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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91. [역경의 열매]
정상권 (1-16) 절망의 끝에서 말씀만이 한줄기 빛이었다
내 인생의 주제성구를 뽑는다면 빌립보서 4장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가 아닐까 싶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과 극한 고통, 처절한 멸시를 당해 본 나에겐 이 말씀이 언제나 깊은 감사와 은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삶의 원천은 언제나 '신앙'임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사실 간증이란 형식을 빌려 내 삶을 드러내기까진 쉽지 않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내가 한센병 환자였으며 소록도 생활까지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내 주변에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난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가려 결심했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이것마저 내 아집임을 깨달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를 건지시고 치유시켜 주시고 귀하고 놀라운 일들을 감당케 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그분이 바로 내 삶의 주인이셨음을 고백하면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신다. 그 무엇보다 이 사실을 독자 여러분들이 분명히 깨닫게 되길 기도한다.
충북 청주의 한 변두리 마을에서 태어난 나는 늦둥이였다. 7남매 중 막내로 나를 낳은 어머니의 당시 나이가 46세였다. 나는 6살 때 8·15 해방을, 11살 때 6·25 전란을 만났다. 인민군들이 마을까지 들어와 쌀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소년단 청년단을 조직해 활동하던, 어지러웠던 당시 상황이 눈에 선하다.
나는 6·25 직후 친구들과 산에 탄피를 주우러 다니곤 했는데 이때 죽은 군인들의 시체를 무수히 보았다. 인간의 죽음이 이렇게 비참한 것인지, 어린 나에겐 무서움과 충격 그 자체였다. 청주 무심천에 버려졌던 무수한 주검들을 보며 인간이 인간을 왜 이렇게 죽여야 하는지 어린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울 수복 후 초등학교에 다시 다니게 된 나는 학교가 너무 좋았다. 나도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꿈을 꾸며 열심히 공부했다. 성적이 상위권이어서 사범학교에 갈 수 있는 실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예비고사에서 낙방을 하고 말았다.
교사의 꿈을 접게 된 나는 주성중학교에 입학했다. 집과는 12㎞ 정도 떨어져 있어서 2시간30분을 걸어야 했다.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 하나 싸들고 집을 나서면 밤 늦게야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지식이 늘어나는 것이 마냥 행복했다.
이렇게 분주한 삶을 보내던 어느날, 팔뚝 안쪽에 마비가 오는 느낌이 있었다. 내가 꼬집어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의원을 찾아 뜸을 뜨고 여러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얼굴이 부으면서 종기 같은 것이 나기 시작했다. 코의 점막이 헐면서 호흡곤란도 왔다. 증상이 심해지면서 결국 내가 '한센병' 즉 나병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와 가족의 놀라움과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만 해도 이 병은 하늘이 내리는 형벌로 인식될 만큼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고칠 방법도, 약도 없는 이때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집의 구석방에 갇혀 사람들의 눈에 전혀 띄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중학교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왔는데 나는 얼굴도 마주 보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돗자리를 펴고 절을 했던 기억이 난다. 동네에 소문이라도 나면 큰일이기에 날라다 주는 음식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내 삶은 희망도, 가능성도 전혀 없는 잿빛이었다.
정리=김무정 기자 kmj@kmib.co.kr
* [역경의 열매] 정상권 (1) 절망의 끝에서 말씀만이 한줄기 빛이었다
* [역경의 열매] 정상권 (2) 어머니가 눈물 흘리며 내민 약 먹고 사경
* [역경의 열매] 정성권 (3) 부랑아 생활중 한센병 악화 소록도로
* [역경의 열매] 정상권 (4) 꾸준한 치료―기도로 소록도서 ‘완치’ 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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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럭 △1940년 충북 청주 출생 △56년 소록도 입소 후 완치 △한센 국제 IDEA협회장 및 한국회장 △예장(합동)총회 사업부장 △서울 암사제일교회 장로 △새마을훈장 및 국민훈장 서훈
***[역경의 열매] 정상권 (2) 어머니가 눈물 흘리며 내민 약 먹고 사경
한센병 발병은 나 혼자만의 문제로 끝낼 수 없었다. 7남매의 막내인 내가 한센병에 걸린 사실을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던 누나들의 시댁이 안다면 파혼을 당할 것이 뻔했다. 이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또 어린 내가 골방 속에서 병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그 아픔이 어떠했으리란 것은 내가 부모가 되어 보니 알 것 같다.
당시 우리집은 15명이나 되는 대가족에 끼니를 겨우 때우는 빈곤한 상태였기에 어머니는 단호한 결정을 내리셨다. 나를 그대로 두면 죽을 것이 뻔한데 이 때문에 누나들이 시집도 못 가고 집안이 풍비박산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머니는 어디서 창출(蒼朮)이란 한약재를 구해 오셔서 나에게 눈물을 흘리시며 먹으라고 하셨다. 창출을 많이 먹으면 죽는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으신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느낌을 은근히 받았지만 내가 죽어 우리 집안 우환이 없어지면 좋겠다는 사실보다 지금 내 삶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기에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나는 그 약을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그러나 어머니가 알고 계신 상식은 잘못된 것이었다. 나는 3일 동안 깊은 잠에 빠져 헤매다가 깨어났다. 이미 죽음을 결심한 상태였는데 눈을 뜨니 더 막막했다. 16세 소년에게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다. 이번에는 내가 약국을 돌며 쥐약을 사 모아 마셨으나 구토가 나와 약을 쏟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다시 저수지에 몸을 던졌는데 물만 잔뜩 먹은 채 구출됐다. 죽을 자유도 내겐 허락되질 않았다. 이렇게 되고 나니 다시 자살을 시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살실패가 이젠 두려웠다.
"그래 아무도 모르게 집을 떠나 사라져 버리자. 그것이 가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내가 없어지면 집안에서도 골칫덩이가 사라지는 것이고 누구 하나 나를 찾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새벽에 옷가지 몇 개만 싸 들고 집을 빠져나와 무작정 서울행 열차를 탔다. 청주를 벗어난 적이 없는 내가 난생 처음 서울에 간 것이다.
그러나 몸이 온전치 못한 내가 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가진 돈으로 며칠 음식을 사먹으며 버텼고 그저 정처없이 걸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관심을 가져 주는 이가 없었다. 잠자리와 일자리를 찾을 수 있길 바랐지만 가능성이 없었다.
