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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12절-24절: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 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찌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사건이 한 사건 한 사건 진행되어 갑니다. 13장에서는 조카 롯이 그 숙부 아브라함의 요단평야를 취하고, 그래서 조카 롯은 하루아침에 거부가 되었습니다. 숙부 아브라함은 롯에게 목장을 빼앗긴 셈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험산준령을 넘는 양치는 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물론 삼촌이 ‘네가 좋아하는 대로 행해서 가져가라’ 그랬을 때에 조카 롯이 ‘삼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먼저 삼촌이 선택을 해가지고 그 후에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될 텐데 ‘기회는 이때다’ 하고 조카 롯이 요단 온 들을 취한 거지요.
그 후에 소돔성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되니 침략을 당하고 조카 롯은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이지요.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으니 이제 뭐 전부 다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역기서 역사적으로 보면 그건 전쟁입니다. 전쟁 났다 그러면 모든 건 다 빼앗기지요. 그렇지요? 모든 물품 사람까지 빼앗기고 죽고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자기 일생에 뼈빠지게 수고하고 벌어놓은 거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 버리지요. 그게 이제 역사에서 우리가 즉시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전쟁은 아닌데, 눈에 보이는 전쟁은 안 보이는데 하나님의 백성, 믿는 사람의 그 정신은 간단히 말하면 천국의 정신, 영이 잘되는 정신, 사람이 영적으로 지혜적으로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자라고 성장되게 하는 그 정신. 그 정신이 아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소원 목적인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아보자’ 하는 정신에 정복을 당해버리면, 정신적인 정복입니다. 아까는 무기전쟁으로 정복이지요?
이제 정신적으로 정복을 당하면 크게 말해서 ‘인간이 잘 먹고 세상에서 잘 살아보자’ 하는 그 말의 의미가 뭔가 하니 ‘이 세상에서 누리고 살자’ 그 말이요. 우리 성도들은 ‘누리고 살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건설하고 살자’ 그건데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먹고 마시고 누리고 살자’ 하는 그 정신으로 정복을 당해. 정신적인 정복이지요? 그 정복성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그렇게 살면 모든 세상을, 자기의 안팎의 모든 것을 누리고 다스리게 돼요. 누린다는 말은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면에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그런데 그렇게 살 내가 세상정신에 정복을 당해버리면 그 말이요. 그게 이제 전쟁입니다. 그렇게 정복을 당해버려 놓으면 반드시 빼앗깁니다. 세상 쪽으로 빼앗긴단 말이요. 그 방향과 목적성이 세상 쪽으로 전부 다 나가버린다 그 말이요. 그걸 알아야 됩니다. 인간이 만들어지기를, 하나님께서 나 인간을 만들어 놓기를 그런 자로 살라는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 놓지를 않았다 그 말이요. 믿던 안 믿던 인간 모두에게. 알겠어요?
이제 크게 대국적으로 보면 세상소원 목적으로 사는 그것이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는 그게 인간 타락이라 그 말이요. 알겠어요? 그렇게 사는 게 아니고 생활방편은 다 똑같지요. 그렇지만 그 속에서 갖는 그 특수한 정신은 먹고 마시고 일하고 하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닮아나가는 것. 성경을 통해서지요? 예수 믿는 믿음을 통해서지요? 그렇게 사는 게 바로 되는 거란 말이요.
롯이 이제 요단평야로 나가서 점점 소돔 고모라성이 가까우니까 물이 들고 거래가 되고 이래서 소돔 고모라로 이사를 들어가지요. 이사를 갔다는 그 말은 벌써 그곳이 좋다는 말이 되고 그 정신에 정복이 됐다 그 말이요. 정복이 됐지만 롯은 그런 신앙적이고 정신적인 면에, 세상정신에 정복을 당한 줄을 모르고 있는 거지. 전혀 모르고 있는 거지. 현재적으로 저 안 믿는 사람들에게 ‘당신 전문적으로 정복을 당했군요’ 그러면 모릅니다. 알 리가 없지요. 그 면에 대해 모르고 깨닫지를 못하니까.
