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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기억의 골방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현순길 세 번째 시집(호주머니 속 세상)을 읽고
글/ 김부회 시인, 문학평론가
현순길 시인과는 오래된 인연이다. 시집「추억의 숨바꼭질과 자판기」를 출간하고 10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세 번째 시집 「호주머니 속 세상」을 출간한다. 오랜 군 생활에서 전역하여 고향 제주로 귀향한 시인의 얼굴이 새삼 그립다. 현순길 시인은 다분히 감성적이며 다분히 정적이며 또 자신만의 시적 질감을 넓게 포용하고 사는 시인이다. 그가 복잡하고 번잡한 이 도시의 그늘을 벗어나 자연의 풍광이 아름다운 제주에서, 그 10년의 세월 동안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으며 그만의 세상을 어떻게 꾸미며 살았는지, 그가 관조하며 바로 본 세월의 윤색은 어떤 크기와 모양과 무게를 더 채워 넣는지, 그래서 그의 삶이라는 캔버스가 창조적인 형상과 따듯한 인간미로 가득 채워졌는지 긴장을 갖고 시인이 보내온 시집 원고를 차근차근 읽어 보았다. 만나지 못한 10년의 세월 동안 현순길 시인은 딸을 성혼시키고 사위도 얻었으며 덤으로 우렁우렁한 손자와 사위도 얻어 듬직한 할아버지가 되었다. 한 갑자 60년의 세월을 살아왔으나 허투루 산 적이 없고 늘 솔선수범하고 진실과 정의에 앞장서던 시인이었기에 환갑을 기념하며 출간하는 이 시집이 대단히 흥미롭다. 시집 서두에 있는 「작가의 말」에 최근 그의 삶이 모두 녹아있다. 몇 부분 인용해 본다.
2024년은 나에게 소중한 한 해로 남을 듯싶다.
잘 살진 못했지만, 인생살이 한 갑자를 맞이했으며
해병대 부사관 임관 40주년, 10년 만의 3집 시집 출간 등.
앞으로도 축복받은 땅에서 바다와 오름과 바람과 별도 헤아리며 제주의 사계절 이야기 소중한 친구들의 이야기 아름다운 추억과 사랑의 시를 쓰고 싶다.
『작가의 말』 일부 인용
시인의 말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새가 시간이 되면 스스로 자기의 알을 깨고 세상과 만나 더 넓은 세상을 만나듯 2집 출간을 하고 10년 만에 새가 세상을 만나는 심정으로 육십갑자의 갑을 맞이하여 사랑하는 가족의 아낌없는 지원과, 세상을 같이 살아오며 서로 위안과 위로를 주는 소금 같은 친구의 격려 덕분에 3집 『호주머니 속 세상』을 출간한다.
우선 내 자신에게 축하와 위로를 건네며 한 갑자의 나를 위해 그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 50대 60대를 살아가는 비슷한 세대들이 비슷한 생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글이 좋겠다는 생각에 3집을 집필하게 됐다.
지나쳐 버린, 세월에 잊혀져간 시절 연인도 잠시 회상하고 어린 시절 깨벗기 친구들과의 추억도 회상하며 잠시나마 위로가 되고 잠시나마 위안받고 추억 여행 하듯 추억 서리 하는 시간이길 소원해 본다.
