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대면 인터넷 공개 강좌 2022년 6월 8일 (수)
역사 이야기 (5회)
무 당 (巫堂) 이야기
회장 정 기 용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 위원
나는 어렸을 적에 무당이 집에 와서 굿하는 장면을 자주 보아왔다. 어머니가 중년에 병을 자주 알아 자리에 누워있어, 할머니께서 무당을 불러 액을 때워야 병이 났는다고 굿 풀이를 자주 하였다.
무당은 좋게 말해서 무교(巫敎)라고 하고 재래풍습 혹은 민간 신앙적 관습정도로 보고나 더 나쁘게는 미신으로 매도해버리지만 모든 요소를 갖춘 순진한 종교로 보기도 한다.
무교는 사람들이 평상시 일반적인 방법으로 풀 수 없는 큰 문제에 직면했을 때 무당의 중재를 빌어 신령의 도움을 얻어 풀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힘만으로 풀 수 없고 예축 할 수 없는 일을 초자연적인 존재나 힘의 위력에 의탁해서 해결하려고 한다.
무교인 무(巫)를 풀어보면 아래위에 직선과 그 선을 연결하는 수직선 양쪽에 사람 인(人)자가 두개 있는 형상이다.
위의 선은 하늘을, 아래 선은 땅을 상징하며 그 공간을 연결하는 수직선은 무당을 나타낸다고 한다.
신령(神靈)계와 인간(人間)계를 연결하는 무당의 직능을 잘 나타낸 글자라 하겠다. 수직선 양쪽에 두개의 사람인(人)이 있는데 춤추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무당은 노래를 곁들인 춤으로서 망아경(忘我境)에 빠져 신령을 접대하고 그 말씀을 받아 신도들에게 전하는 역할이다.
무교정책은 조선조에서도 대체로 양면성을 띠었다. 하나는 억압정책이다. 신분상 최하층, 천민계층, 백정이나 노예 같은 신분으로 전락해 무당의 활동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교를 억압한 것만은 아니다. 가끔 무당을 활용한 예가 있었다.
왕족의 수명장수를 빌던 도교 계통의 성수청(星宿廳)이라는 관청에 무당을 예속시켜 지금 보건소와 같은 활인원(活人院)에 무당들을 집결시켜 전염병 치료를 받기도 했다. 당시 의학 수준으로는 속수무책이었던 전염병에 초자연적인 힘과 통하는 무당의 능력을 믿었다.
사대부들이 일방적으로 매도한 반면에 왕실에서는 왕비와 같은 여성들이 여전히 무교를 신봉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장호원으로 피난 가면서 개인적으로 굿을 좋아했을 뿐만아니라 측근에 ‘진령군’이라는 용한 무당을 두고 있었으니 세도 또한 대단 했다.
한국 무교는 일제의 문화 탄압정책에 희생되기도 했다.
대표적 예로 남산꼭대기 팔각정 옆에 있던 한국무교의 총본산인 국사당(國師堂)을 인왕산으로 옮겨졌다.
한국 무교는 1945년 해방되면서 서양의 과학문명과 기독교의 유입 속에서도 여전히 잠재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제3공화국 조국근대화 작업의 하나인 미신 퇴치운동으로 수많은 굿당이 사라지고 무교 계통의 종교단체 건물이 철거되는 등 수난을 겪었지만 무교인들은 나름대로 권익보호단체인 대한승공경신(大韓勝共敬信)연합회를 만들어 나름대로 세력을 조직화했다.
한국 고유문화에 대한 관심이 일면서 무당 숫자가 늘어났고 굿당도 많이 생긴다고 한다.
한국 사림들이 일방적으로 무당을 미신 또는 저급한 신이라고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어도 한번도 한국인의 곁을 떠난 적이 없으니 우리는 무교를 떠나서 살 수 없는 민족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무당은 무(巫)라는 글자에서 보듯이 하늘과 땅을 연결 시켜 주는 성스러운 존재로 생각 하지만, 아무나 무당노릇을 할 수는 없다고 한다.
무당이 되려면 무병(巫病) 혹은 신병(神病)을 앓아야 한다. 일반적인 병과는 전여 다르다.
