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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퇴계 이황이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퇴계는 평생 책을 놓지 않고 책에서 익힌 내용을 몸소 실천했다. 조선고적도보 11권(1931).
"손으로는 물 뿌리고 소제도 할 줄 모르면서 입으로 천리(天理)의 오묘한 이치를 말하는구나."
남명 조식(1501~1572)은 퇴계 이황(1501~1570)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사람은 조선 성리학의 양대 거목이었다. 이황이 경상좌도 사림(남인)의 스승이었다면, 조식은 경상우도 사림(북인)의 영수였다. 남명은 퇴계가 제자 학봉 김성일에게 유교 경전인 '태극도설'을 설명했다는 것을 나중에 전해 듣고 악담을 퍼부었던 것이다.
사진2. 퇴계의 진면목을 담은 <퇴계선생언행록>.
퇴계 제자들의 기록물 중 퇴계의 언행을 모아 간행된 저술이다. 소수서원 소장.
남산 퇴계 이황 동상
<퇴계선생언행록>의 한대목이다. 퇴계 제자들의 각종 기록물에 산재해 있던 퇴계의 언행을 모아 영조 49년(1883) 도산서원에서 간행된 저술이다. 학문·교육·예절관, 생활태도와 성격, 관직생활 등 퇴계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남명은 성리학에서 주자(주희) 이래 일인자로 꼽히는 퇴계를 항상 가소롭게 여기고 사사건건 모욕했다. 사람이 너무 순진하고 고지식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도산정사(도산서원) 밑에 관청이 관리하는 어장이 있었다. 일반인들은 고기를 잡을 수 없는 곳이다. 퇴계는 여름만 되면 도산정사에 와서 지냈지만 일부러 어장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남명이 이 소식을 듣고 "어찌 그리도 소심한 것인가. 내 스스로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관가에서 금한다고 굳이 피할 것은 무엇인가"라고 비웃었다. 이에 퇴계는 "조식이라면 그렇게 하겠지만 나는 이렇게 할 따름이다" 했다.
조식은 산청의 단성현감 벼슬을 사양하면서 쓴 상소에서 어린 명종 대신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를 겨냥해 "깊은 궁궐의 한 과부"라고 표현해 파란을 일으켰다. 평소 다른 사람을 나쁘게 말하지 않는 퇴계도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 없었다.
"남명은 비록 이학(주자학)으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자부하지만 그는 다만 일개의 기이한 선비일 뿐이다. 그의 의론이나 식견은 항상 신기한 것을 숭상해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주장에 힘쓰니 이 어찌 참으로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 하랴."
퇴계는 평생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익힌 바를 몸소 실천하는 진정한 학자였다. 퇴계의 제자로 이조판서에까지 오른 정유일(1533~1576)은 "(선생은) 평상시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서재에 나가 자세를 가다듬고 단정히 앉아 조금도 어디에 기대는 일이 없이 온종일 책을 읽었다"고 했다.
율곡과 이기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박순(1523~1589)도 "바른 학문을 밝게 드러내고 후배들을 끌고 인도하여, 공맹정주(공자, 맹자, 정자, 주자)의 도가 불꽃처럼 우리 동방을 밝히게 한 사람은 오직 선생 한 사람이 있다"고 칭송한다.
퇴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자리에 앉아서 책만 읽다 보니 건강하지는 못했다. 역시 퇴계의 제자인 이덕홍(1541~1596)은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학문에 뜻을 두어 종일토록 쉬지 않고, 밤새도록 자지도 않고 공부를 하다가 마침내 고질병을 얻어 몹쓸 몸이 되고 말았다. 배우는 자들은 모름지기 자기의 기력을 헤아려서 잘 때는 자고 일어날 때는 일어나며, 때와 장소에 따라 자기 몸을 살펴 마음이 방종하거나 빗나가지 않게 하면 된다. 굳이 나처럼 하여 병까지 날 필요야 있겠는가' 하였다"고 전한다.
사진3. 퇴계의 스승이자 숙부인 송재 이우 초상.
`이마가 넓고 두툼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퇴계의 외모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그림이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퇴계가 학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전적으로 숙부 이우(1469~1517) 덕분이다. 퇴계는
"숙부 송재공(이우)은 학문을 권면하면서 몹시 엄하셔서 말이나 얼굴에 조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내가 논어를 주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틀림없이 외웠음에도 칭찬은 한마디도 없으셨다. 내가 학문에 게으르지 않은 것은 다 숙부께서 가르치고 독려하신 때문"이라고 늘 제자들에게 얘기했다.
