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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단군 조선 얼(뿌리를 찾아서)/7만년 한 민족사 2018.01.23 15:08
8. 단군 조선
가. 개요
중국에 농경문명이 농사로 인구증식과 군대로 거주민 통제를 한 국가가 운영된 동안 황해 연안에서 자연이 주는 식물로 생활하던 샤먼 제사국가를 칭함
- 존속 시기: 기원전 2.333년에서-기원 전 245년까지(2.096년 간)
- 연대: 47대
* 번한과 단군 조선 충돌에 관한 단군 세기의 기록
- BC 2.183 1세 단군 왕검 우왕을 유수(황하: 후에 희대)지역의 제후로 임명
- BC 2.119 4세 오사구 하나라 징벌
- BC 1.741 13세 단군 홀달 은(탕왕)이 하(걸왕 침범) 걸왕 구원 요청 단군 출정 은이 사죄
- BC 1.741 15세 단군 대음 때 수메르, 우루, 양운국 이 사신과 특산물 보냄
- BC 1.463 18세 단군 동업 때 치엑특(티벳) 사람 특산물 바침
- BC 1.341 20세 단군 때 공공, 고흘이 구한의 지도 제작
- BC 1.291 21세 단군 소태 때 은(무정) 조선 영지 침략 대패, 우현왕 고등 죽은 후 색불루가 우현왕이 됨. 서우여 부여(북경, 천진, 산동반도 일대)에서 발호 단제 그를 폐하고 북경에서 등극 백의 숙제 더 남쪽 해변 고죽국에서 죽음
- BC 1.285 22세 단군 색불루 은나라 격파 후 회군 변한의 희대 땅 회복
- BC 1.114 25세 단군 솔나 때 기자 등장(서화에서 자칭 왕)
- BC 904 30세 단군 내휼 때 흉노 공물 바침
- BC 838 32세 단군 추밀 때 초나라 대부 이문기 귀순 벼슬
- BC 819 33세 단군 갑물 때 주나라 조공
- BC 707 35세 단군 사벌 때 연나라 서울 돌파
- BC 653 36세 단군 매륵 때 연나라 침공 격퇴
- BC 426 43세 단군 물리 때 우화충 반란 단제 해두(지금의 천진)으로 피난
- BC 426 44세 단군 구물 때 우화충 죽임 장당경(북경)에서 즉위 나라 이름을 대부여로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어 부름
- BC 380 45세 단군 여루 때 연나라 배도 침략 진조선, 막조선이 와서 도움, 요서 회복, 연 연운도에서 재기 준비 - BC 343 년 이후 연나라 해마다 침공
- BC 341 46세 단군 보물 때 번왕 해인이 연나라 자객에게 시해됨, 기후 자칭 번조선 왕으로 칭함
- BC 259 47세 단군 고열가 때 4월8일 웅심산에서 해모수가 내려와 군대 이르킴(고리국 사람)
* 요순시대 관련 한중기록 정리
BC 2357년 당요 - 요임금이 동방족과 무력으로 싸움.
BC 2333년 단군왕검 솔나 1세가 송화강 유역 아사달을 도읍으로 단군조선 건국
BC 2267년 요임금 선양 서방 한족의 무력함을 감추기위한 미화.
BC 2255년 순임금 즉위 구려 분정 시작.
BC 22??년 순임금 남쪽으로 순수 중 사망.
BC 2205년 하우
BC 1981년 단군조선에서 만주족 설유가 난을 이르킴.
BC 2181년(?) 단군조선 왕 가륵이 삼랑 을보륵에게 가림토 38자를 만들게함.
BC 2119년 오사구 재위(19년) 하나라 5대 임금 상(相)이 실덕, 식달에게 명하여 남, 진, 변 3부에 군대를 이끌고 정벌.
BC 1891년 노해 국전조도 설치
BC 1767년 은나라로부터 하 나라가 단군조선에 구원요청. 하나라 걸이 약속을 어겨 은나라 탕을 도와 하나라 걸왕을 정벌. BC 1291년 은나라 22대 무정이 귀방을 물리치고 색도 .연지를 공격하다가 고조선에게 대패 당함.
BC 1.286년 고조선에서 왕위 계승문제로 내분이 일어남. 그 틈을 타 단군 색불루가 즉위.BC 1.285년 단군 색불루가 백악산 아
사달을 도읍으로 천도함.
