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감 김공 묘표〔縣監金公墓表〕
우리 종인(宗人)인 김군 양근(金君養根)이 하루는 자신의 9대조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이르기를, “우리 선조가 돌아가신 지 170여 년이 지났는데도 묘표가 없습니다. 이는 자손이 감히 태만해서가 아니라 시대가 멀어져서 옛일이 아득해졌기 때문입니다. 상세하게 기술한 글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랐으나 끝내 그러한 글을 얻지 못하였으니, 또 앞으로 시대가 멀어질수록 옛일이 더욱 아득해질까 두렵습니다. 삼가 상고할 만한 한두 가지 일을 가지고 묘표를 써주기를 청하니, 선생께서 그만두는 것보다 낫다고 여기신다면 기술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공은 휘는 기보(箕報), 자는 문경(文卿), 자호(自號)는 창균(蒼筠),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고려 때의 태사(太師) 휘 선평(宣平)의 후손이다. 증조는 장령 휘 영수(永銖)이며, 조부는 승지 휘 영(瑛)이다. 부친은 휘 생락(生洛)이며, 모친은 박씨(朴氏)로, 현령 휘 성조(成稠)의 따님이다.
공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고결하며, 담론을 잘하고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젊은 시절부터 퇴계(退溪 이황)와 청송(聽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교유한 자들이 모두 당세의 현인(賢人)이었다.이동은(李峒隱), 조중봉(趙重峰)聽松 같은 분들과는 특히 서로 매우 친밀하였다.
만년에서야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는데, 누차 천직(遷職)되었다가 언양 현감(彦陽縣監)과 회인 현감(懷仁縣監)이 되었다. 회인 현감으로 있을 때 상소를 올려 백성들의 고충에 대해 아뢰었고, 은혜롭게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다.
만력(萬曆) 무자년(1588, 선조21)에 관사(官舍)에서 별세하니, 향년 58세이다. 안동 역동(驛洞) 유좌(酉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 이씨(李氏)도 공의 무덤에 합부하였는데, 부인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농암공(聾巖公) 휘 현보(賢輔)의 손녀이고, 찰방(察訪) 휘 문량(文樑)이 부친이 된다.
3남을 두었는데, 첫째 아들은 극(克)이고, 둘째 아들은 태(兌)로 덕을 감추고 출사하지 않았으며, 셋째 아들은 원(元)이다. 3녀는 모두 사인(士人)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와 증손자 아래로는 오늘날까지 번성하여 거의 수백 명이 된다.
아아, 공의 사우(師友) 관계의 성대함으로 보건대, 자신을 연마하고 단련하여 스스로 성취하였을 것이니, 칭술할 만한 언행(言行)이 어찌 적겠는가. 그러나 지금 이처럼 사적이 인멸되었으니, 참으로 비통한 일이다.
다만 여러 명공(名公)의 뇌문(誄文)이 아직 남아 있어, 공을 두고‘선학(仙鶴)의 정신〔仙鶴精神〕’이라고 말한 것도 있으며, ‘호월(壺月)의 흉금〔壺月襟懷〕’이라고 말한 것도 있으며, ‘나라의 호련(瑚璉)〔邦國瑚璉〕’이라고 말한 것도 있다이라고 말한 것도 있다. 아아, 이러한 글만으로도 공의 풍모를 비슷하게나마 상상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우선 이렇게 써서 묘석(墓石)에 새기도록 한다.