나는 서울에서도 결국 죽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돼 한강물로 뛰어 들어갔다. 허우적거리며 의식을 잃으려는 순간에 한강모래를 리어카로 실어나르는 아저씨가 나를 발견하고 구해주었다. 참 질긴 목숨이었다. 무작정 상경해 돈이 떨어져 죽으려 했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그 아저씨는 나를 데리고 삼각지 근처에 있던 삼광식당으로 갔다. 이곳에서 자면서 일하라고 소개를 해 준 것이다. 나는 내 병을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다. 식당에서 청소하며 간신히 밥을 얻어 먹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내 병을 속일 수 없었다. 금방 들통이 나서 쫓겨나야 했다. 울면서 식당을 나올 때 집에서 나올 때보다 더 서러웠다.
구걸하다시피 서울역 주변을 맴돌며 지냈다. 그런데 나처럼 거리를 떠도는 패거리들이 나를 보더니 자신의 그룹으로 들어 오라고 했다. '역전파' '서대문파'로 불리던 내 또래인데 잠자리도 주고 취직도 시켜 준다고 꾀었다. 할 수 없이 그들에게 갔더니 대뜸 우유통을 주면서 밥부터 얻어 오라고 시켰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대로 발길질이 날아왔다. 나는 내 의지는 뺏긴 채 그들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는 삶을 시작해야 했다. 참 기구한 인생이었다.
***[역경의 열매] 정성권 (3) 부랑아 생활중 한센병 악화 소록도로
부랑아가 되어 거리를 떠도는 삶도 오래가지 못했다. 잘 못 먹고 시달림을 당하다 보니 한센병이 심해졌고 급기야 거리에서 쓰러져 경찰에 의해 발견된 나는 한센병 환자임이 드러나면서 1957년 7월, 소록도로 후송조치됐다.
소록도는 고흥반도 녹동항에서 남쪽으로 약 600m 지점에 있는 아름다운 섬이다. 지형이 어린사슴과 비슷하여 소록(小鹿)이라 했으며 주민은 나병 환자와 국립소록도병원에 근무하는 직원 및 그 가족이 전부였다. 일찍부터 한센병 환자 집단거주지로 자리잡은 섬이다. 처음부터 한센병 환자 치료를 위해 건설된 국립소록도병원은 1916년 도립자혜의원으로 맨처음 문을 열었다.
나는 소록도 이야기를 들어 이미 알고 있었고 이곳에 정말 오기 싫었다. 나도 한센병 환자지만 소록도는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만난 주민들의 모습은 한눈에도 비정상적이고 몸이 온전치 못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참으로 착잡하고 고통스러웠다. 이분들과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숙소를 배정받고 소록도 생활을 시작하는데 정을 붙이지 못했다. 그런데 소록도 중심부에 큼지막한 교회가 잘 지어져 있었고 예배를 알리는 종소리가 가끔 울려퍼졌다. 내 기억 속의 교회는 크리스마스 때 조카와 함께 두번 정도 나가 노트와 공책을 받았던 기억이 전부였다. 가슴이 휑하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 눈물을 흘리던 나는 이곳에라도 가 보고 싶었다. 또 마침 어린 소년 혼자 이곳에 온 것을 안타깝게 여겨 교회에 가자고 이끄는 이도 많았다.
한 분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예배당 안은 뭔지 모르는 온기가 있었다. 성도들의 모습은 병의 후유증으로 똑바로 쳐다보기도 민망했지만 그 속에서도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처음에 주일마다 교회만 왔다갔다했는데 어느날 황성수 박사란 분이 교회 강사로 초청받아 오셨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분은 일본 도호쿠 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변호사와 국회부의장을 지낸 분으로 목사 안수도 받으셨다.
"여러분, 용기를 잃지 말고 희망과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하면 하나님이 엄청난 능력과 힘을 주십니다. 그 힘으로 인생을 살면 여러분은 참된 행복과 감사 속에 성공적인 인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설교에 내 마음이 움직였다. 그 말씀이 믿어졌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거듭남을 체험할 수 있었다. 성령의 은사도 이때 받았고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기 시작했다.
당시 소록도에는 7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내가 출석한 중앙교회는 1000여명의 성도가 있었다. 학생만 300여명 됐는데 나는 처음 주일학교에 배정돼 신앙 훈련을 쌓았다. 그러다 학생부로 올라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부 회장을 맡았다. 리더가 되고 보니 모든 면에서 내가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자연히 신앙이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 한센병 환자들은 모두 국립소록도병원에서 정기검진을 받으며 '대풍자유'란 약을 치료제로 받아 사용했다. 이 약은 색이 변하면서 특이한 냄새를 풍겨 먹기가 힘들었다. 양도 많았다. 그런데 내가 소록도에 들어간 해부터 미국에서 'DDS 다이아손'이란 약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그 효과가 놀라웠다. 이 약은 무척 귀하고 비싸 간호사들이 직접 먹여주곤 했다. 그 와중에도 이를 빼내 쌀과 바꿔 먹는 이들도 있었다. 한센인들이 농사를 짓고 식량 일부를 배급받아도 양식이 부족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젊고 발병 초기여서인지 이 약을 쓰면서 몸 회복이 놀랍도록 빨랐다.
***[역경의 열매] 정상권 (4) 꾸준한 치료―기도로 소록도서 ‘완치’ 판정
소록도에 들어가 치료를 받는 동안 나는 누구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물론 친구들까지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사람이 그리워 누군가를 찾으면 그 사람에게는 오히려 부담이 될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찾으면 이곳으로 와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요 짐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곳에서 지내다 보니 사람들이 너무 그리웠다. 특히 어머니가 가장 그리웠다. 나는 한 순간도 나를 죽으라고 했던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랬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소록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홀로 있을 때 많은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를 단 한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점점 깊어지는 그리움을 견디다 못해 가출 3년 만에 처음으로 집에 편지를 썼다.
그러자 어머니는 소록도에 있는 나를 보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오셨다. 충북 청주에서 소록도 녹동까지는 꽤 먼 거리였는데, 한글을 전혀 모르셨던 어머니가 길을 물어물어 소록도까지 걸어오셨다.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찡하다.
당시 3·15 부정선거 때문에 대부분의 길이 통제되었고 어디론가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무척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는데 어머니는 그 험한 길을 지나 나를 만나러 오신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평소와 달리 면회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소록도 병원장이었던 차윤근씨가 나와의 면회를 거절하고 어머니를 돌려보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들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모자가 다시 만나 얼굴을 한번 볼지언정 그 아픔은 예전보다 더 커지기에 못 만나게 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어머니를 못 만났지만 나를 위해 먼 길을 와 주셨다는 사실 만으로 힘이 솟았다.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랑만으로도, 그 기쁨만으로도 소록도에서의 남은 치료를 견뎌낼 수 있었다.
나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간호보조업무를 맡아 도왔다. 하나님께서 내게 왜 이 일을 시키셨는지는 나중에 알게됐다. 여기서 배운 의료 기술이 정착촌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또 행정적인 부분도 어깨너머로 배웠는데 이 역시 나중에 아주 유용하게 사용됐다.