BC 1236년 고조선이 은나라 정벌.
BC 1122년 주나라 무왕등극. 은나라 정복.
BC 1114년 단군왕검 솔나 2세 재위. 기자가 하남성 서화에 살면서 인사를 사절하고 운둔 생활(기자조선은 날조된 것).
BC 770년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시작.
BC 723 단군 조선 장군 언파불압을 일본에 보내 웅습, 구마소를 평정
BC 707년 연 나라와 제나라를 쳐서 대승을 거둠.
BC 667년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 일본 삼도를 평정
BC 653년 수유의 군대와 더불어 연나라 정벌 중 제나라가 연나라를 도우러 왔다가 화친하고 퇴각함.
- 마지막 단군 준왕은 위만에게 붸겨 익산으로 들어왔다.
- 진시왕에게 붸긴 고조선의 유민(중국식으로는 묘족)은 경주와 서해안 등 한반도로 피난하여 기원전 238년(47세 단군 고열가) 부터 한반도 삼한 시대가 열렸다.
- 지역: 최초 황하 유역 번한 지역을 제외한 삼한 전지역 그 후 한반도로 피난하기 전 300 년 간은 중국의 황해 연안 지역에 국한
- 단군시대 주요 유적의 위치
* 흑피옥과 같은 옥기의 발견으로 한인의 후손임이 검증된 배달국의 신시와 같은 위치에 시대만 다른 같은 옥기 출토품이 나아 단군조선 임을 입증한다
나. 조선(朝鮮)이라는 이름과 의의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은 사람이 자연과 더불어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나라라는 뜻으로 그 기원은 44세 단군 구물 때(기원전425년)(고려 행촌 선생 문정공 지음 임승국 해설 한단고기 114p) 삼한 관경이 춘추시대의 군웅들에 의해 침략을 당하고 단군의 나라가 약해지자 이름을 삼한에서 삼 조선으로 바꾼 데 기인되나 한문이 나온 이후에 중국인들에 의해 회자된 이름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기초 문자인 상형 문자를 을 근거로 풀면 "하늘의 해와 달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양을 키우고 물고기를 먹고사는 나라"라는 뜻으로 한인 시대부터 "자연스럽게, 자연을 해치지 않고 사는 나라"라는 뜻으로 통용되어온 국호로 근본적으로 복을 빌어주는 제사 기능을 가진 집단이다. 인본적으로 인간이 집단을 형성하여 인간의 힘으로 식량을 생산하여 살면서 군사력으로 영토권을 행사해 온 나라라는 중국의 농경국가의 이름과는 대조적인 이름이다. 조선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해석하고 난 후 필자는 삼한의 백성들이 중국 내륙에 있지 않고 중국 동해안과 한반도, 일본으로 피난을 간 이유가 바로 농사를 짓지 않고 힘들어도 전쟁을 피하면서 자연을 해피지 않고 살려고 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단군이 왜 황해 동해 연안의 백성들을 아우르는 제사집단을 형성하고 그 국호를 조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오랜 동안 삼한의 백성들이 조선의 샤머니즘(三韓主義)을 준수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국가를 형성해 사는 나라로 서양에는 옛날부터 제사장 죤의 나라 즉 프레스트 존스 칸츄리(Preist Jhon's Counrtry)로 알려지게 된 기원도 여기서 나온 것 같다. 이 이름은 아시아에서 황하의 농경 문명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자 생겨나 수 만 년 동안 가지고 있던 이름으로 중국이 여기에서 갈라진 이후에도 우리 민족이 계속하여 유지해 왔던 이름이다. 그 이전의 이름은 "하나"라는 뜻의 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서 세계에 유례가 없는 홍익인간 정신이 나왔다. 그 근거로 한인(한님)시대에 생긴 최초의 기호에서 이 이름은 一로 표시하고 하늘을 의미하였으나 나중에 중국인들이 그들 식 사람 표식인 人字를 넣어 大자로 만들고 그 위에 하늘을 의미하는 一을 넣어 큰 대(大)자를 만들었다. 참고로 당시의 왕은 하늘 과 땅인 二를 잇는 사람인 十자를 합친 글로 "王"이라고 하였으나 중국인들은 그 위에 점을 찍어 "主"지(字)로 만들고 그래도 안 되니까 그 위에 사람 얼굴을 오려놓고 "皇"지(字)자를 만들었다. 그들은 쉬운 자연의 사물 모양에서 뜻을 상상하도록 한 한인조선의 기초 글자(흑피옥에 나타난)를 이용하여 문자를 만들어 중국대륙의 온갖 잡족(雜族)들을 농사에 동원하였다. 한문은 원래 삼한이즘에 따라 한인 시대에 만들어 진 것이나 중국의 농경민족이 자신들에게 맞게 변조하고 자신들의 조상인 한인 조선과 한웅조선을 의도적으로 지운 것이다. 그러나 이 朝鮮(조선)이라는 단어가 이제 와서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고대 우리나라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훌륭한 단초가 되어 다행스럽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원래 이름은 한국이 맞고 중국을 의식해서는 조선이 맞다. 당시의 삶에서 나온 용어가 조정(朝廷), 조공(朝貢) 등 조선에 관련된 용어이고 지금도 중국에서 쓰고 있다. 우리나라가 한국이고 북한이 조선인 것이 다행이지만 북한이 중국에 흡수되는 의미라는 점에는 유의해야 한다.
