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책읽는 사람들-실향민의 향수를 책으로 펴낸 화가 김한.pdf
실향민의 향수를 책으로 펴낸
-화가 김한(金漢)
인터뷰 김호운(책 읽는 사람 발행인)
정리 윤구영기자
‘나의 어린 시절은 푸른 바다가 바라보이는 동구 밖 언덕 위로 꼬불꼬불 뻗은 오솔길을 정신병을 앓아 늘 흥얼흥얼 알 수 없는 노래를 읊조리는 앙상한 할아버지 등에 업혀선 번듯이 흔들리는 상투 너머의 짙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오르내리곤 하였다.’ (김한, 화문집 <나의 세월은…>의 ‘고갯길’중에서)
김 화백은 화가 이영진(李英進, 이중섭의 조카), 하인두(河鱗斗, 작고)와 함께 시인 구상과도 교유하는 사이다. 그리고 그는 ‘이중섭 미술상’ 창설을 위해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고 1996년 제7회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한 한국 화단의 원로 화가다.
김 화백을 만나기 위해 아침 일찍 서울 도심을 벗어나 목동 사거리를 지나 화곡동으로 향했다. 찾기가 어렵다며 김 화백은 골목어귀까지 나와서 방문자를 맞이하는 자상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의 작업실은 주택가 골목길에 있었다. 단독주택 1층을 작업실로 위층은 휴식 공간 겸 서재로 쓰고 있었다. 월간 <책 읽는 사람들>에 국내 화가로는 처음으로 초대하는 하였는데 김 화백은 잡지를 보자마자 제호가 마음에 든다면서 기쁜 표정으로 첫 인사를 건넸다.
작업실에 걸린 그의 그림들은 온통 청색이 주조를 이룬다.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가 추구하는 청색의 이미지가 구의 유년기의 감성이 배어 있는 바로 고향의 그 푸른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유년기를 보낸 고향은 함경북도 명천의 조그마한 시골 포구다. 그는 이번에 제2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북한을 다녀왔다. 그 곳에 살고 있는 시인인 동생 김철을 50년 만에 만난 감회가 아직도 그의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 있었고 한 참 동안 그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 화백은 두메산골인 명천에서 9살 때 항구 도시인 성진(지금은 김책시)으로 나와 고급 중학교가지 다니다가 6.25 발발 초기에 남쪽으로 나왔다.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국군이 북진하자 그는 고향이 가까운 최전방에 가 있었다. 혹시 고향으로 가는 길이 열릴까 해서였는데, 그 고향 가는 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가족들과 헤어져 혼자만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4년이 지난 후 부모님과 동생들도 고향을 떠나 월남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족들이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가족이 다시 상봉했으나, 북한에 남아 있던 동생 김철만 끝내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두 동생 중 한분도 화가로 활동하다가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형제들이 모두 예술가로 활동하는 예술가 가족이다.
“동생은 헤어질 당시와 얼굴이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판에 박은 듯 아버지를 쏙 빼 닮았어요.”
김 화백은 동생 이야기를 하면서 얼굴이 어두워졌다. 동생 김철은 북한에서 아이들에서 어른가지 그의 시를 줄줄 외울 정도로 대시인이 되어 있었다. 김철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그 곳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어떻게 아느냐고 묻더라고 하면서 동생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그리움에 대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또 동생의 건강이 아주 안 좋아서 언제가지 버틸지 알 수 없지만, 수많은 이산가족이 있는데 이렇게나마 생전에 만나 볼 수 있었던 것만도 감사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김 화백은 얼마 전 틈틈이 쓴 시와 산문을 그림과 함께 엮은 <나의 세월은>이란 화문집(畵文集)을 냈다.
“그림으로 못다 한 고향이야기를 써 본게 <나의 세월은>이란 책이에요.”
그는 어릴 때부터 책읽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일제 강점기였던 당시에는 주로 일본어판으로 된 책을 많이 읽었고,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펄벅의 <대지>나 시튼의 <동물기>라고 했다. 그 당시 일어로 읽었던 도스트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요즈음 한글 번역판으로 읽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당시와는 새로운 느낌이라고 귀띔한다. 그림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책 읽는 시간을 내기 어려워 주로 시를 즐겨 읽는다고 했다. 좋아 하는 시인은 작고한 박재삼이며, 그의 티 없이 맑은 서정적 시를 좋아한다고 했다. 박재삼 시인과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순순한 그의 인간미만큼 시도 아름답다고 했다. 문학 작품과 독서와 그림 작업은 서로 장르는 다르지만 모두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공통점에서 마음이 통한다고 했다.
동생이 시인이 된 것은 자신의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말했다. 동생도 역시 책을 좋아했고, 글 쓰는 재주가 띠어나서 초등학생 때 동요, 동화를 쓰는 등 일찍부터 글 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김 화백은 그림을 좋아 하게 된 뚜렷한 동기는 없다고 했지만, 그렇게 책을 좋아 하면서 가꾸어진 감성과 고향의 푸른 이미지를 그리고 싶은 충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예닐곱 살 때 곁방에 경상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 중 한사람이 모수였는데 그림을 잘 그려 그에게 그림을 그려 다라고 자주 부탁했고. 그 그림을 흉내 내어 그렸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때였다. 아파서 누워 있을 때, 어머니가 스케치북과 크레용을 사주시면서 그림을 그리게 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는 “글 쓰는 재주도 없고 시간도 없지만 마지막으로 화문집을 한 권 더 만들어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김 화백은 1996년 제7회 이중섭 미술상 수상기념 전시회를 성황리에 마치고. 작품 흐름을 모색하며 꾸준히 작업을 해 왔다. 내년쯤에 개인전을 가질 예정이라고 했다. 그가 축하는 작품 세계는 어느 유파를 쫓기보다 실향민의 향수가 깔린 애환을 그림에 담는 것이다. 어차피 예술은 자신의 경험의 축적을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것이다. 평생 분단 조국에서 이산가족이라는 멍에를 가슴에 안고 살아온 그로서는 고향이 애절하게 그리울 것이다.
‘한겨울 내내 부둣가를 비롯해 온통 명태덕이라 하여 길고 곧은 나무를 엮어 명태를 말리는 장대나무 숲이 하늘을 가리웠고, 생선 냄새로 자욱한 골목과 거리를 누비며 우리는 그런대로 즐겁고 티 없는 한 겨울을 보내곤 했었다. 명태가 많이 잡히는 때가 되면 부두를 비롯해 온 거리 골목 할 것 없이 종일토록 웅성거렸고, 산더미 같은 고기 더미가 온통 부두와 마을을 뒤덮었다. 생선 내음으로 자욱한 거리거리와 골짝은 겨우내 진한 환성과 나름대로 기쁨에 술렁거렸고 흥분에 넘쳐있었다.’(화문집 <나의 세월은>의 ‘겨울 浦口의 回想 중에서)
처음 만날 때와 마찬가지로, 방문객을 배웅하기 위해 골목까지 따라 나오던 김 화백은 무엇을 잊어버린 듯 다시 들어가더니 북한에서 가지고 온 술이라며 ‘워드카(보드카)’ 한 병을 가지고 와 손에 쥐어 주신다. 고향에서 묻어온 사연을 오래도록 기억하라는 뜻일 게다.
비록 자유롭게 오고가지 못하는 고향이지만, 그림과 글을 통해 김 화백의 아름다운 고향이야기는 우리들의 가슴에 오래오래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