우리가 쉽게 한 번 생각을 해 보세요. 그 왜 외국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저 뭐요? 이북에서 내려 보낸 간첩들의 가르침을 받고 정신에 의해서 거기에 정복이 되니까 그리로 그냥 붙잡혀 가지요? 그게 정복이란 말이요. 정복당하고 정복을 하고. 그 정신적 면의 정복성을 우리가 강하게 인식을 하고 느낄 줄 알아야 돼요. 성경은 그걸 다 가르쳐주고 말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불신세계는 전혀 그걸 모르지요. 모르니 깨닫지 못하는 거니까. 내가 정복을 당해서 이 상태가 돼 있는 건지 그 모르는 거요.
거의가 보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누리자 돈 많으니 누리자.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죽을 때까지 살아보자.’ 거의가 그거 아니요? 그런 정신을 갖는 것은 배우고 못 배우고 상관이 없어요. 아무리 국가의 높은 사람이라도 그거는 그런 정신은 다 갖고 있지요? 정복을 당해요. 그런 정신이 들어있는 한 절대로 사람이 바로 만들어지지를 못한다. 사람이 정립이 돼지지 않아요. 사람이 바로 세워지지를 않아요.
아무리 매를 가지고 때리고 감옥 속에 집어넣고 해도 사람이 바로 서지를 못 해. 설령 한두 가지 도덕성적으로 술 담배나 끊을지 모르지만, 마약을 중단하고 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의 근복적인 목적에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를 못한다. 성경은 그걸 가르쳐줘. 하나님 앞에 인간이 바로 서는 것, 바로 사는 것, 인간창조의 그걸 모른다 그 말이요. 전혀 모르지요.
내 욕심 같아서는 교육계에 유치원 들어가면서부터 대학교까지 기본적인 교육이 딱 돼 있으면 아닌 말로 이 한국이 지엽적이지만 이렇게 돼지지를 않아요. 될 수가 없어요. 문제는 사람이다.
그래, 롯이 그 때 당시 전쟁이 나가지고 포로로 잡혀갔지요. 그렇지만 롯은 생각할 거야. ‘저 놈들이 전쟁을 일으켜가지고 나를 포로로 잡아간다.’ 남만 볼 줄 알았지 롯이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그 자체가 빠져나오지를 못해요. 불가능이야. 참 외부의 어떤 강한 세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강한 세력이 아니면 무형적인 거기에서 자기가 탈출을 못해요. 해방이 안 된단 말이요.
그래놓으면 사람이 어떤 환경에 놓여지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거기에 먼저 자기가 폭 쌓여서 딱 갇혀져 버려요. 갇혀져 버리면 자유가 아니야. 남이 볼 때는 자유인데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는 자유인이 아니야. 속박이 됐다. 구속이 됐다. 정복을 당했다.
여러분들, 여러분들 마음을 마음대로 자유할 수 있습니까? 안 그런 때가 있지요? 도무지 빠져나오지 못하는 내가 내 마음대로 하면 될 텐데, 그게 자유인데 그게 안 돼. 거기서 누가 자유자로 끄집어 내주겠느냐?
이 소돔성에 거하고 있는 롯이 포로로 잡혀가 버렸어요. 지금도 이 시간에 포로, 세상정신 세상사상에 포로로 잡혀간 그런 기독자들이 수두룩합니다. 안 믿는 사람이야 이건 뭐 논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정신을 가지고 세상정신에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해방시켜야 할 오늘날 교회와 교역자들 거의가 보면 포로로 잡혀 있어. 그러니까 세상정신 판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그게 타락이다. 참 이게 큰일 난 겁니다. 모르면 전혀 의식을 못하지만 알면 두렵고 떨리는 겁니다.