짧지 않은 인생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 앞에 거듭난 우리 인생들은 그 어떤 것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세상적 가치기준으로 보면 귀하고 좋은 것과 천하고 허름한 것이 구별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엔 그 무엇이 차이가 있을까 싶다. 그러므로 세상적 기준에 눈 돌리지 말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할까를 늘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소록도 생활이 당시는 죽기보다 싫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축복이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이곳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한센병에 걸린 것도 감사해야 한다. 병에 걸리지 않고 남들처럼 평범한 인생을 살았더라면 지금 내가 이만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을지 결코 자신이 서지 않는다.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정기적인 치료를 받은 내 몸은 하루하루가 달라졌다. 더구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열심히 기도한 결과로 나는 결국 소록도국립병원에서 '완치'라는 최종판정을 받게 되었다. 소록도를 떠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역경의 열매] 정상권 (5) 완치되고도 고향집 못돌아가 한센병 정착촌서 새 인생 설계
한센병이 완치돼 소록도를 뒤로 하고 새 삶을 찾아나서는 내 마음에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다. 수많은 환자들 가운데서 내가 빨리 치료가 되어 나갈 수 있게 된 것은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지만 그동안 정들었던 이들과 헤어지는 것은 안타깝고 슬펐다.
"하나님, 제 기도를 들으시고 한센병을 빠르게 치료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진정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병이 완치가 됐어도 나는 보고 싶은 어머니가 계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잠잠했던 집안에 다시 풍파를 일으키는 것이라 여겼다. 내가 소록도에 간 것을 아는 사람은 알 터인데 그 아들이 나아서 돌아왔다고 해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고 나와 접촉하는 것도 무서워할 것이 뻔했다. 당시 한센병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소록도병원에서 지내며 알게 된 한 친구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자네, 곧 여기서 나가게 되면 남원 한센병 정착촌으로 가게나. 이도령과 춘향이의 무대인 남원은 경치가 뛰어난데 한센병력 환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이 있다네. 그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해 보게나."
오랜 투병으로 지친 내겐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나는 물어물어 남원 한센병 정착촌을 찾아갔다. 당시 한센병 환자들은 나아도 얼굴과 손에 남아 있는 후유증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어 산속에 모여 살았고 이런 정착촌이 전국 곳곳에 있었다.
내가 도착한 남원의 '왕제'란 마을은 당시 8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모두 세상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착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마치 친자식 이상으로 환대하며 함께 잘살아보지고 손을 잡아주었다. 내 나이 당시 20세,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나이였다.
동병상련이라고 했던가. 그들과 한마음이 되어 농사를 지으며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발이 온전치 않아 농사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능률이 떨어지다보니 식량 자급자족이 안 되었다.
내가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어머니를 남원에 와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집으로 편지를 보내자 한걸음에 달려오신 것이다. 우리 모자는 부둥켜 안고 눈물의 상봉을 했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남원에 있는 나를 보기 위해 종종 다녀가셨다. 한번은 어머니가 오셔서 식사를 대접하려는데 쌀이 없었다. 워낙 여유없는 생활을 하고 있던 터라 맛있는 쌀밥 한 번 해 드리기가 어려웠다.
당시 나는 낡은 자전거로 달걀을 팔러 다니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부랴부랴 쌀을 구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지만 막막했다. 그런데 골목 어귀에서 갑자기 크고 누런 구렁이가 한 마리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잡아다 팔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를 내 냉큼 구렁이를 잡았는데 예상 외로 순순히 잡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구렁이를 꽤 비싼 값에 팔았다.
나는 먼길을 오신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었는데 그 안타까움을 읽으신 주님이 기적을 베푸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어머니께 쌀밥을 지어 드릴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감사가 절로 나온다. 세심히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역경의 열매] 정상권 (6) 대통령이 90억 지원 지시… 사료공장 세워
남원 정착촌에서 어느덧 4∼5년이 흘렀고 드디어 나의 반쪽을 만나게 됐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20대 중반의 청년이었고, 그녀는 이제 막 20대 초반이 된 꽃다운 나이였다. 유난히 희고 고운 피부와 맑은 눈망울이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내는 꽃처럼 아름답고 천사처럼 착한 사람이었다. 마을 사람 누구에게도 친절하고 다정하게 따뜻한 마음을 베풀 만큼 속이 깊었다.
처음 가정을 이루었을 때, 내 수입은 변변치 못했다. 그저 병아리를 키우는 일이 생계의 전부였다. 나와 아내는 신혼방 아랫목에서 병아리를 키웠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달걀을 팔았는데 영 신통치 않았다. 그럼에도 나를 믿고 따라 준 아내가 참 고맙다. 아내가 없었다면 나는 그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차츰 나를 인정해주면서 많은 일을 맡겼다. 나중에는 농촌지도자 역할을 했다. 1972년 당시 국가적으로 농촌 주택 개량 사업을 했는데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를 다니면서 아주 열심히 일했고 그 성과가 크게 나타났다. 특히 새마을운동이 진행되면서 손수레 길조차 없었던 마을이 차츰 살기 좋은 마을로 변화되었고 나중에는 주변에서 가장 잘사는 마을로 인정받을 만큼 변모했다. 이런 마을 소식을 들은 전라도 지사가 부인과 함께 마을을 찾아왔다. 나는 도지사 앞에서 마을의 사업 보고를 했는데 도지사 내외는 물론 모두가 함께 울었다.
이런 영향인지 각 방송사에서 우리 마을을 취재했고 그 결과 새마을 자립 마을로 승격되었다. 그후 대구 체육관에서 새마을지도자대회가 열렸는데, 전국에서 온 각 마을 대표들이 대통령 앞에서 성공 사례를 발표했다. 나는 남들처럼 웅변식으로 거창하게 하지 않고 진솔하게 대화하듯 우리 마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반응이 가장 좋았다.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언제나 도우셨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막힘없이 잘 진행되었다고 여겨진다. 그 결과 나는 새마을훈장도 받고 이후로도 계속해서 새마을 강사로 불려다니게 되었다.
