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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김성철
1. 티베트불교의 형성과 쫑카빠의 ?보리도차제론?
2. ?보리도차제론?의 수행체계
3. 보살의 마음 - 종교심, 도덕성, 출리심, 보리심, 청정견
1. 티베트불교의 형성과 ?보리도차제론?
티베트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송첸감뽀(Sroṅ btsan sgam po: 581~649C.E.)왕이 만년에
당나라 文成공주와 네팔의 티춘(Khri btsun)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면서부터이다.
티베트의 수도 라사(Lhāsa)에 문성공주는 라모체(Ra mo che)寺를 건립하였고
티춘공주는 툴낭(Ḥphrul Snaṅ)寺를 창건하였다. 그 후 티송데첸(Khri sroṅ lde brtsan: 742~797C.E.) 왕대에는
인도의 나란다(Nālanda) 대학의 장로인 샨따락시따(Śāntarakṣita)와 밀교승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를 초청하여
삼예(Bsam yas)에 대 승원을 건립하게 된다(779C.E.).
이 시기까지 티베트에는 인도불교와 중국불교가 혼재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티손데첸 왕대 말기에 산따락시따의 제자 까마라실라(Kamalaśīla)가 초청되어 중국의 禪僧 摩訶衍과 삼예 승원에서
대 논쟁(792~794C.E.)을 벌인 이후 티베트에는 인도계 불교가 자리를 잡게 된다.티베트 史書에는 삼예의 대논쟁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티손데첸 왕의 면전에서 이루어진 御前論爭에서 마하연이 “흰 구름도 검은 구름도 하늘에 있으면 장해가 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善을 행하여 천상에 가는 것도 惡을 행하여 지옥에 가는 것도 다같이 윤회 속에서 벌어진 것으로 佛性을 얻는데 똑같이 장해가 된다. 윤회로부터 해탈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 것도 窮究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頓悟야말로 十地와 동등한 것이다”라고 주장하자,
까마라실라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궁구하지 않고서 해탈할 수 있다면, 실신한다든지 졸도했을 때에도 해탈한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방편과 반야의 지에 통달하고 진리를 잘 관찰하여 일체법이 무자성임을 깨닫는 것이다”라고 응답한다.
티베트의 사서에서는 이 논쟁 이후 마하연은 까말라실라에게 화환을 바치며 패배를 인정하였고, 결국 티베트에서 추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드메빌이나 뚜찌와 같은 현대학자들은 그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1)
어쨌든 삼예의 대 토론 이후 티베트에서 중국의 선불교의 모습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나, 그 후 200여 년이 흐르면서
잘못된 밀교행법으로 인해 티베트의 불교계가 문란해지게 되자, 11세기 西티베트의 고루레 왕은 인도의 고승 디빵까라슈리갸나(Dīpaṅkara Śrījñāna), 즉 아띠샤(Atiśa: 982~1054C.E.)를 초청하게 된다.
아띠샤는 까담(Kadam)파를 창설하여 계율의 중요성과 밀교의 엄숙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菩提道燈論?(Bodhipatha pradīpa) 등의 저술을 통해 소승, 대승, 밀승을 구분하고
밀승 중에서 無上瑜伽딴뜨라를 최상으로 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2)
현재 티베트 불교의 4대 종파인
겔룩(Gelug),
닝마(Ñiṅma),
까규(Kargyu),
사꺄(Sakya)파는
모두 아띠샤의 직, 간접적 영향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띠샤가 까담(bkaḥ gdams, kadam)파를 창시한 이후,
까담파의 엄숙주의에 반발하는 그 제자들에 의해
까규(bkaḥ brgyud, kargyu)파와
사캬(sa skya, sakya)파가 각각 분파된다.3)
그리고 아띠샤 이전의 티베트 밀교는 닝마(ñiṅ ma)파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며 독립된 교단이 된다.
그리고 아띠샤에 의해 창시되었던 카담파는 쫑카빠(Tsoṅ kha pa: 1357~1419)의 개혁 이후 현재의 겔룩파로 이어진다.
가장 오래된 닝마4)파는 내용적으로는 중국의 선과 인도밀교가 융합된 형태를 보이며, 참 마음(rig pa)5)의 자각을 강조하고
족첸(dzog chen)6)을 수행법으로 삼는다. 11세기 후반 라닥지방의 라마인 마르파(Marpa)에 의해 창시된 카규(bkaḥ rgyud)7)파는 마하무드라(mahāmudrā)8)를 중심으로 한 은둔수행을 특징으로 하고,
사캬9)파는 윤회와 열반의 不二의 체득을 수행의 목표로 삼으며, 겔룩10)파에서는 계행을 중시하며 원초적 淨明의 체득을 목표로 수행한다.11) 그러나 이러한 4대 종파는 밀교수행뿐만 아니라 대소승을 포괄한 모든 수행을 닦을 것을 강조하고, 인도 내에서
발생한 다양한 불교사상 중 중관사상을 가장 중시한다는 점에 일치를 보인다.12)
그리고 이렇게 ‘포괄적 수행’을 강조하고 ‘중관사상’을 중시하는 것은 겔룩파의 창시자인 쫑카빠의 교학에 근거한다.
티베트인들에 의해 문수보살의 화현으로 간주되는13) 쫑카빠는 그 때까지 전승되어 오던 모든 교학과 수행법을 종합하여
체계화하였다. 쫑카빠가 탄생한 15세기 중반은 티베트대장경의 경부(깐쥬르)와 논부(텐규르)가 모두 완성된 시기였다.
이런 시대배경 하에서 태어난 쫑카빠는 아띠샤에 의해 창설된 카담파의 전통을 계승하며,
대소승의 모든 수행을 포괄하여 단계화 한 ?보리도차제광론?을 저술하게 된다(1402년). 아띠샤는 ?보리도등론?을 통해 깨달음을 지향하는 중생을 下士와 中士와 上士의 세 부류로 구분한 바 있는데, 이러한 구분은 쫑카빠에 의해 그대로 수용되어
?보리도차제광론?의 근간이 된다. 이렇게 세 부류의 중생을 구분하며 ?보리도등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下와 中과 上에 의해
세 가지 중생을 알아야 하네
그들의 특징을 명확히 하고
각각의 구별을 묘사하리라
그 어떤 경우든
윤회의 행복만을 추구하며
자신의 이익을 염려하는 자
그런 자는 下士라 하네
윤회의 행복에 등을 돌리고
도덕적 악에서 자신을 멀리하며
자신의 적멸만을 추구하는 자
그런 자는 中士라 하네
자신의 상속에 속한 고통의 소멸과 같이
다른 자의 모든 고통이
완전히 모두 사라지기를 희구하는 자
그 자는 上士이다14)
하사란 윤회의 세계 내에서 향상을 지향하는 일반 범부를 의미하며,
중사란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지향하는 소승적 수행자를 의미하고,
상사란 보리심을 발하여 중생의 제도를 위해 다시 윤회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보살을 의미한다.
