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크로네시아의 마샬제도 안에 길이가 약 100km가 되는 콰잘린 환초가 있는데, 이 섬에 일본군은 규모가 큰 해․공군 기지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콰잘린 남쪽 800km 지점에 있는 길버트 군도에 매킨과 타라와환초가 있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콰잘린을 빼앗기 위해 매킨과 타라와 환초를 먼저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두 섬은 콰잘린과 호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타라와에는 비행장을 닦아 놓고 연합군의 수송선을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작전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맹활약을 한바있는 스프류앤스 중장이 니미츠 제독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태평양 함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1943년11월 스프류앤스 제독은 매킨과 타라와 남동지점에 약 200척의 대 함대를 집결시키고 있었다.
이 함대 속에는 제2해병사단과 육군 2개 사단(-)을 실어 나를 36척의 수송선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병력은 총 35,000명 이었다.
이 수송선단을 호위할 함정들로는 항모 17, 전함 12, 중순양함 8, 경순양함 4, 그리고 구축함 66척 이었는데, 현제 보유한 항공모함은 미드웨이 해전당시의 항모와는 다른, 새로 건조한 것으로 더 크고 빨랐다. 함재기는 모두 900대가 넘었다.
대 함대는 3개의 기동부대로 구분되었다.
남방기동부대는 타라와를 공략하고, 북방기동부대는 매킨을 공격하도록 되어 있으며, 제3기동부대는 콰잘린 으로부터 예상되는 일본군의 공격을 차단하고, 두 섬을 공격하게 될 기동부대를 엄호하도록 되어 있었다.
북방기동부대에 의한 매킨환초 공략은 4일 만에 끝이 났다.
항모 리스컴베이가 일본군 잠수함의 어뢰에 맞아 침몰하였으며 미군은 약 860여명의 병력을 잃었다.
이중 644명은 항모가 침몰할 때 발생한 전사자였다.
한편 타라와환초에서는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처절한 전투로 기록된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타라와환초는 47개의 산호초 섬이 점점이 연결되어 말발굽 형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 가장 큰 섬이 ‘베티오’ 섬으로 길이는 3km이고 가장 넓은 부분이 1km도 안되는 섬이다.
이 섬에 일본군은 비행장과 몇 가지 시설물을 건설하고 있었다.
고작 1km2 남짓한 이 작은 섬에는 일본 해군의 시바자끼 게이지 소장이 지휘하는 약 2,600명의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고, 건설노무자로 일본인 1,000명과 한국인이 1,200명 있었다.
이 노동자들이 베티오섬 만한 크기로는 세계최강의 요새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일본군은 이 요새에 걸 맞는 화력과 방어시설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그래서 시바자끼 소장은 큰소리 쳤던 것이다. “백만의 병력이 백년 걸려도 타라와를 함락시킬 수 없다.”라고
그도 큰소리 칠만한 것이 절반이상은 한국인의 노력에 의한 것이지만, 섬을 일주하는 교통호는 거의 유개화 하였으며 거기에는 100개도 넘는 기관총 진지와 14문의 유개 해안포진지, 그리고 40문의 박격포 진지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해안선을 따라 1.2km나 되는 야자통나무 방책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섬주변의 바다 속에는 무수히 솟아있는 산호 봉우리가 있는데 이 봉우리 간격이 먼 곳에는 사이사이에 이른바 용치(콘크리트 뿔기둥)를 설치하여 보강하였기 때문에 어떤 배라도 접근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철조망과 지뢰를 매설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반면 남방기동부대의 함대사령관 하워드 F. 킹먼 소장도 자신 있게 말하였다.
“장병제군, 우리는 베티오섬을 무력화 하려는 것도 아니고 점령하려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섬을 지도상에서 말살하려는 것이다!”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킹먼제독 역시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즉 엘리스섬에서 날아온 B-29 폭격기가 이미 수일 전부터 베티오섬을 융단폭격하고 있었는데 그 폭격은 상륙 직전까지 계속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3척의 항모로부터 발진한 모든 전투기 편대가 상륙 개시일의 새벽에 30분간 기총으로 쓸어버릴 것이고, 마지막으로 순양함 5척과 구축함 9척의 함포가 3,000t의 포탄(100m×100m에 25t)을 퍼붓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