누가 보아도 일반적 견해는 ‘이 전쟁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일으킨 전쟁인데 아브라함을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이 못된 물질욕심이 가득한, 세상정신이 가득 들은 이 롯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렇게 대개는 보고 있다 그 말이요.
전쟁이 왜 일어났느냐? ‘롯의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으켰다’ 그렇게 본단 말이요. 왜냐하면 삼촌 재산 빼앗아 가버렸으니까. 그러니까 꼴 보기 싫고 하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위해서 롯에게 복수하는 식이다. 그렇게 보기 쉽다 그 말이요.
아브라함은 다른 이치를 붙잡고 바르게 살려고 그랬지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종과 횡으로 행해봐라.’ 조카 롯이 요단들을 취해서 나갔지요? 삼촌은 이제 산골로 양을 데리고 들어가고. 목장까지 조카 롯에게 빼앗겼으니까. 그 후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네가 종과 횡으로 봐라. 네가 밟는 땅을 내가 다 주겠다’ 그랬지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고 하면 사건이 옵니다. 직접적으로 오는 사건도 주고 또 멀리서도 사건을 일으키고. 이건 모두 다 자기를 위해서 일어나는 사건들입니다. 자기의 가정에 자기의 집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으면 가정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 그랬을 때에 누가 잘못했던지 간 그 사건은 믿는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겁니다. 알겠어요? 그게 성경의 이치요. 누가 잘못해서 뭐가 손해보고 누가 죽었던 그게 상관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의 자녀인 믿는 사람을 중심하고 일어난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성경을 볼 때도 사건이 터졌을 때에 가장 큰 수입을 보는 자가 누구냐? 그러니까 그 사람을 중심해서 일어났다 그 말이요. 성경에 보면 세계적인 유명한 왕들이 있지요? 있지만 아주 권세가 당당하고 사건이 그 사람의 말이 나오고 졸병들이 일어나고 그래도 그 사건 속에 믿는 하나님의 자녀, 예를 들어서 에스더로 본다면 에스더가 먼저고 사촌, 오라비 집에서 부엌대기 노릇을 한 에스더가 먼저고, 그 다음 모르드개, 이스라엘 백성들 이렇게 나간단 말이요. 거지 같이 사는 에스더를 중심해가지고 그게 일어났단 말이요. 그러니까 가장 큰 수입을 보는 자는 누구냐? 믿는 사람이다. 깨닫는 사람이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집에서 자식은 믿고 부모들이 믿지 않아도 알고 보면 그 자식을 중심해서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에 이런 저런 사건을 하나님께서 아주 필요적절하게 주는 겁니다. 전부는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구원이라 그러면 간단히 말해서 그 사람을 하나님 성품을 닮게 하는 것.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으로 닮아나가게 하는 것. 그걸 갖다 구원이라 그렇게 여기서 지금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부는 나를 위해서 일어나는 것이니 최대로 내가 유익을 보고 수입을 볼 준비를 하고 있어야 된다.
그리고 조심할 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옳은 이치요 진리에 절대로 신앙양심에 양보를 하지 말아라. 목숨이 달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하나님의 옳은 말씀을 붙잡았거든 어떠한 것이 오더라도 절대로 양보를 하지 말아라. 알겠어요? 그래야 수입을 보고 들어가는 겁니다. 많이도 아니고 딱 한 번 양보함으로써, 날마다 주일 있지 뭐 하니까 오늘 주일날 까먹고 한 그런 것 있을 수 있지요? ‘다음에 잘 믿지 뭐. 다음에 가지 뭐.’ 어쨌든 딱 한 번 양보함으로써 이놈의 마귀가 들어와 가지고 자기 속에서 마귀새끼를 딱 쳐놓습니다.