?보리도차제광론?에서는 이러한 세 부류의 수행자가 닦아야 할 수행을, 각각 하사도, 중사도, 상사도라고 명명하며 그 방법,
경계할 점 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보리도등론?에 의거한 이러한 가르침은 ‘문수 → 용수’로 전승된
‘지혜’와 ‘미륵 → 무착’으로 전승된 ‘수행’을 통합한 것이라고 쫑카빠는 말한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했던
‘삼예의 논쟁’에서 귀결되었던 漸修的 불교관 역시 ?보리도차제광론?에 철저히 배여 있다.
?보리도차제광론? 서두에서 쫑카빠는 ?보리도등론?의 위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①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조화롭게 통달할 수 있다: 부처님은 교화될 근기에 맞추어 다양한 가르침을 베푸셨다. 따라서 타인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길을 배워야 한다. 소승은 소승과 대승과 밀승이 모두 배워야 할 공통된 길이고, 대승은 대승과 밀승이 모두 배워야 할 공통된 길이다. 따라서 대승을 배운다고 소승을 버린다든지, 밀승을 배우면서 대승이나 소승을 버리는 것은 큰 잘못이다.
②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두 담고 있다: 각종 경론과 주석에 의거하여 가르침을 편다. 경론이나 주석과 무관하게 수행법을 만드는 것은 불교를 포기하는 큰 죄업을 짓는 꼴이 된다. 부처님의 말씀을 단계(차제)화할 때 모든 가르침이 생명을 갖게 된다.
③ 불교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쉽게 통달한다: 대 경론은 초학자에게 어렵고, 배우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순서에 의해 배우면 그 참뜻이 쉽게 터득된다.
④ 큰 죄업이 저절로 없어진다: 부처님의 말씀을 가려서 배울 경우 악업이 된다. 어떤 것은 성문의 것이고,
어떤 것은 보살의 것이라고 말하며 가려서 배울 경우 불법을 비방하는 큰 죄업을 짓게 된다.
?보리도등론?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대소승을 망라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자의적인 수행 역시 방지된다는 것이다. 아띠샤의 ?보리도등론?은 한글 번역문으로 총 9페이지정도에 불과하며 보살도 수행의 요점만 추려 놓은 짤막한 게송집인 반면, 쫑카빠의 ?보리도차제광론?은 한글 번역문15)으로 약 8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이다.
그리고 ‘앞 단계의 수행이 무르익지 않은 사람은 다음 단계의 수행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수행의 차제성이 강조되고, 감동적인 갖가지 비유로 가득하며, 다양한 경론에서 추출된 방대한 전거가 실려 있으며,
읽음과 동시에 독자의 마음이 순화된다는 점에서 ?보리도차제광론?의 가치는 ?보리도등론?을 훨씬 능가한다.
그래서 쫑카빠가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나 아띠샤(Atiśa)보다 더 훌륭한 고승으로
티베트의 불교인들에 의해 추앙되고 있는 것이리라.16)
쫑카빠는 ?보리도차제광론? 저술 이후, 이어서 반 정도의 분량으로 축약한 ?보리도차제약론?을 저술하였고,
다시 이를 짤막한 게송으로 요약한 ?보리도차제섭송?을 저술하게 된다.17) ?보리도차제광론?이 저술된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티베트에서는 그에 대한 수백 권의 요약본, 강연집, 주석집이 제작된다. 쫑카빠의 출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600년 간의
티베트 불교는 ‘오직 ?보리도차제론?18)의 불교’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티베트 불교에 끼친 ?보리도차제론?의 영향은 막대하다. 최근에도 달라이라마를 위시한 많은 림포체들이 ?보리도차제론?에 대한 강연집과 저술을 남기고 있다. 근세 가장 위대한
림포체로 추앙받는 빠봉까(Pabongka) 림뽀체 역시 24일에 걸쳐 ?보리도차제론?을 강의한 바 있으며, 그 제자 중 하나인
리부르(Ril bur) 림뽀체에 의해 그 내용이 정리된 후 다시 영역되어 출간된 바 있다.19)
빠봉까 림뽀체는 이러한 차제법의 장점에 대해 “그 어떤 사람이건 불도를 걸으려는 사람 모두에게 이해되고 실천될 수 있게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단계적으로 배열하고 있다”20)고 평한다. 사실 그렇다. 세속적 복락을 목적으로 삼는 재가자든, 해탈을 목적으로 삼는 소승 수행자든, 대승적 보살도를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든 ?보리도차제론?의 가르침에 입문할 경우, 그 심성이 그런 목적에 부합되도록 개조된다. 아니,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불교신행의 목적과, 자신의 무의식에 내재한 불교신행의 목적이 전혀 다른 이중인격자라고 하더라도 ?보리도차제론?의 가르침에 들어올 경우 그 성품이 선량하게 개조된다. 즉, 그 누구라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모든 중생의 성불을 위해 무수겁을 윤회하며 자리이타의 삶을 살고자 희구하는 보살’의 성품을 갖추도록 그 마음이 개조된다. 그 어떤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동질적인 성품을 가진 ‘보살’로 개조해내고야 마는 수행체계가 바로 ?보리도차제론?에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2. ?보리도차제론?의 수행체계
그러면 이렇게 입문자의 심성을 개조해내는 ?보리도차제론?의 수행체계를 소개해 보기로 하자.
