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문화원 마을조사지]
소리로 재능을 나누다
- 조리읍 이형우 님
김선희 (정빈)
속이 가득 차기 시작한 김장배추가 벌써 한 아름 자라 햇볕에 푸르다. 옆에는 쪽파, 대파, 무, 고수, 상추, 가지, 들깨 등 가족을 위해 심어 가꾼 채소들이 화단인 듯 예쁘게 자라고 있다. 주인을 닮은 밭은 가지런하고, 이랑을 옮겨가며 분주한 부부를 비추는 아침 햇살이 따뜻하다.
이형우(83세)님은 파주시 조리읍 대원리에서 나고 자랐다. 삼 남매는 잘 자라서 손주가 여섯 명이 되었다. 봉일천 공립보통학교(현 봉일천초등학교)를 다녔고 1965년부터 근무한 미군부대 캠프하우즈에서 2000년, 35년의 직장 생활을 마무리 했다. 지금은 내외가 논과 밭을 오가며 자연과 함께 건강하게 지낸다. 어려서 본 것과 동네 어른들한테 들은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신다.
되찾은 마을 이름 대원리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현재 조리읍) ‘죽원리’는 ‘죽었니’로 들려, 좋지않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주민청원이 있었다. 마을 이름 하나가 바뀌면 행정적으로 일이 많아지기도 하지만 호적도 고쳐야 하고 지도도 바꿔야 하고 상당한 비용이 들어 안 된다며 계속 보류가 되었었는데, 결국은 받아들여져 2000년 ‘대원리’로 지명이 바뀌었다. 원래 마을 이름을 되찾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대원’ 또는 ‘대원리’라 불렸으나 흥선대원군의 군호(君號)와 같다고 해 ‘대(大)’자를 대나무를 뜻하는 ‘죽(竹)’으로 고쳐졌다. 마을에 대나무가 많았던 것은 아니고, 대원군 행차에 연도 나간 백성들을 보고 대나무처럼 청정하고 꼿꼿하게 살라고 그런 것 같다고 이형우 님은 말한다.
함께 살기 좋은 마을
예전에는 씨족이 모여 마을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는데, 근현대의 대원리는 그렇지 않았다. 어른들께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김해 김씨네와 조선 정종 임금님의 아들 임언군 후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이 500여 년 전이다. 그 후 은진 송씨네와 흥해 배씨네가 300~400여 년 전부터 살았다. 그러나 1903년 교회가 터를 잡을 만큼 개화된 마을이어서 그런지 양반, 상놈 구분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타 성씨들이 들어와 정착하기 수월해서 다양한 성씨들이 모여 살았다. 동네 평안을 위해 1년에 한 번 산신령한테 치성을 드리던 일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치성은 음력 시월 상달 초사흗날 새벽에 드리는데, 마을에서 집안이 평안하고 건강하면서 홀수 나이인 사람 7~8명을 뽑아 고사를 지냈다. 뽑힌 이들은 활터 뒤 산치성터에 초하룻날부터 미리 올라가 준비를 했다. 고사가 끝나면 손바닥만 한 소고기를 세 쪽씩 가는 나무에 끼워 집집이 나누어 주었다.
40여 년 전 경지정리 전에는 동네마다 농수로를 만드는 데 힘을 모았다. 농사를 지으려면 물이 정말 중요한데, 조리읍은 공릉천이 있어서 다른 지역보다는 그나마 좀 나았다. 그러나 농사라는 것이 물이 필요할 때는 다른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라 물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고양시 내유리 위쪽에 보를 쌓고 물을 막아, 논 사이사이로 흐를 수 있게 물길을 냈다. 장정들의 수고는 가을걷이 후 수세를 걷어 마을 경비로 사용했는데, 대원리는 지영리와 설문리까지 수세를 받아 부유했다. 마을에선 그렇게 모인 돈으로 ‘보명고등공민학교’를 세웠다.
당시 문교부 인가를 받은 중등과정의 교육 시설이었다. 허름했던 건물은 6·25전쟁이 끝나고 미군의 원조를 받아 네 칸으로 확장해 지어 운영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몇 년 지나 없어졌다.
내 땅에 농사짓기
밥은 굶어도 ‘상환’은 했다. 그래야 내 땅이 되니까 죽기 살기로 갚았다. 농지개혁이 있기 전, 대원리 벌판 대부분은 두 사람이 지주였고 일반인들은 거의 소작농이었다. 내 땅을 갖게 된다는 소망 하나로 버틴 세월이다.
당시 전국 농토의 65% 이상이 소작지였는데, 가혹한 소작료로 인해 빈곤이 악순환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불합리하게 일본인 소유가 된 땅 등을 환수해 민주국가 건설의 토대가 되게 하고, 토지소유권을 경작자에게 넘겨 경작인을 보호하려는 조치였다. 덕분에 지금은 내 명의로 된 땅에다 맘 편히 씨뿌리고 거둔다.
소리로 나눔 봉사
어려서부터 소리를 잘했다. 어르신들이 술 한잔하시면 불러보라고 했는데 곧잘 불러서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정식으로 배운 적 없어도 어려서부터 들어서인지 상엿소리와 달구질 소리 등을 할 줄 알아서, 마을에 초상이 나면 마을 일이니까 당연한 마음으로 다녔다. 지난 번에 소리 하는 걸 들었다며 두건(頭巾)을 쓰고 달려와 상엿소리를 맡아달라는 이들도 있었다. 사람을 가려서 가는 건 아닌데, 직장에 빠질 수가 없어 못 간 일을 아직도 서운타 하는 이도 있다.
요즘은 요양원 몇 곳과 경로당으로 소리 봉사를 다닌다. 술이홀예술봉사단과 함께 하거나 으름나무 봉사단과 가는데 유행가들 속에 양념처럼 경복궁타령, 창부타령, 달 타령 등 노랫가락을 들려드리면 좋아한다. 바빠서 몇 번 빠졌더니 “왜 안 오냐고” 하신다기에 또 길을 나선다.
함께 한 지 50년이 넘은 아내는 말이 별로 없다. 흔히 말하는 바가지도 없었고, 남 나쁘다 소리를 한 적도 없고, 아이들 키우면서도 그랬다. 수더분한 성격이어서 주변 사람들과 별 탈 없이 지냈고 지금도 늘 함께여서 고맙다
.
고수가 이쁘게 자란다고 했더니, 100명이 먹어도 남을 만큼 뽑아주신다. 아직도 남아 있는 넉넉한 시골 인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