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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 및 직무 | 인명 | 시상 내역 |
內外各營都領宿衛, 訓練大將 | 洪國榮 | 鞍具馬 1匹 |
守禦使 | 徐命膺 | 熟馬 1필 |
守禦前營將, 廣州府尹 | 宋煥億 | 大虎皮 1令 |
晝夜試閱時 兵曹判書 | 鄭尙淳 | 半熟馬 1필 |
壇上執事 宣傳官 | 申應周 외 3인 | 兒馬 1필 |
訓練都監 御前待令敎鍊官 | 金鼎澤 | 加資, 邊將 임명 |
京畿監司 | 鄭昌聖 | 大虎皮 1令 |
兩陵地方官 前驪州牧使 | 朴師崙 | 熟馬 1필 |
駕前八把驛人 | 다수 | 本寺에서 시상 |
정조는 능행에 참여한 軍官들을 포상했는데, 남한산성에서 국왕의 질문에 응대를 잘한 山城敎鍊官 延德雨를 특별히 邊將에 임명하도록 했다. 정조는 능행이 진행되던 중에 행차를 수행한 군병들에게 別試射를 시행하여 발탁하라고 했는데, 능행이 끝난 뒤에는 武臣 가운데 직임이 있던 사람과 장교들도 별시사 응시자에 추가되었다.
정조는 능행 지역에 있던 왕실 가족과 공신에 墓所에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를 올리게 했다. 여주에는 淑敬公主와 興平尉, 金昌集의 묘가 있었는데 지방관이 제사를 지내고, 광주에 있는 淑靜公主와 東平尉, 明安公主와 海昌尉의 묘에는 지방관이, 永昌大君, 明善公主, 明惠公主의 묘에는 내시가 제사를 올리게 했다.
정조는 또한 이 때의 행사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행차를 수행한 장군 및 군사의 이름과 숫자, 연로의 사실 등을 갖추어 기록한 陪從錄과 남한산성의 故事를 분류한 南漢山城誌를 작성해 올리라고 명령했다. 이를 담당한 관리는 수어사 서명응이었다. 정조의 능행은 기념 비석을 세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8월 24일, 정조는 서명응을 만난 자리에서 이 일을 의논했다.
이번 남한산성에 행행할 때에 글을 남기려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詩文을 쓰는 것은 긴요하지 않은 일인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산성의 동문과 남문 밖에 비석을 세우고 ‘己亥駐蹕’이라고 적는 것이 무방할 것 같은데 경(서명응)의 생각은 어떤가?
서명응은 이에 동의했고, 남한산성의 東門과 南門 밖에 ‘己亥駐蹕’이란 御筆을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3. 능행 중의 조치
1) 老論 山林의 초빙
정조는 노론 山林 두 사람을 초빙하기 위해 노력했다. 宋德相(1710~1783)과 金亮行(1715∼1779)이 그 주인공인데, 송덕상은 회덕 출신으로 宋時烈의 玄孫이었고, 김양행은 여주 출신으로 金壽恒의 曾孫이었다. 그런데 송덕상은 정조 초년에 홍국영의 지원을 받아 조정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초빙 대상은 김양행이었다. 정조는 능행 준비가 진행되던 중에 송덕상을 불러 이번에 김양행을 만나기를 희망했다.
두 儒賢이 함께 陵所에 간다면 또한 훌륭한 일이다. 先正(송시열)의 시 중에 ‘어느 곳에서 무릎을 꿇고 진달할지 모르겠네(不知何處跪陳辭)’라는 구절이 있는데, 올해 경(송덕상)이 능소에 참배하게 되었으니, 이 일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송덕상은 이 자리에서 寧陵 제향에서 사용할 祝文에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말 것을 건의했고, 정조는 이를 흔쾌히 수용했다. 효종의 對明義理를 고려해서였다.