?보리도차제론?의 특징은,
첫째 수행자의 심성 훈련에 초점을 맞추어 수행이 단계화되어 있다는 점이고,
둘째 앞 단계의 수행이 무르익지 않으면 결코 다음 단계의 수행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이고,
셋째 각 단계마다 필요한 마음자세를 갖추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수행이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며,
넷째 대부분의 수행이 무분별이 아니라 철저한 분별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이고,
다섯째, 모든 수행은 현세가 아니라 내세 지향적이라는 점이며,
여섯째 수행과 신행 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고,
일곱째 대부분의 내용이 저자 자신의 말보다 기존의 경론이나 주석서의 인용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보리도차제광론?의 전체 내용을 순서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21)
A. 예비적인 가르침
a. 아띠샤의 전기 - 아띠샤의 탄생에서, 구도, 그리고 티베트에서의 포교
b. 차제법의 위대성 - (앞 장에서 요약했던) ?보리도등론?의 위대성
c. 배우는 자의 자세 - 불법의 소중함, 스승을 대하는 태도, 가르침을 듣는 태도
d. 가르치는 자의 자세 - 마음가짐, 가르치는 방법
B. 수행의 준비
a. 기도법 - 불단을 마련하고, 예경, 공양, 참회, 수희, 권청설법, 권청주세, 회향
b. 생활지침 - 빈 시간에 할 일, 식사 및 수면의 방법
c. 思擇修(분별적 수행)의 중요성 - 모든 가르침이 문사수의 단계에 의해 체득된다
d. 사람으로 태어난 중요성 - 사람으로 태어나야 불법을 공부할 수 있다
C. 하사도 - 종교심과 도덕성의 획득
a. 죽음에 대한 명상 - 재물욕과 명예욕에서 벗어난다.
b. 삼악취에 대한 공부 - 내세의 두려움을 갖게 한다.
c. 삼귀의 - 삼보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음
d. 업과 과보에 대한 공부 - 선악의 기준인 십선계와 파계한 악업의 과보
e. 악업을 정화하는 방법 - 참회, 독경, 불상조성, 공양, 염불, 지계행, 삼귀의, 보리심 등
D. 중사도 - 출리심의 획득
a. 해탈에 대한 이해 - 해탈의 의미에 대해 설명
b. 사성제 각각에 대한 분별적 공부 - 관찰사택에 의해 고제를 사유한다.
c. 윤회의 과정에 대한 공부 - 사후 중음신을 거쳐 태어나는 과정
d. 12연기에 대한 공부 - 윤회의 과정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여 출리심 발생
e. 계, 정, 혜 삼학에 대한 이해 - 소승적 수행의 이치에 대한 개관
E. 상사도 - 보리심과 청정견의 획득
a. 보리심의 중요성 -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성불을 지향하는 마음
b. 보리심을 발생시키는 방법 - 七種因果, 自他相換
c. 보살 서원식을 치른다 - 불단을 차린 후 선지식을 모시고 불퇴전의 서원
d. 육바라밀의 실천 - 자신의 불성을 성숙시키는 수행
e. 사섭법의 실천 - 다른 유정을 섭수하고 불성을 성숙시킴
f. 지(止: śamatha) - 혼침과 도거를 물리친 輕安을 목적으로 한다
g. 관(觀: vipaśyanā) - 중관에 대한 귀류논증파(prāsaṅgika)적 이해
h. 지관쌍운 - 지에 토대를 둔 관 수행
?보리도차제론?의 차례는 그대로 수행의 차례에 대응된다.
예비적인 가르침
먼저 三士道의 수행체계의 골격을 제시했던 아띠샤의 치열했던 구도의 삶과, 그가 인도에서 티베트로 초청되어 오기까지의 至難했던 과정을 소개함으로써 수행자의 모범을 제시함과 아울러 수행자로 하여금 <보리도차제법>의 소중함에 대해 자각하게 한다(Aa). 그리고 아띠샤가 가르친 <차제법>의 우수성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한다(Ab). 수행자는 이를 통해 ?보리도등론?의 가르침을 계승한 ?보리도차제론?의 중요성을 절감함과 아울러 그에 대해 깊은 믿음을 갖게 된다. 그 후 배우는 자의 자세(Ac)와 가르치는 자의 자세(Ad)를 상세하게 설명함으로써 수행자로 하여금 앞으로 스승을 잘 모시며 흔들림 없이 진실하게 ?보리도차제론?을 공부할 수 있는 마음자세를 갖추게 만든다.22)
수행의 준비
?보리도차제론?의 체계에 의거하여 공부하는 일은 하루 이틀에 끝나는 일이 아니다. 입문자는 매일 일정시간 동안은 ?보리도차제론?의 공부에 매진하겠지만 그 이외의 시간에는 마음이 풀어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쫑카빠는 피교육자로서의 수행자가 ?보리도차제론?을 공부하는 시간 이외의 시간에 행할 기도의 방법과 생활지침에 자상하게 알려준다.
기도법의 경우, 먼저 법당을 청소하고 불단을 차린 후 가부좌하고 앉아 제불보살과 여러 선지식이 자신 앞에 앉아 계시다는
관상을 하라고 말한다. 수행자가 혼자 있다고 하더라도 제불보살과 선지식께서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며, 가르치고 계시다는
생각 하에서 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기도는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예경, 공양, 참회, 수희, 권청설법,
권청주세, 회향의 일곱 단계로 이루어진다. 특기할 것은 초심자의 경우 이러한 기도의 시간은 짧아야 한다고 말하는 점이다.
너무 오래 앉아 있게 할 경우 ‘방석만 봐도 구토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이 몸에 익으면 자연스럽게 기도의 시간은 길어질 것이다(Ba).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수행의 자발성을 중시한다. 그리고 일상생활 중에는 안, 이, 비, 설, 신, 의의 육근을 잘 지키라고 말하며, 음식을 먹는 법, 잠에 드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설명한다(Bb).
?보리도차제론?에서 제시하는 수행의 특징은 ‘분별에 의해 대상을 관찰하는 思擇修’가 주종을 이룬다는 점이다.
쫑카빠는 무분별의 삼매 수행만 중시하고 이러한 사택수를 비판하는 자를 사견에 빠진 자라고 혹독하게 비난한다(Bc).
불전의 모든 가르침은 문→사→수의 삼혜에 의해 수행자에게 체득되는 것이기에 마지막의 수의 깊이는 문과 사의 깊이에 의해
결정된다. 수행에는 분별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택수와 분별을 멀리하는 불사택수의 두 가지가 있는데 ?보리도차제론?에 제시되어 있는 수행 중 ‘사람으로 태어난 고마움’, ‘죽음에 대한 명상’, ‘윤회의 과정에 대한 공부’, ‘보리심의 발생’ 등은 철저한 사택수에 의해 체득된다.
