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조선으로 향하는 기독교 단체와 선교사 파견
(1) 영국 성공회(1890년) : 의료, 사회복지, 문서선교
미국 북장로교와 북감리교에 이어 영국성공회가 조선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1883년 11월, 주중영국 전권대사 “해리 팍스”경은 조선복음화에 관한 긴박성을 영국 “켄터베리 대주교 벤슨”(Benson, E. W.)에게 전달하였고, 그 가운데 11월26일, “조영수호통상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었으며 1884년 4월28일 상호 비준안을 교환하였습니다. 1885년, 중국선교사 “울프”(Wolfe, J. R.)가 2명의 선교단을 임시파견 형식으로 부산에서 2년간 선교활동을 진행하였으며, 1887년, 통상조약 체결이후 조선선교를 타진하기 위해 일본의 “빅커스테드”(Bickersteth)와 중국의 “스코트”(Scott) 선교사가 조선을 방문하여 영국에 조속히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1889년, 영국성공회 “해외복음전파회”(The Society for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는 영국 해군의 종군사제로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조선주재 주교로 “찰스 존 코프”(Bishop Charles John Corfe,한국명,고요한)를 임명하고 1890년에 파송되었습니다. 코프 주교는 “와일즈”(Julius)와 "랜디스"(Landis,한국명,남득시) 의료선교사와 “트롤로프”(M.N.Trollope), "와너“(L.O.Wamer), ”파우널“(J.H.Pownall), ”데이비스“(M.W.Davies) 등 6명의 선교사, 신부와 함께 부산항을 경유하여 제물포항으로 입국하였습니다. 존 코프는 입국 당시 영국 세관원의 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성공회는 도착과 동시에 ”의료선교, 사회복지선교, 문서선교“ 등 3대 정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직접적인 활동을 곧바로 시작하였습니다.
1890년 10월, 제물포에 “성 누가병원”을 개원하고 1891년, 한성 정동에 “성베드로병원”과 낙동에 “성마태병원”을 개원하는 등 빈곤과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조선인들을 향하여 먼저 섬기는 자세로 임하였습니다. 경기도 여주와 충북 진천에도 성공회 병원을 설립하는 등 지방으로 확대하며 복음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성공회는 문서선교를 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 낙동에 인쇄시설을 설립하고 “성교이증”과 “성회송가”를 발간하여 한성,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배포를 시작하였습니다.
성공회는 병원과 출판사를 시작으로 1891년 공식적인 교회설립에도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최초의 성공회 교회는 제물포(인천중구)에 위치한 “성공회 내동성당”으로 1891년 9월30일 설립되었습니다. 또한, 한성 중구 정동1번지에 “성공회 주교좌 대성당”을 설립하며 성공회의 성공적인 조선 선교를 향한 기초를 세웠습니다. 교회를 설립한지 6년째인 1897년, “김희준”(마가)과 “김군명”(요한)이 최초의 성공회 세례자가 되었습니다.
1910년, 성공회 2대 주교인 “아더 터너”가 과로로 별세하고, 3대 주교인 “마크 트롤로프”는 조선인 성공회 사제를 양성하는 교육기관 설립을 계획하여 1914년, 강화도에 “성 미가엘신학원”(현,성공회대학교)을 설립하였습니다. 1915년, “김희준 사제”가 마크 트롤로프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음으로서 “조선인 최초의 성공회 사제”가 되었습니다. 1925년에는 “수녀원”(현,성가수녀원)을 축성하고 “아비비”수녀가 최초의 지원자가 되었습니다.
성공회는 사회복지선교에 주력하며 생활속으로 밀착하는 선교정책을 지향하였습니다. 근대 서양교육과 성공회 신앙인을 육성하는 “신명학교”를 충남 천안에 설립하고, 제물포와 여주와 진천 등지에 병원을 설립해 의료선교를 확대하였습니다. 경기도 수원과 안중에는 보육원을 설립하여 빈곤 계층의 여성과 아동들과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조선인들의 마음을 얻는데 주력하였습니다. 성공회는 천황을 숭배하는 일본의 종교적 신념에 대항하여 거부하는 이유로 신명학교가 폐교되고, “김구응” 선생님이 일본 헌병에 의해 순교자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