단군 조선은 우리가 국조로 부르는 바로 그 단군(檀君)으로 고조선의 첫 임금이다. 그에 관한 우리나라의 첫 사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史)》에 전하며, 천제(天帝)인 환인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로 아사달(밝달)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개국하였다고 전한다. 이 단군의 한문 뜻은 박달나무 아래에 세운 나라의 왕 또는 밝은 땅에 세운 나라의 왕이라는 뜻이나 실제는 흙으로 단을 쌓은 제단을 의미하는 단(壇)으로 에서 제사를 지내는 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중국인들의 고대 한문 조작은 빈번하다. 王(왕)자의 의미를 하늘과 땅(二)을 연결하는 사람인 제사장의 의미에서 인간 왕인 主(주)자 또는 皇(황)자로 바꾸었는데 이러한 중국식 한문으로의 개조는 헌원 이후 치우의 흔적을 지우려고 필사적이었으며 우리나라도 당나라의 속국이었던 신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홍무 예제(洪武巤制)를 국법으로 받아들인 이조시대에 극심하였다.
단군 조선 개국 시 주변의 상황은 일본과 상하이가 위치한 중국의 동해안과 만주, 한반도를 제외한 전 지역이 농경민족과 헌원의 후예
들에게 복속되었고 단군은 당시 같은 시기에 중동에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 주고 십일조를 받은 멜기세덱의 제사장처럼 삼한 관경지역을 경계로 제사권, 즉 오늘 날 무당이나 목사, 승려들처럼 행사나 기도를 해주고 돈을 받는 권리만 가지고 있었고 주로 중국인에 대한 계도와 계몽을 실시하였다. 단군조선은 지역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금속으로 무장된 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함부로 쓰지 않았고 악행을 일삼는 제후를 토벌하기 위해 주변의 공 분을 이용하였다.(신채호 저 이만열 해설, 조선 상고사 참조) 이나마 15대 단군(기원 전 12세기)이 재위하였던 중국의 은 나라시절 때부터는 농경 집단에 의한 남아있던 단군 조선의 영토까지 침략하는 사례가 빈번해 졌다.
단군 조선 2천 년간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다음과 같다.