쫑카빠는 사택수 없이 삼매만 닦으려는 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멸시키는 죄업을 짓는 자’이며, ‘수행할수록 기억력과 간택
취사력이 떨어지게 된다’고 비판한다. 마치 야금쟁이가 금을 여러 번 제련해야 불순물을 없애고 장신구를 만들 수 있듯이 관혜로 마음의 장애를 제거해야 사마타와 비파사나가 무난히 성취된다. 수행 이후 오히려 아둔해지는 수행자가 가끔 발견되는 이유가 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또, ‘낙태, 피임, 안락사, 유전공학’ 등에 대해 불교적 견지에서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는 달라이라마의 지혜는 이러한 ‘사택수’에 의해 계발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수행자의 자세, 수행 방법에 대한 믿음에 대한 교육이 끝나면 비로소 본격적인 수행이 시작된다.
가장 먼저 닦아야 할 수행이 ‘사람으로 태어난 고마움’에 대한 사택수이다(Bd).
쫑카빠는 이에 대해 갖가지 예를 들어가며 상세하게 설명하는데 이런 예화들을 읽으며(聞)
그 진실성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 본 후(思) 그에 대해 가슴 깊이 공감하는 것(修)이 바로 사택수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고마운 이유는 사람만이 불교를 공부할 여가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중생이기 때문이다.
육도중생 중 축생이나 아귀, 지옥중생은 괴로움이 심해 불교를 공부할 수가 없고, 하늘나라에 태어날 경우 행복에 취해
불교를 공부할 수가 없다. 축생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눈먼 바다거북이 떠오르다가 나무구멍에 목이 낄 정도의 확률만
가질 뿐이다. 쫑카빠가 사택수의 소재로 제시하는 갖가지 예들은 대부분 불전에 쓰여 있는 것들로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보리도차제론?의 특징은 그런 예화들을 한 번 듣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수행에서
가슴에 깊이 새기게 함으로써 발심의 자세를 재정비하게 만든다는 점이다.23)
하사도
‘사람으로 태어난 고마움’에 대한 사택수가 끝난 사람은 ‘하사도’의 수행에 들어갈 것이 허용된다(C).
하사도의 수행에서 제일 먼저 제시되는 사택수는 ‘죽음에 대한 명상’이다(Ca).
‘죽음에 대한 명상’이란 ‘자신은 반드시 죽으며 그 시기는 오늘이 될지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점에 대해 ‘공포심이 들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이에 대해서도 갖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절벽에서 떨어질 때 하늘을 난다고
기뻐하지 말지어다’, ‘60년의 생에 중에 밥먹고 잠자고 앓다보니 수행할 시간은 5년밖에 없구나’, ‘매일매일 오늘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수행하라’. 이러한 ‘죽음에 대한 명상’을 통해 수행자는 재물욕과 명예욕에서 벗어나게 되며, 금세의 보잘것없는 안락에 탐닉하지 않게 되며, 항상 청정한 계율을 지키게 되며, 수행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게 된다. 쫑카빠는 ‘죽음에 대한 명상’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평생 계속해야 하는 최고의 수행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우리가 죽은 후 태어나게 될지도 모르는 ‘지옥과 축생과 아귀’의 세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Cb).
불전에 쓰여 있는 삼악취에 대한 묘사를 모두 모아 놓은 것으로 생각될 정도로 그 양이 방대하다. 그리고 이러한 사택수는
‘삼악취의 고통에 대해 큰 공포심이 들 때 까지’ 꾸준히 닦아햐 한다고 쫑카빠는 말한다.
이상과 같은 분별적 수행을 통해 죽음과 내세에 대해 큰 공포심을 갖게 된 사람은, 도저히 이전과 같은 속물의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아무리 높은 명예와 아무리 강한 권력과 아무리 풍족한 부를 얻었다고 해도 목숨을 마치면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하고 만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종교에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죽음’과 ‘삼악취’의 고통에 대해 처절하게 자각했을 때 우리의 마음 속에서는 강력한 ‘종교심’이 발생하게 된다. 세간의 잣대를 넘어선 진정한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진정한 삶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불․법․승 삼보에 있다. 이 때 비로소 삼보의 의미에 대한 교육이 시작되고 삼귀의가 권유된다(Cc).
삼보만이 우리를 죽음과 삼악취의 고통에서 구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쫑카빠는 불․법․승 삼보 각각의 의미와 그에 대한 귀의 방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하는데 이 모두가 관찰수, 즉 되풀이하여 생각하는 사택수에 의해 우리에게 체화된다. 삼귀의는 불자와 비불자를 가르는 기준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명상과 삼악취의 고통에 대한 자각 이후에 이루어지는 삼귀의만이 수행자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삼귀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삼귀의 이후 수행자에게 인과응보의 이치가 가르쳐진다(Cd). 선업을 지을 경우 행복한 내세가 보장되고 악업을 지을 경우 고통스러운 내세가 초래된다. 여기서 선과 악을 가름하는 기준으로 제시되는 것이 十白業道, 즉 十善戒이다. ①살생, ②투도, ③사음, ④망어, ⑤악구, ⑥양설, ⑦기어, ⑧탐, ⑨진, ⑩사견의 열 가지 행위를 저지를 경우 우리는 불행한 내세를 맞게 된다.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이런 열 가지가 도덕의 기준으로 제시되며 그런 행위가 과보를 초래하는 이치, 또 각각의 악업이 초래하는 과보의 구체적 모습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앞에서 ‘죽음의 필연성’과 ‘우리가 내세에 태어날지도 모르는 삼악취의 고통’에 대해 깊이 자각함으로써 큰 공포심이 생긴 다음에, 우리의 내세의 고락을 결정하는 열 가지 행위 기준이 제시되었기에, 우리는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들이키듯이 지극히 자발적으로 도덕적인 삶을 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쫑카빠는 ‘인간의 도덕성은 공포심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徹見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十善戒를 지키며 도덕적으로 살더라도 우리는 전생에 지었던 악업으로 인해 초래되는 불행한 과보들을 피할 수가 없다. 그래서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악업을 정화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Ce). 이는 참회, 독경, 공성에 대한 이해, 불상조성, 공양, 염불, 지계행, 삼귀의, 보리심 등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악업이 정화될 경우 큰 고통이 작은 고통으로 변하게 하든지, 악취에 태어나도 그 고통을 받지 않게 하든지, 오래 받을 고통을 짧게 받게 만들든지, 상속되어 오던 업종자를 말려 버려 아예 나타나지 않게 한다.