마을 대표로 일하면서 가장 마음이 뿌듯했던 것은 대통령으로부터 사료공장 지원금을 받았을 때다. 그 당시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90억원이라는 엄청나게 큰돈을 지원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하나님이 함께해주셨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 사연을 소개하면 이렇다. 대통령을 접견할 기회가 있었는데 함께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발언과 질문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내게는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찬스를 보아 대통령께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소견을 밝혔다. 그리고 우리 마을과 사업에 관한 제의를 일목요연하게 밝혔다. 그 결과 대통령이 우리 마을에 '사료공장'이라는 큰 사업을 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우리 정착 농원에서 생산되는 달걀이 전국 생산량의 25%를 차지할 때도 있었다. 그때 사료가 무척 비쌌는데 우리 사료공장은 손익분기점을 넘길 만큼 잘 운영되었다. 당시 우리가 함께 운영했던 한성사료공장의 한 달 생산량은 1만t이나 되었다. 나중 30만t을 넘겼을 때는 고난 극복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한센병 환자들로 이루어진 정착마을이 처음에는 가난하고 미약하기만 했으나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에 그 어느 곳보다 건강하고 살기좋은 마을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으로 하나가 되지 못했다면, 이런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정상권 (7) 평화봉사단 美 아가씨 “한국 청년과 결혼”
남원 정착촌에서 열심히 일하다 보니 마을 대표가 되어 여러 가지 일을 도맡아 했다. 우리 마을에 평화봉사단원으로 미국인 '미스 강'이라는 자매가 배정됐다. 당시 한센병력자 정착 마을이 전국에 100여개 있었는데, 평화봉사단에서 대표적 마을에 한 사람씩을 파견해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한국에 온 평화봉사단 15명 중 유일한 여성이었던 이 아가씨는 한국 이름이 '강주혜'로 미국 미시간주립대학을 졸업했으며 성격도 싹싹해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교회 주일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고 몸이 아픈 사람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기도 했다.
"저 아가씨는 미국의 좋은 가정에서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며 잘 살 수 있는데 왜 한국의 이 시골마을에까지 들어와 헌신적으로 봉사를 하는 것일까.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나는 그녀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심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깊은 신앙심이 이런 헌신적인 봉사를 하게 된 배경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를 희생하고 남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보며 나의 신앙도 새롭게 정립하고 다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자매를 '누나'라고 부르던 최영만과 유독 친하게 지내더니 어느 날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자매는 나를 이모부라고 부를 정도로 잘 지냈는데 자신들이 결혼을 해야겠으니 허락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최군은 당시 그 자매보다 나이가 많이 어려 여러 가지로 걱정이 되었다. 일시적인 감정으로 인해 최군이 상처를 받으면 어쩌나 싶었다. 그런데 미스 강은 "오히려 최군이 자신을 버리면 버렸지, 자기는 최군을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들의 진지한 태도에 결혼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스 강 부모님은 한국에 오시기 힘들었고, 주례를 해줄 사람이 마땅치 않아 내가 그들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다.
이 사실을 알고 TV방송국에서 취재를 했는데 예고편이 너무 자극적으로 나가는 바람에 전국 정착촌에서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이 결혼을 허락한 내게도 문제를 제기해 왔다. 당시만 해도 나이차를 이해할 수 없는 보수사회였기에 많은 손가락질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격려했고 오히려 주변의 항의를 막아주었다.
두 사람은 방송 출연료를 받아 계획대로 미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는데 지금도 그녀를 생각하면 무척 고맙고 존경스럽다. 여러 면에서 많은 것들을 갖춘 자매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마을까지 와서 여러 사람들을 섬기던 모습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자매의 모습을 무척 기뻐하셨을 것이다. 자신의 학벌과 미모, 많은 재주가 다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겸손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은 그 자매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아닐까 싶다.
종종 그 자매의 소식을 듣는다. 여전히 두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며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최군은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했고, 두 사람 모두 목사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이 바로 우리 정착 마을을 통해 맺어진 사랑의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 이야기는 내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기억이자 아름다운 추억이다.
나는 이곳 정착촌에서 아침부터 밤이 늦도록 정말 열심히 일했다.
***[역경의 열매] 정상권 (8) “사람답게 살아보자” 전국 돌며 강연
전국에 있는 한센인 정착촌 대표들을 모아 창립한 것이 한성연합회다. 처음엔 한센인연합회란 이름으로 시작됐다. 1967년부터 이 모임이 생겼고 75년 사회단체로 첫 등록됐다. 이때부터 시·도지부가 결성됐는데 나는 나이가 어려 열심히 따라다니며 연합회 일을 배웠다. 그러다가 전북지부 사무장이 되어 6년 동안 봉사했다.
그러다 한성연합회는 이름을 바꾸고 한참 뒤인 87년에 가서야 정식으로 창립됐다. 한센인들은 일제 치하 때부터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처음엔 힘이 없었다. 그런데 조직을 갖춘 한성연합회가 활동을 하고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제법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구호물자를 받는 일부터 새마을사업, 순회 지도 등을 하면서 축산기술도 전해야 하는 등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81년부터는 한성협동회 상무이사로 서울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사회단체로서의 조직을 강화하고 중앙정부의 인정을 받아 예산도 지원받을 수 있었고 여러 사업도 진행할 수 있었다.
나는 각 정착촌의 생활보호대상자 양곡을 지원받는 일과 예산 배정을 위해 뛰었고 정착촌의 무분별한 민원 요청을 중간에서 정리하는 일도 맡아 했다. 당시 정부는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한센병 환자들을 소록도에 강제로 보내는 일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한센인들의 인권이 무시되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서 보건복지부에 우리 한성연합회가 자율적으로 이 일을 하겠다고 제안했고 그게 받아들여졌다. 우리가 이 사업을 맡아 몰려다니는 한센인들에게 잘 이야기하고 권면함에 따라 거리를 배회하며 부랑하던 한센인들이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한센연합회 회장을 모시고 전국 정착촌을 돌며 특별 강연을 시작했다.
"우리도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한번 살아봅시다. 우리가 비록 한센병 때문에 가난에 찌들어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살았지만, 열심히 돈 벌고 자립해서 이 불행을 우리로 끝내야 합니다. 그래서 결코 후세들에게는 이 아픔을 넘겨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 부모는 진짜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줍시다."
당시 전국에 있던 101개 정착농원 중에 84곳에 교회가 있었고 몇몇 곳은 성당이 있었다. 나 역시 크리스천으로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었기에 기독교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교회에 힘을 실어주는 데 앞장섰다.
나는 한성연합회 임원으로 다른 마을도 잘살도록 도움을 주었는데 내가 사는 남원정착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당시 우리 마을은 인원이 늘어 35가구 125명이 살고 있었다. 마을 주민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힘을 합쳐 일하고 돈을 모았기에 조금씩 경제적으로 자립을 해가고 있었다.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생기니 탄력이 붙으면서 가구별 수입이 점점 늘어났다. 그랬더니 우리들을 멀리한 채 지냈던 가족, 친척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세상 이치였다.