1, 별다른 이유 없이 고통의 정도나 그 기간이 일반적인 병보다 더한 것이 보통이다. 사지가 뒤틀리고 찬물을 자꾸 마시고 싶고, 고기류를 멀리하 게 된다고 한다.
2, 돌발적인 발작을 하고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도 하며 환시(幻視)가 생기 는가 하면 몇 날 며칠을 미움을 한 숱가락 제대로 못 먹고 보내기도 한다.
3, 혈변을 보기도 하며 꿈속에서 신령을 만나 계시를 받기도 하는 등 병원 에 가보아도 전여 해결되지 않는 증상들을 겪게 된다고 한다.
가족들은 결국 이 후보자를 무당에게 데려가 신이 지폈으니 내림굿을 받아야 한다는 선고를 받는다.
4, 후보자가 신령을 끝까지 거부하고 버티면 ‘인다리’와 같은 현상이 생긴다고 한다. 인다리 현상이라 함은 신을 거부하는 자와 가깝게 지내거나 사랑하는 인 척들의 목숨을 몸주가 될 신령이 아사(餓死=죽음)시키는 현상을 말한다. 그래서 결국 후보자는 대부분의 경우 신내림을 승낙하게 된다고 한다.
신내림의 예
1, 박수무당인 최선생이라는 사람도 자식을 일곱이나 뺏기고 결국 최영 장군을 몸주로 받들게 됐다면서 누가 이런 사실을 믿겠나면서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2, 진선미가 쓴 에세이(essay)에 『내가 무당으로 사는 이유』 에서도 진선미는 작고한 진의종 전 국무총리의 조카딸로 명문가에 태어나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김금화 만신에게 신 내림을 받고 신의 딸로 살아간다.
그는 옥황선녀를 몸 주신으로 모시고 있는 무당이다. 두 아이의 엄마와 한 남자 의 아내로 살아간다는 그는 자신의 운명이 타고난 신기를 억누르기 위해 연극 배우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지만 일생을 무당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진선미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방언을 했다 한다.
한밤중에 자다 일어나 벽을 마주보고 중얼거리기도 하고 꿈이나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기도 했다 한다.
상대를 보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에서 말이 나와 그 말이 훗날 적중했 다 한다.
3, KBS,2 드라마 ‘엄마 뿔났다’ 에서도 은실(강부자의 딸 역)이도 입에서 나 오는 말이 적중하게 맞는 장면이 나온다.
4,『신이 선택한 여자』에 심진송 저자도 전통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기구 한 운명의 무녀로 어린나이에 나오는 말이 후일 사건과 동일시되었다고 한다.
신의 선택에 네 번이나 자살하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무녀로 미래를 예언 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무당들은 일정한 신령을 몸주로 모시고 살아야 하며 신령을 부모 섬기듯 해야 한다. 보통 자신의 방 한 칸에 신당을 마련하고 신령에 해당하는 그림이나 물건을 걸어놓고 매일 아침 또는 매월 초하루나 보름날에 신령에게 정성을 드리고 도움을 청한다.
무당에는 성별에 구별없이 크게 두 종류로 나눈다. 신이 내려 무병을 앓고 무당이 된‘강신무’와 가업으로 이어받는 ‘세습무‘로 나뉜다.
세습무는 예능 면에 뛰어나 춤이나 노래에선 강신무를 앞지른다.
지역적으로 중부 이북지방에 강신무가 많고 호남지방에는 세습무당이 많다고 한다.
굿은 복을 구하고 재앙을 물리치는데 목적이 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나 흥망성쇠는 인간 자신의 노력보다도 신령들의 의해 좌우된다고 한다. 굿당은 개인 신당보다 크기는 하지만 방 서너 칸 자리 굿당부터 몇 채의 독채로 된 굿당이 있다.
대표적인 굿당이 인왕산의 국사당과 무악재의 산신당이다.
굿에는 재수굿과 오구 굿이 있는데 재수굿은 천신굿 이라고 하며 자기 집안의 안녕을 위해 정기적으로 행하는 굿을 말한다. 오구굿은 전형적인 사령제로서 죽은 영혼을 저승세계로 안전하게 도착하게 해주는 굿이다.