이상(Ca~Ce)은 하사도의 삶에 대한 설명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사도적인 삶조차 살고 있지 않다. 껜술렉덴(Kensur Lekden: 1900~?)은 하품의 중생을 다시 셋으로 나눈다. 첫째는 종교적 수행도 하지 않고 오직 현생에서의 행복만 추구하는 下下品의 중생들이다. 지옥중생과, 아귀와 축생이 그에 속하고, 인간 중에도 오직 먹고 마실 것 등 현생에서의 향락만 추구하는 ‘벌레같은’ 사람들 역시 하하품의 중생에 속한다. 둘째는 종교적 수행도 하지만 이를 현생에서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로 下中品의 중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들은 공부도 하고 수행도 하고 직장을 다니며 가끔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즉, 종교적 삶과 비종교적 삶이 혼합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셋째는 下上品의 중생으로, 자신이 내생에 지옥이나 아귀, 축생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 내생에 인간계나 하늘나라에 태어나기 위해 수행에 전념하는 자들이다.24)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하품이나 하중품의 삶을 살고 있다. 하상품의 삶이 되어야 비로소 ?보리도차제론?에서 말하는 하사도에 해당된다.25)
하사도에 제시된 도덕의 기준을 철저히 지키며 살아갈 경우 우리는 내세에 보다 유복한 인간이나 천신으로 태어날 수 있다. 즉, 윤회의 세계에서 지금보다 향상할 수 있다. ‘윤회의 세계에서의 향상’을 지향하는 하사도의 삶을 삶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이 보장된다면 그 이상의 수행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무수겁 동안 계속될 윤회의 세계에서 언젠가 우리는 다시 삼악취의 세계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윤회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는 해탈’을 지향하는 중사도의 삶이 제시된다.
중사도
중사도에서는 먼저 해탈의 의미에 대해 설명한다(Da). 쫑카빠는 해탈이란 다시는 삼계, 또는 육도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초기불전의 경우 ‘아라한이 열반 이후에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에 붓다는 답을 하지 않는다. 이를 무기설이라고 한다. 그러나 쫑카빠는 해탈하려는 마음이란 ‘다시는 윤회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으려는 마음’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쫑카빠의 해탈관은 단견에 빠진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만일 무시겁 이래 계속 생사하는 윤회의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모를 경우, ‘해탈한 이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면, 심한 공포심이 들며 해탈을 추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죽으면 반드시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을 철저히 자각할 경우,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지긋지긋한 고통으로 생각되어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랄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해탈’은 수행의 정상에 올라 선 위대한 인격자인 아라한에게만 가능한 축복이다. 끝없이 다시 태어나며 되풀이되는 윤회의 과정에 대한 사택수가 철저해진 사람에게 해탈 후의 無는 단견이 아니라, 무시겁 동안 계속된 괴로움을 쉬는 고요한 안락이다. 이런 동기에서 해탈을 희구하는 마음을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출리심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출리심을 강화하기 위해 다시 갖가지 사택수가 제시된다.
사성제의 경우 수행자는 먼저 고성제에 대해 사유한다(Db). 고성제 중 생로병사의 四苦에 대한 사택수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生苦의 경우 우리가 탄생하는 과정에 대해 면밀히 관찰하여 탄생이 고통임을 자각하게 만든다; ‘탄생을 위해 중음신이 자궁에 착상하게 되는데, 자궁 속은 고약한 악취가 나며, 칠흑같이 어두우며, 주변은 오줌과 똥으로 둘러싸여 있다. 입에서 씹은 더러운 음식이 배꼽을 통해 태아에 전달된다. 그런 더러운 자궁 속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10개월 간 갇혀 있다. 출산 시에는 기름틀에 넣고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엄습한다. 출산 이후에는 몸에 닿는 모든 것이 칼날이 스치듯 아프게 한다.’ 老苦의 경우 ‘앉을 때는 밧줄이 끊어진 흙 주머니 같고, 일어설 때는 나무뿌리를 뽑아 내듯이 힘들다’ …. 쫑카빠는 갖가지 실감나는 비유를 들어가며 一切皆苦의 진리를 체득시킨다. 이어서 사망 후 중음신으로 떠돌다가 다시 입태하여 태어나는 과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Dc), 그런 생사윤회를 주관하는 법칙인 십이연기에 대해 설명한다(Dd). 이런 사택수를 통해 ‘다시는 생명을 갖는 중생으로 태어나지 말아야 하겠다’는 출리심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샘솟게 되는 것이다.
이어서 아라한이 되기 위해 닦아야 할 계정혜 삼학이 간략하게 소개된다(De).26) 만일 수행자가 계정혜 삼학의 수행에 매진한다면 해탈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소승적 수행자일 뿐이다. 자기 하나만 윤회의 세계를 탈출하는 이기적인 수행자인 것이다. 그래서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이러한 소승적 해탈을 유예하고 대승적 보살의 길을 갈 것을 권한다. 그것이 상사도이다.
상사도
무시겁 이래 계속되어 온 윤회의 세계의 괴로움을 자각하고,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추구하던 수행자는, 앞으로 계속 윤회의 고통에 시달릴 부모와 친척, 친구, 더 나아가 다른 모든 중생을 생각하게 된다. 중사도의 길을 걷는다고 해도 이타행은 가능하다. 초기불전에서 보듯이, 성문이나 독각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을 갖추고 가르침도 베풀고 시주자에게 공덕을 지을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성문, 또는 연각의 이타행의 기간은 그의 한 생애로 마감한다. 자신만의 해탈을 추구하는 이승은 결코 많은 중생을 제도할 수 없다. 쫑카빠는 이렇게 이타행이 부분적일 경우 해탈이라는 자리적 목표도 완전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무수겁에 걸친 보살행을 다짐하는 상사도가 제시된다. 상사도란 윤회의 세계 속에서 고통받을 수많은 중생의 제도를 위해 무수겁 이후의 성불을 다짐하고 다시 윤회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보살의 길이다. 이러한 보살의 마음이 보리심이다. 단순히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이 보리심이 아니다. 수행자의 마음이 모든 중생에 대한 한없는 자비심으로 충만한 후, 부처가 되어야만 수많은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성불을 지향하는 마음이 보리심이다. 수행자가 대승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대승적으로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쫑카빠는 말한다. ‘보리심을 가진 경우 까마귀에게 먹이를 주는 것도
보살행이 된다’, ‘보리심이 없는 경우 삼천대천세계의 보배로 보시해도 보살행이 아니다’(Ea).