여러분들, ‘오늘도 햇빛 나고 내일도 햇빛 날 거다’ 뭐 이런 식으로 해서, 여러분들, 그 된장 담을 때 된장 잘 덮어야지요? 그런데 조금 뭐 이렇게 벌렁하다 해서 ‘에이, 귀찮다’ 하고 그냥 내버려둔다. 딱 한 번이라는 그것이 똥파리가 와서 벌레가 수십 수백 마리입니까? 딱 한 번이라고 해서 벌레가 딱 한 마리입니까? 살펴보면 여러 수백 마리야. 딱 한 번이라고 하는 이거 신앙양심 어기고 양보하게 되면 자기 속에 마귀가 수많은 새끼를 친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새끼를 친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가장 적절한 사건을 줍니다. 모든 사건 환경이 일어난 후에 아브라함을 우리가 보니까 아브라함이 성자가 되었고 아브라함이 큰 영웅이 된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래,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바로 살려고 하는 이 아브라함을 위해서 존재가 얼마나 동원이 됐느냐? 4대 연합군이 동원이 됐고, 5대 연합군이 동원이 됐어요. 그러니까 9대 연합군 아니요? 이거 엄청난 숫자요. 아홉 왕이 동원이 되었고 군대가 동원이 되었고 또 롯이 동원이 됐어요. 누구를 드러내 주려고요? 아브라함을 드러내 주려고. 이거 굉장한 겁니다.
6. 25 때에 16개국이 참전을 한 것 같은데 그 때에 누가 최고의 수입을 봤을까? 16개국 그 참전국 군대가 엄청나지 않아요? 6. 25 전쟁 일어났을 때에 누가 수입을 보았을까? 그 전쟁에서? 넓게 보면 순교자들이고. 여러분들, 영화로 나온 그 누구야? 손양원목산가? 그래, 그 수입을 본 사람이란 말이요. 영적 최대의 수입. 그걸 누가 알겠느냐? 하나님은 우리가 성경을 볼 때 그렇게 보여주고 있단 말이요.
참 이거 굉장한 수입이지요? 사건을 아홉 왕이 동원되고, 16개국이 동원되고. 어쨌든 그 사건을 일으키는 그것이 쉽겠습니까, 순종을 하는 그것이 쉽겠습니까? 자기가 무슨 수로 9대 연합군을 일으키고 16개국 군대들을 일으켜요? 그건 하나님이 하시도록 내버려두고 나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만 해 나가. 그렇지요?
6. 25난 것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 구원을 위해서 일으킨 거 아닙니까? 하나님의 주권섭리에 들어있는 거 아니겠어요? 물론 일반적인 역사로 일반적으로 깨닫는 것이 또 있는 것이고. 어려운 일은 하나님이 맡으시고 쉬운 일은 자기가 하는 거고. 그렇게 돼 있단 말이요. 성경에.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섭리에 의해서 동원된 심부름꾼을, ‘하나님 너 나’ 이 삼각관계지요? 너라고 하는 여기에는 나 외에 다른 사람 전부, 세상사람 전부. 사건. ‘하나님 너 나’ 이렇게 삼각관계. 삼각관계를 놓고 볼 때에 미운 사람이 있을까요? 미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보면 전부 다 나 깨닫게 해주기 위한 하나님의 심부름꾼이에요. 그러니 하나님 심부름꾼인데 왜 미워하겠어요. 미워할 까닭이 없지요. 모르니 미워하고 모르니 그거 잡고 ‘죽일 놈 살림 놈’ 대적을 하고. 누구만 나쁜 사람 되고 누구만 고통을 앉게 되지요? 성경은 이런 걸 밝혀주고 있어요.
누구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이냐? 알고 보면 자기를 위해서 다 동원되고 있는 건데 모르니 하나님의 심판거리를 장만하고 막대한 손해를 보고 있으니 그 말이요. 깨닫고 보면 참 다 고맙고 미운 것이 아니지요. 다 고마워요. 다 고마운 사람들이야. 성격이 어떻고 성질이 어떻고 그게 다 고마운 사람들이야. 왜 고맙지요? 누구 만들어 주려고? 나 만들어 주려고. 그 얼마나 고마우냐?