효종대왕께서는 일찍이 ‘忍痛含寃’ 네 글자를 잊은 적이 없어, 저 나라를 항상 ‘오랑캐 나라[虜國]’라 칭하셨습니다. 그런데 本陵에 祭享할 때의 축문에 저 나라의 연호를 사용했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온당치 못한 것 같습니다. 年月과 干支만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정조가 김양행을 처음 본 것은 8월 4일이었다. 행렬이 여주에 들어섰을 때 김양행이 동구 밖에 나와 국왕을 맞이했는데, 정조가 지나가면서 얼핏 그를 보았던 것이다. 이튿날, 정조는 김양행을 이조참의에 임명하고 불렀지만, 김양행은 해직된 다음에 나오겠다고 답했다. 정조는 김양행을 이조참의에서 해임한 다음에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8월 6일, 정조는 여주 행궁에서 김양행을 만났다. 오랜 기다림 끝에 김양행을 만난 정조는 그 기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卿(김양행)을 한번 보려고 하는 나의 마음은 목마를 때 물마시기를 생각하는 정도를 넘어서, 이전에도 정성을 들여 부른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나의 성의가 부족하여 경이 나를 멀리하는 마음을 돌리지 못했는데, 이제 여기에서 서로 만나게 되니 나의 기쁜 마음을 어찌 말로 형용하겠는가? 당초 이조참의에 제수한 것은 나에게 다른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경이 간절히 사양했기 때문에, 해임을 허락하여 경의 마음을 편히 하고 나오는 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경(김양행)은 山林의 宿德이 있는 현자로 泰山北斗와 같은 명망이 있다. 내가 왕위를 계승한 뒤 맨 먼저 불러 隱士에 대한 聘禮를 부지런히 했지만 賢士의 수레를 돌리지 못했는데, 이는 나의 정성과 예우가 부족하여 감동시키지 못한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마음에 부끄러움만 절실했는데, 이제 능에 展謁하는 행차가 현자가 사는 마을을 지나게 되었으므로, 이로 인해 서로 만나기를 바랐다. 다행히 나를 멀리하지 않고 생각을 바꾸어 登對했으니, 바라고 기다리던 끝에 위로가 된다. 이제 서로 만났으므로 계속 자주 만날 수 있겠지만, 車駕가 돌아갈 때 함께 가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정조는 김양행이 송덕상처럼 경연에서 자문해 줄 것을 요청했고, 김양행은 쇠약해진 몸을 치료한 후 上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정조는 김양행과 송덕상에게 음식물과 땔감을 보내고, 御醫를 파견하거나 藥物을 보내는 등, 산림을 초빙하는 국왕으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또한 정조는 김양행에게 召對에서 강의할 책자를 문의했고, 김양행은 송시열의 節酌通編을 추천했다.
9월 8일, 정조는 경연에서 김양행을 만났다. 정조는 경연관 김양행에게 정치와 학문하는 방도를 물었다.
驪江 가에서 잠시 보았지만 행사가 바쁘고 번잡하여 정치와 학문하는 방도를 자세히 물어보지 못해 지금까지도 마음에 한탄스럽다. 지금 다행히 차분하게 召對에 나와 목마른 듯했던 뜻에 부응해 주니, 실로 기쁜 마음 가득하다.
정조의 물음에 화답하여 김양행은 涵養의 공부에 힘쓸 것과 人心을 안정시킬 방안을 강구할 것을 건의했고, 정조는 이를 수용했다.
臣이 선포하신 綸音을 보면 정중하게 읽어보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만, 구구하고 어리석은 생각으로 볼 때, 명령하시는 사이에 혹 급작스럽게 하는 부분이 없지 않으십니다. 이는 涵養의 공부가 독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亂逆의 변고가 매년 거듭 발생하여 大族들이 많이 상하고 人心이 안정되지 않고 있으니, 위에서 진정시켜 안도하게 할 방안을 좀 생각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 날, 김양행은 元에 벼슬하여 義理를 저버린 許衡을 文廟에서 黜享할 것, 文廟의 祝辭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말 것, 사치 풍조를 경계할 것, 역적의 처벌을 마무리 할 것 등을 건의했다. 그러나 정조로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 많았다. 가령 허형을 문묘에서 출향하는 것은 송시열도 주장했었는데, 정조는 허형을 문묘에 배향한 것이 明나라이고 숙종 대에도 이 문제가 거론되었지만 그대로 두었던 점을 들어 거절했다.