시인 현순길
가. 들어가며
시를 쓴다는 것은 일종의 관조 행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관조 觀照의 사전적 의미는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본다는 것 외에 참된 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한다는 것을 말한다. 시의 발화지점을 논하기 앞서 먼저 생각할 것은 명상이다. 고요하고 잔잔한 자기만의 골방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 방은 실존하든 실존하지 않든 머릿속에 존재하는 나만의 방이다. 그 속의 나는 그동안 보았던 풍경과 사람과 관계와 관계를 더듬어 보고 내가 본 세상에 대해 나만의 잣대와 저울을 갖고 그 크기를 재보거나 달아보는 것이 명상의 처음이다. 우리가 명상하는 이유는 마음을 정화하고 정화된 마음으로 나의 잘못과 너의 잘못을 모두 포용하여 좀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미래의 길을 예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일들, 그 아쉬운 것들을 내가 보고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빌려주는 것. 우리는 그것을 울림의 소통이라고 말한다. 내가 느낀 것을 너도 같은 동일 선상에서 느낄 수는 없다. 각자의 키 높이가 다르고 각자의 살아온 방식이 다르고 각자의 관계가 다르고 기준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원적인 부분, 좀 더 세밀하게 보면 사람의 감정은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풍경의 배경을 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풍경을 보는 방식은 같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풍경의 배경을 읽는 것을 명상이라고 하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명상이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되어 (모두)라는 개념을 상실하게 되면 소통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모두는 나와 너를 포함하는 말이다. 나와 네가 개별이 아닌 궁극의 한 지점에서 깊이 있는 울림을 공유하게 된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며 우정이며, 관계며 현순길 시인이 그리고 싶은 소중한 친구들의 이야기이며 아름다운 추억과 사랑의 시가 될 것이다.
시는 아무리 어렵게 표현한다고 해도 보편타당한 삶의 법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시의 질감을 위한 소재나 주제, 상황의 변환 등은 결국 내 삶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서사적 드라마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시 한 편에 우주 탄생의 진리를 담아낸다거나, 시 한 편에 삶의 고차 방정식과 같은 알고리즘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메소드한 연기를 펼치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고 생각한다. 중간단계의 다른 무엇이 개입하거나 타인의 사고와 언어가 개입하여 내 명상의 결과물을 방해한다면 그것이 이미 내 작품이 아닌 타인의 작품에 대한 공유의 결과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좀 더 쉽게 표현한다면 시는 나를 가장 잘 표현하는 직접적인 수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감정과 내 느낌과 내 생각과 내 삶과 그것에서 파생되는 숱한 관계와 관계 사이에 놓인 (틈)이라는 다리를 축조하는 것이 시를 쓰는 것, 일탈이 아닌, 바르게 사는 것에 대한 지침의 부목을 상처가 있는 자리에 대주는 것이 시를 쓰는 일이다. 그래서 시는 삶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두루뭉술한 이야기와 기문둔갑과 같은 허황된 구름잡이 이야기가 아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한 정과 온기를 그 곁의 다른 누군가에게 전파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잘 된 작품의 정의가 뭘까? 필자는 이십여 년 시를 쓰면서 가장 잘 된 작품을 꼽아달라는 질문을 들으면 늘 이렇게 대답한다. “내일 쓸 작품이요.” 오늘 쓴, 지금까지 쓴 작품이 아닌 앞으로 쓸 작품이 내게 가장 잘 된 작품이라고 말한다. 시는 이승을 하직하는 날까지 공부해야 한다. 그 공부는 수학 공식을 이해하거나 외우거나 하는 것이 아닌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지속해서 만드는 일이다. 내 작품을 통해 나를 성찰하고 반성하고 내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와 내가 해야 할 것들에 대해 되돌아보고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 보는 일. 그것이 내 삶이라는 시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잘 된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김경주 시인의 말처럼 시인은 지금 시를 쓰는 사람이다. 어제까지 시를 썼다고 시인이 아니고, 내일부터 시를 쓴다고 시인이 아니다. 오늘, 지금, 삶을 시처럼 생각하고 시로 쓰는 사람은 충분히 시인의 자격이 있다. 중요한 것은 머리로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시는 절대 어려운 장르가 아니다. 하지만 반대편에는 절대 어려운 장르라고 이야기한다. 선택은 시인 자신의 몫이다. 