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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터지는 다산의 유머 (부제: 다산서신에 나타난 해학과 풍자[i])
지은이 정약용, 옮긴이 박석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개정2판 5쇄. P.330. 창비.
시간의(=문화적인) 격차가 너무 커서 이루 헤아리기 어려운 책이며, 사상의 스펙트럼[ii]이 너무 커서 담아내기 버거운 책이다. 박석무가 쓴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나로서는 역사적 배경지식이 무지할 뿐 아니라, 다 담아낸들 다 적용할 수도 없을 것 같아 어설픈 서평은 접어 두는 게 좋을 듯 하다. 서평이 아니라면 무엇을 쓸까? 염두에 두며 읽던 중에 흥미로운 대목들이 눈에 뛰었다. 여느 독자들도 그러하겠지만 이 책 곳곳에 숨어있는 특정 패턴들을 따로 정리하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데에 공감할 것이다. 특히 두 아들과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글쓰기 노하우’에 대한 내용을 발췌하여 따로 분류하면 하나의 논술 교과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뿐 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다산의 독서 노하우, 다산의 가문 바로 세우기 전략, 다산의 목축업으로 살아남기, 다산의 군신 관계론, 다산의 여성관에 대한 딴지 걸기 등과 같은 소재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고서를 함부로 훼손할까 염려되기도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콘텐츠만을 뽑아 보는 것도 ‘책을 읽고 쓰는 데에’는 더 할 나위 없는 도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유배지에서 아버지 정약용은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번갈아 가며 편지를 보내고 받는다. 자신이 사대부 집안의 어른답게 품위와 기개를 유지하려고 애쓰며, 자식들에게도 아버지를 모델링할 것을 힘써 강조한다. 중죄로 출세길이 막힌 폐족처럼 살지 말고, 깨끗하고 이름있는 청족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갖고 살 것을 당부 또 당부하였다. 당시 두 아들에게는 잔소리 대마왕의 목소리처럼 들렸을 것 같다. 아버지의 조언을 무시한 듯한 행동들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엄하게 보이는 아버지에게도 위트는 살아 있었다. 저자 거리에서나 통할 저급한 웃음을 유발하는 책들을 비판하기는 했지만, 당시 저서들 중에는 격물의 이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역사성도 부족한 얄팍한 지식으로 쓴 글들과 작가들에 대한 일침으로 한 말이었을 것이다[iii]. 계속되는 편지의 내용들을 보면 그의 해학적 기지가 엿보이는 대목들이 구비구비 포석되어 있다. ‘다산의 위트, 유머, 해학’ 어떤 것을 붙여도 될 만한 내용들을 발췌하고 코멘트를 달아 보았다.
다산의 위트 넘치는 해학, 빵 터지는 개그 감은 특히 아들과의 편지에서 많이 나타났다. 유배지를 죽산, 가흥을 지나 경상도 장기로 옮기는 도중에 아버님 묘소에 들려 뵙고 왔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갔다. “이제 막 아버님 묘소에 도착해서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한바탕 뿌렸구나. 귀양을 보내도 아버님 묘소가 있는 곳을 지나게 해주시니 어딘들 임금의 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이 있겠느냐?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p.31, 1문단 6줄~) 이 대목에서 빵 터졌다. 아버지 앞에서 흘린 눈물이 과연 좋아서 흘린 눈물일까? 억울하게 벼슬을 잃었다는 서러움의 눈물은 아니었을까? 천덕꾸러기가 되어 살아갈 아이들을 걱정하며 울지 않았을까? 외로운 귀양살이를 어떻게 견뎌낼까? 또 어지러운 국운에 대한 충정이 아버지를 뵙는 순간 그 모든 것이 쏟아져 나오지 않았을까? 그런데 서러움과 염려와 외로움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그는 해학적 기지로 승화시킨다. “귀양을 보내도~ 어딘들 임금의 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이 있겠느냐?” 천주교 박해(신유박해)에 연루되어 그의 셋째 형 ‘약종’은 처형당했고, 둘째 형 ‘약전’과 본인은 귀양 길에 오른 신세였다. 귀양살이를 하게 된 최종 결정권자가 임금이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 터인데, 그는 ‘임금의 은혜’를 찬양하는 듯 말한다. 