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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3_마가25_이 말을 하였으니
마가복음 7장 24~30절 “24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26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비교 : 마태복음 15장 21-28절)
할렐루야! 한주간도 건강하고 평안하셨는지요?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지금 이곳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을 배경으로 ‘이 말을 하였으니’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천냥이라는 무게로 표현한 것입니다. 천냥의 무게, 값어치가 얼마나 될까요?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천냥은 지금으로 치면 약 3억 6천만원 정도된다고 합니다.
잠언 25장 11절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는 말씀처럼 성경은 ‘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합니다. 말에는 그 사람의 ‘인격’과 ‘영혼’이 담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을 너무 가볍게하면 그 사람이 미덥지 않은 가벼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진중하면 우리는 그를 신뢰하고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집니다.
목사는 필요이상으로 말을 많이해야 하는 직분입니다. 그러다보니 말에 실수를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요즘에 저도 모르게 운전하다가 혼자서 뭐라뭐라 말을 하다가 훔칫 같이있는 사람들을 의식하기도 합니다. 운전할 때 이러지 않았는데 싶으면서도 ‘내 안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온다’는 말씀이 생각나서 지금 내 마음에 가득한 것이 무엇인가하고 되돌아볼 때가 있습니다.
내 귀에 들린 대로 너희에게 행하리니!
성경이 말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말에 ‘믿음’이 담겨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말은 곧 우리의 영혼이 어떠한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말을 하는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민수기 14장의 열두명의 이스라엘 정탐꾼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에 대한 이야기는 가장 부정적인 예화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이 이야기에서 열두명의 정탐꾼들 가운데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열명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대하여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과 원망과 분노의 말들을 쏟아놓았습니다(민14:1-3). 그들이 쏟아놓은 말들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민14: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민14:27-28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 가운데 쏟아놓은 말들은 마치 하나님이 안계시거나 무능한 분인 것처럼 하나님을 모욕하고 멸시하는 말들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쏟아놓은 말이 하나님께 들린 대로 그들에게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할 때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즘 나는 어떤 말을 많이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민수기 14장이 부정적인 예라면 오늘 본문은 긍정적인 예가 되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갈릴리 땅을 떠나서 가버나움에서 북서쪽으로 약 60km 떨어진 이방지역, 지금 레바논 땅의 두로에 가셨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멀리 이방땅까지 가셨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공적인 사역을 위해서 가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24절에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이 지역에 전해져 있었기 때문에(막3:8)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한 헬라인이며 수로보니게 족속인 어떤 여인이 자기 딸이 귀신들린 것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조금 차가운 태도로 대하셨지만 결국 그 여인의 말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7: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 말을 하였으니...”라는 말씀은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자녀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는 동기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자식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인간의 한계를 느끼다가 자녀를 위해 기도하며 예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식들의 문제를 끌어안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과정에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구한 것은 자녀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 정도의 은혜였지만 누구보다 큰 은혜를 경험합니다. 오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하는 사람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한 응답을 구하는 사람마다, 이 여인에게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말과 태도에서 나타나는 ‘큰 믿음’입니다. 이 여인이 가지고 있던 큰 믿음의 특징을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 우리도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은혜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째로 예수님만이 소망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의 수로보니게 여인은 딸이 귀신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녀의 딸은 그것으로 인하여 큰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아마도 여러가지 할 수 있는 노력들은 다 했었지만 치료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25절을 보면, 그 여인은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병행구절이 있는 마태복음 15장 22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이 여인의 고백을 들어보면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부를 때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하여 보내실 그리스도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지만 궁극적인 의미는 '인생의 모든 죄와 어둠의 문제를 해결할 분'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 이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여인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내 삶의 유일한 소망이다’라는 사실을 소문을 통해 알게 되고 '곧' 달려와서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립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다는 말과 예배하다라는 말은 같은 의미입니다.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런 그림을 그려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이 자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소문을 듣게되는 그림입니다. 예수님만이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라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에 달려옵니다. 그리고 그분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예배합니다. 우리 교회에 이와같은 은혜가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소문이 나야합니다. 어떤 소문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시다’라는 소문입니다. 예수가 우리 인생의 유일한 소망이요, 그 예수를 하늘빛교회에서 만날 수 있다는 소문입니다. 그와 같은 소문이 우리교회에 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 소문이 나기 위해서 한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외에는 이땅에 정말 소망이 없다는 확신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이 확신은 이 여인처럼 예수님께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려 하나님만을 예배하게 합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세상의 가치를 예배하는 것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예배하는 교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높이고 경배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이 여인에게서 배워야 할 믿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마가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 15장 22-26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 여인의 요청에 3번이나 거절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15:22-26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처음엔 아무리 도와달라고 해도 아무 대답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안니하시니” 침묵입니다. 나의 기도에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끼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때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 신앙의 길에서 돌아서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구체적인 반증입니다. 두번째는 제자들까지 가서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주님은 행 하실 능력이 계시니 빨리 고쳐서 돌려 보내시지요. 여인의 간구를 응답해 주십시오'라는 주의 종들의 중보기도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거절하십니다. 나의 기도를 돕기 위해 구역에서 혹은 목회자들이 함께 중보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응답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거절하시는 것 같은 말씀을 듣습니다. 어떻습니까? 더 기도하고 싶으십니까? 이 여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예수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번엔 예수님이 직접적으로 대놓고 거절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이런 모욕적인 거절을 받아 보셨습니까? 해도해도 너무하시지 어떻게 저를 개에게 비교하십니까? 너무 냉정하고 모욕적인 거절 앞에 이 여인은 절망과 신앙에 대한 회의를 품고 예수님 앞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거절이 너무 냉혹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이스라엘 땅에 있지 않으십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곳 이방인의 땅에 오신 것은 전도하고 사역하기 위함도 아니십니다. 오히려 제자들과 쉼을 갖고 제자들을 따로 훈련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사역의 우선순위가 분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땅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은 먼저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이였습니다.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잘라 말씀하시지만 이것이 사실이였습니다. 먼저는 주인의 자녀들에게 떡을 먹여서 그들을 살려내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이방여인에게 눈을 돌리실 수 없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의 빈틈이 보입니다. 그 빈틈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하나님 은혜의 부스러기’입니다.