이웃에게 말을 나누듯, 술 한잔하며 흉금을 터놓듯 왜곡되지 않은 자신의 투박하지만, 진솔한 이야기를 꺼내 탈탈 털어 보이는 일. 현순길 시인의 시가 그렇다. MSG가 많이 들어갔다거나 혹은 너무 맵거나 너무 싱겁거나 하여 극단적인 맛의 기준이 바뀔 요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며칠을 끓이고 끓인 된장찌개의 오묘한 맛과 향이 오감을 자극하는 작품이라고 하면 바르게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순길 시인은 머리말에서 이런 말을 한다. “우선 나 자신에게 축하와 위로를 건네며 한 갑자의 나를 위해 그 무엇을 할지 생각하다 현순길 시인과 비교적 비슷한 세대의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글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집필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공감이라는 단어다. 공감은 상대방의 마음이나 감정을 상대방이 느끼는 그대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현대사회는 개성이 넘치는 사회다. 넘치는 개성은 창조와 혁신의 발판이 되기도 하지만, 반면에 불통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가장 말을 잘하는 사람은 남의 말을 먼저 귀담아듣는 사람이다. 경청이라고 한다. 허투루 듣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후에 자신의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요즘 세상은 자기 말을 먼저 하는 시대다.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닌, 자기 말과 주장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방식의 세상살이는 자칫 모두를 편견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 현순길 시인은 비슷한 세대의 비슷한 생각이라는 말을 한다. 먼저 들었다는 말이다. 가족, 친구, 이웃, 아들, 딸, 아내, 사위의 말을 먼저 듣고 자기 말을 나중에 하는 지극히 현자적인 입장에 서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현상이나 물상에 대한 공감의 영역을 글로 표현한다. 시로 만들어 시집을 출간한다.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한 권의 책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생의 방향을 정리하고 새롭게 만들어 주는 지침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배우는 사람이며 동시에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다. 내 한마디의 말과 표현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용기가 된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며 충분한 일이다. 머리말에서 또 이런 말을 한다. “잠시나마 위로가 되고 잠시나마 위안을 받고 추억을 서리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한다. 시가 그런 것이다. 봄빛 찬란한 어느 봄날 한 줌의 햇살을 손에 쥐고 현순길 시인의 시집(호주머니 속 세상)을 읽다 보면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진다. 볕이 주는 양광의 온기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온기다. 그 온기는 측량할 수 없다.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거나 하지 않다. 적당히 호주머니에서 데워진 손바닥만큼의 온기지만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기도 하고 저체온증에 시달린 사회인들에게는 일회용 핫팩이 될 수도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핫팩이다.
서두에도 언급했지만 지금 시를 쓰는 사람이 시인이다. 죤 A. 세드는 이런 말을 했다. ”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그것은 배를 만든 목적이 아니다.“시인은 시를 안다면 시를 써야 한다. 타인의 시선이 두렵다거나 타인의 평가가 두렵다거나 이런저런 말에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주면 된다. 진리는 먼 곳이나 경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새벽에 일어나 저녁에 잠들 때까지 모든 일상이 진리다. 시집 출간은 인생이라는 너른 바다에 띄울 한 척의 배를 건조하는 일이다. 언제까지나 안주할 것인가. 현순길 시인의 세 번째 시집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이유다. 때론 친구의 위로처럼, 때론 자식들의 바른 아버지처럼, 때론 힘들여 고생하며 살아온 아내에 대한 다정다감한 친구가 되어주는 일. 그것이 현순길 시인이 (호주머니 속 세상)을 펼쳐 세상에 보이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작품 세계는 읽을수록 단맛이 난다. 설탕의 단맛이 아닌, 흔히 말하는 달달한 단맛이다. 감각적인 언어와 질박한 서정의 중간쯤에서 그를 만나보는 것이 (호주머니 속 세상)을 바르게 읽는 일이다. 시집 상재를 거듭 축하드리고 세상에 널리 알려져 현순길 시인의 온기가 봄처럼 환하게 빛나길 오랜 글벗으로서 바란다.
나. 들여다보기
시집 속 많은 작품 속에서 몇몇 작품을 선별하여 가장 현순길 시인다운, 가장 현순길다운, 현순길 시인을 만나본다. 그가 작품에서 정작 말하고 싶은 것들을 한 치의 오차 없이 경청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관계
신의 손이 어루만져
구름이 비를 내리고
강물이 바다를 만나고
봄 햇살은
소소리 바람에도
형형색색 꽃 치장하고
만나는 관계.