우리나라가 한결같이 中華의 제도를 따랐는데, 許衡의 配享은 明나라 때부터 해 온 것이다. 지금 갑자기 출향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이 없진 않겠지만, 이는 先正(송시열)이 미처 하지 못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許衡은 宋나라 때 진사가 되었다가 오랑캐 元에게 몸을 허락한데 지나지 않았으니, 그 처신을 잘못했다고는 할 수 있어도 節義를 잃었다고 배척하는 것은 지나치다. 만약 머리를 풀고 옷섶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의 습속을 따랐던 것을 허물로 삼는다면, 그 당시 온 천하에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므로, 이를 가지고 허형 만의 죄라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肅廟 때 朴泰輔 등이 급한 일이 아니라 하여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이다.
얼마 후 이조판서 송덕상과 공조참의 김양행은 사직을 했으며, 정조는 이들을 다시 초빙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김양행은 노론계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한 상소를 올렸지만, 역시 정조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안이었다. 김양행은 그 해 11월에 사망했고, 정조와의 직접 대면은 두 번으로 끝났다.
2) 儒生과 武士의 선발
정조는 광주, 이천, 여주 지역에 거주하는 유생과 무사를 선발하는 別試를 실시했다. 국왕의 행차가 지나가는 지역에 거주하는 유생과 무사들의 士氣를 고양시키려는 조치였다.
문무과 별시는 8월 8일에 남한산성 연병관에서 진행되었다. 먼저 문과의 試官은 徐命善, 李徽之, 金華國, 洪國榮, 兪彦鎬, 李性源이 讀券官을 맡고, 林鼎遠, 洪樂彬, 尹行修, 柳孟陽, 朴祐源, 李度黙, 金宇鎭, 趙時偉, 沈樂銖, 李夔, 睦萬中이 對獨官을 담당했다. 이 날 시험장에 들어와 응시한 유생의 숫자는 800명을 넘었고, 이들이 바친 試券의 양은 수레로 5𨋀이었다. 시권을 채점한 결과 閔泰爀, 黃仁炫, 尹永儀 등 3人이 선발되었는데, 帳籍을 확인한 결과 윤영의는 廣州 유생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 실격 처리하고 중벌을 내렸다.
무과는 初試와 本試로 구분되어 시행되었다. 무과 초시는 7월 17일 남한산성에서 수어사가 주관했는데, 응시 자격을 갖추려고 호적을 위조하는 폐단을 막기 위해 나중에 單子를 올린 사람은 제외시켰다. 무과 본시는 문과와 함께 8월 8일에 거행되었다. 이 날의 試官은 徐命膺, 鄭尙淳, 李柱國이 參考官을, 申應周, 尹行元, 吳毅尙이 參試官을 담당했고, 시험을 치른 결과 李尙淵 등 15인의 무사가 선발되었다.