우리 말 사전에는 남의 결점을 다른 것에 빗대어 비웃으면서 폭로하고 공격하는 것을 풍자라고 하며, 문학 작품에서 현실의 부정적 현상이나 모순 따위를 빗대어 쓴다고 되어 있다. 임금의 잘못 된 결정에 대한 역설적인 표현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위트있게 치고 빠져야 사사로운 감정이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훗날을 기약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외에 해학과 풍자가 드러나는 표현들은 계속 나온다. “날짜를 헤아려 봤더니 지난 번 편지를 받은 지 82일 만에 너희들 편지를 받았더구나. 그 사이에 내 턱 밑에 준치 가시 같은 하얀 수염 일고여덟개가 자라났다.”(p.32. 2문단 2줄~) 요즘 사람들은 날짜를 새는 걸 좋아한다. 사귄 지 100일, 1000일, 심지어 계산해주는 앱도 있다고 한다. 아들의 편지를 받은 후 답장이 오길 손 꼽아 기다리는 어린 아이 같은 순진함이 묻어 있다. 이어지는 표현을 보라. 애타게 기다렸다는 말을 턱수염이 하얗게 자란 것에 비유하여 익살스럽게 말한다. 그냥 ‘흰 턱수염이 났다’는 사실을 “그 사이에 준치 가시 같은 하얀 수염이 일고여덟개가 자라났다”고 했다. ‘일고여덟개’라는 표현에서 빵 터졌다. 그것들을 새고 앉아 있을 사대부의 준엄한 가장의 모습을 상상하자니 웃음이 나온다. “너희들이 참으로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내 저서는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마음의 눈을 닫고 흙으로 빚은 사람처럼 될 뿐 아니라, 열흘이 못 가서 병이 날 것이고 이 병을 고칠 수 있는 약도 없을 것인즉, 너희들이 독서하는 것이 내 목숨을 살려 주는 것이다.” (p.40. 1문단 6줄~) 벼슬 길도 막혔고 큰 아버지의 눈치 밥을 먹으며 살수 밖에 없는 처지에 마음을 다잡고 기울어진 가세를 다시 세울 생각은 커녕 공부를 게을리한다는 소식에 화가 난 아버지의 극약 처방이었다. 만약 경상도 버전으로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이 않을까? “니 들이 책을 읽지 않는데, 내가 죽을 똥 살 똥 책을 쓰면 모하겠노, 내는 앞으로 얼음 맹쿠로 가마이 있다가 ‘땡’ 할 때까지 꼼짝도 안 할끼다마. 이라다가 병들어 주거삐면 약도 없데이. 니거가 독서를 하믄 내 목숨을 살려 주는 거 아이겠나? 알겠재!” 그러니 정신차리라는 것이지.
“이 책을 2월 보름에 보내 온다면 내 마음은 너무 기뻐 벌떡 일어나 춤이라도 출 것 같다. 너희들이 이 아비의 마음을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급히 서둘러 착수하기 바란다.” (p.76. 아래에서 3줄~) 이 대목은 아버지의 잔소리로 들릴 수 있는 내용이지만, ‘벌떡 일어나 춤이라도 출’ 사대부의 준엄한 가장을 연상하면 또 웃음이 나온다. 이 정도면 설득 당하고도 남지 않을까? 나라도 씩 웃으면서 글 쓰기에 착수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매주 기한에 맞추어 과제를 내듯이 ^^ 말이다. “제3. 음식(밥을 흘리지 않는 일이나 남의 집에 가서 국간을 맞추지 않는 일 같은 것)”(p.77. 밑에서 3줄) 다산의 주변에 과연 이런 사람이 있었을까? 경험담이었는지 궁금하다. 남의 집에 가서 국간을 왜 맞쳐?? 아마도 식사초대 받아서 먹을 때는 간이 짜다 싱급다 하지 말고 맛있게 먹으라는 뜻으로 보인다. 이런 것까지 언급하는 디테일 함에 웃음이 또 빵 터진다. 푸하하.
“사람은 집안에 화기(和氣)가 있도록
힘써야 한다. 일가끼리 자리를 같이 한다거나 가끔 친한 손님이 찾아오면 기쁜 마음으로 맞아 대접하고
하룻밤이라도 더 주무시고 가게 하여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어야 한다. 만약 단정하게 무릎 꿇고 앉아
천천히 안부만 묻고는 말도 않고 웃지도 아니하고 무뚝뚝하게 대하여 손님을 어색하게 만들어 손님이 일어나 가겠다고 하면 만류도 하지 않고 보내면서
마루에 내려서지도 않는다면, 여러 사람이 상대해주지
않을 것이며 필경 평생의 복을 망쳐버리는 일이 될 것이니 부디 깊이 조심하도록 해라.” (p.89. 2문단) 만약 불청객이라면 반갑지 않을 수
있다. 하룻밤을 재워주기는커녕 빨리 일어 났으면 한다. 그러나
‘사대부 청족의 선비’는 그럴 수 없지 않는가? 기쁜 마음으로 대접하고 흐뭇하게 해주어야
한다. 특히 밑 줄 친 부분은 읽을수록 재미있는 대목이다. 이
부분에서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 손님을 맞이 할 때, 대면
대면하거나 부동 자세로 있지 말고 적당히 리액션을 하라. 경쾌한 말투로 웃으면서 말하면 분위기가 경직되지
않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잘 대접하면 마을에서 왕따 당하지도 않고,
반드시 복이 네게 임할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하는 것이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을 선비의 번역기로 돌려 고상하게 표현하고 있다. 웃음이 나온다. ㅋㅋㅋ
“고기 그물을 처 놓으면 기러기란 놈도 걸리게 마련인데, 이를 어찌 버리겠느냐?”(p.99.