우연 혹은 인연인 듯
형제로 만나고
이웃으로 만나고
대론
모르는 사람으로
스쳐 갔더라도
우리는 이미
그 어떤 의미의
필연의 관계
「관계」 전문 인용
시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가장 앞에 관계라는 작품을 두었다. 구름과 비, 강물과 바다, 바람과 봄, 우연과 인연, 형제와 이웃,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이 모든 관계와 관계 속에서 그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시인 자신의 몫이다. 상대를 이웃으로 보고 친구로 보고 가족으로 보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면 불화나 분쟁은 없을 것이다. 다툼이나 경쟁이나 내 이익의 우선 가치를 셈하지 않을 것이다. 관계를 관계로 본다면 관계는 성립하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 시인은 말한다. /우리는 이미/ 그 어떤 의미의/ 필연의 관계/ 어떤 종류의 의미이든 필연이라는 연결 고리로 맺어진 우리라는 접점은 뭐든 다 내어줄 수 있는 양보와 타협의 시발점이 되는지도 모른다. 담담한 색채로 별말 아니라는 듯 툭툭 던지는 시인의 한마디는 결구에서 나를 아프게 한다. 필연이라는 말이, 그 말의 소중함이 새삼 각인되는 것이다. 현순길 시인의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다.
추억 서리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은 날이 있다
아침 햇살이 눈 마중 해 주는 해맑은 아침.
등 푸른 바다처럼 기분이 푸르른 날엔
습관처럼 면도를 한다.
부드러운 감촉과 기계 소리가 눈부신 햇살처럼 정겹다.
스쳐 지나간 기억의 저편,
아버님이 면도 하시던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시리다.
대야에선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고
면도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어머님 모습도 있다.
그 시절엔 특별한 날에만 면도를 했다
면도기가 특별 난 건지 아버님 실력이
모자란 건지
얼굴 한두 군데 베이고 나서야
행사가 마무리 되곤 했지.
면도하는 모습을 보며
어른 연습 해보던 나의 철없던 모습들이
이 아침,
왜 이리 가슴 뭉클하게 젖어 드는지.
면도를 하며,
「추억 서리」 전문 인용
서리라는 말 꽤 오랜만에 듣는다. 주인 몰래 남의 과일, 곡식, 가축 따위를 훔쳐 먹는 장난을 서리하고 한다. 유년 시절의 추억 중 가장 특별한 것을 꼽으라면 ‘서리’라는 말이다. 친구들과 작당하여 늦은 밤 남의 수박밭이나 참외밭에 들어가 몇 개 따먹는 재미. 그 맛은 왜 그리 꿀맛이었는지 그 긴장감과 늦은 저녁이 주는 왠지 모를 공포, 불안 등과 맞물려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기억의 편린 속에 자리 잡은 그날의 풍경들을 시인은 ‘서리’라는 말로 표현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 면도하시던 아버지의 모습과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그걸 따라 하던 시인의 모습이 병치되어 어느 추억의 에피소드에 기록되고 전승되어 내려온다. 대단히 큰일도 아닌데, 일상적인 것인데, 그 일상의 어느 한 장면이 컷팅되어 시인에게 각인되어 있다는 것은 현순길 시인의 성정을 잘 말해주는 것 같다. 우직하지만 한 길을 선택하여 일로매진하는 성격과 잔정이 많은 성격, 그리고 자식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 어쩌면 그것 때문에 시인이 시인의 길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면도하시는 모습과 어른 연습 해보던 나의 철없던 모습이 마치 어느 다큐의 내레이션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세월이 아무리 지나가도 그리운 것은 그리운 법이다. 자식은 자식인 법이고 아버지는 아버지인 법이다. 추억을 서리한다는 것은 아무리 많이 해도 늘 부족하다. 나도 늙어가기 때문이다.
정년
공허한 아스팔트 위로
스산한 바람이 낮게 몸을 움츠리며
굼벵이처럼 더디게 기어가고
사람들은 주어진 길을 오갔다.