무과 별시는 광주, 여주, 이천에 거주하는 무사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능행에 참여한 장교와 병사들을 위해서는 別試射를 시행했다. 먼저 남한산성 훈련에 참가한 수어청 장교와 병사에게 觀武才 시험을 보였는데, 장교의 경우 柳葉箭에서 貫 1발, 帿箭에서 貫 1발을 1技로 하고, 병사는 鳥銃에서 貫 1발, 柳葉箭에서 貫 1발을 1技로 하도록 했다. 그 결과 유엽전 1巡에 邊 3발을 맞춘 守堞軍官 陳儀行과 金碩官에게 直赴殿試의 혜택을 주었다. 또한 별시사에서 떨어진 수어청의 장교와 병사들은 능행에 참여한 사람들이 응시하는 鍊戎臺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능행에 참여한 장교와 병사들을 위해서는 湯春臺 별시사가 있었다. 정조는 이들이 밤낮을 통틀어 16일간이나 고생한 점을 위로하며 별시사를 거행하도록 했는데, 장교는 柳葉箭와 騎蒭를 각 1巡하고, 병사는 鳥銃 1巡을 쏘아 1발 이상을 명중하면 시상하게 했다. 또한 각 營門의 初試에서는 장교의 경우 유엽전과 기추 1순에 2발 이상, 병사는 조총 1순에 2발 이상을 맞춘 사람을 선발하게 했는데, 뒤에 ‘二中’을 ‘二分’으로 수정하여 1발 이상을 명중시키면 會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정조는 탕춘대 별시사를 직접 참관하여 능행에서의 수고로움을 위로했다.
3) 民弊의 제거와 세금 경감
정조가 가장 많은 신경을 쓴 것을 民弊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국왕이 궁궐에 앉아 아무리 爲民정치를 펼쳐도 백성들에게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지 못하다가, 능행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정조는 능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민폐를 제거할 것을 천명했다.
정조 : “이번 능행에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 과연 많겠는가?”
좌의정(서명선) : “外邑의 민폐는 거의 모두 제거될 것입니다.”
정조는 한강 양쪽에 몰려든 백성을 보았고, 민생을 안정시킬 방안을 걱정했다.
산에 가득한 백성과 온 들판에 펼쳐진 곡식은 매우 완상할 만하다. 다행히 농사가 풍년이 된 것은 실로 皇天이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이지, 不德한 내가 혹시라도 이것을 이루었겠는가? 새해에도 거듭 풍년이 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구경하는 백성들은 담장을 두른 것 같아 億萬으로도 헤아릴 수 없으니, 노인을 부축하거나 어린아이를 데리고 길을 메우고 막아 가득 찼다. 내가 오늘 이곳에 와서 이 백성들을 대하니, 한결같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한사람이라도 자기 자리를 얻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할 방도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믿는 것은 경들이 협력하여 보좌하는 功에 있다.
능행 첫날, 정조는 고위 관리들(영의정, 좌의정, 수어사)에게 백성들의 어려움을 말하게 했다. 국왕의 행차를 ‘行幸’이라 하는 것은 본래 백성들에게 은택이 있기 때문인데, 이 말의 본뜻을 실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車駕가 행차하는 것을 ‘行幸’이라 하는 것은 백성이 거가의 행차를 다행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거가가 이르는 곳에는 반드시 백성에게 은택이 미치므로, 백성들이 모두 이것을 다행으로 여겨서 그런 것이다. 이제 나의 거가가 이곳에 이르렀으니, 저 백성들이 어찌 바라는 마음이 없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길 ‘행행의 의의를 실천한 다음에야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했으니, 경들은 백성을 편하게 하고 폐단을 바로잡을 방책을 생각해 각자 앞에서 진달하라.
정조는 관리들로부터 흡족한 답을 듣지 못했고, 경기감사(정창성)에게 民弊를 조사했다가 환궁할 때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다음날의 사정은 달랐다. 정조는 민심을 파악하기 위해 미리 암행어사로 파견해 두었던 史官(金勉柱)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번 車駕로 행행할 때 列邑에서 물자를 제공하고 백성들이 공역에 동원되는 과정에 필시 폐단이 많았을 것이지만, 九重宮闕이 깊어 알 길이 없다. 특별이 그대를 보내어 찾아 묻게 한 것은 이 때문이다. 暗行할 때 연도에서 듣고 본 것이 과연 어떠한가? 탐욕스런 관리와 교활한 아전이 권세에 의지하여 마구 침해하는 폐단이 없으며, 오막살이에 사는 백성들이 견디기 어려운 근심을 면할 수 있던가? 낱낱이 진달하라.
