 87년 장명부와 함께 '83년의 기적'을 일구었던 선배포수 김진우가 갑작스레 이탈하는 통에 주전으로 긴급 수혈된 김동기는 그 해 0.277의 만만치 않은 타율로 최약체팀 청보 핀토스의 중심타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8년, 그는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 해 김동기는 개막초반 1승 13패로 허우적거리며 패전에 관한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의 기록을 갈아 치울 기세였던 신생팀 태평양 돌핀스 타선에서 고군분투하면서도 전기리그에만 10개의 홈런, 그리고 무려 0.379의 기록적인 타율로 타격선두에 나서는 활약을 선보였다.
데뷔 후 두 해 동안 출장기회도 채 잡지 못하면서 2할에도 못미치는 타율에 허덕이던 장채근이 '차라리 트레이드를 시켜달라'며 볼멘소리를 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 해 초반 타이거즈의 주전포수 김무종이 손가락이 뒤로 꺾이는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주전으로 진입해서 전기동안 6개의 '뜬금포'를 터뜨리기도 했지만, 2할대 초반에 머무르는 타율로 보나 아직 엉성하던 투수리드로 보나 '대안이 없어 못 자르는' 선수에 불과할 뿐이었다.
@BRI@그러나 두 선수의 운명은 그 해 후반기에 갈라졌다. 후기리그가 한창이던 8월 12일, MBC 청룡 전에서 기습번트를 시도하고 1루로 달리다가 발목이 접질리며 쓰러진 김동기는 발목 인대 부상 판정을 받고 그대로 시즌을 마감해야 했고, 0.358이라는 압도적인 타율에도 불구하고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한 '비공인' 타격왕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장채근은 9월 4일 대구에서 삼성을 상대로 3연타석 홈런을 터뜨리는 등 후기리그에만 무려 20개의 타구를 담장 밖으로 날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30개를 기록한 팀 선배 김성한에 이어 26개로 홈런부문 2위였다.
그 해 가을, 김동기가 눈앞의 타격왕도 놓친 채 무려 7.5경기 차이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꼴찌로 내쳐진 팀의 처지에 한숨을 흘리는 동안 장채근은 전후기 동시 1위를 차지한 압도적인 팀의 전력을 등에 업고 한국시리즈 우승의 순간을 만끽했을 뿐만 아니라, 이만수가 5년 동안이나 내놓지 않고 있던 포수부문 골든글러브를 빼앗아오는 감격을 즐길 수 있었다.
그 다음 해도, 또 그 다음 해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장채근은 우승의 순간을 상징하는 얼굴이었고, 김동기는 고전과 불운과 난감함을 상징하는 얼굴이었다. 장채근은 세 번이나 우승을 결정짓는 공을 직접 받아냈고, 또 세 번이나 골든글러브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데뷔 해에서부터 은퇴할 때까지 함께 뛰었던 열 한 해 동안 단 한 시즌도 장채근보다 낮은 타율을 기록한 적이 없었고, 세 번만 빼고는 항상 홈런도 많이 때려냈던 김동기는 잊혀진 이름이 되어갔다.
두 선수 모두 포수로서의 특기는 '투수리드'로 꼽힌다. 그러나 '노지심'이라고 불렸던 거대한 체격의 장채근이 투수를 푸근하게 만드는 특유의 심리적인 리드에서 특장점을 가졌던 반면, 김동기의 장점은 '볼 배합'이었다.
장채근의 팀 타이거즈 마운드는 원래 강점이 많은 투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선동열로부터 고교시절의 활약만으로는 선동열에 뒤질 게 없었던 조계현, 그리고 반대로 완전 무명의 잡초근성 송유석과 좌충우돌의 사고뭉치 김정수까지. 그래서 각자의 강점을 극대화함으로써 약점을 극복하게끔 기를 살려주었던 푸근한 장채근의 리드가 강팀 타이거즈를 최강팀 타이거즈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김동기의 팀 돌핀스는 애초에 자원이 없었다. 에이스라고 해봐야 다른 팀 3, 4선발급에 불과했을 노장들이었고, 그나마 기대를 걸 곳은 가능성 외에는 가진 것이 없는 신인들이었다. 그 가능성을 밑천삼아 살림을 해나가자면 적극적으로 볼배합을 요구하고 가르치는 것이 필요했다.
그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1989년이었다. 그 해 돌핀스는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이라는 난데없는 신인투수 트리오의 분발에 의지해 플레이오프까지 내달리는 돌풍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 김동기의 만루홈런을 보도한 당시 기사 / ⓒ 태평양 돌핀스
그 돌풍의 해 1989년, 김동기는 무려 120게임, 그러니까 그 해 팀이 치러야 했던 모든 경기에서 포수마스크를 쓰고 나서는 진기록을 만들어냈다. 그 때까지 프로야구 8년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 뒤로도 박경완과 강민호가 한 번씩 따랐을 뿐인 험한 기록이었다.
10kg 가까운 장비를 온몸에 두르고 한 경기 이백 번 안팎으로 일어섰다 앉았다 반복하다보면 웬만한 사람 실신시키기 알맞은 일이 포수노릇이다. 게다가 시속 백 사오십을 다투는 투구와 그보다도 더 빠르게 반발하는 타구가 교차하고 부딪히는 공간에 버티고 있다보면 금방 어디가 부러져도 이상할 것 없이 강타를 당하는 일이 드물지 않고, 또 그렇게 맞고도 천하에 예민한 투수들이 흔들릴까봐 아픈 내색조차 할 수 없는 것이 포수다. 그래서 한 해 내내 혼자서 그 몫을 감당한다는 것은 고단한 일이기에 앞서 잔인한 일이다.