가슴 벅찬 희망 속에
집안의 안녕을 기원하며
때론 숙명이라 여기며.
현실과 부딪히며 살아온 세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흐느적거리면서
그 길을 오가던 긴 세월.
가끔은,
그 길을 바꾸려고
그림을 그렸다 지우기를 십수 년
돌아서면 항상 그 자리를 맴돌며
삶의 멍에처럼 쉬이 바꿀 수 없었던 길.
이젠,
더는 비상구가 될 수 없다 해도
일상과 환경을 새롭게 접하면서
내가 가던 길을 바꿔야 한다.
어쩜 그게 희망이 없는 미로라 해도
어제까지 걷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정년」 전문 인용
현순길 시인은 해병대 부사관 출신이다. 그 힘들다는 해병대에서 어언 사십여 년,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위대한 일이며 박수받을 일이다. 시인의 군 생활을 짐작은 가면서도 정확하게는 모른다. 다만,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했을것이라는 것만 집작된다. 전역을 하고 사회에 막상 발을 내딛고 보니 자신만의 무엇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며 아마 짐작건대 시를 쓴 것도 그 미래를 만들기 위한 과정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길은 어제와 같지만, 어제의 그 길이 아닌 다른 길이다. 동행하는 사람이 달라지고 동행하는 햇볕이 달라지고 동행하는 풍경이 달라진 모습에 당황했을 수도 있지만 스스로 극복하여 잘 이겨내고 고향 제주도로 어떤 의미의 금의환향을 했다.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손에 걸머쥐고. 시인의 말대로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비틀거리거나, 흐느적거리며 다닌 길의 어느 곳에서 숨겨둔 자신의 실루엣을 엿보며 정년이라는 무게를 온몸으로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년을 정년에서 끝내지 않았다. 다른 인생의 전환점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자신을 채근하며 이웃과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주려 노력했다. 누군가 인생에 퇴직이란 없다고 했다. 죽음 밖에는. 정년은 새로운 시작이며 또 다른 갈래 길의 초입일 뿐이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 점이다. 정년에서 멈추지 말라고 멈추면 멈춰진다고. 정년을 해 본 사람이 해줄 수 있는 말을, 시를 빌어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호주머니 속 세상
봄 햇살이 따사롭게 내려앉는 공간
언제나 나를 이해해 주었던 곳.
시린 손 호호 불던 풍경을 기억하며
그 안을 들어가 보면
따스하고 정겹다.
내가 살아오며 저질렀던 크고 작은 죄를 덮어주기도 했고
민망한 격려도 아끼지 않았으며
내 욕망이 만들었던
미움과 시기를 용서하며
나의 자만도 눈감아 주던 공간이었다.
동전 몇 개 쥐고 흔들어 본다.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동전은 풀빵 한 개에
자명종 소리처럼 배부른 동전이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과 이성적 생각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그곳을 찾는다.
신을 숭배하는 의식처럼 말이다.
나는 내가 아닌 나에게 얼마나 많은 가슴앓이를 주었을까.
괴로움을 주고, 나의 위선이 알량한 자존심이
세상살이 힘들다며 또 다른 남을 힘들게 했던 무지
호주머니 속 세상!
세상은 작은 소망 작은 온기에서도 시작될 수 있는데,
나를 합리화했던 자책의 비련.