1) 농경민족(헌원과 염제) 단군조선과 대립
* 삼한의 영토 축소
2) 하, 은, 주, 연 등 황하 민족의 단군 조선 침략
3) 약 천 년 간 중국의 혼란(춘추전국)시대 후 진시왕 때 중국 통일 삼한의 제사권 박탈
4) 진한의 제사장들이 충칭(양자강 중류)에서 경주로 피난,
다. 단군(고)조선의 영토
최근의 고고학 발굴과 연구결과에 의하면 고조선 강역인 만주지역
의 청동기문화 개시연대는 서기전 2400년경으로 밝혀져 고조선은 초기부터 이미 국가사회에 진입해 있었음이 명확히 입증되었고 이제는 상식화되고 있는 역사의 진실이다.(윤내현,[한국고대사]64~65쪽) 은 나라의 갑골(甲骨)문화도 본래 동방 동이족이 창조하고 계승 발전시킨 동이문화로 판명되었다. 동이족의 활동지역인 발해연안 북부에서 최초의 갑골(서기전 3500년경)이 출토되는 등 초기 갑골은 주로 이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갑골은 중국 고대왕조 중에서 전형적인 동방 동이계열인 은(殷)나라에서 많이 숭상했고 이 지역에서는 그 후에도 하나님을 위시하여 조상신과 산천, 일월성신 등 자연신을 대상으로 점복 활동이 많이 행해졌는데(이형구,[한국 古代文化의 기원]107~113쪽) 삼한이즘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또 한반도 두만강 유역에서는 서기전 2000년기(紀) 전반기의 뼈 피리(骨笛)가 발견됨으로써 동방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예악(巤樂)이 발생해 민족음악으로 성장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민족음악의 기원은 이미 한웅 시대의 '공수(貢壽)',두열(頭列)'이 있었고 단군조선시대에는 저 유명한 '어아가(於阿歌)'가 있었다.(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그리고 발해연안 북부, 송화강 유역의 만주지방, 한반도에서 광범위하게 출토되고 있는 단군 조선시대 청동기문화의 전형적인 유형인 ' 발해연안식 청동단검'(비파형 단검)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은 단군 조선의 강역을 증거한다.(같은 책,113~131쪽) 중국학자 서량지(徐亮之)는 "중국의 책력법은 동이족이 창시한 것이다(中國曆法創始於東夷:『中國史前史話』246쪽)"라고 하여 동이 조선족이 책력법을 창시하였음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천자(天子)사상. 천자제도 또한 동방조선족이 창시한 것이다. 동한(東漢)의 채옹(蔡邕)이 지은 『독단(獨斷)』 상권을 보면 "천자는 동이족이 부르던 호칭이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는 까닭에 천자라 부른 것이다"라고 하여 천자라는 말이 중국의 것이 아닌 본래 동방조선족의 말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것은 고대에 동방조선이 천자의 나라(天子國)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거짓 없이 전해주는 기록이다. 이는 28세의 청년시절에 공자가 자기 스승인 동이족 담자(談子)를 찾아가 동이의 천자제도를 배웠다는 사실(『春秋左炩)』 昭公 17년에서도 더욱 뚜렷이 입증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단군의 고조선은 청동기시대였고, 법률제도(팔조 금법)가 있었으며, 문자(원시한글인 가림토. 고대신지문)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볼 때 더욱 명백히 국가사회였음이 입증되는 것이다. 또한 화폐제도(명화전. 일화전, 팔조금법 중 50만 전 배상 내용), 조세제도(1/20세),토지제도, 역(易)철학과 음양오행 상수(象數)학, 책력법(曆法)등 고도의 선진문화를 창조 발전시킨 문명국가시대였다. 단군의 고조선 왕조는 모두 47세 단군 열조(列祖)가 2,096년동안 다스렸다. 동아시아 전역을 광역동방문화권으로 묶어두고 통치한 고대한민족사의 최대의 전성기였다. 이 때 단군 조선의 발달한 모습은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하였으나, 후에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고 나서 더욱 강한 나라가 되었다.
*중국과의 충돌이 있은 후, 중심지를 한반도 북서쪽 지방으로 옮겼다.
* 왕 밑에 여러 관직이 있었다.
라. 8조 금법(단군8조 교령 - 규원 사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너희는 한 분이신 하나님(천지신명)을 정성을 다해 순수하게 섬겨라(하나님 사랑).
2.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너희 어버이는 하늘에서부터 온 것이니, 너희 어버이를 공경하면 이는 능히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니라.
3. 너희 남녀들은 화합할 뿐 미워하지 말고 투기하지 말며 음탕하지 말라.
4. 너희는 서로 사랑하고 도와라. 서로 헐뜯거나 죽이지 말라(홍익인간).
5. 너희는 서로 양보하며 같이 경작하라. 너희끼리 서로 빼앗거나 훔치지 말라.
6. 너희는 사납고 교만해져서 사물을 상하게 하거나,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라. 서로 항상 존중하며 너희 하늘 본보기를 따라 사물을 사랑하라(샤머니즘).
7. 너희는 위태로움을 돕고 어려움을 구제하라. 약함을 업신여기거나, 천하다고 업신여기지 말라.