얼마 전 나에게 중랑구 봉화산에 있는 굿 당제에서 초청장이 왔다. 마을 안녕을 비는 제라 했다.
문화재보호 차원에서 활성화되고 있으니 무조건 미신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으며 무시해버리는 경향은 재고해 봐야 된다고 믿는다.
◈ 추 이
=한국인의 민간 신앙=
◉ 신앙= 무속
◉ 사당= 성황당, 부군당
◉ 신= 망태할아버지, 부뚜막신, 산신, 삼신할매, 성주신, 터주신
◉ 액맥이= 금줄, 문매도, 부적, 액맥이, 장승, 팥죽
◉ 굿= 다리굿, 대동굿, 도당굿, 별신굿, 서울새남굿
,,지동풀이, 지노귀굿, 강화교동지노귀굿, 서와도깨비굿
☛ 서울에도 300개의 민간 신앙이 존재하며 행사를 치른다
국 사 당 (國 師 堂)
민속자료 제18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정 기 용
국사당은 우리나라 무당의 본원(本院)이다.
민속자료 제18호로 종로구 무학동 산 2번지의 12호에 소재한다. 전철 3호선 독립문역 3번 출구로 나와 인왕산 쪽 서울 성곽을 따라 산기슭을 올라가면 국사당이 보인다. 나는 가끔 이곳을 찾는다. 서울역사문화포럼 수요 강좌생(30여명) 현지답사와, 각 문화단체들의 시내 유적을 탐방 때도 국사당에서 해설해 준다.
이 당은 본래 남산 정상에 있던 목멱신사(木覓神祠)에서 유래되었다. 『태조실록』을 보면 태조 4년(1395년) 12월에 남산 산신(南山 山神)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목멱신사를 세워 국가에서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태조 8년(1408년)에 가뭄이 들자 여기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고 그 이듬해 장마가 계속되어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일명 목멱신사를 국사당이라 하였는데 태조 이성계가 국사당을 짓게 된 연유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남아있다.
함경도 영흥(永興)땅에 한 노파가 외동딸을 데리고 살았다. 어느 날 이성계가 소녀시절 노파집 앞을 지나가는데 노파가 그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당신은 장차 군왕이 될 것이니 몸조심 하고 무순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하였단다. 소녀가 장성한 다음 비 오는 어느 날 그 집을 지나다가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이때 노파는 그에게 장래 있을 일을 예언하고 나라를 세운 뒤 한양에 도읍을 정하도록 일러주었다 한다. 그 후 이성계는 노파의 예언대로 왕위에 올라 옛날 일을 생각하여 노파를 찾았으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이성계는 고마움에 보답하고자 남산 위에 국사당을 짓고 노파의 영정을 모셔놓았다고 한다.
국사당은 동쪽의 각심사(覺心寺), 서쪽의 구파발(舊擺撥), 남쪽의 우수현(牛首峴) 등 세 곳의 국무당(國巫堂)을 두었다. 대표적인 3대 만신(萬神)(무당대표)들이 모여서 시봉(侍奉)(부모를섬김) 하고 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편안함을 기원했던 곳이다. 『신중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봄, 가을에 초재(醮祭)를 지냈고 『한경지략』에는 이곳에서 무학 대사의 화상(畵像)을 모셔놓았다고 한다.
1925년 7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세우면서 국사당 이 전을 권고 협박하여 강제로 철거하였으므로 현재 위치인 인왕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곳으로 옮겨진 것은 이 당에 모신 무학 대사가 인왕산에서 기도했기 때문이다. 당 위에는 선(禪)바위가 있다. 선바위는 중이 장삼을 입고 선 형상으로 두 개의 바위가 보인다. 이 바위는 보는 이에 따라 모양과 생각이 다르게 느껴진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성계와 무학 대사라는 설, 또는 이성계 부부라는 설이 있으나 전자에 무게를 두고 있으며 지금은 기자암(祈子岩)으로 유명하다. 서울특별시 민속사료 제4호로 제단도 만들고 말끔히 단장한 선바위는 무당을 선호하는 신도들이 많이 찾아와 기도를 드린다.