사람 만들어지게 하는 그거 누가 신경을 써요? 학교선생들도 그건 신경을 못 써요. 모르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내가 잘못해서 손해만 보고 심판거리만 장만하고 가게 된다. 그러니까 알고 보면 원수가 누구냐 그 말이요. 알고 보니 깨닫고 보니 원수란 딴 사람이 아니고 바로 자기다. 원수는 몰라서 그렇지 가만히 자기를 살펴보면 원수는 바로 자기 속에 들어있어요. 자기 속에 다 들어있어.
원수는 바로 자기인데 누리고 살려니까, 그 환경에서 누리고 살려니까 불평이고 불만이고 그렇다 그 말이요. 누리고 살려니까. 구원목적이면 하나님 성품 닮는 목적으로 사는 목적이면 그것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다 그 말이요. 남이 나를 좋게 해주니 그거야 뭐 누구든지 예수 믿던 안 믿던 다 좋아할 거 아니요? 좋게 해주니까. 그렇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을 미운 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미운 사람으로 비춰지고 미운 짓을 하게 될 때에 ‘내 속에 미운 것이 들어있구나’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잡고 나에게 와서 가르쳐준다 그 말이요. 그러니 얼마나 고마우냐 그 말이요. 이 참 우리가 말이 이렇지 그 면에 대해서 둔감하니까 성질도 나고 그러지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해서 주신 것은 누리라고 주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는 구원을 잘 이루라고 하나님이 줬다 그 말이요. 누리라고 준 건 하나도 없어요. 이게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모르니 그걸 잡고 누리려고 그러고.
하나님의 자녀인 경우는, 또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이 되는 자기에게는 길리울만큼 길러서 하나님께서 데려갑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부딪힌 사건을 관망을 말고 날 위해서 일어난 것인지 심사를 할 줄 알아야 되는 겁니다.
소돔성에 전쟁이 일어난 거, 아브라함이 만일 나쁜 마음을 가졌다면 조카 롯에게 ‘아주 고소하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거란 말이요. 그런 마음을 가졌다면 믿는 아브라함이 안 믿는 사람들의 마음과 다를 게 없는 거지요. 그렇지 않나요? ‘나를 그렇게 해롭게 하더니 아이고, 잘 됐다. 아이고, 고소하다.’ 여러분들, 그런 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요? 그런 마음은 그런 말은 뽑아버려야 돼요. 자기 속에 없도록 해야 되고.
그 제가 언젠가 한 번 얘기한 것 같은데 전라도 여수에서 살 때 내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어머니가 쌀장사하는데 아마 고등학생들이 술을 먹고 길에서 떠들고 그랬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내 친구 어머니가 ‘저 놈들, 물에 빠져 죽었으면 좋겠다.’ 여수는 바닷가 아니요? 그 소리 탁 하고 난 뒤에 마음속에서 뜨끔 하더래요. 뭔가 탁 와 닿는데 왜냐 하면 자기 집에도 자식이 있거든요. 그 후에 자기 큰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어요. 내 친군데. 믿는 사람인데.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우리에게 그런 게 있어요. 우리에게 그런 마음들이.
이치를 안 뒤에는 반드시 사건이 온다. 왜 사건을 주느냐? 써먹으라고 사건을 준단 말이요. ‘네가 깨달았느냐? 그래, 네가 이 사건에서 깨닫는 대로 네가 어디 통과를 해봐라’ 하고 준단 말이요.
그래, 전쟁이 일어나니까 아브라함이 출전을 했습니다. 318명 자기 집의 키운 군대들이라 할까? 318명. 출전을 했어요. 이거는 대 선입니다. 소 선이 아니고.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어떤 사건이 올 적마다 소 선으로 나가는 것보다 아주 대 선으로 나가는 것이 수입이 많아요.
