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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최초로 담근 채소 절임은 아마 오이지였을 확률이 높다. 지금 우리가 먹는 것처럼 소금에 절인 오이지였건 아니면 서양에서 주로 먹는 식초로 절인 오이 피클이 됐건, 어쨌든 오이 절임이 최초의 저장 채소였다.
동양 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채소 절임은 중국 고대 시집인 《시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경》 〈소아편〉에 “밭두렁에 자란 오이를 깎아 절여 조상님께 바치자”라는 구절이 있다. 절인다는 표현의 한자로 김치 저(菹) 자를 썼다. 그리고 절인 채소로는 오이를 뜻하는 과(瓜)라는 한자를 썼으니 바로 오이지에 다름 아니다.
물론 정확하게 따지고 보면 지금 우리가 먹는 오이지와는 상당히 다르다. 왜냐하면 지금의 오이는 《시경》이 편찬되고 나서 훨씬 이후인 기원전 2세기 무렵에 동아시아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본초강목》에서는 한나라 때 외교관인 장건이 서역에서 오이를 가져와 퍼트렸다고 한다.
따라서 《시경》에서 절여서 조상님께 바치겠다고 한 오이는 동아시아에서 토종으로 자라는 참외 종류였을 것이다. 과일인 참외로 오이지를 담갔다고 하니까 지금은 낯설고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조선시대 말기까지만 해도 참외는 과일인 동시에 채소였으며 또 배고플 때 밥 대신 먹는 양식이었다.
《시경》에 나오는 절인 오이가 오이지인지, 혹은 오이 피클인지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 절였는지 설명이 없기 때문인데 짐작은 할 수 있다. 한나라 때 사전인 《설문해자》에 김치 저(菹)는 채소를 식초에 절인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니 《설문해자》의 풀이를 근거로 해석해보자면 《시경》의 오이지는 소금에 절인 오이지가 아니라 식초에 절인 오이 피클일 수 있다.
특히 《시경》이 편찬된 무렵인 기원전 7세기 이전이라면 내륙 지방에서는 식초보다 소금 구하기가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곡식을 발효시키면 얻을 수 있는 식초로 오이를 절이지 않았을까 싶다.
최초의 절인 채소가 오이지가 됐건 또는 오이 피클이 됐건 그것은 무려 3천 년도 넘는 먼 옛날의 이야기일 뿐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여름철 입맛 없을 때 먹는 최고의 밥반찬은 오이지였다.
지금은 계절에 관계없이 어느 음식이고 먹을 수 있으니 특별히 계절 음식의 소중함이 예전처럼 피부에 와 닿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냉장고가 귀했던 시절에는 겨울이 시작되기 전 김장을 담그는 것처럼 오이가 나올 때가 되면 집집마다 장마와 삼복더위에 대비해 오이지를 담갔다.
그런데 같은 오이지라도 예전에는 경기도 용인 오이지가 특별히 유명했던 모양이다. 담그기가 까다로운 것도 아니고 특별히 맛난 재료가 별도로 더 들어간 것도 아닌데 용인 오이지는 조선 팔도의 별미로 소문이 자자했다.
일제강점기의 문인인 최영년은 《해동죽지》에서 용인 오이지를 조선의 명물 음식으로 꼽으며 “용인에서 나오는 오이와 마늘, 파로 오이지를 담그면 부드럽고 맛이 깊을 뿐만 아니라 국물은 시원하고 단 것이 사탕수수즙에 뒤지지 않는다”며 극찬했다.
용인 오이지가 얼마나 유명했는지는 18세기 중반의 《증보산림경제》에도 기록이 보이는데 아예 다른 오이지와 구분해 용인 오이지 담그는 법을 별도로 적어놓았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소금을 묽게 탄다는 것, 반복해서 오이를 뒤집어준다는 것 이외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유독 용인 오이지가 조선 팔도의 별미로 소문이 났으니 《해동죽지》에서는 맛의 비밀이 오이에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용인 오이지는 용인군에서 나는 오이로 담그는데 수원에 살던 호사가가 용인의 오이를 수원으로 옮겨다 심은 후 오이를 따다가 오이지를 담갔지만 용인군에서 수확한 오이로 담근 오이지와는 맛이 같지 않아 괴이하게 여겼다고 기록해놓았다. 또 세종 임금이 용인, 이천, 광주 등으로 사냥을 다녔는데 길가의 시골 백성들이 더러는 푸른 오이[靑瓜]를 드리기도 하고 더러는 보리밥을 바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에 경기도 용인 일대는 이렇게 오이(참외) 특산지로 유명했으니 용인 오이지가 별미로 소문난 것 역시 재료가 좋았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지금은 명맥이 끊어진 용인 오이지의 맛이 궁금해진다.
#음식#역사일반
#음식으로읽는한국생활사
글 윤덕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