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한국 교회의 두 번째 사제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벗이자 동료였습니다. 신부님은 전국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몸소 깊은 신앙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번 사순 시기에는 최양업 신부님이 선교의 길 위에서 흘린 땀과 고난을 기억하며 신부님의 시복 시성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고자 합니다. |
최양업 신부님은 1821년 3월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에 있는 새터 교우촌에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이성례 마리아 복자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신앙을 지켜오던 열 다섯살 소년 최양업은 1836년 2월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었고 1837년부터 마카오에서 신학을 수학하였습니다. 그리고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 장가루(또는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그해 12월 조선으로 귀국하기 전까지 중국 요동 지방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조선에 귀국한 후 곧바로 전국 곳곳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찾아 방문하였습니다.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도 5천여 리(약 2,000km)를 걸어 다니며 3,815명의 신자를 만났고 1,764명의 영성체와 2,401명 고해성사 어른과 어린이를 포함한 275명의 세례성사 등을 거행하였습니다. 이후에는 진천 배티를 사목 중심지로 하여 활동하였습니다.
신부님은 귀국 후 11년 6개월 동안 전국 120여개 공소의 6천여 명의 신자들을 돌보며 목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신자들을 모두 방문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서양인으로 오해를 받아 쫓겨나기도 하고 순방 도중에 발각되어 포졸들에게 두들겨 맞고 쫓겨나서 눈 쌓인 밤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양업 신부님의 신앙과 조국애 그리고 신자들에 대한 애정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
신부님은 이러한 사목 활동 중에도 한문 교리서와 기도서를 번역하고 선교 사들의 조선 입국을 돕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또한 1854년 3월에는 배편으로 말레이 반도의 페낭(Penang) 신학교에 입학하는 3명의 신학생을 태워 보냈으며,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였습니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경상도 남부 지방에서 우여곡절 끝에 사목 방문을 다 마치고, 베르뇌 주교님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 하러 상경하던 중에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1861년 6월 15일에 문경 근처에서 푸르티에 신부님으로부터 종부성사를 받고 40세의 나이로 선종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선종 후 같은 해 11월 초에 베르뇌 주교님의 주례로 장례가 성대하게 치러졌고, 가매장되어 있던 시신은 배론 성 요셉 신학교 뒷산에 안장되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 청원 준비는 1996년 청주교구 배티 성지에서 『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이 간행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2001년 교황청 시성성에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 안건을 상정하였으며, 2016년 교황청 시성부의 성덕 심사를 마치고 최양업 신부님은 ‘가경자(可敬者Venerable복자 전 단계)’로 선포되었습니다. 현재는 기적 심사 단계에 있으며 계속해서 신부님의 시복 시성을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복음을 전하고 양 떼를 돌보기 위해 어떤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선교의 길을 떠났습니다. 곧 시작되는 사순절의 여정 동안 최 양업 신부님의 믿음과 노고를 기억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