그러나 모든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진심으로 갖추고 있는 자는 드물다. 그래서 ?보리도차제론?에서는 ‘보리심(Bodhicitta)’을 갖추게 만드는 두 가지 수행을 소개한다. 하나는, 아띠샤(Atiśa)로부터 전승된 것으로 모든 중생이 전생에 한 번쯤은 자신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知母’에서 시작하는 ‘七種因果’의 관찰법이고, 다른 하나는 적천(Śantideva)으로부터 전승된 것으로 나와 남을 바꾸어 보는 ‘自他相換’의 관찰법이다(Eb). 앞의 하사도나 중사도의 수행에서와 같이 ‘보리심’을 갖추게 만드는 수행도 ‘철저한 분별’에 의한 사택수이다. 이는, 그 어떤 마음을 가지고 불교 수행의 길에 들어온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수행을 통해 균질적인 ‘보살’의 마음을 갖도록 만들어내는 수행이다.
칠종인과에 대한 관찰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①우리가 수억겁에 걸쳐 윤회하며 살아오는 동안 모든 중생이 전생에 한 번쯤 자신의 어머니였으며
미래에도 언젠가 자신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知母).
②그리고 어머니의 은혜를 생각한다(念恩). 이는 추상적으로 막연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자신과 친밀한 사람을
떠올린 후, 전생에 나에게 베풀었을 그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 대상을 점차 자기와 먼 사람으로 바꾸어 가며 그 은혜를
생각한다. 이런 방법은 초기불전 중 ?자비경?에 등장하는 ‘자비관법’과 일치한다.
③그 다음에는 ‘이렇게 은혜로운 어머니들을 버리고 돌보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눈 멀어 비틀거리며 삼악취의
벼랑으로 가는 어머니를 그 아들이 아니면 누구 구해주랴’라는 등의 생각을 가슴에 새긴다. 이는, 전생에 나의 어머니였을
모든 중생의 은혜를 갚겠다는 마음이다(報恩).
④그리고 念恩에서와 같이 ‘친족 → 일반인 → 원수 → 일체중생’의
순서로 ‘그들이 안락하기를 바라는’ 慈心을 되풀이하여 사유한다(修慈).
⑤수자의 경우와 동일한 순서로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悲心을 되풀이하여 사유한다(修悲).
이는 ‘사랑하는 아들의 고통에 대한 비심과 동등한 정도의’ 悲心이 모든 중생에 대해 들 때까지 되풀이한다.
⑥그리고 이러한 마음을 더욱 강화하여(强化), ⑦‘일체중생을 구제한다는 짐을 내가 짊어지겠다’고 서원한다
(菩提心).
칠종인과의 마음 중
④⑤의 자비심까지는 비단 보살뿐만 아니라 성문과 독각에게도 있다. 그러나 성문과 독각의 자비심은 ‘구덩이에 빠진 외아들을 보고 비통해하기만 하는 것’에 비유된다. 보리심을 발한 보살은 ‘구덩이에 뛰어 들어 외아들을 건져내는 아버지’와 같다. 이러한 보리심이 결여되어 있으면, 아무리 대승경전에서 말하는 공성의 이치에 통달한다고 해도 대승에서 물러나 이승의 지위로 떨어지고 만다. 성불의 길에서 공성은 어머니이고 보리심은 아버지에 비유된다. 아버지가 그 씨족을 결정하듯이 수행자는 보리심으로 인해 보살의 종성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보리심의 수습 없이 ‘모든 중생을 이익 되게 하기 위해 성불하겠다’고 염원는 것은, ‘교만한 마음’만 자라나게 만드는 잘못된 염원이라고 쫑카빠는 말한다.
자타상환법은 ‘자신을 타인으로 삼고, 타인을 자신으로 삼는’ 수행이다. 이는 단순히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고 타인을 버리는 마음을, 자신을 버리고 타인을 위하는 마음으로 바꾸는’ 수행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자신과 타인이 바꾸어질 수 있다는 이치를 생각해야 한다. ‘타자였던 부모의 정과 혈이 자신의 몸이 되었듯이’, ‘이 산에서 보던 저 산이, 저 산에 가면 이 산이 되듯이’ 자신과 타인을 바꾸어 보는 것은 다만 상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수행을 통해 ‘젊은 시절에 늙음을 대비하고, 손이 발의 고통을 제거하듯이’ 타인은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칠종인과법과 자타상환법에 의해 보리심이 계발된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보살의 삶’이 가능해진다. 귓가에서 북을 쳐대도 흐트러지지 않는 수행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보리심이 없으면, 내생에 ‘밤낮 참회하며 살아가야 할 곳’에 태어나게 된다고 쫑카빠는 말한다.
이렇게 보리심이 계발된 후 수행자는 궤범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공경합장하고 의궤를 받게 된다(Ec). 불퇴전의 서원으로 보리심을 발하여 무수겁 동안 보살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현생 중 미래의 언젠가, 또는 내생에 다시 태어날 경우 이런 다짐을 기억하지 못하여 보살도에서 물러날 수가 있다.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이를 방지하는 방법 역시 자상하게 가르친다. 먼저, 현생에 보리심에서 물러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경전을 읽고 스승에게 배워 보리심의 이점을 마음에 새기며, 낮에 3회 밤에 3회, 매일 총6회에 걸쳐 ‘삼보에 귀의하고 육바라밀을 닦아 중생을 이롭게 하여 성불하고자 합니다’라는 서원을 되풀이함으로써 보리심을 강화시키고, 항상 지혜와 복덕의 두 가지 자량을 쌓으며 살아가면 된다. 그리고 내생에 발심이 후퇴하게 만드는 것은, 스승이나 공덕을 갖춘 사람을 비난하거나, 참회할 필요가 없는 자에게 참회의 마음이 생기게 하거나, 대승에 올바로 진입한 중생에 대해 나쁘게 말하거나, 남을 속이고 비방하며 존중하지 않는 것 등이다. 수행자가 이런 행위를 멀리 하고, 다른 중생이 망어죄를 짓는 것을 막으며, 항상 정직하며, 일체보살을 큰 스승으로 생각하여 그 공덕을 널리 알리고, 소승에서 벗어나 대보리를 지향하며 살아갈 경우 내세에도 그의 보리심은 결코 후퇴하지 않는다고 쫑카빠는 말한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삶에서 잠깐이라도 어긋났을 경우 이를 보완하는 방법, 발심 후 수행하는 방법 등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보리심도 진실로 갖추고 보살로서의 삶을 서원하는 의식도 치른 이후, 수행자는 자신의 불성을 성숙시키는
육바라밀행을 닦고(Ed) 타인의 심상속을 성숙시키는 사섭법에 의해(Ee) 살아가게 된다.27)
육바라밀에 대한 설명 중 특기할만한 것은 다음과 같다.
