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강의(經史講義) 39
함괘咸卦
단전(彖傳)에서 “함(咸)은 감응(感應)의 뜻이다.”라고 하였고 정자(程子)는 “감(感)은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단전에서는 또 천지 만물과 성인이 감통(感通)하는 이치를 지극히 말하였으니, 함괘(咸卦)는 오로지 감응과 움직임을 위주로 한 것 같다. 그러나 여섯 효의 효사(爻辭)를 보면 모두 정(靜)을 마땅하게 여기고 동(動)은 마땅하게 여기지 않으니, 어째서인가? 《정전》과 《본의》에서 “구사(九四)는 중간에 있으면서 위에 있고 심장(心臟)의 위치에 있으면서 마음의 상(象)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태(兌)의 하효(下爻)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상사(象辭)에서 “산 위에 못이 있음이 함(咸)이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마음을 비우고 남의 의견을 받아들인다.”고 한 데 대하여 정자는 “마음을 비우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였고, 주자는 “간(艮)의 밑에 있는 두 음효(陰爻)가 중간이 비어서 물이 스며드는 상이 있다.”고 하였고, 장청자(張淸子)는 ‘쌍뉴(雙紐)’라는 말을 만들어 “땅속이 비어 있으면 스며드는 물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는데, 마음속을 비우면 남의 의견을 수용하지 못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또 간의 밑에 두 획으로 마음의 상을 삼은 것 같은데, 어떻게 여기는가?
[김희조(金煕朝)가 대답하였다.]
함은 감응의 뜻입니다. 그런데 그 감응은 스스로 감응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움직임을 기다린 뒤에 감응이 되므로, 하늘과 땅의 기운이 움직여서 한 이치가 서로 감응하고 만물이 움직여서 두 기운이 교감(交感)하며 성인이 움직여서 백성들이 믿음으로 감응하는 것이니, 그 감응하는 것이 어디엔들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지금 저 여섯 효의 효사에서 마치 정(靜)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고 동(動)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지 않는 것같이 말한 것은 대개 태(兌)는 열성(悅性)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을 착(錯)으로 보아 동성(動性)을 지닌 진(震)이 되면 그 진출함이 더욱 빠르니 그렇게 되면 움직이는 것이 중도(中道)를 넘기가 쉽고 감응하는 것이 정도(正道)를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그러한 염려를 하여 특히 “가만히 있으면 길(吉)하고, 움직이면 수치스러움을 당한다.”는 따위의 말로 가볍게 움직임을 경계한 것입니다. 괘효(卦爻)의 본뜻이야 어찌 정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고 동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지 않음이 있겠습니까.그리고 저 구사(九四)의 한 효로 말하면 넓적다리 위와 등심 밑에 있는 격이니 위치로 말하면 심장의 위치이고 상(象)으로 말하면 마음의 상입니다. 《정전》과 《본의》의 해석은 다 그러한 것인데, 다만 대상(大象)에서 “마음을 비우고 남의 의견을 받아들인다.”고 한 풀이를 보면 문득 같지가 않습니다. 장씨의 쌍뉴설(雙紐說)에 대해서는 우선 어떠하다고 논하지 않겠습니다. 주자가 말한 “빈 것은 물이 스며드는 상이 있다.”고 한 것은 대개 간(艮)의 아래의 두 획을 마음으로 여긴 것인데, 이것이 후세의 유학자가 의심을 일으킨 곳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신(臣)의 견해를 말씀드리면, 간의 아래의 두 음효(陰爻)는 감(坎)에서 온 것으로서, 설괘(說卦)에서 “감은 마음이 급한 것이 되고, 단단하고 심이 많은 것이 된다.”고 하였으니, 주자가 간의 아래의 두 획을 마음의 상으로 삼은 것도 여기에 근거한 것 같습니다.
구사(九四)에서 “끊임없이 오가면 붕당끼리만 네 생각을 따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릇 해가 지면 달이 뜨고 추위가 가면 더위가 와서 한 번 가고 한 번 오는 것은 모두 감응(感應)의 정상적인 이치이니, 사람의 마음도 분명히 가고 오는 것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주자가 “점(占)으로 인하여 경계를 베푼 것이다.”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자연스러운 왕래도 있고 좋지 않은 뜻의 왕래도 있으니, 감응도 그러하여 사사로운 감응이 있고 합당한 감응이 있으며 안으로 감응하는 것도 있고 밖으로 감응하는 것도 있으며 대응으로 말한 것도 있고 전일한 감응을 가지고 말한 것도 있는데, 하나하나 분석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윤행임이 대답하였다.]
