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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첼로와 여자/윤준경- 한 남자를 벌거벗겨 첼로로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 한 여자가
만인이 보는 가운데 웃통을 벗고 남자를 연주하는 것은 시인가 외설인가 첼로와 여자가 하나의 음악으로 연주되는
인사동 시인은 멀쩡한 넥타이를 자르고
관객들은 숨을 죽인다 천재 아티스트 백남준을 쓰기 위해 세 권의 책을 독파하고
한 번의 퍼포먼스를 위해 첼로를 부수는 시인 발로 시를 쓰고
시로 섬을 만드는, 80이 넘은 나이에 트위터를 말하고 마리오 바르가스요사를 먼저 읽고 전해 주는 시인 죽을 시간조차 아까운
그래서 죽을 수 없는, 죽으면 안 되는 시인 이생진. <2>-새의 습성/윤준경- 새를 동경한 것은 막연한 욕심이었을 뿐 날 수 있는 힘의 논리를 연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끔 그의 가벼움이 부러웠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부러웠을 뿐 나는 연습조차 해 보지 않았고 나뭇가지 위에 납죽 앉아 보지도 않았다 인간 이상의 습성을 가지고 싶은 욕심에 나는 다만 새가 되고 싶었다 생각하면 새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부글부글 밥물이 넘치는 전기밥솥을 버리고 찍찍거리는 티브이를 버리고 책을 버리고, 옷을 버리고, 옷장을 버리고 지금 막 꽃 피기 시작한 화분을 버리고 내장을 비우고, 머리를 비우고 아주 작아진 몸과 머리가 되어 오래 익힌 인간의 습성을 버리면 날개는 저절로 돋아날 것이다 나무가 새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새가 나무를 받아들인다 방금 저 멧새가 아무도 찾지 않는 대추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을 보아라 대추나무는 비로소 집이 되는 것이다 <3>-뜨지 못하는 자의 변명/윤준경- 나 좀체 뜨지 않네 뭍에서도 물에서도 허우적거리네 나는 왜 혜성처럼 뜨지 못할까 별세계에도 물세계에도
이 지상의 낮은 변죽에도 나는 없네 그때 뜰 걸 그랬나? 사랑하는 경아로,
가슴에 A 자 하나 품고 인생 한 바퀴 뒤집어 볼 걸 그랬나 뭇 가슴에 냉소의 불을 질러볼 걸 그랬나 높이 떠오른 그대들이여 그대의 뼈는 몇 그램인가 살은 몇 리터의 물과 기름인가 내 속을 회전하는 욕망의 퍼즐
켜켜이 퇴적된 막막한 생의 집 무거워 조용히 가라앉는 의식을 집전하고 있네
<4>-허점이 있는 여자가 아름답다/윤준경- 한 묶음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여자가 아름답다 속눈썹에 화장기가 번져있는 여자가 아름답다 한번쯤 넘어지는 여자가 아름답다 미안해, 라고 사과하는 여자가 아름답다 잘 웃는 여자가 아름답다 잘 우는 여자가 아름답다 이 모든 것을 다 갖춘 나는 ? <5>-낙조를 기다리며/윤준경- 부두에서 우리는 낙조를 기다렸다 우리가 부르는 곳으로 해는 서서히 걸어오고 벌써부터 우리는 긴 환호의 첫 음절을 발설하였다 영화(榮華)의 한 끝에서 자숙하듯 해는, 눈부신 자신의 존재를 낮추고 싶었던 것일까 한 무리의 구름 뒤에 숨어 끝내 몸을 드러내지 않았다 낙조를 보지 못하고 돌아서는 길 문득 나를 낮춘다 자연에게 조금만 허리를 굽히면 인생의 황혼도 그만큼 아름다울걸 아무도 인생의 황혼을 기다리지 않은 것도 인생의 태양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태양이 구름과 비와 이슬을 다스리고 있음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6>-어떤 죽음의 알리바이/윤준경- 찬란한 뉴타운 네거리에서 신세계는 죽었다 어느 겨울 그의 탄생을 축하하듯 그의 죽음을 축하하는 휘황한 샹들리에와 미끈한 여자의 다리 모든 죽음의 알리바이는 아주 가까이에서 일말의 의심조차 거부하며 태연히 미소 짓는 법 누가 신세계를 죽였나 선 채로 제를 올리는 저 뼈의 납골당 바겐세일의 플랜카드를 어깨에 걸고 내장된 몸부림의 압축파일을 풀고 있는 아무렴, 한 생애 죽음에 이르기 위해 가시광(可視光)의 조도(照度)를 높이며 핏발선 너, 살생의 조력자 가슴에 손 얹지 않고 다시 사격중이다 과녁의 중심을 관통한다 물증은 없고 심증뿐이다 무죄다 <7>-행복, 항복/윤준경- 행복하려다 말고 나는 항복(降伏)합니다 행복이란 것도 한번 갇히면 빠져나오기 힘든 감옥, 감옥은 행복도 답답하여 수시로 탈출을 꿈꾸겠지요? 