이 조카 롯에게 사건이 왔을 때에 힘 안들이고 할 수 있는 말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삼촌이. ‘아이고 불쌍해라’ 그렇게 할 수 있지요? 그리고 포로로 잡혀가는 조카 롯을 향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포로로 잡혀가는 그 순간이라도 조카 입에서 기도가 나오도록 해달라’ 하는 그 그런 기도도 할 수 있지요? 그런 기도하는 것도 선이지요. 기도하는 것보다도 자기가 하는 선이 더 큽니다. 자기가 직접 나가는 선이 더 크단 말이요. 하나님보고 해달라고 하는 것보다 자기가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그 뒤 책임은 또 하나님이 진다.
이 세상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적기사를 좋아하고 그러는 건지? 성경에 보니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그랬단 말이요. 이적 보려고. 어디 요행하는 그런 거 보려고. 그 못 쓰지요. 그 천하 못 써요.
출전을 하는데 있어서 각오할 건 뭐지요? 전쟁 나가는데 각오할 거? 죽음이지요. 죽음만 각오하면 되는 거지요. 그런데 나가서 전쟁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니까 소문이 어떻게 나느냐? 아브라함에게 ‘4대 연합군을 이긴 영웅이다’ 하고 소문이 난단 말이요. 318명을 데리고 나가서. 4대 연합군을 여러분들이 이길 수 있어요? 불가능해요. 인간의 머리로서는 인간의 계산법으로서 이거는 불가능해요. 전혀 불가능이요.
그런데 이겼다 하는 것이 사건적으로 보면 이적이지만 그러나 그 속에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는 계시성이 들어있지요?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리무장 튼튼하게 해가지고 나갈 것 같으면 일대 백을 잡고도 싸울 수가 있는 것이고 일대 천을 잡고도 싸울 수가 있는 거고. 신앙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옳다고 하는 거기에는 하나님이 같이 하는 거요. 알겠어요?
여러분들, 물론 뭐 예수 믿는 것에 비할 건 아니지만 옛날에 전쟁하는 것 보면 도를 닦은 사람이 착 나타나가지고 뭐 어떻게 하니까 손을 팍 이렇게 하니까 바람이 일어나고 하니까 수많은 군대들이 파리 떼처럼 날아가고 하는 그런 거 있지요? 예, 하나님의 능력을 그런 데다 비하겠어요? 신앙의 힘이라고 하는 거.
신앙싸움은 영적 정신적 신앙싸움은 패배가 없어요. 반드시 이기게 돼 있어요. 그리고 그 배경에는 하나님이 버티고 있는 겁니다. 온 지구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달라붙어서 하나님과 싸우자고 그래 봐요. 어떻게 이길 수 있어요? 말도 되지 않는 소리지. 예수 믿는다고 하는 건 기독교라고 하는 건 그런 신비로운 싸움이 있는 겁니다. 이게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신앙하면서 사는 세계에 실질적으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이렇게 전쟁하고 돌아오니까 소문이 영웅적으로 난 거지요? 이 참 이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 굉장한 거요. 만일 아브라함 자기가 ‘내가 영웅이 되겠다’ 그러면 그게 영웅이 되겠어요? 사건이 와서 대 선으로 목숨을 걸고 나가니까 영웅소리는 자동적으로 돌아오지요.
이래서 전리품에서 얻은 것을 멜기세댁에게 십일조로 바치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그랬지요? 그런데 그 때에 소돔 왕이 대가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영광을 지불하려고 그랬지요. 대가적으로. 아브라함은 그 대가를 바라보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죽음을 무릎 쓰고 대 선을 향해서 나간 거지요.