성리학의 최고봉이 보기에 초기 사림파 학문은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조광조는 학문이 부족하다 보니 시행한 것이 지나쳐 마침내 일에 패하고 말았다. 학문에 충실하고 덕행과 기량이 이루어진 뒤에 세상일을 담당했더라면 그 이룬 바를 쉽게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또 "김종직은 학문하는 사람이 아니며 그가 종신토록 했던 일은 다만 화려한 문장과 시가에 있었으니 그 문집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평했다.
서경덕에 대해서도 "우리 동방에는 이와 기를 밝힘에 있어서는 이 사람이 처음"이라면서도 "다만 그가 말할 때에 자부함이 너무 지나친 것을 보면 터득한 경지가 깊지 못한 것 같다" 하였다.
퇴계는 높은 관직을 지냈지만 스스로 낮추고 모범을 보였다. 당시 고관들은 국가 의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퇴계는 언제나 관청의 세금이나 부역도 남들보다 앞서 처리했다.
곽황(1530~1569)이 예안의 수령으로 있을 때
"이 고을의 세금이나 부역에 대해 나는 아무 걱정이 없다. 퇴계 선생이 온 집안사람을 거느리고 와 남보다 먼저 바치니 마을 백성들도 혹여 뒤질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한 번도 독촉하지 않아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으니 내게 무슨 걱정이 있을까"라고 주위에 말하기도 했다.
선물을 주고받음에도 도리를 앞세웠다. 관가에서 교제의 예로서 보내오는 작은 물건은 애써 거절하지 않았지만 받아서 주위와 나눴다.
<퇴계언행록>은 "선생이 일찍이 월란사(예안의 사찰)에 머물 때 작은 물고기를 보내준 사람이 있었다. 선생은 이웃 노인들에게 나누어 보낸 뒤에야 비로소 맛을 보았다"고 했다. 음식은 허기를 면하면 그만이었다. 퇴계의 식사는 끼니마다 세 가지 반찬을 넘지 않았고 여름에는 건포 한 가지가 전부였다.
임금은 퇴계를 늘 가까이 두려고 했지만 그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기를 소원했다. 율곡 이이(1536~1584)는
"명종 말년에 임금의 부름이 여러 번 내렸으나 굳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명종은 이에 '어진 이를 불러도 오지 않는다'는 제목을 내 시를 짓게하고, 화공을 시켜 그가 사는 도산을 그려서 바치게 하였으니 선생을 공경하고 사모함이 이와 같았다"고 했다.
<퇴계언행록>은 퇴계의 외모도 언급한다. 1000원짜리 지폐에서 퇴계는 안면이 여의고 병색이 짙은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얼굴이 그다지 갸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의 손자 이안도(1541~1584)는 "선생은 이마가 두툼하고 넓었다. 송재(숙부 이우)가 매우 아껴서 이름 대신 항상 '광상(넓은 이마)'이라고 불렀다"고 묘사했다.
<언행록>은 '고종기(考終記)'로 마무리된다. 병세가 완연해진 때부터 사망하기까지 한 달 동안 쓴 일기다. 선조 3년(1570) 11월 9일(음력) 제사를 지내려고 온계 이해(퇴계의 형)의 종가에서 묵다가 한질(감기)에 걸렸다. 몸이 편치않은데도 제사때 신주를 받들고 제물을 드리는 것을 손수했다.
15일 병세가 더욱 악화됐는데도 공부를 그치지 않았다. 소식을 들은 기대승(1527~1572)이 사람을 보내 편지로 문안했다. 선생이 자리에 누운 채 답장을 썼다. 치지격물(致知格物)의 해설을 고쳐서 자제들에게 읽게 한 뒤 기대승과 정유일에게 보냈다.
12월 4일 유훈을 적게 했다.
"첫째, 예장(禮葬·나라에서 지내주는 장사)을 하지 마라. 예조에서 전례에 따라 예장을 하겠다고 하거든
유명이라고 자세히 말해서 굳게 사양하라.
둘째, 유밀과(기름에 튀긴 과자)를 쓰지 마라.
셋째,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다만 조그만 돌을 쓰되, 그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써라."
그리고 퇴계는 8일, 눈을 감았다. 고종기는 퇴계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침에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하였다. 이날은 개었지만 유시(酉時·17~19)시부터 갑자기 흰 구름이 지붕 위에 모이더니 눈이 내려 한 치쯤 쌓였다. 잠시 후 선생이 자리를 바르게 하라고 명하므로 부축하여 일으키자 앉아서 운명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13."매화에 물 주라"하고 앉은채로 운명한 퇴계[실록 밖의 인물評4]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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