심지어는 우리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외부 사람들이 오히려 우리 정착촌에 와서 축사 관리 등을 하면서 돈을 벌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외부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왔고 우리 마을에 점점 동화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한센병 마을이라고 상대도 안 하더니 마을이 잘살게 되니 제발로 들어와 함께 살기를 원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역경의 열매] 정상권 (9) 美 월드비전,정착촌 아동 400명에 장학금
정착촌의 경제적인 문제가 안정되자 새로 대두된 것은 자녀 교육이었다. 우리 마을엔 초등학교 분교밖에 없어 어린이들이 제대로 교육받기엔 열악했다. 학교에는 선생님이 두 분 계셨는데 아이들이 수업받다가 집에 가버려도 누가 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이 아이들을 위해 당시 월드비전 정착복지관장이었던 신정하씨가 미국 후원자와 연결시켜 자녀들의 학비를 도와주는 1대 1 결연을 맡아 지원을 해줬다. 미국 월드비전에서 정착농원 어린이 400여명에게 1명당 매달 7달러씩 장학금을 줬다. 당시 이 금액은 학비는 물론 학용품을 사서 공부하기에 알맞은 액수였다. 내가 살던 남원농장에도 40여명의 아이들이 학비 보조를 받았다. 요즘 한국의 NGO 단체들이 해외 어린이들과 후원 결연을 맺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당시 정착농원은 일반 사회사업가들이 원장을 맡았는데 신 관장은 처음부터 이 관습을 깨고 한센병력자 33명을 대표로 뽑아 지원을 받도록 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 사람 돈 받기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받을 땐 좋은데 한달 동안 쓴 결산보고서를 만들고 사업계획서도 짜야 하고, 그것도 그냥 만드는 게 아니라 6하원칙에 맞는 영수증을 반드시 첨부해야 했다. 어린이 사진도 찍어야 미국에 있는 후원자들에게 보낼 수 있었다. 미국 사람들이 아주 치밀하게 일한다는 것을 여기서 배웠다.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신 관장은 이후 교회 장로가 되어 한국구라회에서 함께 활동했으며 현재는 한국국제학생교류회(YFU) 회장으로 계신다. 지금도 여전히 내가 하는 사역을 지원해주고 계시다.
그때 월드비전 장학금을 받은 아이들이 이제는 40대 후반 혹은 50대가 됐다. 지금도 그 뿌리가 이어져 있어 만나면 그때 얘기들을 서로 나누곤 한다. 또한 그 뜻을 기려 장학회를 만들어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무슨 일을 하건 하나님 앞에 항상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내가 한센병을 앓아 하나님을 만났고 구원을 얻었기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엎드려 기도할 때마다 지혜와 바른 판단력을 주셔서 계속 많은 일을 이루도록 하셨다.
1978년 내 나이 38세였을 때 남원의 용정교회에서 장로로 추대받았다. 그러나 이 직분을 맡기엔 너무 어려 사양하다가 81년 41세 때 장로가 되었다. 직분으로 일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은 정말이었다. 장로가 되고 보니 모든 면에서 신앙적으로 모범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늘 들었다.
남원에서 살았던 18년 중에 81년부터 88년까지 7년반 동안은 내가 서울에서 일하느라 주말부부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아내는 나의 생활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신경 써 주었다. 아이들은 서울에서 학업을 했다. 첫째는 중3 때 처음 서울로 가게 되었고, 작은 아이들은 각각 초등학교 3학년, 5학년 때 올라갔다. 세 아이 모두 서울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며 자신들의 꿈을 펼쳐나갔다.
나는 당시 11시간반씩 걸려 남원에서 서울까지 왔다갔다했지만 마음만은 행복했다. 성실하게 자신의 꿈을 위해 준비하는 아이들과 언제나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어 세상 살아갈 힘을 얻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여겼다.
***[역경의 열매] 정상권 (10) 한센병에 대한 편견 고치려 동분서주
우리 남원 정착촌이 특별히 잘살게 된 것은 그 어느 마을보다 크리스천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젊은이들을 모아 새마을청년단이라고 이름 붙이고 마을발전을 위해 돕도록 했다. 그런데 주민들은 내가 있으면 열심히 일하다가도 조금만 한눈을 팔면 술마시고 노름을 했다.
하루는 새벽기도를 다녀오다가 주민들이 모이는 곳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방문을 열었더니 밤새 술마시며 노름을 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화가 나 옆에 있던 요강을 들어 냅다 던져버렸다. 청년들이 혼비백산해 도망을 쳤는데 나는 다음 주일부터 모두 교회에 나올 것을 명령했다.
당시 정착촌 주민들에겐 정부에서 양식을 배급했다. 나는 우리가 다 먹기도 넉넉지 않지만 한달 분은 교회에 헌미로 올려드릴 것을 권했다. 십일조였던 것이다. 그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노인들의 환갑잔치도 해드리고 상을 당하면 장례를 잘 치르도록 도와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이 마을이 잘살게 되는 축복의 통로가 됐다고 생각한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의지하니 정말 그대로 된 것이다.
나는 한성협동회 간부로 전국을 뛰면서 국민들이 한센병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한센병은 보건당국의 노력으로 이젠 거의 퇴치가 된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한번 한센병환자이면 영원한 한센병환자인 것으로 여긴다. 일단 병의 후유증으로 얼굴과 손 등에 후유증이 있는데다 일제시대 때 강력한 격리정책을 쓴 것이 어른들의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센병은 DDS란 치료약이 개발돼 이젠 전염이 사라진 것으로 보며 국내에서도 대부분 완치됐다. 그럼에도 한센병환자를 격리해 관리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일본과 한국밖에 없다.
한센병은 균에 노출돼도 면역력이 있는 사람은 절대 발병하지 않는다. 발병 후에도 자연치유되는 경우가 많고 특별히 면역력이 약해 노출이 되더라도 약을 먹으면 3일 내에 균이 사멸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외부의 흔적만 보고 악수도 꺼리고 차별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센병 환자들에겐 커다란 마음의 상처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사회복귀에 장애가 되어 요양소에만 머무는 것은 국가적 낭비다.
한센병은 처음에 '문둥병'에서 '나병'으로 바뀌었고 다시 현재의 용어로 바뀌었다. 그리고 헌법에서도 명칭이 개정됐다. 그런데 이 옛 용어들을 목사님들이 설교에서 생각없이 사용하고 언론 등에서도 막 사용해 한센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정착촌 주민 대부분이 잘살고 있고 사회적 편견도 많이 해소된 상태지만 좀 더 인식이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한센병의 역사는 길고도 길다. 구약시대의 나아만, 욥, 게하시에서부터 신약시대에는 수많은 한센병 환자들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는 장면이 성경에 나온다. 한센병은 당시엔 고치기 어려운 병이었지만 예수님의 능력으로 단번에 고침받을 수 있었다.
