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최초의 의료 선교사 노라노 닥터의 재밌는 선교편지 ⌜제중원 편지 1⌟에서 발췌
편지가 역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선교서신이 복음서에 이은 ⌜사도행전⌟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것은 1세기 바울서신에만 해당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바울의 서신을 읽으며 받았던 감동과 전율을 20세기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의 편지를 읽으며 경험하고 있다. 그들이 남긴 편지를 통해 그들의 삶과 섬김이 조선의 봉건사회를 무너뜨렸으며 인권의식, 평등세상, 민주화의 교육이며 훈련이었음을 깊이 깨달았다.
조선반도에서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아니었다. 기독교는 진실로 나라를 잃은 망국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라는 새 희망을 주었으며 500년 동안 계속된 유교의 충효사상으로 조선인에게 DNA로 유전된 남녀차별, 반상의 차별과 관민의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사상과 신념을 심어 주었다.
실제로 북장로교, 호주장로교, 남장로교 그리고 카나다장로교 선교사들이 차례로 들어와서 복음을 전한 일이 궁극적으로는 조선 반도 밑바닥에 들어가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하였던 ‘민이 나라의 근본’이 되는 평등세상, 갑신정변이 실패하였던 ‘조선의 자주 독립과 근대화’의 추구가 되었다. 이전까지만하여도 ‘민’은 통치의 대상으로 세금과 군역을 감당하는 나라의 보조적인 존재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민’이 양반들을 위한 보조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주역임을 설파하였다.
해방 이후, 사회주의와 극보수적인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지식인들과 학자와 정치인들이 선교사를 제국주의 앞잡이로 매도하며 그들의 소수의 부정적인 언행을 크게 문제 삼아 한국의 근대사에서 기독교와 선교사들의 희생과 공로, 업적을 폄하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다 지울 수 없다.
코로나가 준 긴 방학기간에 선교사들이 남긴 편지와 각종 저술, 회고록, 한국인들이 쓴 기념과 추모의 글을 통하여 19세기와 20세기 초기 조선 사회를 살았던 선교사들을 만나며 감동의 밤을 지새운다.
아래는 광주기독병원선교회 연구도서 시리즈 1 ⌜제중원 편지 1⌟, 15~ 18쪽에서 발췌한 글로 1906년에 노라노 선교사가 남장로회 선교본부에 보낸 선교서신의 일부이다.
오전에는 수술을 집도하고 환자 진료는 주로 오후에 하고 있습니다. 의사에게 어쩌다 운좋게 여유시간이 생기게 되면 언어공주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것은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치료실마다 환자 대기실이 마련되어 있어 아침 일찍부터 환자들이 모여듭니다.
항상 보조원들이 남아서 말씀도 전하고, 권면도 하고, 전도지를 나눠주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 보조원들(조사들)은 매우 깊은 신앙을 가진 신자들로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간 열성을 다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그들의 얼굴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음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전도가 “의사”가 나타날 때까지 대기하고 있는 환자들을 얌전히 앉아 기다리게 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환자들을 의사가 올 때까지 선교부 안팎을 돌아다니면서 무엇이든지 처음 보는 것들을 입을 벌린 채 꼼짝 않고 쳐다보고나, 정원을 짓밟고 다니고, 깡통부터 시작하여 비옷, 그리고 고정되지 않은 것은 모두 자신들의 것처럼 가지고 천진난만하게 기분 전환시키며 즐깁니다.
진료를 시작하기 전에 정기적으로 예배시간을 갖는데 이 시간에는 찬송과 성경 봉독 그리고 기도를 드리니다. 예배가 끝나면 환자를 진료하는ㄷ[ 여자와 어린이 환자들을 먼저 진료하고 나서 남자 환자들을 진료합니다. 그 때부터 바쁜 장면이 이어집니다. 온수를 비롯하여 진료에 필요한 모든 ᅟᅥᆺ들이 사전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비싼 상품이었다면 한국에서의 의료사역은 아마도 본국의 교회를 파산시켰을 겁니다. 의사는 중환자들을 진료하고 있으며, 의보조원들은 재진환자들의 상처 치료, 약 조제, 그리고 경환자들을 돌보며 바쁘게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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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환자와의 일상대화 한 예를 소개합니다.