사관은 자신이 탐문했던 것을 보고했다. 양주목사(엄숙)는 刑杖을 지나치게 쓰고 이번 행차에 진배할 물건을 백성에게 강제로 징수한 뒤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는 것에서 시작하여, 양근현감(김재화), 과천현감(이의화), 여주목사(박사륜)의 비리가 보고되었다. 다만 음죽현감(이보첨)은 봄에 진휼할 때 굶주린 백성들에게 衙祿을 나눠주고, 부역이 편중되는 폐단을 제거했으며, 행차에 사용된 물건의 비용도 관에서 부담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사관의 보고는 대신들이 합석한 자리에서 다시 한번 있었고, 음죽현감은 熟馬 1필을 상으로 받은 반면에 비리가 알려진 지방관들은 파직되었다.
정조는 관리들에게 民弊를 물었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제 정조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려 했으며, 여주, 이천, 남한산성에서 백성들을 직접 만났다.
(여주 행궁에서) 너희들은 나의 어린 자식이고, 나는 너희들의 부모이다. 자식에게 고생스럽고 원망스런 일이 있는데 부모된 자가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여 구제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내가 여기에 와서 너희들을 만나 보았으므로, 너희들을 근심스럽게 하는 숨은 폐단이나 고질적 폐해가 있다면, 어렵게 여기지 말고 나에게 자세하게 진달하여라.
(이천 행궁에서) 나 과인이 너희들의 부모가 되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한결같이 생각하는 것은, 항상 사랑하고 기르는 도리를 다하지 못해 버려져 수척해지는 근심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늘 마음속에 염려되어 비단옷을 입고 맛난 음식을 먹어도 편안하지가 않다. 이제 輦이 지나는 곳에 너희들이 늙은이를 부축하거나 어린아이를 데리고 길가에 모여든 것을 보니, 갓난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에게 나아가는 것과 같다. 따라서 내 마음에 부족하고 부끄러움을 더욱 감당하지 못하겠다. 이번에 특별히 너희들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한 것은 고질적인 폐단을 물으려 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모두 진달하여라.
(남한산성 연병관에서) 남한산성 백성에 있어서는 그 노고가 다른 읍에 비해 더욱 심하니 가엾고 불쌍하다. 너희들의 근심과 고생의 단서가 되는 고질적인 폐단이 있으면, 반드시 앞에서 다 아뢰어 빠뜨리는 것이 없게 하라. 내가 廟堂의 신하와 수령으로 하여금 바로잡고 개혁할 방도를 강구하여 진휼하는 정사를 시행할 것이니, 너희들은 그리 알아라.
국왕의 말을 들은 백성들은 몹시 감격하면서도 직접 폐해를 말하지는 않았다. 경기감사와 지방수령이 함께 한 자리라 그들의 잘못을 말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백성들을 직접 만나 자기 뜻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으리라 짐작된다. 정조는 자신이 방문한 3개 읍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혜택을 주었다.