육체의 질병은 마음을 병들게 하고 마음의 병은 육체를 병들게 한다. 그 모든 질병으로부터 자유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상처와 아픔으로부터 해방된 강건한 영혼이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 혹시 병에 걸리더라도 믿음으로 의지로 거뜬히 이겨내게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병자와 같은 존재다. 어느 누구나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를 고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한 영혼 한 영혼을 깊이 만나 주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실 때 인간은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다.
***[역경의 열매] 정산권 (11) 한센인 위한 국제기구 발족 주도
1988년 9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국제나학회가 열렸다. 보건복지부 공무원 및 의사들과 한국 대표로 이 회의에 참석한 나는 마음이 답답했다. 그것은 한센병을 치료하고 환자들의 재활과 자립을 논의하는 이 모임에 정작 의사들과 사회사업가들만 있지 한센인은 없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좋은 호텔에서 잠자고 잘 먹고 관광하면서 얼마만큼 한센병 환자들을 이해할 수 있을지 안타까웠다.
나는 한센병력을 가진 지도자로 활동을 해왔지만 한센인들을 위한 실제적인 국제 모임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이때 처음 하게 되었다. 나는 공부를 많이 하지도 못했고 국제 감각도 없지만 이 비전을 가슴속에 품고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저는 능력이 부족하지만 주님이 허락하시면 가능할 것입니다. 세계의 한센인들이 모여 국제적인 교류와 협력을 하길 원합니다. 이 길을 열어 주시고 인도해 주옵소서."
이렇게 계속 기도해오다가 93년 미국 올랜도에서 다시 국제나학회가 열렸고 여기서 내 의견을 피력했다. 그런데 참석자들이 적극 후원을 하겠다고 나섬으로써 구체화됐다. 이때 7개국 60명이 모여 총회를 열어 나를 회장으로 추대한 것이 바로 국제기구 IDEA(Integration Dignity and Economic Advancement)다. 정식 창립총회는 1년 뒤 브라질 페트로폴리스에서 열렸고 나는 일약 한센인을 위한 국제 조직의 수장이 되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적인 일이었다. 하나님은 결코 한센인들의 아픔과 눈물을 잊지 않으셨다.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주시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 그리스도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하셨으며 또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IDEA가 탄생한 뒤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지구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었는지 모른다. 또 상한 영혼들을 복음으로 치유한 숫자를 일일히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국제IDEA의 회장으로 지금도 일하고 있는 나는 언제나 이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 자리는 하나님이 만든 직함이기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는 일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사실 처음에는 IDEA가 한센인 국제 협력 기구라는 상징성만 가지려 했는데 하나님은 계속 사역을 확장시키셨고 더 많은 일들을 맡겨주셨다. 그리고 그 영역을 한국이 아닌, 세계로 확장시켜 나가도록 인도하셨다. 지금도 IDEA는 기도로 움직이고 있다. 우리의 힘과 능력이 아닌, 그분의 역사하심에 따라 가면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국제IDEA에서는 한센인들의 협력을 강조하고 한국IDEA에서는 주로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지어주거나 한센촌에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세운 교회와 학교들 중에서 가장 보람이 컸던 곳이 인도 콜카타에 있는 IDEA 미션스쿨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한국에 돌아와 40일 동안 기도하고 후원자로부터 40% 정도 기부받고 오랫동안 모아놓았던 IDEA 기금을 털어 2003년에 만든 학교다. 교실 10개에 200명이 공부하고 기숙사에서 80명 정도를 양육하고 있다. 건물을 얼마나 예쁘게 지어놨는지 콜카타건축협회가 발행하는 월간지 표지 사진에 게재될 정도였다.
이 건축과 여러 가지 지원 관계 때문에 나는 인도를 25번쯤 방문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계속 귀하고 소중한 사역들을 맡겨주셨다.
***[역경의 열매] 정상권 (12) 연 매출 300억 사료공장 접고 해외선교
장로가 되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내게 큰 복을 허락하셨다. 장로 안수를 받은 이후 내 영적, 육적 삶이 계속 상향곡선을 그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하나님은 나를 통해 역사하시고 또 쓰고 계시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세계 선교를 하다 보면 하나님의 인도를 가까이 느낄 수 있다. 마치 사람이 옆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지혜를 주시고 이를 통해 열매를 맺게 하신다.
처음 한성협동회를 세워서 지부사무국장으로, 중앙회 상무이사로, 회장으로 어언 30년 동안 나는 완전히 한성맨이었다. 그러다 2000년 4월 완전히 은퇴했다.
만약 은퇴 이후 내가 흘러가는 대로 그냥 삶을 살았다면 나는 굉장한 교만에 빠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동료 중에서 내가 가장 성공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전주에 지은 사료공장 연 매출액이 300억원 정도였는데 이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대단한 일이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정리하게 한 뒤 새로운 일을 하도록 하신 것이라 믿는다. 계속 그 세계에 있었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기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은퇴한 이후에도 마음이 정말 평안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나에게 예수의 흔적이 있노라'고 하는 고백이 있다. 핍박받은 흔적, 매 맞은 흔적, 감옥 다녀온 흔적. 은퇴 이후의 삶 속에서 나에게 선교의 흔적을 하나 더 주신 것 같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하면서 '아멘' 하고 받아들인 뒤 95%는 믿어지고 5%는 의심이 생길 때가 있다. 해외선교를 하면서 많은 교회와 학교를 지었다. 우리 가족 선교회가 돈 내서 하는 게 하나 있고 나머지는 어느 장로님이, IDEA 후원회장님이, 한성장로회 등에서 지원해준다. 가만 세어보니 지금까지 무려 25개의 교회를 세웠다.
그동안 콜카타,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등 학교를 세워준 곳이 5개가 되었다. 현지 교역자들에게 주는 생활비뿐만 아니라 선생님들 봉급에서부터 아이들 간식까지 IDEA협회에서 다 지출된다.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돈이 없어서 뭘 하려다가 못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알라는 성경말씀은 한치의 어긋남이 없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장로연합회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합회 활동을 할 때마다 IDEA 사업을 지원할 사람들을 모으게 됐다. 다행히 장로교연합회에서는 IDEA협회 사업에 대해 관심을 보여주었고, 여러모로 지원을 해주었다. 그 사이 IADA사업은 점점 더 확장됐고, 지금까지 150여 교회를 짓게 됐다. 그동안 나와 우리 가족이 개인적으로 지어준 교회도 30여개가 된다. 이렇게 눈에 띄는 성과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고 사업을 후원해 주신 분들에게 큰 절이라도 올리고 싶다.
