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熺性 계엄사령관은 崔圭夏 대통령이 안중에 없는 듯 소리를 질렀다』
피의자 진술조서 (제3회·1995년 12월 26일 서울지방검찰청) 요약
張炯泰 당시 전남도지사
책임의 한계 느껴 道知事 사임
문 진술인이 5·18 광주 민주항쟁 당시 전남도지사였나요.
답 예, 그렇습니다.
문 진술인이 1980년 5월28일 전남도지사를 사임하게 된 사유는 무엇인가요.
답 5월27일 공수부대에 의한 「도청진압작전」이 끝난 뒤, 그때까지 정부 차원에서의 시위진압 과정에서 발생된 모든 결과에 대해 도지사로서 책임의 한계를 느껴 사임을 결심하고, 그날 10시경 내무부 장관 김종환에게 사의를 표명하여, 사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문 1980년 5월17일까지 계엄하에서의 광주의 시위상황은 어떠했나요.
답 도청 앞 광장에서 주로 학생들이 『全斗煥 물러가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는 등 산발적인 시위는 있었으나 경찰력으로 시위를 진압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문 1979년 10·26 사건 이후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기 이전까지의 道 업무가 평상시와 다른 점은 무엇이었나요.
답 도청 업무가 변한 것은 거의 없으며, 단지 법적으로 전남·전북 계엄분소장인 전투병과교육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문 진술인이 광주에 공수부대원들이 투입된 사실을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알게 된 것인가요.
답 1980년 5월18일 05시30분경에서 06시경 사이에 전남 道警(도경) 정보과장 양동회가 관사로 저에게 전화를 하여 어제 밤에 공수부대가 전남大와 조선大에 온 것 같다는 보고를 받아 처음 알게 된 것입니다.
문 그 이전에 계엄분소장과 회의를 갖거나 하여 그와 같은 사실을 전달받았던 것은 아닌가요.
답 그런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 제가 가장 불쾌하게 생각했던 점입니다. 아무리 계엄하에서 계엄분소장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지만, 도지사에게까지 軍 병력을 투입하는 것에 대해 사전 통보도 해주지 않았던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5월18일 母親 사망 임종
문 진술인이 5월18일 최초 공수부대 투입 이후에 취한 조치는 무엇이었나요.
답 저는 5월18일 11시경 못자리 시기였기 때문에 관내 나주군, 함평군 등을 순시하던 중 모친의 위독 사실을 연락받고 도청 뒤에 있던 관사로 돌아와 같은 날 16시에 모친이 운명할 때까지 임종을 맞이했고, 5월20일까지 장례를 치른 탓으로 공적인 보고 및 지시를 할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간의 대략적인 상황은 5월20일 14시경 출근을 하여 보고를 받아 알게 된 것입니다.
문 5월21일 시민들이 도청에 진입하게 된 경위는 어떠한가요.
답 그날, 도청에서 비상대기 중 10시30분경에 경찰 헬기에 광주시장 구용상과 함께 탑승하여, 광주시내 상공을 선회하면서 시민에게 과격시위를 자제하고 질서를 회복하도록 호소하던 중, 17시경 광주비행장 내 경찰항공대에 그 당시 경찰 간부들이 집합해 있었는데 시민들이 도청을 장악하고 있어 들어갈 수 없다는 보고를 받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상황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문 그 당시, 도지사로서 경찰 보고계통을 통해 시위에 대한 전반적인 보고를 받지 않았나요.
답 그런 보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때는 이미 정상적인 경찰 보고를 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고, 그날 오후부터는 도청 직원들도 대피를 하여 뿔뿔이 흩어져 버린 상황으로 전화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문 진술인은 계엄분소장 등과 비상대책회의를 가진 사실이 있는가요.
답 대책회의 등에 참석한 사실이 없고, 참석을 시키지도 않았습니다.
문 지역 기관장 또는 시민들과 대화를 가진 사실은 있는가요.
답 5월26일 14시경 도청 광장 상무관 건물 내에 희생자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과 함께 묵념 등 애도를 표한 뒤, 도청 내 도지사실에서 그 당시 시민들로 구성된 「수습대책위원」들과 만났습니다. 그 다음에 학생대표, 희생자 유족대표 등과 만나 대화를 가진 사실이 있으며, 이어서 내외신 기자들과 인터뷰를 가진 사실이 있습니다.
문 그 당시 수습대책위원, 학생대표들은 누구였나요.
답 수습위원회는 5월22일 12시경 그 당시 사태 수습을 위해 도지사, 정시채 부지사, 김신근 목사, 이종기 변호사, 독립유공자 최한영, YWCA 총무 조아라 여사 등 8~9명으로 기억합니다. 학생대표로는 조선대학교 김종배, 전남대학교 성명불상자 1명 등이었고, 희생자 유족대표들은 이름이 전혀 기억 나지 않습니다.
문 그들과의 대화내용은 무엇이었나요.