1) 3개 읍 사람들에게 과거를 실시함
2) 3개 읍 백성들에게 금년 가을 세금을 면제함. 儲置米를 會減하고 가을 大同米를 덜어줌
3) 3개 읍의 士庶人으로 70세 이상인 사람에게 음식과 고기를 하사함
4) 3개 읍의 士庶人으로 80세 이상이고 行幸을 2번 경험한 사람에게는 한 資級을 더해줌
5) 卿宰를 역임했고 70세 이상인 사람에게 음식물을 하사함
정조의 다그침이 계속되면서 민폐를 보고하는 관리도 나타났다. 경기감사와 이천현감(이단회)은 原田을 續田을 포함시켰다가 災荒이 든 해에 조세를 면제해 달라는 것과 이천 백성들이 광주의 移轉米를 빌렸다가 납부하는 장소를 남한산성 대신 이천으로 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물론 정조는 이 요청을 수락했고, 은혜를 공평히 한다는 차원에서 여주 지역의 이전미도 남한산성 대신 이천에 납부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정조는 남한산성의 백성을 위해 별도의 조치를 했다. 保恤錢의 債錢을 전부 탕감해 주었는데, 이는 경상비용의 축소를 감수해야 하는 특별한 조치였다. 정조는 남한산성의 父老들을 불러 탕감 조치를 직접 통보하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20년간 쌓인 債錢文券을 쌓아놓고 불살라 버렸다. 이 광경을 지켜본 백성들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정조는 능행길에 上言과 擊錚도 받아들였다. 정조는 국왕이 행차할 때 衛外에서 격쟁을 하는 것을 허용하고 상언과 격쟁에 民隱을 올리게 했는데, 1779년의 행차에서 이를 시행했다. 정조는 여주 寧陵을 참배한 이후 왕릉 입구에서 서울의 흥인문에 이르기까지 상언을 받아들이라고 명령했고, 이후 상언과 격쟁이 접수되었다. 격쟁 중에 특이한 경우도 있었다. 행렬이 살곶이 앞길에 이르렀을 때 어린 아이가 격쟁을 하며 원통함을 호소하자, 정조는 행렬을 멈추고 그의 호소를 들었다.
제 나이는 11세이고, 제 아비 金宗孝가 지극히 원통한 일로 유배를 당한지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풀려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정을 드러낼 수 없어 원통함이 뼛속에 사무치기에, 외람됨과 두려움을 잊고 만번 죽을 각오를 하고 격쟁했습니다.
이는 돈을 사사로이 주조했다는 죄명으로 위원군에 유배되어 있던 김종효를 풀어달라는 호소였다. 정조는 그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너의 행동을 보고 네 사정을 들으니 불쌍하고 가엾다. 이는 조정에서 마땅히 처분할 것이므로 너는 물러가 기다리도록 하여라.
능행에서 돌아온 후 정조는 행차 중에 받은 上言을 담당 관서에서 기한 안에 모두 처리하게 했다. 그러나 상언과 격쟁에서 받은 供招의 숫자가 너무 적은 것을 이상하게 여긴 정조가 승정원에 그 까닭을 묻는 것으로 보아, 상언과 격쟁이 활성화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4. 능행의 의의
1) 국왕의 통치력 과시
1779년의 능행에서 정조는 자신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음을 과시하고자 했다. 먼저, 정조는 자신이 선왕으로부터 이어진 정통성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행차가 출발하려 할 때 정조는 군대를 동원할 때 사용하는 信箭을 내주며, 자신의 信箭이 명에서 조선으로, 영조에서 자신으로 이어진 것임을 강조했다.
이 信箭은 예전의 이른바 彤弓(붉은 색의 활)과 彤示(붉은 색의 화살)이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皇朝에서 九章의 복식과 九錫의 은전을 받았는데, 이 신전도 하사받은 것이다. 내가 政務를 보던 초기에 선대왕(영조)께서 이것을 나에게 내려주셨는데, 이것은 궁중에 전해오던 물건이다. 옛적부터 매양 군사가 움직일 때가 되면 반드시 車駕 앞에 이 신전을 세웠는데, 오직 정벌의 뜻이다.
정조는 효종과 세종의 왕릉을 참배하고 나서, 세종, 효종, 숙종, 영조의 사업을 繼述할 책무가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했다.
英廟(세종)와 孝廟(효종)의 盛德과 大業을 어찌 감히 형용하여 말할 수 있으랴마는, 오늘에 있어 繼述하는 방안은 바로 왕위를 계승한 나 小子의 책임이다. 내가 오늘 두 능을 전배하고 추모하는 가운데,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더욱 절실했다.
우리 肅祖와 英考께서 孝廟의 포부를 추모하고 중국(明)의 멸망을 통탄하여 繼述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으셨으니, 이는 왕위를 계승한 내가 법도로 삼을 만하다. 부덕한 내가 만에 하나라도 聖祖의 聖德과 방불하기를 바라겠는가마는, 구구하게 스스로 힘쓰는 마음만은 선조의 뜻을 이어 계술하고 훌륭한 뜻을 실추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계술을 잘 하는 방법은 참된 마음으로 政事를 행하여 실제 효과를 얻는데 달려 있다.