방글라데시에 교회 4개, 필리핀에 교회 3개가 이미 지어졌거나 준공단계에 이르렀고 또 시청에 허가만 받으면 곧 한센인 주택 30가구를 짓는다. 그 입구에 IDEA빌리지를 정문으로 세우고 왼쪽에는 모든 가정이 들어가서 예배 드릴 수 있는 예배당을 세우고 오른쪽에는 농구대를 세우는 등의 계획이 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의 계획을 실천할 그림으로 가득하다. 다른 사람은 이 기쁨을 모를 것이다.
***[역경의 열매] 정상권 (13) 한센인 사역 인정받아 英 기독단체 공로상
2001년 2월 인도를 향하는 내 발걸음이 무척 가볍고 즐거웠다. 이번에는 내가 소록도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소록도중앙교회가 헌금을 한 돈으로 교회를 지어 헌당식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컸다. 한센인들이 정성을 다해 모은 물질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전을 짓는 데 사용했으니 하나님이 무척 기쁘게 받으셨을 것이다.
새생명교회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 교회 담임은 인도 코인신학교를 졸업한 아이삭 목사(당시 전도사)였는데 사모는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이 있었다. 이곳에 교회를 세우기로 결심한 것은 빈민촌인 이곳에 움막을 세우고 학교에 가지 못하는 어린이 27명을 사모가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근처에는 한센인을 포함해 40여세대 70여명이 역시 움막 같은 곳에서 살고 있어 교회가 이곳 공동체의 중심부가 된다고 판단했다.
은혜 가운데 헌당식을 치르며 나는 이들을 이렇게 격려했다.
"여러분 이 교회는 한국의 한센인들이 헌금을 모아 보낸 돈으로 건축한 것입니다. 저도 어린시절 그분들과 함께 생활했는데 참 가난하고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결과 이젠 잘 살게 되어 이렇게 나누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반드시 후일 이보다 더 좋은 예배당을 지어주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1999년 나는 국제 웰레스 레이 베일리 상 수상자로 선정돼 그해 11월 인도 델리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했다. 이 상은 한센병 환자를 지원하는 영국기독교구라회(TLMI)가 제정했다. 이 단체는 그동안 120여국에 125년 동안 한센병퇴치 및 지원사업을 전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 가운데 국제적으로 공이 큰 사람들을 추천받아 2년에 한 번씩 시상을 하는데 내가 일본과 미국, 수리남의 수상자와 함께 상을 받은 것이다.
당시 시상식은 개회예배를 은혜롭게 드린 뒤 더스틴 TLMI 총재가 각자의 공적내용을 찬찬히 소개했다. 정상권 장로는 한센인으로 정착마을에 들어가 주민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정부와 협조해 새마을운동 등을 통해 정착촌 주민들을 잘살게 했을 뿐 아니라 한센병과 한센인에 바른 이해와 인권회복에도 크게 기여했음을 알리는 내용이 소개되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참으로 영광스러웠다. 더구나 상금도 1000파운드나 되었다.
수상자 소감 발표를 위해 강단에 오른 나는 "앞으로 남은 삶도 한센병 퇴치와 경제자립, 지위향상에 바치고 상금은 요즘 베트남에 건립되는 한센인 요양소의 전산시스템 시설비로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시상식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다시 기립박수를 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정말 잊지 못할 감격스런 순간이었다. 동시에 나는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밖에 없음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높여주시고 자긍심을 갖도록 이런 선물을 주신 것이다.
나는 내가 늘 부족한 사람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능력으로 귀한 일들을 할 수 있음에 감사를 드렸다. 그런데 어느날 나를 보고 도전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모든 사역에 나서게 되었다. 인도인 친구 고팔은 공부를 포기했던 상황에서 다시 학업에 도전해 사회학 박사가 됐다고 내게 연락했다. 또 중국인 친구 공호빈씨는 나의 초청으로 중국 한센인으로는 처음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했다며 감격스러워했다. 나는 내가 주도하는 한센인 행사에는 언제나 그 주인공인 한센인을 많이 초대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당당하고 자신있게 행동하도록 순서도 맡기고 인사도 시켰다.
지구상에는 1600만의 한센인이 있다고 한다. 이들에게 좋으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현실을 지혜롭게 극복하게 돕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라고 굳게 믿는다.
***[역경의 열매] 정상권 (14) 하나님 영광 위해 전세계 누비며 봉사
한국 IDEA에서 인도 다음으로 정성을 많이 기울인 곳이 필리핀 달러호우 마을이다. 그곳은 한센인이 많이 살고 있는데다 사는 집 환경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가정방문을 하다 한 가정에 들르게 됐는데 한 여자어린이가 영양실조로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몸은 꼬챙이처럼 심하게 말랐고 눈만 퀭한 게 아프리카 기아 사진에서만 보던 어린이가 이곳 필리핀에도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났다.
나와 동행한 선교사한테 몸이 먼저 건강해야 영혼이 사는 것인데 저렇게 죽어가는데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겠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그러나 그 선교사가 무슨 죄인가. 나는 일단 그 어린이가 내 눈에 띄었으니 지나칠 수 없었다. 당장 종합 비타민제를 사다 먹이라 하고 우유를 계속 먹이라고 몇 달분 우유값을 주고 한국으로 왔다.
다시 필리핀에 교회를 지으려고 3∼4개월 후 그곳에 다시 가게 되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아이가 전혀 다르게 토실토실 살이 올라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기분이 좋아 그 애를 만지고 또 만졌다. 조그만 관심이 한 생명을 살린 것이다. 최근에 다시 갔을 때는 아이가 완전히 건강해져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한국의 교회에 가서 선교보고 형식으로 전하면 성도들이 은혜를 많이 받는다.
요즘 내가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곳이 중국이다. 조선족이 많이 사는 옌볜에 내가 속한 예장 합동교단이 주도하는 '연변연합회'를 만들었다. 현지에 조선족 교회 8개를 세웠는데 거기에 나갈 선교사 8명을 장로회에서 교육시켜 작은 시찰을 세운 것이다. 이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다. 내가 어떻게 그걸 할 수 있는가. 목사도 아니고 신학 공부를 했던 사람도 아니고, 한때는 인생 저 밑바닥에서 그렇게 어렵게 살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시키시니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계속 선교활동 및 구제 사역을 하면서 참 힘들고 고생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관광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지만 찾아다니니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당장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다.
한번은 젊은 인도 목사님을 만나 선교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가려는 나에게 그 목사님이 조심스럽게 "교회 목사관에서 주무시고 호텔비로 헌금을 해주시면 안되겠느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목사관으로 갔는데 냉방이 안돼 찜통인데다 방안에 도마뱀이 제집처럼 기어 다니고 있었다. 수돗물은 나오지 않고 아침에 식사를 준비한다고 냉장고를 열어 빵을 가져왔는데 곰팡이가 새파랗게 피어 있었다. 그 목사님이 너무 미안해 했지만 이런 일은 다반사였다. 이런 환경에서 사실 사랑의 사역을 감당하려 해도 계속 이 길을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면 이런 체험을 통해 진정한 감사를 배우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낀다.