사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싸움에서 무형적 이면적인 면으로 승리한 것을 보면 하나님이 싸운 거지요. 인간계산은 안 돼요. 하나님이 싸운 거지. 그러니까 순종만 하면 돼. 뒷일은 하나님이 책임졌다 그 말이요. 생각을 해봐요. 318명을 데리고 나갈 때 하나님이 보고 하나님이 왈 ‘쟤가 지혜로운 거냐, 미련한 거냐? 누구 빽을 믿고 318명을 데리고 4대 연합군을 상대해서 나가는 거냐?’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브라함이 누굴 믿고 나가는 거지요? 하나님을 믿고. ‘내가 싸우러 나갈 테니 하나님, 내 목숨 살려주십시오’ 그건 아니지요. 죽음을 각오하고. 참 이게 다 우리의 신앙싸움인데.
아브라함은 영광 받을 자가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자입니다. 인간이 영광을 받으면 안 돼요. ‘아, 내가 예수 잘 믿으니 이런 대가가 오는구나.’ 이거 아주 잘못 생각한 거지요. 인간 자기는 영광 받을 자가 아니다. 순종만 해나가면 돼. 사람이 볼 때는 롯과 소돔성 사람들을 위해서 아브라함이 수고한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상대하고 나간 거요.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그랬으면 그 전쟁에 안 나갔을 겁니다.
우리가 대신관계나 대인관계 대사관계 대물관계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되는 것이지요? 사건위주로 하고 돌아가면 안 됩니다. 우리 성도의 움직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다 보니 일이 성사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고. 대신관계.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 그게 대신관계. 대인관계. 자기와 또 다른 인간과의 관계. 대신관계가 먼저 되는 것이 종, 인인관계로 돼나가는 것이 횡. ‘네가 종과 횡으로 네가 살아봐라. 그러면 발로 밟는 곳을 너에게 다 주겠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나가면 이제 종과 횡으로 나가는 것이 천국점령법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정복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알겠어요?
기독교 신앙 안에는 사람의 마음을 정복하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 거짓 종들은 나쁜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을 정복해서 꾀어서 세상적으로 집착하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정복해가지고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사실 그건 뭐 정복도 아니지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진리에 정복이 되면 바로 자기가 진리의 사람이 되고 빛의 사람이 되고 능력의 사람이 되고 진실의 사람이 되고 지혜의 사람이 되고. 그렇게 되는 거지요.
종과 횡. 대신관계에서 대인관계로. 대인관계, 이거 사람과 사람. 하나님을 먼저 놓고. 그런데 대사, 대물관계가 겸해서 나올 수가 있어요. 사건과 인간관계, 물질과 인간관계. 어쨌든 물질은 사람을 위해서 쓰고 사건을 위해서 쓰고. 그런데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놓으면 전부는 어그러져 버려요.
안 믿는 사람들의 눈을 가지고 이렇게 보면 그 때 당시야 그것이 즐겁고 기쁘고 내 편이고 뭐 이렇게 통하는 것 같으나 얼마 안 지나면, 생각을 해봐요. 사람의 마음이 나도 물질에 초점이 가서 있고 상대도 물질에 가서 초점이 돼서 있는데, 사는 목적이 그렇게 돼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물질을 초점을 다 움직이게 해놓으면 여러분들, ‘나는 자네를 그렇게 믿었네.’ 그러면 그 사람이 나쁘다는 말입니까? 사람은 좋은데 그 사람도 딴 데서 돈을 받아 나에게 주려고 그랬는데 돈이 달아나 버렸지. 그러니까 나와 관계성이 거짓말쟁이가 돼버렸지. 이것도 한 번 두 번 지나가 버려요.
전부는 물질적으로 초점이 돼가지고 물질제일주의로 기준이 되고 그것이 잘 돼야 기분이 좋고 그걸로 인해서 살고 그것이 중심을 해서 기준하고 해서 사업관계도 하려고 그러고. 그 어그러지면 어떻게 해. 잡지를 못하지.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기준하고 나도 하나님 닮고 너도 하나님 닮고. 사는 게, 모든 관계성이.