나의 이 가난과 고독의 매너리즘 삐걱거리는 침대와 비가 새는 창 가난과 고독에서 여문 몸짓은 가난한 심령에 위안이 되고 꿈꾸지 않음으로 행복한 무한 자유 행복은 나에게 잘 맞지 않는 날개옷 끊이지 않는 근심으로 삭은 기둥을 버티는 나는 이 장르의 탤런트 항복(降伏)한 투쟁주의자 두 손 번쩍 들고 드러누운 행복, 항복입니다 <8>-은행나무 연가/윤준경- 우리 집 은행나무는 혼자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짝이 없던 은행나무는 연못 속에서 짝을 찾았다 그것이 제 그림자인줄 모르고 물속에서 눈이 맞은 은행나무 물에 비친 제 그림자에 몸을 포개고 만 명도 넘게 아기를 가졌다 물방개는 망을 보고 연잎은 신방을 지켜주었다 해마다 가지 사이에 돌멩이를 얹고 그림자에게 시집 간 은행나무 한 가마니씩 은행이 나와도 그것이 그리움의 사리인줄 몰랐다 바람이 세게 불 때마다 연못이 걱정되는 은행나무는 날마다 그 쪽으로 잎을 날려 보내더니 살얼음이 연못을 덮쳤을 때 은행잎은, 연못을 꼭 안은 채 얼어있었다 <9>-자목련/윤준경-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어 새하얀 옥양목에 자색 물을 들인다 큰오라버니 여지없이 무덤에서 나와 ‘검정물을 들이거라’ 자줏빛 시절은 그렇게 잿빛물이 들고 특별할 것도 없는 가계의 문신을 지우지 못해 오라버니의 폐에는 녹물이 고였다 “괜찮다, 괜찮다” 오늘은 환하게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시는 큰오라버니 슬퍼라, 삼갈 게 많았던 큰오라버니의 생도 저승에서는 붉게 피셨던가 자색치마 남이 볼까 멀리 동구 밖을 도시더니 그때는 왜 몰랐을까 ‘괜찮다 괜찮다’는 말 아침에 붉던 꽃잎이 난분분 첩첩했다 <10>-나 다시 젊음으로 돌아가면/윤준경- 나 다시 젊음으로 돌아가면 사랑을 하리 머리엔 장미를 꽂고 가슴엔 방울을 달아 잘랑잘랑 울리는 소리 너른 들로 가리라 잡초 파아란 들녘을 날개 저어 달리면 바람에 떨리는 방울 소리 방울 소리 커져서 마을을 울리고 산을 울리고 하늘을 울리고 빠알간 얼굴로 돌아누워도 잘랑잘랑잘랑 잘랑잘랑잘랑 나 다시 젊음으로 돌아가면 머리엔 장미를 꽂고 가슴엔 방울을 달고 사랑을 하리 사랑을 하리. <11>-모퉁이 별-고 성찬경시인님을 추모하며/윤준경- 애석 하여라, 모퉁이 별 문득 빛을 놓고 영면에 들다니 나는 황망하여 걸음을 멈춘다 팔순의 무거운 이력은 어디에 주었는지 마냥 순한 아이 같은, 거부도, 반대도, 비난도 모르는 여덟 살 바스락바스락* 주문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흥얼거리며*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바스락바스락* 80대를 인생 최고의 황금기가 되게 하는 마지막 남은 전략*은...... 이미 다 이룬 것인가 덧없어라, 이것이 사람의 일이었네 깨끗한 ‘흙’* 밑에 그 환한 이름자만 남기셨네 ‘성찬경’ * 고 성찬경 시인님의 시에서 인용 <12>-겨울 숲/윤준경- 나체가 아름답다는 걸 겨울 숲에 와보고 안다 잔가시 하나에도 생생한 피돌기, 손가락마다 파랗게 힘줄이 뻗쳐있다 탄주를 기다리는 수 만개의 현, 청춘을 놓아버린 잎들의 비로소 자유로운 사색 침묵의 우화를 꿈꾸며 겨울 숲은 다시 만삭이다 참나무의 풍만한 허벅지를 햇살이 애무하듯 쓰다듬고 간다 <13>-시간의 등/윤준경- 내 힘으로 걷지 않았다 인생을 위해 내가 설사 수고한 것이 있다해도 헛수고였을 뿐, 나 인생에게 술 한 잔 사 준 적 없이* 인생은 나를 견뎌주었다 섣달 초열흘, 어머니 나를 윗목으로 밀어내셨지만 살려달라고 우는 나에게 이내 젖을 물리셨다 전쟁은 나를 버리라고 애원했지만 용케도 나는 버려지지 않았다 한 남자의 등에 나를 업히시던 날 어머니 속으로 우셨다 삶은 언제나 미지수였다 현실의 옆칸은 늘 비어있고 예측할 수 없는 곡조가 인생을 밀고 당겼다 내 힘으로 걸을 새 없이 시간이 나를 업고 달렸다 내일에 대해서는 말해 준 적 없이 *정호승 시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를 변용 <<윤준경 시인 약력>> *경기도 양주 출생. *1994년 <한맥문학> 등단. *2000년 8월 초등교사 명퇴. *시집 『나 그래도 꽤 괜찮은 여잡니다』(1999),『다리 위에서의 짧은 명상』(2009),『새의 습성』(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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