1문단) 푸하하. 요즘 하는 말로 ‘얻어 걸린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것 아닐까? 책을 집필하기 위한 자료들을 수집해서 보관해 놓고 나중에 꺼내 보니
아주 적합한 내용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면, 의도하지 않은 것이게 파기해야 하는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고기 그물’은 주로 작은 식용 물고기들을 잡을 목적으로 놓아둔 것이다. 어부가
무심코 그물을 올려 보니 큰 ‘기러기’가 잡힌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횡재라고 부른다. “내 어찌 사대부 청족이었던 선비가
비록 벼슬길 막힌 폐족이 되었다고 아무거나 다 받아들일 수 있겠나?”라고 말했을 법 한데, 다산은 의외에 반응을 보인다. “이를 어찌 버리겠느냐?” 선비도 횡재 앞에는 어쩔 수 없나 보다.
“네 형이 왔을 때 … 동생인 너의 주량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너는 네 형의 배도 넘는다 하더구나. 어찌 글 공부에는 이 아비의 버릇을 이을 줄 모르고 주량만 아비를 훨씬 넘어서는 거냐?” 술을 즐기지 않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술을 권하며 동생의 주량을 물어본다. 술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앞 부분만 들으면 잘 모른다. 끝까지 들어야 무슨 말인지 알게 된다. 역시 공부하라는 이야기였다. 기승전’책’이다. 집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들은 자식이 책 읽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구나. 나 역시 그렇다.
“슬프도다. 어지신 (정약전, 다산의 둘째 형님)이께서 이처럼 곤궁하게 세상을 떠나시다니 원통한 그 분의 죽음 앞에 나무나 돌멩이도 눈물 흘릴 일인데 무슨
말을 더하랴!” (p.105. 2문단.) 둘째 형의 죽음을 보고 이런
저런 루머들이 떠 돌았던 것 같다. 루머라는 게 대부분 팩트가 아닌 경우들이 왕왕 있지 않은가? 누구 보다도 형을 잘 알고 아끼는 동생이 볼 때는 세인들의 입방아가 못마땅한 것이다. 셋째 형 정약종은 천주교 박해 사건에 연루된 증거가 확실하게 드러났기에 처형당하였지만, 정약전과 정약용은 그 혐의가 약하고 천주교에 물들지 않았다고 보아 귀양살이를 보낸 것이다. 박석무(본서의 옮긴이)의
다른 글을 보면 귀양 간 두 사람이 천주교로 개종했느냐 안 했느냐를 가지고 아직도 논쟁이 있다고 하니, 당시
다산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그의 표현처럼 ‘곤궁하게’ 세상을 떠난 ‘원통한’ 죽음이었다. ‘나무나 동멩이도 눈물 흘릴 일인데 무슨 말을 더하랴!”라는 표현에서는
그의 해학적 기지가 빛을 발한다. 사람이 죽었는데 애도하기 보다는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붕당 정치꾼들을
향해 풍자를 날린다. ‘너희들은 나무나 돌멩이보다 못한 놈들’이라고
비꼰다. 시원한 한 방을 날렸다. 나도 통쾌하다.