답 수습대책위원들이 저에게 특별히 요구한 것은 없으며, 유족대표들은 장의절차 등에 대해 의논을 했습니다. 제가 학생대표들에게 「더 이상의 피해가 없도록 하자」고 할 때, 학생대표들은 「一戰(일전)을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다」며 「그 이상의 말은 하지 말아 달라」고 하여 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문 내외신 기자들과 인터뷰한 내용은 무엇이었나요.
답 「도지사로서 그 당시 사태를 어떻게 보는가」라고 질문을 하여, 『지나친 과잉진압으로 인해 발생한 사고』라고 답변을 했고, 「향후 대책」에 대한 질문에 『더 이상 희생이 있을 수 없으며, 희생이 없는 가운데 해결이 돼야 한다』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도지사로서는 그 당시 「종이 호랑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그야말로 희망사항이었을 뿐이지 경찰도 흩어진 상태였고, 오직 공수부대와 시민들의 대치양상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오토바이 뒤에 타고 도청으로 돌아와
문 5월21일 오후부터 5월23일 14시경까지 광주 송정읍 소재 광주비행장 내 경찰항공대에 체류하며 무슨 조치를 취했나요.
답 그 사이에 하루에 한 번 정도 상무대에 있는 전교사령부 사령관실, 부사령관실을 방문하여, 대략적인 상황파악을 하곤 했습니다.
5월26일까지 광주시내로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5월22일에는 총리가 광주를 방문한다고 하여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고, 5월25일은 崔圭夏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내에 일단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고 판단하여 늦게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5월26일 07시경 먼저 광주시청에 들러 시장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고, 점심을 먹고 난 후 오후에 도청으로 시청직원이 운전하는 오토바이 뒤에 타고 혼자 가게 된 것입니다.
문 진술인이 도청 상무관에서 목격한 희생자의 수는 어느 정도였나요.
답 확실히는 모르지만, 100명은 안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진술인이 5월21일 09시경부터 10시경 사이에 도지사실에서 전옥주 및 남자 2~3명과 면담 시 「공수부대 철수」, 「연행자 석방」, 「과잉진압 사과」, 「계엄사령관과의 면담주선」 등의 시민들 요구사항을 들어 주겠다고 약속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예, 최대한 수용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한 사실은 있습니다.
문 진술인이 그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했나요.
답 5월21일인지 5월22일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없지만 바로 전교사령관 윤흥정을 만나 시민들의 요구사항을 전달하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만 했지 특별히 취해진 조치사항은 없었습니다.
문 진술인이 광주 기관장들과 전교사령부 등지에서 간담회 등을 가진 사실이 있는가요.
답 그런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문 진술인이 수습대책위원들과 함께 전교사령관과 간담회를 가진 사실은 있는가요.
답 공식적으로 수습위원들과 전교사령관을 만난 사실은 없습니다.
문 5월22일 박충훈 국무총리(서리)가 전교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함께 배석을 했던 사람들은 누구였나요.
답 저와 경찰국장이 함께 참석을 했고, 그 외 전교사령관 등이 참석했으나 구체적인 기억은 없습니다.
『市民들은 폭도가 아니었다』
문 그 당시, 진술인이 총리에게 건의한 사항은 무엇이었나요.
답 제가 명확히 기억하는 것은 정부 차원에서 시위하는 학생·시민들에게 「폭도」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신문에 「폭도」라는 기사가 실리자 신문보급소에서 배달을 못 한다는 얘기를 듣고 난 뒤 총리를 만났기 때문에 그와 같은 건의를 드렸던 것입니다.
문 진술인은 그 당시 시위하던 사람들이 폭도가 아니라고 판단한 근거는 무엇이었나요.
답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으로 그것에 반발하여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폭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먼저 과격하게 시위진압을 한 쪽이 폭도라면 폭도겠지요.
문 진술인이 5·18 광주항쟁 당시 도지사로서 시민들의 입장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軍의 과격한 진압에 대처하지 못한 사유는 무엇이었나요.
답 초기에 제가 모친상을 당한 관계로 적극적으로 대처를 못 한 것은 저의 책임이라 할 수 있으나, 그 이후에는 도지사로서 軍의 강경대응에 대해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을 정도로 무시를 당했기 때문에 특별히 취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문 5월25일 17시30분경 전교사령부에 崔圭夏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진술인도 참석했지요.
답 예, 참석했습니다.
문 그 당시, 어떤 사람들이 배석했나요.
답 崔대통령을 수행하여 계엄사령관 이희성 장군, 내무부 장관 김종환, 보사부 장관 진의종, 건설부 장관 최종완 등이 참석했고, 국방장관은 기억이 안 나며, 전교사령관 소준열, 저와 경찰국장 안병하, 그 이하 전교사 간부들과 부대장들 정도가 참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새로 부임한 소준열 장군과 부사령관 김기석 장군 외에는 잘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대통령은 안중에도 없는 상황
문 그날, 崔대통령과의 면담과정에서 진술인이 도지사로서 건의한 사항은 무엇인가요.