남산에 있던 조선 신궁은 광복과 동시 헐려지고 그곳에 팔각정을 지어 많은 나들이객들이 N타워를 이용하고 정자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예술인들이 다양한 행사를 갖기도 한다. 팔각정 앞에는 국사당의 유래와 옮겨진 내력의 표지석만 그 옛날을 말해줄 뿐이다.
현재 국사당 건물은 여섯 칸이었던 건물이 이전하면서 후면과 오른쪽으로 2~3칸 내몰려 지어 15평이 되었으며 그 이외 가옥 구조는 남산에 위치했을 때와 동일하다. 당 내부에는 민속자료 17호로 지정되어 28개의 신상(神像)을 모셔놓았다. 이 중 12점은 조선 후기 인조 때, 16점은 조선말 고종 때 유물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17점으로 모셔졌다. 이곳 무신도는 1970년 3월 24일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태조 이성계를 모신 상(17-1호)은 세로 104cm 비단 바탕에 채색이며 위아래 같은 크기의 같은 그림 두 점이 걸려있다. 머리에는 관을 쓰고 양 어깨와 앞가슴에 용무늬가 그려진 곤룡포를 입었다. 전주 ‘경기전’에 있는 영정과 흡사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경기전’ 영정을 본떠서 그린 것이라 한다. 그 이외 강 씨 부인(17-2) 호구아씨(17-3,홍역을 관장하는 아씨) 용왕(17-4), 산신(17-5), 창부씨(17-6), 무학대사(17-8), 단군(17-9),삼분제석(17-9,農神,産神,壽神), 최영 장군(17-17) 등 걸려 있으며 신당에는 억울하게 죽은 위인과 병을 다스리고 액을 막아주며 안녕을 지키는 신으로 대별한다. 특히 무신도들 중 무당인과 치성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은 최영 장군이라고 한다.
현재 무신도들을 모셔놓고 무당들이 사업 번창을 기원하는 재수굿, 병을 치료하는 병굿, 살아있는 사람의 안전을 위해 죽은 영혼의 명복을 비는 지노귀굿, 선무당의 확실한 강신(降神)을 위한 신굿 등을 행하고 있다.
조선 초의 목멱신을 제사하고 있는 것과는 많은 변화가 있다. 옛날 나라의 안녕에 반하여 기우제나 기청제는 살아졌고 개인의 길흉화복에 치중을 준다.
무당은 좋게 말해서 무교(巫敎)라고도 한다. 재래풍습 혹은 민간 신앙적 관습정도로 보거나 더 나쁘게는 미신으로 매도해 버리지만 모든 요소를 갖춘 순진한 종교로 보기도 한다.
무당에는 성별에 구애 없이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눈다. 신이 내려 무병을 앓고 무당이 된 ‘강신무(降神巫)’와 기업으로 이어받는 ‘세습무(世襲巫)’로 나눈다.
세습무에는 예능면에 뛰어나거나 춤이나 노래에선 강신무를 앞지른다고 한다. 지역적으로 중부 이북 지방에 강신무가 많고 호남지방에는 세습 무당이 많다고 한다.
굿은 복을 구하고 재앙을 물리치는데 목적이 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나 흥망성쇄는 인간 자신의 노력보다 신령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는다. 굿당은 개인 신당보다 크기는 하지만 방 서너 칸 자리 굿당부터 독채로 된 굿당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국사당이다.
굿에는 재수굿과 오구굿이 있는데 재수굿은 천신굿, 자기 집안의 안녕을 위해 정기적으로 행하는 굿을 말한다. 오구굿은 전형적인 사령제로서 죽은 영혼을 저승 세계로 안전하게 이르게 해주는 굿이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하여 21세기 문명의 시대라고 하나 각, 지역마다 마을 어귀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굿거리와 제사가 성행한다.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활성화되고 있으니 무조건 미신으로 치부하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고 본다. 무당을 부정한 차원에서 무시해버리는 경향은 재고해봐야 하겠기에 이곳의 본원을 찾아 국사당의 역사를 더듬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