숙종대왕께서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다면 살갗인들 아끼겠는가’라 하셨고, 선대왕(영조)께서 늘 이 하교를 絲綸에서 일컬었는데, 나 小子가 곁에서 듣고 지금까지 마음속에 엄숙히 새기고 있다. 내가 왕위를 계승한 이후 늘 두 聖朝의 덕을 생각하여 우러러 체득할 방도를 생각했는데, 백성에게 편리하고 이로운 일이라면 어찌 살갗을 아끼지 않을 뿐이겠는가? 약간의 國用이 축소되는 것이야 어찌 돌아보겠는가?
이외에도 정조는 능행을 하는 동안 선왕 때의 관례를 실천함으로써, 선대에서 이어지는 정통성을 중시했다. 왕위의 계승성을 중시한 정조는 軍令을 확립함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다. 능행을 출발하기 직전, 정조는 병조판서(정상순)와 훈련대장(홍국영)을 불러 능행 중에 군령을 엄격하게 할 것을 당부했다.
이번 行幸은 길이 매우 멀어 가까운 능에 動駕하는 것에 견줄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文治를 숭상하고 武備를 닦지 않아, 사람들은 병사 일에 익숙하지 않고 병사는 조련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行軍할 때마다 비록 1舍(30里)의 거리라도 달리면 다들 숨이 차서 진정하지 못하는데, 장수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군병들도 예사로 여긴다. 하물며 훈련대장은 三軍의 司命이고, 元戎(병조판서)은 국가의 重任임에랴.
예전 唐나라 玄宗의 開元 초기에 驪山에서 講武할 때 군법이 威儀를 잃자 병부상서 郭元振을 처벌한 것을 史家들은 지금까지도 일컫는다. 이 하교는 군대에 誓戒하는 것과 같으므로 훈련대장은 힘쓰라. 車駕를 扈從하는 일과 衛內를 돌며 경계를 서는 것은 本兵의 임무이므로 병조판서도 힘쓰라.
정조의 다짐은 현장에서도 확인되었다. 정조는 가랑비가 내리는데 雨傘을 대령하지 않은 京畿都事, 행군할 때 제대로 이동하지 않은 啓螺・招搖旗의 次知宣傳官을 문책했고, 한강을 건널 때 放砲를 잘못한 책임을 물어 어영대장(李敬懋)을 삭직시켰다. 또한 英陵을 참배할 때 作門을 信地에 설치하라고 명령했는데,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훈련도감의 中軍을 문책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천에서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도중, 왕명을 받아 信箭을 가지고 간 宣傳官이 中營(홍국영)에서 차단당하고, 말을 갈아타려는 선전관을 具敏和의 종이 밀어서 신전을 부러뜨린 사건이었다. 더구나 왕명을 받은 선전관은 中營에서 차단당했는데, 중영의 교련관은 武藝別監이 파수하는 衛內를 무단으로 지나가자, 정조는 무엄함을 느꼈다. 이에 정조는 중영의 지휘 책임자인 홍국영을 문책하고, 신전을 부러뜨린 구민하의 종은 棍杖 15대를 치고 구민화를 김제군으로 유배시켰다.
정조는 각종 典故 및 지리에 해박한 지식을 보임으로써 정국을 실질적으로 운영할 능력을 있음을 보여주었다. 정조는 1768년(영조 44)에 영조를 수행하여 獻陵에 간적이 있었는데, 그 때 廣津를 건넌 경험이 이번 능행에 도움이 되었다. 정조는 여주의 邑誌를 통해 여주부의 연혁을 파악하고, 東國與地勝覽을 통해 신륵사의 甓浮圖를 알았다. 또한 정조는 영릉을 참배한 날 여주 淸心樓에 숙박할 것을 결정했는데, 이는 承政院日記을 통해 1688년(숙종 14)과 1730년(영조 6)의 여주 능행을 검토한 이후 내린 결정이었다. 정조는 여주에서 숙박하지 않고 이천까지 갔더라면, 한밤중에 백성들이 횃불을 들고 50여리의 길을 밝혀야 했을 것이라 했다.