가고 오는 것은 곧 감응의 이치인데,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은 자연스럽게 가고 오는 것이지만 ‘끊임없다’라는 한마디를 덧붙인 것은 바로 좋지 않은 뜻으로 가고 오는 것이므로 《본의》에서 “점으로 인하여 경계를 베푼 것이다.”라고 풀이한 것입니다. 초육(初六)이 구사(九四)에 응(應)하는 것은 이른바 전일한 감응이고 육이(六二)가 구오(九五)에 응하는 것은 이른바 대응의 감응이지만, 구오가 육이와 응하는 것과 구사의 끊임없이 오간다는 것은 이른바 사사로운 감응입니다. 괘(卦)의 하체(下體)에서 감응하는 것은 이른바 안의 감응이고 괘의 상체(上體)에서 감응하는 것은 이른바 밖의 감응입니다. 산과 못이 기운을 통하는 것과 남자와 여자가 서로 감응하는 것은 이른바 합당한 감응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만물을 변화 육성시키는 것과 임금과 신하가 천직(天職)을 함께 다스리는 것과 남편과 아내가 화합하는 것과 해와 달이 번갈아 가며 비추어 주는 것들은 하나의 감(感) 자에 지나지 않으니, 함(咸)의 의의가 하도 커서 다른 의논이 더 필요 없겠습니다.
이상은 함괘(咸卦)이다.
[咸]
彖傳曰咸感也。程子曰感者人之動也。彖傳又極言天地萬物聖人感通之理。則咸之一卦。專主乎感也動也。而第觀六爻爻辭。皆宜靜而不宜動何也。傳義曰九四在中而居上。當心之位而有心之象。此則指兌之下爻而言也。象曰山上有澤咸。君子以。虛受人。程子云中虛則能受。朱子謂艮下二陰畫中虛。有滲水之象。張氏又雙紐爲說曰土之中虛。於潤無所不受。心之中虛。於人何所不容。此則又若以艮下二畫爲心之象何也。煕朝對。咸者感也。而感不自感。必待動然後感。故天地動而一理相感。萬物動而二氣交感。聖人動而黎民孚感。其所感之也。安往而非動也。今夫六爻爻辭之似若宜靜不宜動者。蓋兌性說而錯以爲震則其進又速。所動者易以過中。所感者難以得正。故聖人爲此之慮。特以居吉往吝等語。警戒夫輕動而已。卦爻本旨則何嘗宜靜而不宜動哉。且夫九四一爻。居股之上脢之下。以位則心之位也。以象則心之象也。傳義所釋。旣皆如此。而但觀大象虛受人之訓則又却不同。如張氏雙紐之見。姑勿論其如何。朱子所謂虛有滲水之象云者。蓋以艮下二畫爲心。此所以爲後儒起疑處。而以臣言之。艮下二陰自坎來。而說卦曰坎爲亟心爲堅心。然則朱子之又以艮下二畫爲心之象者。似由此也。九四云憧憧往來。朋從爾思。夫日往則月來。寒往則暑來。一往一來。皆感應之常理。則人心之亦不能無往來也明矣。然而朱子謂因占設戒者何也。有自然底往來。有不好底往來。感應亦然。有私感應。有合當底感應。有內感者有外感者。有對應而言者。有專於感而言者。可一一剖析言之否。 行恁對。往來卽感應之理。而日往月來。那箇是自然底往來。而著一憧憧底。便是不好底往來。故本義有因占設戒之訓。而初六之應九四。夫所謂專於感者也。六二之應九五。夫所謂對應而感者也。九五之應六二。九四之憧憧。夫所謂私感應者也。卦之下體之感。夫所謂內感者也。卦之上體之感。夫所謂外感者也。山澤通氣。男女相應者。夫所謂 合當底感應也。故天地之化育萬物。君臣之共理天職。夫婦之和諧。日月之代照。不過曰一感字而已。咸之義大矣哉。無容更議。以上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