“쓸모 없는 의론(의역하면 개똥철학) 따위는 한 갓 종이와 먹만 허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차라리 손수 맛있는 과일이나 영양가 높은 채소를 심어 살아 있는 동안의 생활이나 넉넉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 (p,154, 2문4줄) 괴상한 웃음이나 자아내는 자질구레한 이야기와 진부하고 새롭지 못한 이야기, 그리고 지리멸렬하고 쓸모 없는 논증만 가득한 책을 쓸 바엔 차라리 그 노력으로 생산적인 노동을 하라고 꼬집는다. 요즘 SNS나 인터넷 사이트에서 음담패설이나 반사회적인 글을 올려 음란, 자살, 테러, 마약 등을 부추기고 있다. 무비판적인 청소년들에게는 위험한 일이다. 직업적으로 쓰는 네티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런 일로 밥 벌어 먹는 것보다 농사지어 얻은 것으로 소박하게 사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배우 송중기식 군인 말투로) 요즘 귀농, 귀촌이 유행이지 말입니다. 아니면 공사판에서 땀을 흘려 보시든지 말입니다. ^ ^
“..만약 매우 빈곤해지면 곡식 몇 되 몇 자 가지고도 다툼이 일어나고 나쁜 말이 오고 가서 서로 모욕하고 무시하다가 점점 더 격렬하게 다투게 되어 끝내는 원수지간이 된다. 이런 때 감동시킬 만한 도량 넓은 남자가 없다면, 점잖고 지혜로운 부인이 산이나 늪같이 넓은 도랑을 활짝 열어 구름을 헤치고 나온 햇빛이 비치듯 순순히 받아 들여 부드럽게 어린 아이처럼, 속없는 사람처럼, 뼈 없는 벌레처럼, 갈천씨(중국 상고시대의 제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천하를 잘 다스린 인물로 인용한 것)처럼, 참선하는 중처럼 해야 한다. 저 사람이 나에게 돌을 던지면 아름다운 옥으로 갚아주고, 칼이나 창을 들이대도 맛있는 술로 대접해주면, 눈을 흘기고 화를 내며 다투고 소란을 피워 집안을 뒤엎은 뒤에야 끝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p.159. 2문~160. 1문) ‘뼈 없는 벌레’^^에서 빵 터졌다. 집안의 화목한 분위기(和氣)를 만드는 건 역시 현숙한 아내의 몫인가 보다. 그 전에 보낸 편지 내용에서는 여성을 폄하하는 듯한 묘사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대목에서만큼은 여성의 역할을 부각시킨다. 그런 면에서 풍자적 기법이 돋보이기도 하다. 가정의 불화를 일으키지 않고, 험악한 분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우악스러운 무력이 아니라 ‘넓은 도랑을 활짝 열어 구름을 헤치고 햇빛이 비치듯 부드럽게’ 대처하는 유연함에 있다. 상상해보라. ‘속없는 사람처럼’, ‘뼈 없는 벌레처럼’ 다 받아주고 품어주는 모습을. 그래야 분노를 잠재울 수 있을 터. 예수님이 말씀하신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마5:39)’는 가르침과 닮아 있는 듯하다.
‘풍자가 비판적 인물을 공격함으로써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을 밝히며 읽는 이에게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라면, 해학은 그런 비판적 인물에게 공격받는 대상에 대한 동정으로 읽는 이에게 그런 상황을 공감하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iv]’고 하였는데,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는 풍자도 있고 해학도 들어 있는 셈이다. 붕당정치인들이나 저급한 저술가들에게는 풍자를, 귀양살이하는 자신과 가족들의 이야기에는 해학을 엿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암행어사까지 지낸 조선의 대실학자요, 저술가요, 철학자였던 그가 귀양살이 신세가 되어 미래가 묘연한 ‘폐족’으로서의 삶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글쓰기의 위력이 아니었을까? 그 위력 안에는 현실을 꼬아 웃음과 유머와 위트로 승화시키는 능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i] *해학(諧謔): 익살스럽고도 품위가 있는 말이나 행동. *풍자(諷刺): 1. 남의 결점을 다른 것에 빗대어 비웃으면서 폭로하고 공격함. 2. 문학 작품 따위에서, 현실의 부정적 현상이나 모순 따위를 빗대어 비웃으면서 씀. [네이버 어학사전 제공]
[ii] 위키백과사전에서 정약용(丁若鏞)을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로 소개하는 것을 보면 그의 사상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iii] 정약용, 박석무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P.154의 둘째 문단에서 “자질구레한 이야기들로 한 때의 괴상한 웃음이나 자아내는 책이라든지, (생략)… 따위는 한 갓 종이와 먹만 허비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괴상한 웃음을 자아내는 책을 비판했지만 문학적 해학과 풍자는 그것과는 결이 다른 것이다.
[iv] 송진우, 국어용어사전. 2007. ㈜신원문화사 [네이버 지식사전 제공]
첫댓글 위트, 해학, 유모어라는 하나의 주견을 가지고 인용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사부님께 충분히 칭찬받을만 합니다ㅎ 다시 읽어도 재밌고 유익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부족한 부분이 자꾸 눈에 뛰어 수정하게 됩니다. 배경지식이 짧아서 공부하면서 썼습니다. ㅎㅎ
정말 글을 잘 쓰신 것 같습니다. 책을 모르는 이라면 책을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많이 들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