환자 : 기체후 일향만강하신지요?
의사 :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약 타러 오셨나요?
환자 : 예 그렇습니다. 병을 잘 고친다는 명성이 사방에 소문나서, 의사 선생님을 뵙기 위해 200길 길을 걸어왔습니다.
의사 : 연세가 어떻게 되셨는지요?
환자 : 오! 저는 현재 임금의 즉위 2년 넉 달, 열흘에 태어났습니다.
의사 : 대충 알아들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확실하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우리 둘 뿐인데 언짢게 생각하지 마시고 연세 좀 말씀해주세요.
환자 : 거시기 생일 떡을 30번이나 먹었습니다.
이 정도 고비에 이르게 되면, 의사는 깊은 한 숨을 내쉬며 이마에 땀을 닦고 질문을 계속하게 됩니다.
의사 : 어디에 사십니까?
환자 :제가 사는 곳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 큰 길을 따라가다가 큰 절이 보이는데 까지 가서, 왼쪽으로 돌아서면 거기에 제 집이 있습니다.
의사 : 죄송합니다. 제가 못 알아들었습니다. 저는 이 나라에서 오래 살지 않아,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살고 계시는 마을 이름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환자 : 제가 사는 마을을 00 고을입니다만, 이것이 내가 아픈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군요. 약이나 좀 주시지요.
의사 : 질문을 많이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침 좀 내뿜지 마시고, 언제부터 어떻게 아프기 시작했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환자 : 제 이웃에 김 아무개라는 사람에게 결혼한 아들이 있는데 말입니다.…
의사 : 그 분의 아들이 무슨 상관입니까? 묻는 말에나 대답해주세요.
환자 : 그 김 아무개란 녀석이 내 남편의 삼촌의 아들과 결혼을 했는데 말입니다. …
의사 : 당신의 족보를 일어 보아야 할 것 같군요. 족보가 적여 있는 책이나 문헌이 있으면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본 후에 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환자 : 아닙니다. 지금 약을 꼭 받아가야 합니다. 제가 말을 끄집어내자마자 그 녀석이 제 조카인 자기 처를 마구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렸더니 그 녀석이 곰방대로 나를 때려서 이렇게 상처를 입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
이 사람에게는 바르는 약을 주고, 다른 환자들을 진료했습니다. 한 사람은 나병환자인데, 손가락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없었으며 , 커다란 궤양으로 인해서 모양이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턱에 괴저가 생긴 아이를 데려 와서 다음 말 오전에 수술을 했습니다. 다음은 가려움증 환자인데, 한의사로부터 숯으로 만든 연고를 처방받아 한 달 동안 열심히 발랐는데도 아무 효과가 없다고 찾아와서, 비루로 목욕을 시켜주고 다음 날 와서 치료를 더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한번은 환자 대기실에서 큰 소리가 들려 나가서 무슨 일인가 알아보니, 턱에 결핵성 누관이 있는 환자였는데 그는 환부에 붙여놓은 고약이 떨어져서 고름이 흐르지 않도록 금히 다른 고약을 붙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으ㅟ사를 본 모든 환자들이 전주 나에게 몰려와서 빨리 봐달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의사는 한 전에 한 사람씩만 볼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조금 전에 진료하던 환자에게 돌아갔지만, 의사가 잘 못한다고 큰 소리로 마구 늘어놓는 장광설을 들어야 했습니다.
“한 번에 한 사람씩만 볼 수 있다니, 멍청한 의사구만 그래.”
“정 떨어진다 정 떨어져.”
조선 사람은 화가 나면 벼락이 여기저기 땅을 치는 것 같지만, 화가 풀리면 폭풍이 지나가고 하늘이 개이듯 언제 그랬었냐는 듯 편안하고 조용하게 담배를 피웁니다.
의사 : 이것이 무엇입니까?
환자 : 조선인 의사가 악귀를 내쫓아 준다고 불에 달군 침으로 무릎에 구멍을 뚫어준 것인데, 너무나 아픕니다.