①보시: ‘재가보살은 재보시를 하고 출가보살은 법보시를 행하라. 출가보살이 재보시를 하는 경우 재물을 얻는 과정에서 계행을 어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생의 공덕으로 얻어진 재물은 보시해도 된다.’, ‘재물을 쌓은 후 일시에 많은 보시를 하는 것보다, 기회가 될 때마다 조금씩 여러번 보시하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재물을 쌓는 과정에서 구걸자를 쫓아버리게 되고, 쌓은 후에는 구걸하지 않는 자에게 보시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②지계: ‘계행이 청정할 경우 힘들이지 않아도 재산이 모이며, 공포심을 주지 않아도 모두가 공경하게 된다.’,
‘계행이 청정한 자에 대해서는 그 신발에 묻은 먼지도 상서롭다고 여겨 가져가서 공경한다.’
③인욕: ‘천겁의 보시로 쌓은 공덕은 한 번의 분노로 모두 무너진다.’, ‘남이 나를 해치는 것은 나의 악업을 씻어 주는 것이기에 이에 대해 화를 낸다면 배은망덕한 짓이다.’, ‘그 마음에 질투심이 있다면 <모든 중생의 성불을 원한다>는 그의 보리심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나를 비방하는 것도 인욕하고 나를 칭찬하는 것도 인욕하라.’
④정진: ‘나만이 이를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정진하라.’, ‘다른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정진하라.’,
‘정진하다가 피로하면 잠시 휴식하라, 그렇지 않으면 정진에 대해 厭惡心이 난다.’
선정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의 경우, 여기서는 먼저 요점만 소개한 후 마지막에 장을 달리하여 ‘止’(samatha)와 ‘觀’(vipaśanā)이라는 이름 하에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관에 대한 설명은 그 분량이 ?보리도차제론? 전체의 약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방대하고 상세하다.
육바라밀은 자신의 불성을 성숙시키는 수행이다. 보살은 이런 육바라밀행과 아울러 타인의 마음을 계발해 주는 사섭법을 갖추어야 한다(Ee). 사섭법이란 ‘가르침이나 재물을 베푸는 布施와 타인을 좋은 말로 가르치는 愛語와 타인으로 하여금 가르침대로 수행케 하는 利行과 자신도 함께 수행하는 모습을 보이는 同事’로 타인에게 이득을 주기 위한 네 가지 방법이다.
상사도의 길에 들어선 보살은 칠종인과법과 자타상환법에 의해 지극한 자비심을 계발하고 궤범사 앞에서 불퇴전의 서원식을 치른 후 육바라밀과 사섭법에 의해 윤회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데, 서원식 이후 3아승기 겁이 지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쫑카빠는 말한다. 상사도의 수행자는 깨달음을 서두르지 않는다. 마치 ?법화경?에서 아라한도를 성취한 붓다의 제자들이 수기를 받고 무수겁 동안 보살행을 닦을 것을 서원하듯이 ….
무수겁 이후의 성불을 다짐하는 보살행이라고 하더라도, 선정과 반야의 수행, 즉 지관의 수행이 결여되어 있으면
진정한 불교 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다. 지관의 수행을 통해 三乘의 모든 공덕이 발생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보리도차제론?에서 말하는 지관 수행이란 무엇일까? 쫑카빠는 먼저 지와 관을 ‘바람 부는 밤에 벽화를 보기 위해 등불을 켜는 것’에 비유한다. 밤에 벽화를 보기 위해 등불을 켤 때 바람이 잔잔해져야 벽화를 똑똑히 볼 수 있다. 여기서 바람이 잔잔해지는 것은 止에 해당되고, 벽화가 똑똑히 보이는 것은 觀에 해당된다.
정혜쌍수, 지관겸수, 지관쌍운이란 지와 관을 함께 닦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쫑카빠는 먼저 지를 닦은 후 그 지에 의지해 관을 닦는 지관쌍운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지의 수행을 설명하면서 ?유가사지론?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소개하는데 지의 대상(所緣)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28)
ㄱ. 주변소연 - ①유분별영상, ②무분별영상, ③사변제성, ④소작성변
ㄴ. 정행소연 - ①부정, ②자민, ③연기, ④계별, ⑤수식29)
ㄷ. 선교소연 - ①온, ②처, ③계, ④연기, ⑤처비처
ㄹ. 정혹소연 - ①번뇌의 일시 단절, ②번뇌의 영구 단절
수행자는 자신의 성향을 파악하여 지의 대상을 선택한다. 예를 들어 잡념이 많은 사람은 정행소연 중 수식의 지를 닦고,
탐욕이 많은 사람은 부정의 지를 닦는다. 그리고 이러한 예비 수행 없이 얻어지는 삼매는 가짜 삼매라고 쫑카빠는 말한다.