물질이 있는데 인간을 위해서 쓸 줄 모르면 인간이 달아나 버립니다. 물질을 잡기 위해서 타락이 되니 인간이 달아나 버려요. 인간이 달아나면 물질도 달아나게 돼 있어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면 인간의 마음도 기뻐지고, 그 사랑으로 옳은 것으로 증명이 들어가는 거요.
옳은 것 주기 위해 사귀고 옳은 것 받기 위해 사귀고 옳은 사람 되기 위해 사귀고. 그러나 보통 보면 인간과 하나님과 이렇게 겸해서 나올 때 보통 인간을 잡지 하나님을 잡지 않더라고요. 얼마나 그게 오래 갈는지 몰라. 그런 게. 특히 주일날. 성도는 주일날 지키는 게 기본이야. 그런데 누가 왔다고 안 오고, 결혼식이다 그러고 어쩌고. 얼마나 사이가 좋을는지 몰라. 그런 사람들.
그걸 알아야 돼요. 안 믿는 사람 같으면 ‘안 믿으니 그렇거니’ 하는 거지만 믿는 사람이 그렇게 살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이제 점점 그 마음은 식어지고 빠져들어가 버려요. 괴로움이 찾아오게 되어 있고 고통이 오게 되어 있어요. 왜 그렇게 살아? 우리의 척도는 뭐요? 대신관계 대인관계 대사관계 바로 하고 살아야 된다. 그리고 어쨌든 하나님 마음 섭섭하게 해드리지 말고. 좋은 거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재산은 하나님이 줬지요? 그래서 소돔의 그 왕이 그랬지요? ‘물질은 네가 갖고 가고 사람은 나에게 다고’ 그랬지요?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돌아올 그 영광은 인간이 대가지불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만 하고 나갈 것뿐이야. 영광이 오던 핍박이 오던 뭐가 오던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나가는 것. 그게 우리 기독자가 세상에서 살아갈 마음들입니다.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를 돌이나 나무나 벌레처럼 도덕성이 없는 그런 피조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인간 나를 당신의 형상대로 모양대로 만들어 놓으시고 예수님을 믿게 해서 예수님으로 통해서 나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채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을 할 때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저희들은 영적인 면에 눈이 어두고 둔감하고 보지를 못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찌하든지 못된 나를 신령한 천국에서도 더 높이 되고 영광스러운 자가 되고 최고의 자리로 앉혀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모든 사건 환경 들어 일으켜서 오늘날 나에게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으로 하나님의 정신과 마음으로 닮아지게 하는, 그렇게 하라고 사건 환경을 보냈지만 우리는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서 그 사건 잡고 싸우고 사람 잡고 싸우고 미워하고 헐뜯고 한 것을 생각을 하면 우리 자신이 자신을 돌아볼 때에 너무나도 부끄럽고 너무나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조금이라도 깨달아졌으니 모든 사건 환경은 어떤 고통스러운 사건 환경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지극히 사랑해 주셔서 나를 하나님처럼 만들어 주시고자 하시는 그 마음을 바로 알고 그 때마다 하나님 말씀 바로 붙잡고 이 못된 내가 성격적으로나 성질적으로 나 모든 소원 목적적인 면에서 하나님처럼 잘 만들어지는, 이 세상에 잠깐 나그네 생활하다가 가지만 나그네 생활하다가 가는 중에 하나님의 성품을 잘 입고 죽음의 선을 넘어갈 때에 ‘내가 세상에서 할 일을 다 하고 가는구나’ 하는 그런 말이 튀어나와야 될 줄 압니다. 그러나 죽음의 선을 넘어가면서 ‘내가 할 일을 다 못하고 가는구나. 내가 무엇을 했는가’ 하고 절대로 후회하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아니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강력하게 붙들어 주시고 믿음으로 역사해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충만하심이 당신의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같이할지어다. 아멘.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