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자전차
챙모자에 선글라스를 쓴 아버지가 자전거의 페달을 힘차게 밟으신다. 남강 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흔두 살의 나이가 무색해 보인다. 잔잔하게 너울이 일렁이는 강변길 건너 제지공장에서 뭉게구름 같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잠시 안장에서 내린 아버지는 허공을 향해 사라지는 연기 위로 젊은 날을 잡아보고 계신다. 무려 60년 전, 공장 터를 닦는 노동으로 시작한 일이 인연이 되어 아버지는 평생 제지회사에 몸을 담으셨다.
지금은 자전거라는 이름으로 삶의 속도만큼 가볍게 달리고 있지만, 한때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재빠르게 페달을 밟아야 하던 시절도 있었다. 숨 가쁘게 속도를 내던 아버지의 젊은 시절, 자전거는 두 발로 힘들게 몰고 가야 할 자전차였다.
아버지의 자전차 뒤 보조 좌석에는 투박하고 굵은 검정 고무줄이 감겨 있었다. 고무줄로 칭칭 묶여온 짐이 때마다 달라서 그 물건들은 늘 나를 설레게 했다. 멀리서 따르릉거리는 소리가 나면 호기심이 발보다 먼저 마중을 나갔다.
제지공장의 파지 속에서 고르고 고른 백지로 만든 연습장이 실려 오기도 하고, 꼬부랑글씨가 잔뜩이지만,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은 공주가 그려진 동화책이 실려 오기도 하였다. 야근으로 지친 몸에도 내가 좋아할 모습을 상상하며 아버지는 힘껏 페달을 밟으며 집으로 오셨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전차에 실려 온 짐 중에 나를 들뜨게 한 것은 누런 종이봉투에 든 돼지고기였다. 월급날에는 연탄 화덕을 마당으로 들고나와 온 식구가 아버지의 자전차를 기다렸다. 돼지고기를 싣고 온 자전차가 우쭐대며 마당에 들어서면 뜨겁게 달아오른 연탄불이 먼저 반겨주었다. 석쇠 위에는 빨갛게 양념 된 돼지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며 연기를 뿜었다. 고기 굽는 냄새는 황홀하리만큼 좋았고 어린 나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 하늘과 땅이 다 내 것인 양 마음이 부풀었다. 마당 옆에 세워 두었던 자전차의 벨을 따르릉거리며 까불거리면 아버지는 나를 번쩍 들어 안장 위에 앉혀 주었다. 자식 입에 고기 한 점을 넣어 준 가장으로서의 뿌듯한 마음이 햇살과 함께 자전거 위로 비췄다.
3교대로 밤일을 하고 어슴푸레한 새벽 공기를 뚫고 퇴근한 아버지는 잠깐 눈을 붙이고 나면 체인에 기름칠하고 바퀴가 빵빵하게 바람을 넣었다. 언제라도 자전차가 출동할 수 있도록 채비를 갖추어 두는 것이다. 마치 우리 식구의 비상약을 챙겨 두는 마음처럼. 엄마의 부탁으로 싸전에서 쌀 한 말을 싣고 오는 날도 있었고,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멀리 중학교에 다니는 오빠의 우산을 가져다주는 날도 있었다. 어릴 적 병치레가 유난스러웠던 나에게 자전차는 구급차와도 같았다. 열이 난 얼굴을 부비며 자전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야만 했다.
시내에 있는 시립병원은 한 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였다. 열에 달떠 등 쪽으로 점점 고개가 떨구어지면 아버지는 페달을 더 세게 밟으며 당신의 허리춤을 꼭 잡으라고 했다. 아버지의 등에는 밤새워 일하고 온 기름 냄새가 배 있는 땀이 흥건히 흘러내렸다. 내 머리의 열보다 더 뜨겁게 자전차는 달렸고, 아픈 딸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조바심에 바짝 타들어 갔으리라. 해열제 주사를 맞고 시원한 복숭아 통조림을 내 손에 쥐어주고 나면 그제야 아버지도 자전차도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의 자전차 페달 소리와 함께 나는 허약한 유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면 밤잠을 쫓으며 아버지는 자전차를 타고 마중을 나오셨다. 학교에서의 고단했던 하루를 쫑알거리며 자전차 불빛을 비추며 집으로 돌아가는 밤길은 걸음마다 아버지의 사랑이 유유히 흘렀다. 오랫동안 그 밤길의 노란 자전차 불빛은 나에게 객지에서의 차가운 직장생활을 견디게 해 준 따뜻함이 되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자전차의 페달을 정신없이 밟아야 했던 아버지의 젊은 시절. 때로는 브레이크를 밟아도 멈추지 않는 절박한 삶의 속도에 두려웠을 것이다. 때로는 딱 버티고 있는 장애물을 피하느라 어쩔 수 없이 구렁텅이에 박혀 삶이 쓰라린 날도 있었을 것이다. 멈출 수 없는 자전차에 오른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가족을 태우고 바퀴를 굴러야만 하는 두 다리는 얼마나 고단했을까. 자전차도 아버지도 무거운 짐을 내리고 싶었을 것이다. 철이 들어 삶이 끝없이 달려야 하는 경주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문득 바라본 아버지의 자전차는 아버지의 고단함을 일깨워 주는 징표 같아 마음이 숙연해졌다.
휴일도 없이 평생 성실하게 일한 공로를 인정받아 아버지는 퇴직하면서 큰 하청업체를 받게 되었다. 아버지의 수완과 성실함으로 사업이 번창하면서 아버지는 자가용을 사게 되었다. 기사가 운전해 주는 자동차에서 호사를 누리며 자전차에서 내려온 아버지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편해 보였다. 아버지의 자전차도 담벼락에 기대어 편히 늘어져 팔자가 좋아 보였다.
불같이 일어난 사업으로 많은 현금을 손에 쥔 아버지는 돈을 탐하는 다른 사람의 말에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힘으로 중심을 딱 잡고 달리던 자전차와 달리 자가용에 오른 아버지는 남의 손이 이끄는 핸들에 속도를 맡겨두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력으로 아버지는 수억 원의 금융 사기를 당하고, 연이어 IMF가 터지면서 사업체도 정리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마음도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아버지는 깊은 속앓이로 한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당 한쪽에 자전차도 녹이 슬고 바람이 빠져 핸들이 꺾인 채 기가 죽어 있었다. 주인에 대한 오랜 그리움이 아버지를 마당으로 불러낸 것이었을까. 어느 날 아침 아버지는 자전차를 끌고 가서 새것처럼 수리하여 타고 오셨다. 자전차와 함께 했던 아버지의 활기찬 모습이 겹쳐 보여 좋았다. 자전차는 한세월을 돌아온 주인이지만 극진하게 다시 맞아 주었다. 아버지를 살살 달래며 예전처럼 죽어라 속도를 높여 달리지 말라고, 이제는 나도 자전차가 아니라 설렁설렁한 자전거로 살고 싶다고 속삭였다.
아버지는 팔순이 넘어서 비로소 무거웠던 삶의 무게를 진 자전차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한 자전거를 타게 되었다. 친구들과 동동주를 한잔하며 그깟 돈도, 사업도 길 위로 흘려 버리고 시간을 끌고 가듯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아버지의 지나간 세월이 스르르 스르르 돌아가는 자전거 바퀴에 다 실려 있다. 매 순간 온몸의 근육을 힘겹게 움직여야 했던 아버지의 자전차는 나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