의사 : 친구! 악귀가 그렇게 작은 구멍을 통해 도망치기는 글로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한옥 방에 들어오는 것만큼 어려울 겁니다.( 클리블랜드는 1800년대 후반의 미국 대통령이었는데 엄청나게 뚱뚱했다.- 편집 주)
이 악귀는 류마티스로서 살리시레이트 몇 회분으로 그 악귀를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외국인 의사가 조선의 여러 지역에서 이와 같이 존경을 받고 있는 이유는 조선인들이 의사가 처방하는 약이 병을 일으키는 많은 악귀들을 없애준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나이든 환자는 눈 세척액을 먹는 약으로 잘못 알고 마신 사례도 있었으며, 아주 쇠약하고 창백한 어린아이가 왔는데, 그는 여름타는 병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하루에 밥을 4 그릇씩이나 먹는데도 기운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고 어머니가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에게 위생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요점만 알려주고, ‘하루 동안은 보리물만 마시게 하고 다른 음식은 먹이지 말라’ 고 처방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이의 어머니는 의사가 미친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그런 지시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의사 말대로 하다가는 자기 자식을 죽이겠다며 즉시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또 다른 혼자는 6살 된 아이인데, 아직까지 머리를 감기거나 목욕을 시켜준 일이 없는 불쌍한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의 두피는 화농성 부스럼으로 엉망이었습니다. 보조원들은 그런 환자들을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의사에게 보이지 않고 순식간에 아이의 머리를 깍은 후 녹색 솔과 약 비누로 깨끗이 씻어주니 다음에는 재발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적은 이야기들은 일회적인 에피소드가 아니라 진료실에서 날마다 반복해서 보는 일상적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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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시조약 1년 전인 1904년, 24세의 약관의 나이에 조선에 도착한 노라노 선교사는 목포에서는 오웬 의사의 뒤를 이어 의료 진료에 봉사하였다. 그 후, 1905년 11월에 광주로 발령을 받은 그는 비록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현재 광주기독병원의 전신인 최초의 서양병원 ‘제중원’을 개원하였다. 광주는 그의 의료선교로 비로소 근대적 진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노라노 (Joseph Wynne Nolan, M.D) 선교사는 1880년 켄터키 크리치에서 태어났으며 켄터키 센트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남장로회 선교사로 1904년 8월 15일에 조선에 도착하였다.
그는 목포선교부의 의사로서 사역을 시작하였으며 1905년 11월 8일 광주선교부에서 진료소 개설 작업을 시작하여 11월 20일에 광주 제중원을 개원하여 첫날 9명의 환자를 진료하였다. 그는 제중원에서 비록 1년 6개월 정도 짧은 기간 동안 봉사를 하였지만 광주 근대 의료의 문을 연 선구자가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오웬 선교사, 윌슨 선교사가 광주 제중원의 기초를 다졌다.
노라노 선교사의 편지를 읽으며 1900년대 초기 조선인들의 생활과 습관, 문화와 의식의 수준을 깊이 만났다. 짧은 100년 사이에 삶과 의식의 수준이 달라진 조선인들, 발전하고 진보한 우리 한국인의 생활상과 의식의 기저에 예수를 살아낸 선교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봉사와 기도, 교육과 훈련이 흐르고 있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단 말인가!
조선 500년 역사가 망가지고 무너진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패배의식과 절망감, 무력감과 우울증에 빠져있는 조선인들에게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로 희망과 용기를 준 선교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한국이 고난 중에 받은 하나님의 위로였으며 축복이었다.
코로나팬데믹을 통과하며 식민지 조선에서 한 알의 밀알로 썩어진 선교사들을 만나며 나 자신의 삶이 밀알로 썩어지고 있는지? 방부제 처리가 되어 썩을 수 없는 밀알인지를 생각하며 조선 근대사에서 밑거름이 되어준 그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특별히 ⌜제중원 편지 1⌟를 써주시고 발간해주신 '광주기독병원선교회'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21. 9.12.주일
우담초라하니
* 참고 문헌
광주기독교병원선교회 편 , ⌜제중원 편지 1⌟, 광주기독병원선교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