8. 간사함을 품지 말고 악함을 숨기지 말며 재앙을 감추지 말라. 마음으로 능히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가까이 하면 너희는 이에 복록이 한없을 것이니라.
이 내용은 양심을 구체화 한 것으로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에 자연 사랑을 더한 것 같다.
다음은 청나라 고지도 중 하북성 창려의 위치를 표시한 것이다 고대나 청나라 때나 창려의 위치는 하북성 난하 유역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지도이다. 근세에 중국인들이 역사왜곡을 위해 요령성으로 이동시킨 창려를 믿는 것은 자유이나 역사를 보는 시각은 바로 잡으시길 기대한다 하북성 창려가 위만조선의 왕검성이고 한무제가 침략한 지역임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며 이를 한반도로 가지고 오는 자들은 역사 사기꾼들 밖에 없다. (한서지리지 원문)
왕검성 = 험독 = 하북성 창려" 원문을 읽을 줄 알면 어찌 아래 같은 해석이 나올수 있는가 ? 하북성에 있던 왕검성이 갑자기 한반
도 평양으로 바뀌는 이유가 무엇인가 ? 윗 글은 하북성 창려에 고조선의 왕검성이 있었다는 말이다. 한반도 평양에 무엇이 있었다는 것인가 ?아래 글을 참고 바람 (최재인 한사군 논쟁, 고조선의 왕검성은 하북성 창려였다) 사서에 하북성 창려가 왕검성이라 기록하고 있음에도 중국은 평양이 왕검성이라 우기고 있다.
2003년 초등학교 사회과부도 58페이지에 있는 지도이다. 이병도의 개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사서고 뭐고 필요 없는 무식한 역사 조폭들이다. 패수는 청천강이며 열수는 대동강이고. 고조선의 왕검성은 평양이다. 이 거짓말 역사를 우리의 꿈나무들이 배우고 있다.
사기조선열전과 한서지리지를 보면 요동에 험독현 있는데 그 곳에 왕검성이 있다고 했다. 그 험독현은 하북성 창려라 기록하고 있다. 바로 창려유역에 고조선의 왕검성이 있었다는 말이다
왕검성도 한반도에 한사군도 한반도에 열수도 한반도에 패수도 한반도에 갈석산도 한반도에 깡그리 가져다 놓고 학자랍시며 해방이후 반세기를 밥을 빌어먹고(?) 살고 있다는 서글픈 우리의 현실이다.
마. 오성취루와 단군 조선시대의 천문 관련 기록
우리 민족은 세계최초로 천문대를 설치한 민족
2011/05/06 19:36 동아일보
<단기고사>나 <단군세기> 기록에 따르면, 제13대 단군인 홀달단제 50년, 즉 BC 1733 년에 다섯 개의 별이 서로 한군데에 모인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돼 있다. 즉 '무진 오십년 오성취루(戊辰 五十年 五星聚婁)' 라는 한 줄의 글귀로, 무진 50년에 다섯개 별이 루성(婁星) 근처에 모였다는 뜻이다.
*제13세 흘달 단군, 대음달(즉위년 BC 1782)
무진 50년(B.C.1733), 오성이 모여들고(오성취루)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단군세기)
*제19세 구모소 단군(즉위년 BC 1435년)
지리숙이라는 신하가 별들의 궤도를 관측하여 주천력(周天曆)을,
팔괘가 중첩되었을 때의 병화를 해설한 팔괘상주론(八卦相주論)을 편찬했다(태백일사)
*제10세 노을 단군(즉위년 BC 1950년)
세계 최초로 천문대(天文台)를 설치하였다(태백일사)
*제5세 구을 단군(즉위년 BC 2099년)
육십갑자를 사용하여 책력(달력)을 편찬해 백성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태백일사)
바. 단군 조선 요약
- 단군조선은 동방에서 최초의 농경민족과 샤먼 민족이 충돌한 기
원전 2.600년 경 탁록 전쟁 이후 농경민족에게 쫓긴 한웅 조선의 샤먼제사집단이 중국대륙을 잃고 황해 연안과 요하 동북방을 근거지로 샤먼체제(삼신신앙) 국가를 유지하던 시기이다
- 이 시기에도 전체 아시아에서 삼한의 관경에서 제사권(현대식 종교권)은 보유하였고 샤먼의 대표적 기능인 천문 관측은 각지(박창범 교수의 계산대로 번한=백제는 천안문, 마한,=고구려는 내몽고에서 하르빈, 진한=신라는 기 후 2백 전까지충칭 조천문, 기원후 787년 이후에는 한 반도 남부)에서 계속하였다.