그렇지만 앞뒤로 부족한 팀 돌핀스에는 걸출한 슈퍼스타만 없는 것이 아니라 똘똘한 백업포수조차 없었다. 사실, 아직은 백업 포수로 나서며 배워야 할 것이 많았던 시절의 김동기였다. 때로 위기의 순간에 허둥대기도 했고, 주자를 견제하는 능력도 부족했다. 그러나 그보다 나은 포수도, 그보다 나은 타자도 팀에는 없었다.
그는 실전을 준비하는 시간을 허락받지 못했기에, 실전 속에서 스스로를 키워갔다. 초기에 약점으로 지적받던 블로킹은 훈련을 통해 삼사년 안에 오히려 강점으로 바꾸어놓았고, 고질적인 약한 어깨와 굼뜬 순간동작 때문에 형편없었던 도루저지율은, 대신 '제구력'을 다듬어 보완했다. 느리고 약한 송구나마 2루 베이스 앞에 정확히 떨어뜨려 놓음으로서 도루를 하던 주자가 '자동태그'당하게끔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김경기가 합류하기 전까지 팀에서 유일하다시피 했던 붙박이 중심타자로서 2할 대 후반의 타율에 두자릿수 홈런을 꾸준히 때려내며 타선의 빈틈을 메워내는 공격의 핵이었다. 특히 그는 집중력이 대단했기에 기록으로 남은 것보다도 훨씬 존재감이 큰 타자였다.
그는 특히 선동열에 강했다. 선동열이 당대 모든 타자들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투수였음은 분명하다. 간혹 경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약점이 잡혀있던 고려대 동문 타자들에게 선동열이 약했다는 '야사'도 내려오긴 하지만, 마땅한 경쟁자도, 도전의욕도 없을 만큼 독주했던 국내무대에서 기록했던 무수한 '0점대 평균자책점'이 의미하는 것은 '맞고 싶지 않으면 맞지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런 천하의 선동열이 결정적인 순간 최대한 집중을 하고도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던 타자가 있다면 박노준과 김동기를 꼽을 수 있다. 고교무대에서의 첫 만남에서 한 경기에 결승홈런 포함 3안타를 허용하며 기를 밟혔던 박노준과는 대학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인연까지 겹치며 영 껄끄러운 상대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이해할 만도 하다. 그러나 평생 같은 배를 타본 적이 없는 김동기와의 천적관계는 불가사의한 면조차 있는 일이었다.
주전으로 올라섰던 1987년 5월 5일, 그 해의 첫 만남에서 선동열에게 4타수 3안타라는 '기적적인' 전과를 빼앗아낸 김동기는 그 해 마지막 경기였던 9월 25일에는 319.1이닝이라는, 민망스러울 정도로 엄청났던 선동열의 연속 무피홈런 기록을 끝장내버리는 홈런을 날리기도 했다. 뒷날 1993년 9회말 투아웃에 4:0으로 앞선 상황에서 경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 등판한 선동열로부터 만루홈런을 빼앗아내는 드라마를 연출했던 것도 그였다.
1987년 5월 21일, 타석의 김동기와 신경전을 벌이던 선동열이 결국 포볼을 내주던 마지막 공을 던지고는 발을 잘못 디뎌 허리부상을 입고 두 달을 허송세월해야했던 과거까지 떠올리면, 정말 두 선수 사이에 기묘한 악연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 김동기 선수 / ⓒ 태평양 돌핀스 팬북
그러나 그 이전에 김동기는 김용수나 최동원 같은 다른 대투수들 역시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을 곱게 지나가지 못하도록 달라붙는 근성의 검객이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던 1989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14회말 120미터짜리 끝내기 석 점 홈런을 날려, 혼자 14이닝을 던지고 병원으로 실려간 박정현의 투혼에 보답했던 순간에도 그랬듯이 말이다.
그는 백업멤버조차 없는 안방을 혼자 꾸려가며 신인투수들을 가르치고 이끌어간 만능포수로, 2할 5푼을 넘기는 타자조차 씨가 마른 타선에서 자존심을 세우는 적시타와 만회홈런을 날려준 간판타자로, 혹은 한 자리에서 맥주를 2만 cc나 들이부었던 주량으로 뒤풀이 자리를 이끌었던 분위기메이커로 태평양 돌핀스라는 허약한 팀을 떠받쳤다.
그리고 비록 열심히 해봐야 꼴찌 면하기가 바쁜 약팀이라지만 그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는 독한 근성으로 마지막 공 한 개를 공략해 자존심을 지켰던 선수였고, 특히 94년에는 원정경기에서 0.190에 불과했던 방망이로 홈경기에서만큼은 0.337로 달아올랐을 만큼 인천의 팬들과 함께 호흡하고 움직였던 영웅이었다.
없는 집안의 꿋꿋한 소년가장처럼 앞뒤로 팀의 빈틈을 메워냈던 인천 야구의 살림꾼으로서, 그리고 한국야구의 한 세대를 대표하는 포수로서 큰 획을 이었던 김동기. 비록 선수생활동안 단 한 개의 개인상도 챙기지 못했고, 은퇴 이후의 진로 역시 순탄치 못해 기억 속에서 멀어지고 있지만, 돌이켜 기억하고 박수를 보내줄 가치가 충분한 하나의 이름이 아닐까 한다.
김은식(punctum)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