吾宗人金君養根。一日以其九世祖狀文過余曰。吾祖歿百有七十餘年而墓無表。非敢慢也。以世遠而事微也。冀有鎰其詳焉。竟莫能得則又懼愈遠而益微也。謹以一二可稽者爲請。子以爲賢於己則願有述焉。按公諱箕報。字文卿。自號蒼筠。安東人。高麗太師諱宣平之後也。曾祖掌令諱永銖。祖承旨諱瑛。考諱生洛。妣朴氏。縣令諱成稠女也。公爲人骯髒高爽。善談論。長於詞翰。自少遊退溪,聽松之門。所與交盡一世賢者。如李峒隱,趙重峰尤相得驩甚也。晩筮仕。屢遷爲彥陽,懷仁縣監。懷仁時上章言民弊。治有惠聲。以萬曆戊子卒于官。享年五十八。葬于安東驛洞酉坐原。配李氏祔焉。是爲知中樞府事聾巖公諱賢輔孫女。察訪諱文樑其考也。有三子。長克。次兌隱德不仕。季元。三女皆適士人。自孫曾以往。至今蕃衍幾累百人。噫。觀公師友之盛。其磨礱上下。以自成就。言行之可爲稱述者豈少哉。今其跡泯焉乃爾。良可悲夫。而獨諸名公誄文尙在。有以仙鶴精神言之矣。有以壺月襟懷言之矣。有以邦國瑚璉言之矣。嗚呼。此猶可以想公之髣髴否乎。姑以此書之 使刻諸墓石
<출전:미호집,한국고전번역원>
주1]청송(聽松) : 성수침(成守琛, 1493~1564)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ㆍ죽우당(竹雨堂)ㆍ파산청은(坡山淸隱)ㆍ우계한민(牛溪閒民),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아우 성수종(成守琮)과 함께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19년(중종14)에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와 그를 추종하던 많은 사림들이 처형 또는 유배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송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두문불출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아들 성혼(成渾)을 비롯한 많은 석학들이 배출되었다. 저서에 《청송집(聽松集)》 등이 있다.
주2]이동은(李峒隱) : 이의건(李義健, 1533~1621)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의중(宜中), 호는 동은이다.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5대손이다. 그는 당시의 명유들과 교유하며 시명(詩名)을 떨쳤고, 후학 양성에 전력하였다. 광주(廣州) 수곡서원(秀谷書院)과 영평(永平)의 옥병서원(玉屛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동은유고(峒隱遺稿)》 등이 있다.
주3]조중봉(趙重峰) : 조헌(趙憲, 1544~1592)으로,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ㆍ도원(陶原)ㆍ후율(後栗),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67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환봉사(東還封事)〉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고, 이후 금산에서 700명의 의사와 함께 전사하였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영조10)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고종20)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중봉집(重峯集)》 등이 있다.
주4]선학(仙鶴)의 정신 : 선학은 신선(神仙)이 기르는 학으로, 여기서는 김기보(金箕報)의 고결하고 고매한 정신을 선학에 비유한 것이다.
주5]호월(壺月)의 흉금 : 호월은 ‘빙호추월(氷壺秋月)’의 준말로, ‘옥병의 얼음’과 ‘가을달’이라는 말인데, 사람의 마음이 맑고 깨끗함을 비유한다. 일찍이 송(宋)나라의 등적(鄧迪)이 이동(李侗)의 사람됨을 주송(朱松)에게 평하기를 “원중(愿中)은 마치 빙호추월과 같아 한 점 티 없이 맑게 비치니 우리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愿中如氷壺秋月 瑩徹無瑕 非吾曹所及〕”라고 하였다. 《宋史 卷428 李侗列傳》 이동은 주희(朱熹)의 스승이고, 주송은 주희의 부친이다. 원중은 이동의 자이다.
주6]나라의 호련(瑚璉) : 호(瑚)와 연(璉)은 모두 종묘(宗廟)에서 서직(黍稷)을 담는 제기(祭器)로, 나라를 다스릴 만한 재주를 지닌 사람을 비유한다. 이는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자공이 ‘저는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너는 그릇이다.’ 하였다. 자공이 ‘어떤 그릇입니까?’라고 다시 묻자, ‘호련이다.’라고 대답하였다.〔子貢問曰 賜也何如 子曰 女器也 曰 何器也 曰 瑚璉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