세계를 누비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교하면서 느끼는 은혜, 쾌감, 희열, 감사는 경험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적어도 향후 10년 동안 이런 추세로 간다면 최소한 교회를 50개는 짓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계속 기도하고 있다.
현장을 다니며 너무 감사한 것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변화를 실감 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매년 한 번씩 찾아가는데 아이들이 손님이 왔다고 무용도 하고 성극도 발표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퀭한 눈에 영양실조에 걸렸던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 맥이 빠져 있다가도 새로운 힘이 또 솟는다.
***[역경의 열매] 정상권 (15) 가족 힘모아 필리핀 교회건립·선교회 결성
2008년 2월3일 인도 하이드라바드 컨벤션홀에서 국제 IDEA 협회 정기총회가 열렸다. 나와 인도 고팔 회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각국 대표 23명이 참석하고 회원들까지 200여명이 참석했다. 5번째 모이는 총회 중 가장 많은 나라에 가장 많은 회원이 참석해 감격스러웠다. 한국이 만든 국제기구가 이제 세계적인 모임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브라질의 질다씨를 여성을 대표한 공동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나와 인도 고팔 회장을 다시 회장으로 추대함으로 앞으로 5년간 국제 IDEA 협회를 다시 이끌게 되었다. 아울러 다음날 소집된 이사회의에서 한빛복지협회 임두성 회장을 국제본부 이사로 추대해 승인을 받았다. 나와 임 회장이 협력해 세계를 무대로 힘차게 일을 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사실 지구촌의 한센병 문제는 거의 끝났다. 아프리카에서도 병 문제는 거의 해결되었다. 10만명당 1명꼴로 발병이 되고 있고, 1만명당 위험성 있는 환자가 4명 미만이다. 유엔에서도 한센병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인정했다. 아직 한센병 환자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제는 거의 다 해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9년에는 유엔 산하 나병 담당관의 자리가 아예 없어졌다.
그렇지만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한센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리고 한센병력자에 대한 차별대우를 뿌리 뽑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은 본인들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각 나라에서 한센인차별방지법을 제정하는 등의 구체적인 해결책이 제시되어야 한다.
국제적으로 또 한국에서 정신없이 일을 하는 동안 가정의 일은 모두 아내의 몫이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세 자녀가 지금은 모두 결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고, 제 몫들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감사하다.
큰딸은 목사님의 부인이 되어 남편의 사역을 잘 섬기고 있고, 아들은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작은딸은 벤처기업의 중역인 남편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손자들도 하나 둘씩 생겨나게 되어 아이들이 다 모이면 7명이나 된다.
나는 우리 가족을 볼 때, 축복받은 가정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가며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볼 때, 그것이 지상에서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싶다.
우리 가족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반드시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린다. 6년 전부터 '신석선교회' 라는 이름으로 15명의 가족이 모여서 예배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후원 사업을 하고 있다. 신석선교회는 우리 가족이 힘을 합해 필리핀에 세운 교회이름을 따 온 것이다. 우리는 반석교회, 한센인 선교회 교회 등을 지속적으로 돕고 있다.
최근에는 아내와 나의 결혼 40주년을 맞이하여 자녀들이 커플링을 선물해 주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결국 이렇게 행복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 큰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된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부족한 것을 채워 주는 분이시다.
내 힘으로 살 수 없었던 인생을 고치신 하나님,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살게 하신 하나님, 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역경의 열매] 정상권 (16·끝) 자랑스런 ‘은혜 흔적’ 계속 남겼으면…
지난달 26일 서울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나의 신앙간증집 '소록도 둥지에서 파랑새 날다'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사실 내 삶이 책으로 엮어져 나오리란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주변의 격려와 권고로 용기를 낸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하나님께서 절망 속에 있던 한 소년에게 찾아와 그 삶을 얼마만큼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주는 데 역점을 뒀다. 그래서 이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기적'임을 증거하는 샘플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글을 써내려 갔다.
지난 40년간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김성수 대한성공회 주교님은 추천사를 통해 "정상권 회장이 가는 곳마다 희망의 씨가 뿌려지고 그것은 언제나 알찬 열매로 수학을 거둔다"며 "수많은 교회와 학교가 세워지고 장학회에서 도움을 받는 학생을 보며 하나님의 비전이 주는 능력을 확인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날 IDEA 활동에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많은 분들이 오셔서 격려해주신 것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성결 구절 중의 하나가 '수치스런 흔적이 아름다움을 대신할 것이며'(사 3:24)이다. 바로 나를 향한 메시지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잘못된 인습으로 인해 수치스럽다고 느꼈던 흔적이 지금은 많은 영혼들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구원의 흔적으로 바뀌었다. 더구나 이제 선교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이 지구촌이 좁은 듯 종횡무진 뛰고 있다. 자랑스러운 이 은혜의 흔적을 계속 남길 수 있도록 여러분의 기도도 부탁드린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길 바란다.
나는 2005년 9월, 내가 속한 예장합동 정기총회에 총대 자격으로 참석해 발언권을 얻었다. 그리고 교단 차원에서 한센인을 복음화하고 이를 지원하는 데 협조할 것을 밝혔고 많지는 않지만 총회 예산을 받을 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아울러 예장합동 장로연합회와 여러 소속 교회들의 헌신과 지원이 있었기에 오늘까지 이 사역을 이끌어올 수 있었다. 500여분의 후원자들에게 다시 한번 깊이 감사를 드린다. 더구나 지난해 교단 총회에서 총회 사회부장을 맡게 돼 한국이 받았던 복음의 빚을 세계에 나누자고 강조하고 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의 신앙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며 전도나 선교는 그 이후의 일이라고 미뤄놓는다. 지금은 열심히 일해서 물질적으로 넉넉해지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거의 평생을 그런 상태에서 더 성장치 못하는 경우를 본다. 내가 부족하고 여건이 맞지 않지만 그 가운데도 하나님의 일을 하면 부족한 부분은 넘치게 채워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물질을 주시면 그것으로 선교하겠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 반대이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내려놓음을 실천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비워진 곳을 책임지신다.
그동안 부족한 내용을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낮아지고 섬길 때 더 큰 빛을 발하게 됨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여러분이 직접 세상을 섬김으로써 하늘나라가 더 넓어지길 원하신다. 내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 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리라"(빌 4:13)는 말씀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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