그런데 쫑카빠가 가장 뛰어난 지의 수행으로 권하는 것은 ‘불신을 대상으로 삼아 마음을 모으는 삼매’이다. 좋은 불상이나 불화를 구하여 되풀이하여 보아 그 세밀한 모습을 익힌 후 정좌하고 앉아 그 모습을 떠올리는 수행이다. 자신이 보았던 불신의 모습이 명확히 떠오를 때까지 의식을 집중한다. 이 때 불상이나 불화를 직접 눈으로 보면서 수행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지의 수행은 근식으로 닦는 것이 아니라 의식으로 닦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신을 떠올리는 삼매’의 장점은 첫째 예배와 공양, 발원 등의 자량을 쌓는 밭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지의 수행이 익숙해질 경우 불상이 없는 곳에서도 언제든 불신을 떠올린 후 예배드리고 공양을 올리며 발원을 할 수 있다. 둘째, 참회로 악을 정화하는 밭이 된다. 생활 속에서 죄업을 지었을 경우 즉각 불신을 떠올린 후 참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임종시 제불을 염할 수 있기에 죽은 후에도 보리심에서 물러서지 않을 수 있다. 넷째, 다라니를 욀 때 본존으로 모실 수 있다. 쫑카빠는 ‘불신을 떠올리는 삼매’에 드는 방법에 대해서도 다른 수행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상과 같은 지의 수행의 목표는 혼침과 도거에서 벗어나 심신이 편안해지는 경안의 상태에 도달하여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心一境性)이다. 그리고 지의 수행을 통해 경안과 심일경성을 이룩한 수행자는 그를 토대로 비로소 관의 수행에 들어간다(Eg). 수행자가 만일 지의 획득에서 그 수행을 멈춘다면 이는 외도와 다를 게 없다.30) 수행이 불교적일 수 있는 것은 지 이후에 이루어지는 관의 수행 때문이다. 그리고 관의 수행이란 한 마디로 말해 귀류논증적 중관파의 해석에 입각해 중관사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육바라밀 중 반야바라밀에 해당한다.
관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수행자는 먼저 아공에 대한 정견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른 모든 수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관의 수행도 문사수 삼혜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올바른 경론의 내용을 듣고(聞慧), 그런 내용에 대해 숙고해야(思慧) 정견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견을 갖기 위해서 수행자는 관 수행의 의지처가 될 올바른 경론을 선택해야 한다.
경전은
공성,
무상,
무생,
무원,
무유정,
무명자
무보특가라 등을 설한 요의경과
자아,
유정,
명자,
양자,
사부,
보특가라 등을 설하는 불요의경으로 나누어진다.
다시 말해 진제와 공성을 말하는 경전은 요의경이고
속제와 자아를 말하는 경전은 불요의경이다.
수행자는 이 중 요의경에 의지해야 하며 중관적 의취가 담겨 있는 경전이 바로 요의경이다.
그리고 귀류논증파와 자립논증파라는 중관파의 양대 학파 중 귀류논증파의 견지에서 요의경을 해석하여
관 수행의 자료로 삼는 것이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쫑카빠는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중관에 대한 문과 사의 지혜가 생한 후 수혜의 체득을 위한 관 수행에 들어갈 경우 앞에서 말했듯이 지의 수행,
즉 사마타를 먼저 성취해야 한다. 가부좌하고 앉아 심신이 경안의 상태에 이르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심일경성이 이루어졌을 때, 자아와 제법의 공성에 대해 귀류논증적 중관파의 견지에서 사유한다. 이런 사유는 단순히 이해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관의 수행시 이런 이해를 떠올려 되풀이하여 관찰 수습해야 한다. 지의 수행 다음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관의 수행이란 철저한 사택수이다. 다시 말해 분별적 관찰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별적 관찰이 강화되어, 앞에서 이룩되었던 사마타의 상태가 흐트러지게 되면 관의 수행을 중지하고 다시 마음을 모두어 사마타의 수행에 들어간다. 그리고 사마타가 완성되면 다시 중관적 이취에 대한 분별적 관찰에 들어간다. 이렇게 지와 관, 다시 말해 위빠샤나와 사마타를 교대로 되풀이하는 수행을 쫑카빠는 지관쌍운법이라고 부른다(Eh).
지관쌍운을 위해서는 먼저 사마타의 성취 능력도 키워야 하고 중관에 대한 정견도 갖추어야 한다. 어느 때든 가부좌하고 앉아 삼매의 대상에 집중하면 사마타의 상태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을 터득하였고, 귀류논증파적 해석에 입각해 중관적 이취에 대한 정견을 터득한 수행자만이 지관쌍운의 수행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쫑카빠가 말하는 지관쌍운법이란 “사마타의 시작 → 사마타의 완성 → 위빠사나 수행 → 사마타가 흐트러짐 → 사마타의 시작 → 사마타의 완성 → 위빠사나 수행 → …”으로 계속되는 ‘교차적 지관 수행’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 중에서 각각의 ‘위빠사나’의 단계는 그 이전에 완성된 ‘사마타’에 토대를 두고 수행되기에 ‘지관쌍운의 수행’이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다.31) 그리고 이러한 지관쌍운의 수행 이 완성되어야 즉신성불의 밀교 수행이 허용된다.32)
3. 보살의 마음 - 종교심, 도덕성, 출리심, 보리심, 청정견
지금까지 보았듯이 ?보리도차제론?에서 목표로 삼는 이상적 인간이란 상구보리하고 하화중생하며 살아가는 보살이다.
이는 불교적 지성뿐만 아니라 불교적 감성도 갖춘 인간이다. 불교적 지성은 상사도의 말미에서 이루어지는 공성에 대한 조망을
통해 얻어지며, 불교적 감성은 하사도의 종교심과 도덕성, 중사도의 출리심, 그리고 상사도의 보리심을 훈련함으로써 얻어진다.
?보리도론?에 제시된 수행체계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이 입문한다고 해도 결국은 동일한 마음을 갖춘 규격화된 보살을 만들어내고야 만다는 점이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재물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아직 하사도의 첫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에 대한 명상’(종교심)이 철저하지 못한 것이며, 말이나 행동 또는 생각으로 잘못을 저지른 후 그 ‘죄업의 과보에 대한 두려움(도덕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직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이 몸에 배지 못한 것이며, 내세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 즉 ‘윤회하는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에 대해 공포감이 든다면 중사도에서 이루어지는 ‘해탈을 희구하는 마음’(출리심)이 아직 무르익지 않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나 짐승에 대해 위해할 마음이 나거나 다른 사람의 성공에 대해 질투심이 난다면 이는 상사도의 초입에 이루어지는 보리심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며, 자아와 현상세계(法)에 대한 실재론적 집착이 남아 있다면 지관수행을 통해 이룩되는 공성에 대한 자각이 아직 철저하지 못한 것이다.
감성과 지성, 실천과 이론이 조화를 이루는 보살의 인격을 만들어 내는 것이 ?보리도차제론?에 제시되어 있는 수행체계의 목표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살의 삶은 무수겁의 세월 동안 윤회하며 하화중생과 상구보리를 지향하고 살아가는 끝없는 過程的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