「호주머니 속 세상」 전문 인용
현순길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의 제목이 되는 호주머니 속 세상에 대한 작품이다. 호주머니. 유년 시절의 호주머니는 꽁꽁 언 손을 데우는 아궁이였으며, 춥고 배고픈 시절에 뒤져보면 알사탕 하나쯤은 나올 것 같은 기대를 품은 어머니 앞치마였으며, 내 모든 비밀이 숨어 있는 공간이었다. 본문의 말처럼 /우리는 시간과 공간과 이성적 생각도 없이/무의식적으로 그곳을 찾는다./신을 숭배하는 의식처럼 말이다./ 라고 표현했다. 신을 숭배하는 의식처럼이라는 말에 주목해 본다. 늘 비어 있는 곳, 그래서 뭔가 채워 넣어야 할 것 같고, 뒤지면 뭔가 하나라도 나올 것 같은 공간.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골방과 같이 나만 아는 곳, 나만 존재하는 곳, 내 생각만 나래를 펼치는 곳,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가 없는 곳, 가난한 사람과 부자인 마음이 공존하는 곳. 그러면서도 그 공간을 생각하며 시인은 반성하고 성찰한다. /나는 내가 아닌 나에게 얼마나 많은 가슴앓이를 주었을까./괴로움을 주고, 나의 위선이 알량한 자존심이/세상살이 힘들다며 또 다른 남을 힘들게 했던 무지/ 호주머니 속 세상을 다만, 호주머니 속으로 보지 않고 나의 무지와 위선과 알량한 자존심까지 들여다본 시인의 혜안이 무척 깊다. 시를 쓴다는 것이 그런 것이다. 하나의 눈이 아닌, 겹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작은 것에서 출발하여 궁극의 나를 성찰하게 만드는 것. 그 성찰을 주변과 이웃에게 나누고 설파하여 울림을 공유하는 것이 시라는 장르이다. 시가 인생에서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기억의 골방과 호주머니 속 세상은 어쩌면 일맥상통하는 어휘라는 생각이 든다. 그 두 개의 세상에는 벌거벗은 내가 존재하며 내게 가장 예의 바른 내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솔직하고 진솔하고 우직한 내가 태초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추억을 서리하기에 가장 좋은 마음 밭이 골방이며 호주머니 속 세상 아닐까 싶다. 시인의 반성이 나를 아프게 한다.
바람길
바람의 길을 따라 간 다.
그 틈새로 현실은 직시해보면
어릿하게 다가서는 소소함이 있다.
바람의 시간을 이해하며 너에게로 간다.
때론 요란스럽고
아픈 몸짓의 진심을 알기에
아닌 듯 스쳐 지나가도
바람,
너의 길을 이해하기로 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때론 등 밀려가고
때론 버티다 쉬어 가는
바람길을 가다 보면
어느 해 나도 바람이 된다.
바람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바람의 소리를 마주하면
어느새 나도
여린 실눈에 비쳐오는 햇살처럼
하늘을 향해 날개짓하는
허수아비다.
「바람길」 전문 인용
우리는 늘 동경해 오는 것이 있다. 구름, 바람, 비, 바다, 강, 산, 이 모든 자연의 모습들이 동경의 대상이다. 한때는 바다가 되고 싶고, 한때는 구름이 되고 싶고, 비가 되어 땅을 적시고 싶고, 강이 되어 산을 품고 싶고, 산이 되어 사람을 품고 싶다. 바람의 시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바람이 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바람길에 내 몸을 맡기고 눈을 감고 바람을 더듬는 것은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다. 바람의 방향이 어디든, 내가 너를 이해하면 할 수 있는 것을, 때로는 요란스럽게 지나가야만 하는 바람의 속성을 내가 알기에 바람길에 나를 맡겨두면 나도 바람이 된다. 바람은 무심의 바위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무심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바람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흉내를 낼 뿐이다. 정작 바람이 되려면 바람이 되어야 한다. 바람 같은 바람이 아닌, 바람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람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시인의 속뜻이다. /바람의 끝자락을 부여잡고/바람의 소리를 마주하면/어느새 나도/여린 실눈에 비쳐오는 햇살처럼/하늘을 향해 날갯짓하는/허수아비다. 바람과 하나가 되는 법칙을 설명해 준다. 살아보니까 알겠더라 하면서 시인이 하는 말이다. 그 공허한 풍경의 배경에는 시인이 있고 음유하는 시간과 공간이 혼재되어 있으며 어느 해 바람이 된 현순길 시인이 있다. 산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것이다. 의식적이거나 도식적이거나 위선의 포장을 둘러쓴 것이 아닌, 완전체로서의 내가 완전체로서의 네게 동화되는 일이다. 내 것을 다 버리거나 다 줄 때 네 것도 내 것도 아닌 우리 것이 된다는 것을 바람길에서 만난 바람에게 전해 듣는 시인의 눈동자가 눈에 선하다.