답 제가 먼저 말을 한 것이 아니고, 전교사령관 소준열 장군이 상황보고를 한 뒤, 崔대통령이 저에게 「도지사로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 대답을 하게 되었는데, 『열흘 가까워지니까 생필품이 궁색해지고 치안 공백상태가 더 이상 지속돼서는 안 되겠으니 조속히 수복되겠지만, 이 이상은 희생이 없어야 되겠다』고 의견을 말씀드린 사실이 있습니다.
문 그때, 진술인이 공수부대의 과격한 진압이 시민들이 도청을 장악하는 등 사태악화의 원인이 되었다는 말을 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저에게 구체적으로 묻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렇게 말할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제가 「이 이상은 희생이 없어야 된다」는 말을 한 것만으로도 그 당시 배석했던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화를 내며 『그럼 들어가란 말이냐, 들어가지 말란 말이냐』고 말을 하여, 도지사로서 『그 이상의 말을 어떻게 합니까, 軍이 들어가고 안 하고는 軍 작전상의 문제가 아니냐』고 대꾸를 할 때, 崔대통령이 『李장군, 李장군』 하면서 만류했었는데, 거기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대통령 맞은편에서 앉아 있던 소준열 전교사령관을 향하여 『소준열 장군, 도지사가 들어가라거든 들어가』 하면서 소리를 쳤습니다. 그야말로 대통령은 안중에도 없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문 그 당시, 소준열 장군의 상황보고는 어떠했나요.
답 그동안 있었던 일반적인 시위 현황 등을 보고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구체적인 기억은 없습니다.
문 5월27일 소위 「도청진압작전」이 종료된 뒤, 진술인 배석하에 주영복 국방장관, 황영시 참모차장 등이 도청에서 기자회견을 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제 기억으로는 기자회견을 한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전라남도 공보실장 이종무를 통하여 기사내용을 배포해 주는 식으로 했던 것 같습니다.
문 그 당시, 발표내용은 무엇이었나요.
답 제가 지난번 진술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5월23일 17시경에 전교사령관 부속실에서 2군사령관 진종채 장군을 만난 뒤 무언가 軍이 작전을 할 것 같은 낌새가 있어, 바로 공항 항공대로 복귀하여 경비전화로 국방대학 동기생인 황영시 참모차장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내 육감에 내일 아침 시내로 軍이 투입될 것 같은데 시가전을 할 것이냐, 그래서 얼마만한 희생을 내려고 하느냐』며 신중을 기해 달라는 요청을 하자, 황장군이 저에게 『그것이 당신 소신이냐』고 하여 『그렇다』고 하자 『알았다』고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기자들에게 발표문을 작성해 줄 때 『도지사가 강력한 요청을 했기에 수일간 작전을 지연시킨 결과 희생을 최소화했다』고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수부대의 무차별한 진압이 항쟁으로 발전
문 그 당시, 시민들이 계엄군에 대항하여 무기 등을 탈취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그것은 계엄군들이 워낙 과격하게 시위진압을 하고 심지어 총기를 사용하니까, 그와 같은 것을 목격한 시민들이 대항 차원에서 무기를 탈취한 것으로 들었을 뿐 저는 직접 그런 구체적인 상황은 알고 있지 않습니다.
문 진술인은 공수부대가 광주시내에서 市 외곽으로 철수하게 된 배경을 아는가요.
답 전혀 아는 사실이 없습니다.
문 들리는 바에 의하면, 진술인이 5월21일 12시까지 공수부대원들을 철수시키기로 시민들과 약속한 사실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5월21일 09시에서 10시경 도지사실로 전옥주 등이 찾아와 「공수부대 철수」, 「연행자 석방」, 「과잉진압 사과」, 「계엄사령관과의 면담주선」 등을 요청해, 군부대에 건의할 것을 약속한 사실은 있지만, 그날 12시까지 철수하겠다는 명확한 약속은 한 사실이 없습니다.
문 그 당시, 전교사령관 윤흥정 장군, 31사단장 정웅 장군 등에 대한 시민들의 감정은 어떠했나요.
답 그 당시는 시민들이 좋게 보지 않았는데, 청문회 때 신군부에 의해 잘렸고 지휘체계가 이원화되었던 것을 확인한 다음부터는 좋게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문 5월22일부로 윤흥정 장군이 소준열 장군으로 계엄분소장이 바뀌게 된 경위를 아는가요.
답 전혀 모릅니다.
문 광주 민주항쟁의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요.
답 제가 보는 견해는 도지사가 軍에 요청을 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軍이 부당한 시위진압을 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시위를 하다가 보고만 있었던 시민들이 도저히 볼 수 없다는 판단하에 합세를 하여 대항하게 되면서 결국 민주화를 위한 항쟁으로 발전된 것으로 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공수부대의 초기 무차별한 과잉진압에 대한 반항이 전체 시민들에 대한 봉기로까지 발전한 것입니다.
문 진술인이 5·18 민주항쟁 당시 공수부대의 과격시위 현장을 목격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나중에 듣고 보니, 첫날 제일 과격한 공수부대의 진압이 있었던 시간이 그날 16시경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며, 그 외 특별히 목격한 사실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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