이 여인은 그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도록 이렇게 말합니다.
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여인에게는 세번의 거절도, 모욕적인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귀신들린 어린 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믿음 가운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리는 간절함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간절함 가운데 하나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같은 은혜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마음을 외면하시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큰 믿음’이라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 <지푸라기>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그래서 바람을 따라 떠도는 지푸라기가 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라고 노래합니다. "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새소리가 섞인 진흙이 되어/허물어진 당신의 집을 다시 짓는/단단한 흙벽돌이 되길 바랄 뿐"이라는 것이지요.
〈복음과상황〉에 이 시를 소개한 김기석 목사님은 지푸라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았다고 했습니다. 지푸라기처럼 기다리시는 하나님, 우리의 죄가 되시고,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시는 주님은 지푸라기처럼 손이 닿는 곳에 계십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우리를 위해서, 쉴 곳이 없는 사람의 집을 짓기 위해서 기꺼이 흙벽돌이 되시려는 주님은 물과 바람처럼 가깝고 은혜로운 분입니다.
요즘의 자녀들을 보면서 이 본문의 귀신들린 어린 딸을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에 미쳐가고 있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도 한때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미쳐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세상의 친구들과 술과 즐거움에 빠져서 하나님도 부모도 보이지 않았을 때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다시 하나님께 돌아온 이후에 제가 깨닫게 된 것은 부모님의 기도, 특히 어머니의 기도가 저를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부모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도하는 부모들의 지푸라기가 되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신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방에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요청하는 과부 이야기를 하시면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끈질긴 기도, 지속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것처럼 여겨져서 포기하지 말아야 할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포기하고 놓고 있는 기도가 있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18장의 불의한 재판관을 빗대어 말씀하시는 본문의 끝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주님은 믿음을 통해서 응답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지속적인 신뢰를 뜻합니다. 인격적인 신뢰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어둡고 응답에 대한 어떤 사인이 없을 때, 하나님조차 침묵하고 나를 버린 것 같은 때에도 중요한 것은 ‘그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응답이 되어질 때까지 드려지는 믿음의 기도를 하나님은 이 여인과 같은 우리들에게 기다리고 계신 줄 믿습니다.
어려울 때 인내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는 축복의 말씀, 응답의 말씀이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 본문의 여인에게서 발견되어지는 큰 믿음의 특징은 "겸손한 믿음"입니다.
2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의 대답은 "주님 옳습니다"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상 아래 개로 표현하는 예수님의 표현 그대로를 수용하며 자신을 겸손하게 표현합니다. 겸손이라는 단어는 휴밀리티(humility)입니다. 이것은 인간, 사람을 뜻하는 휴먼(human)과 같은 라틴어 어근 humus에서 왔는데 이것의 뜻은 먼지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하는데 히브리어 원어로 흙은 아다마(Adamah)라고 하는데 먼지, 흙입니다. 아다마에서 왔으니 아담(Adam), 사람이라고 부르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흙에서 온 자, 먼지로 지어진 자라는 뜻인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분 앞에 나는 먼지와 같은 존재, 개보다 더 못한 존재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겸손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은혜는 물과 같아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갑니다. 바다와 같이 가장 낮아진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흘러오게 됩니다. 스스로 교만한 자는 높은 곳에 있기에 은혜를 부어주셔도 다 흘려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겸손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겸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겸손의 왕이십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겸손하게 인간의 모습으로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의 짐을 대신 지시고 겸손함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분은 이제도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는 우리 안에 겸손함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그분에게로 가서 그분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과 코드가 맞으려면 우리도 겸손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겸손한 자는 모든 것이 은혜이지만 교만한 자는 아무리 크고 좋은 것도 은혜가 되어지지 못합니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압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광대하심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자 하며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내 삶 속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큰 은혜와 능력을 요구하지 않고 부스러기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삶을 살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큰 믿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나의 나된 것을 알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는 믿음으로 겸손하게 무릎꿇는 기도의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말은 하나님께만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향해서 나오는 말도 동일해야 합니다. 한입으로 두 말을 할 수 없다는 구절이 성경에 있습니다.
약3:9-10 “9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말과 형제와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말이 동일합니다. 한주간도 우리 입술의 모든 말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그리고 성도님들의 삶의 모든 자리에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