팽이
혼자선,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아이
그래도 꿈은 있으니.
주인 잘 만나
신나게 돌고 싶은 꿈
모진 채찍질에 속으로 강해지며
뿌려주는 마음만큼
더 큰 욕심 없이
주는 만큼 받으니
그게 행복이요.
인간이 만든 세상사
어지러워도
위선자여, 못난 인간이여.
제멋대로 돌아가는 세상.
순리를 역행하면 진실은 무너지고
세상은 제멋대로 돌아가고
나도 돌고 너도 돌고
모든 게 돌고 또 돌고.
「팽이」 전문 인용
팽이로 빙의한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본문의 말처럼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라는 은유가 시의 질감을 풍성하게 만들고 그 속에 나를 투영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신나게 돌고 싶은 꿈/ 우린 누구나 신나게 한 번쯤 돌고 싶다. 세상이라는 바닥 위에서 다만, 모진 채찍질을 견뎌내며 속으로 강해지는 것을 꿈꾼다. 팽이를 돌리는 채찍질, 그 뿌려주는 마음만큼 주는 만큼 받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을 시인은 하고 싶은 것이다. 시인의 셈법은 이익이나 손해가 아닌 정직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시인이 팽이가 된 것은 시인의 글을 읽을 후대를 위해 무엇이 정직하며 무엇이 사는 방법의 바른 지침서인지를 남겨 두고 싶은 것이다. 채찍질이 없이 돌아가는 팽이는 없다. 순리를 역행하여 사는 사람은 언젠가 역행의 원리에 의해 고꾸라지고 마는 법이 세상의 이치다. 비록 지금은 잘 되고 있지만 결국 돌아가야 할 때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한다. 진실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아니, 진실은 그 자리에서 굳건하게 돌아야 한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중심을 잘 잡고 자릴 이탈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시련이나 어떤 악조건에서도 중심을 잡는 것을 소박하게 이야기하는 시인의 말이 소박하게 들리지 않는다. 행복의 의미는 그곳에 있다. 주는 만큼 받는 것이다. 공짜나 요행수가 아닌, 정확한 계산에 의한 주고받기는 삶을 윤택하게 한다. 더 큰 욕심에 사로잡히거나 빈약한 꼼수를 써서 대단한 이득을 보자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행복의 원리를 중심을 잃지 않고 돌아가는 팽이에서 찾는 시인의 눈이 매섭고 예리하다.
상처
아파도 아파할 수 없고
고통스러워도
고통스러울 여유도 없고
울고 싶어도
목 놓아 울 수 없는 비극.
등짐이 무거워서
뛰지 않는 낙타,
항상 눈빛이 젖어있어
따로 울지 않는다 했지.
황새는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고.
하루살이는
천일을 물속에서 견디며
스물다섯 번 허물을 벗고 나서야
성충이 되어 하루를 산다 하지.
몸을 가시로 치장한 선인장은
속으로 운다 했듯이.
인생이란 운명처럼
얽히고설키며 상처도 입으며
서로 모르는 타인처럼
때론 홀로 가는 것.