- 삼한의 축소 및 영토 개척은 철저히 샤머니즘과 관련이 있다. 농경을 죄악시 한 삼한의 후손들은 홍수 이후에 황하 유역에서 농경 민족에게 붸겨 해안으로 이동하였고 새로운 발상지인 요동을 기점으로 한 무리는 이를 수복하기 위하여 농경 없이 식량이 보장되는 황해 연안을 따라 진출하였으며(백제) 그 다음 양자
강 하구에서 기반을 잡은 진한(후에 신라) 인들과 연합하여 치우를 중심으로 헌원과 대결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황해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고조선의 형성은 탁록 전쟁이후 한 민족에게는 자연적이며
필수적인 삶의 터전이었다. 즉, 샤머니즘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 진나라 기록에 의하면 선주 민족인 묘족은 군대가 가면 해안으로 도망했고 진시왕도 창해 역사로부터 시해 위협을 받았다는 중국 측의 기록이 있어 해안이 묘족(산족= 진한, 마한)의 근거지였음을 시사한다.
중국은 이 때에 요순시대와 하, 은(상), 주, 연,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잦은 전쟁으로 피폐해 갔으나 단군 조선은 안정된 상태로 있었고 중국에 예법, 의료 기술 천지인 사상과 음양 오행의 삼신사상을 전파하려고 노력한 시대이다.
* 프레스트 죤의 쇠퇴와 인간 종교의 대두
중국에서 호모사피엔스의 양심이 황하 인본주의에 억압당하고 수탈 당하면서 유교라는 종교가 나타나 국가를 중심으로 이를 합리화하는 사회적 윤리가 제도가 확립되고 있을 때에 바이칼 창시자 이후 서쪽으로 간 아리안 족은 기원 전 1만2천년 전에 인도로 들어가 기원전 3천 년 경에 인다스, 간지스 문명을 일으키면서 남성중심의 샤먼 제사장 위주의 브라만 교를 통해 카스트 계급제도와 내세까지 신분 화하면서 불평등 사회를 만들자 이의 반발로 힌두교와 불교가 나타鎶는데 중국보다는 더 샤먼 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국가가 한반도로 피난할 즈음 유다의 한 청년을 불러 브라만 교, 불교, 힌두교 중 바이칼의 풍족하고 싸움이 없는 하늘나라와 자유, 평등, 기도, 신성한 결혼, 기적, 치료를 허락하는 홍익 인간의 정신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불교와 멩그스테의 밀
교를 만나게 하셨으니 그 청년이 예수 그리스도 이다. 이는 동방과 인도에서 사라진 자연과 사람이 하나의 생명으로 이어져 있다는 인간의 본성, 즉, 양심을 암흑에서 시달려 온 백인들과 중동 인들에게 전파하려고 한 필연적인 조처였다. 자연을 숭상하던 제사장 국가의 쇠락하자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인간 종교인 불교와 유교, 기독교가 생겼고 서양의 기독교와 중국의 불교, 유교의 공격에서 살아 남으려고 그래도 알라를 자연스럽게 섬겨왔던 아랍인들에게서 회교가 생겨났다. 그래서 한국의 샤머니즘이 가장 자연적인 종교이고 그 다음이 회교, 기독교, 불교, 유교 순서이다.
사. 기간 중 번한(중국)의 상황(춘추 전국 시대)
(기원전 770년 ~ 기원전 221년)
춘추 전국 시대는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를 아울러 부르는 말로, 기원전 770년 주(周)왕조의 천도 후부터 기원전 221년 시황제(始皇帝)의 통일까지에 해당된다. 선진 시대(先秦時代)라고도 한다. 이 시대는 중국사상의 개화결실의 시기였다.이 시대의 사상가들을 제자(諸子)라 하며 그 학파들을 백가(百家)라 부른다. 상업이 많이 발달하였고 이때부터 철기가 사용되었다. 주나라가 견융족에 의해 도읍을 동주로 옮기자 주 왕실이 약화되어 봉건제가 약화됨에 따라 각각의 제후국들은 철제 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발전시키고 인재를 등용하여 주왕실에 반기를 들고 춘추 전국 시대의 패자가 되기 위해 치열
한 전쟁 및 제자백가사상, 뛰어난 왕과 장군이 나타났던 시대이다. 특히 전국 칠웅이라 불리는 진, 초, 제, 연, 조, 위, 한의 일곱 나라가 일어나 서로 대립했다. 이들의 발호 지역은 모두 번한 지역 안이었
다.
- 춘추시대
춘추 시대(중국어: 春秋時期, 병음: Ch?nqi? Shiqi: 기원전 770~403)는 중국의 역사에서 기원전 770년에서 기원전 403년 사이의 시기를 말하며, 주나라의 동천 이후 진나라의 중국 통일까지의 시기를 부르는 춘추 전국 시대의 전반기에 해당된다.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에서 이 이름이 유래했다.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와의 경계는 춘추 시대에 열국의 강국 진(晋)이 조·위·한의 3국으로 분열되어 동주로부터 정식으로 승인 받은 기원전 403년까지로 잡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진의 집정하에 있던 지백(知伯)을 멸망시키고 사실상 3국의 분립이 성공한 기원전 453년으로 올려 잡는 설도 있다.
- 전국시대
전국 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221) 중 기원전 260년의 전국 칠웅:
연(燕) · 위(魏) · 제(齊) · 조(趙) · 진(秦) · 초(楚) · 한(韓)이 할거하던 시대이다.
- 오호16국시대
오호 십육국 시대(五胡十六國時代: 304~439)는 삼국을 통일한 서진
(西晉)이 멸망한 후, 5개의 비 한족을 비롯한 16개의 국가가 회수(淮水) 북부에 여러 나라를 세우며 난립하던 시대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전조(前趙: 304~329)가 건국된 304년부터 북위(北魏: 386~534)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까지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다. 이후가 수, 당이다.
* 5호는 모두 뫼족(묘족. 치우의 후예) 나머지 11국은 헌원의 후예
* 진, 초, 제는 치우의 후예 한, 위, 조, 연은 헌원의 후예
* 국을 통일한 진은 진한인들, 항우와 한나라 유방은 황하족
* 조조, 유비, 손권은 모두 혼혈
* 수 나라는 실질적인 최초의 번한 통일 왕조
아. 이 때 한국의 시대구분
1. 건국-치우(BC 26세기): 5천-5만 년 간 제사장중심 3한의 제정시대로 후에 제사권 남용 극심(서납아국 인도과 진한 산악 즉. 네팔, 티벳에서 불교 성행, 번한의 농경지역에서 헌원 이후 하, 은, 주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
2. 농경 군사력에 대비 제사권(샤먼 권) 보호 위해 마한(요하)을 근거로 군사력의 황해 연안 진출 및 양자강 이남 선주 뫼 족인 진한과 연결 시도
3. 치우 때 산동 반도를 발판으로 농경 민족 대표 헌원과 대결, 치우 이후(기원전 2.600년 이후)-: 농사와 제사 분리
4. 단군 이후 군사 관할지역 한반도, 요동, 황해 연안으로 축소 및 요, 순, 하, 은, 주, 연, 진, 한과 대결
5. 44세 단군 구을이 기원 전 423년 도읍을 아사달에서 장당경으로 옮기고 국호를 삼한에서 삼조선 또는 대부여라고 불렀다.
6.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오고 고구려 2대 비류왕의 동생 온조가 남쪽으로 진출하여 황하 하구에서 북경 천문대로 수복하기 위해 백제를 세우고 양자강 하구 과거 진조선에서는 신라가 개국함
7. 단군 조선(대부여)가 쇠퇴하자 기원 후 200년 경 진시왕 때 단군 조선은 제사 권까지 상실하였고 이 때에 충칭의 조천문이 진시왕에게 넘어갔다.
8. 요동과 한반도의 북부여는 고구려가 계승하였으나 대륙의 백제와
신라는 농경민족과 함께 기원 후 500년까지 황해 연안에서 혼재하다가 한반도로 피난하여 한반도 한국이 되었다
자료출처 : http://armymission.org/dangu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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