「상처」 전문 인용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상처 없는 인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육체의 상처든, 마음의 상처든, 어떤 식으로든 상처는 있게 마련인 것이 삶이다. 하지만 상처의 깊이와 크기는 저마다 다르다. 작은 상처와 큰 상처, 깊은 상처와 아닌 상처,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서로 부딪히고 살다 보면 원하든 그렇지 않든 상처를 받기고 하고 주기도 하는 것이 삶이다. 문제는 그 상처의 흔적을 다만, 상처라고 치부하고 버려두는 것과 상처를 더 큰 상처가 되기 전에 봉합하고 미리 예방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정작 아픈 상처는 아파도 아파할 여유가 없는,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상처들이다. 주변과 이웃을 둘러보자. 어떤 상처가 깊은 신음을 뱉어내지 못하고 앓고 있기만 하는지, 우리가 혹시 그 상처를 만들었으면서도 부러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내가 지금 나의 상처로 인해 고통받고 있지만 말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해야 한다. 말을 들어줘야 한다. 아프면 아프다는 말을 하고 아프다는 말을 들어주고 아픈 것을 치료해 줘야 한다. 말을 하지 않는다고 상처가 아무는 법은 없다. 저절로 아물 때까지 상처를 놓아두는 것은 상처를 키우는 일이다. 관계와 관계 속에서 상처를 주고, 받으며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살아간다. 하지만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이며 알 수 있다. 당신이, 내가 가진 상처가 어떤 의미인지, 지금 바로 치료해야 하는지, 상처를 버티고 사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상처를 상처로 인식하고 대응을 하는 것이 상처에 대한 적확한 진단이고 대응일 것이다. 시인은 작품 속에서 자조적인 목소리로 상처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그 중심은 상처가 아닌, 대응에 있을 것이다. 살면서, 살아가면서 생길 수 있는 모든 상흔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말하고 싶은 것이다.
다. 맺으며
현순길 시인의 세 번째 시집(호주머니 속 세상)을 읽으며 문득 목차들이 궁금해졌다. 모든 작품을 소개하고 해설하고 싶지만 지면 관계상 몇몇 작품만 소개해서 송구하다. 목차들을 다시 살펴본다.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세상이란 어떤 주제 의식을 가졌는지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면 시인을 이해 하는데 더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동행/ 무죄/ 귀향/ 병원에서/ 관계/ 숨비 소리/ 추억 서리/ 정년/ 호주머니 속 세상/ 문/ 제자리 걸음/ 암, 투병 1,2,3 / 지나가더이다/ 오발탄/ 나비 효과/ 바람길/ 전투/ 마주보기/ 결혼/ 상처./ 술의 전설...
시인이 보고 있는 세상의 모습들이다. 공허한 세상을 향한 시인의 외침은 필사적이다. 마치 전투에 임한 군인처럼 앞을 보고 전진한다. 오랜 군 생활을 정년으로 정리하고 고향 제주도로 귀향했지만, 시인의 가슴 속엔 또 다른 고향이 존재할 것이다. 그 고향은 글이다. 글이라는 고향은 시인을 안식하게 만들고 힐링하게 만들며 푸른 바닷물처럼 평화와 관용과 포용을 알려줄 것이다. 시인은 느끼는 대로 감각이 이끄는 대로 자신이 만든 세상을 펼쳐 보인다. 그 세계는 우리와 다른 세계가 아닌, 우리와 같은 시공간이 존재하며 이해와 용서와 다툼과 시비가 공존하는 세상이다. 그 속에서 정제된 언어로 차분하게 말하는 시인의 혜안을 본다. 그가 안식을 얻은 것처럼 그의 글에서, 그의 시집에서, 그의 말에서 우리 모두 소통하며 공감하는 울림에 귀를 세워보자. 이 봄에 연둣빛 봄에 그가 채록한 기억의 언저리에서, 관계에서 그를 배우고, 나를 배우는 귀감의 시집이 되길 바라면서 현순길 시인의 작품 한 편을 소개하며 맺는다. 다시 한번 글벗으로서 세 번째 시집 상재를 축하드린다. 모든 은총이 함께 하길 소망한다. (김부회)
물
현순길
그 친구 별명은 물이다.
마음속에 하느님 서너 분을 모시고 살아가는지
그 누가 욕을 하고 시비를 걸어도
허허허 태평하게 웃어넘긴다.
그 친구 얼굴은 언제나 편안하다.
사람 사는 이치는 이미 정해진 길이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살라 하고,
물처럼 살다 보면
미움도 원망도 없으니
마음의 평온이 나의 천국이라.
혼자선
거슬러 올라가는 법이 없이
자신의 몸을 최대한 낮추고
어느 곳이든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고
어느 어설픈 석양이
꽃단풍과 어울려 취기로 내려앉는 저녁녘.
가을빛에
살포시 발 담그는 저녁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