지방 지리에 대한 정조의 관심은 능행 이후로도 이어졌다. 정조는 서명응에게 南漢山城誌의 편찬을 명하는 자리에서 安鼎福이 작성한 廣州誌가 상세하다는 소식을 듣자, 이 책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정조는 자신이 이르는 곳마다 해당 지역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여, 응대하는 신료들이 긴장할 정도였다.
2) 對明義理論의 확인과 老論 우대
정조의 능행은 병자호란 때 청에 항복했던 남한산성을 방문하고 120주기를 맞은 효종의 영릉을 방문하는 행사였다. 따라서 정조는 효종과 송시열을 추모하고 조선의 대명의리론을 재확인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1779년 정초, 정조는 宋德相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성 안의 宣武祠와 남한산성의 顯節祠, 강화도의 忠烈祠에 관원을 보내 제사를 올렸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한 명나라 병사, 청에 항거하다 죽임을 당한 三學士, 병자호란 때 순사한 金尙容을 모신 사당으로 조선의 대명의리론을 상징하는 제사 공간이었다. 정조는 능행 중에도 현절사에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기로 했는데, 이는 삼학사들의 忠節을 장려하기 위해서였다. 남한산성에 도착한 날, 정조는 조선의 대명의리론을 거론하며 효종과 송시열을 떠올렸다.
병자년(1636)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君臣 모두가 어찌 이처럼 태연하게 지내며 치욕을 씻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日暮途遠)’고 한 것은 聖祖(효종)께서 조정에서 탄식하신 것이고, ‘關門을 닫아버리고 조약을 거절하는 것(閉關絶約)’은 先正(송시열)이 상소에서 여러 차례 진달한 말이다.
우리나라는 작은 鰈域인데도 禮義의 방도를 대강 알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中華’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지금은 人心이 점차 안일함에 젖어들고 大義는 갈수록 자취를 감추어, 북으로 가는 폐백(朝貢)을 예사로 여기고 수치스러워 하지도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漢官의 威儀를 다시 볼 수 없고, 神州(중국)의 더러운 오랑캐를 다시 제거할 수도 없다. 다만 北苑의 작은 단(大報壇)에 예물을 바치는 정성을 붙임에, 大明의 日月이 한 구역의 나라(조선)를 비출 뿐이니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이다. 하물며 이 해를 만나 孝廟께서 이루지 못한 뜻을 우러러 생각함에 강개하고 격앙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겠다.
정조는 조선이 北伐을 통해 청을 몰아낼 능력을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大報壇 祭享을 통해 대명의리론을 유지함을 피력하고, 청에 조공을 바치는 것을 당연시하는 당대의 풍조를 비판했다. 또한 정조는 여주 행궁의 청심루에 올라 송시열을 추모했다. 청심루의 편액은 바로 송시열의 글씨였다.
오늘 두 능을 전배하니 내 마음 실로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다. 지금 이곳에서 강 건너 서쪽을 바라보니, 仙寢의 松柏이 무성하게 바라보인다. 내가 宋先正(송시열)의 詩 가운데 ‘한참 앉았으매 달이 지자 능의 잣나무 어두워지니, 어느 곳에 무릎 꿇고 진달할지 모르겠네(坐久月沈陵柏暗 不知何處跪陳辭)라는 구절을 욀 때마다,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효종과 송시열의 知遇, 그들의 대명의리론을 떠올린 정조는 송시열을 현창하는 사업을 허락했다. 여주에는 효종의 영릉이 있고 송시열이 만년에 소요했던 곳이므로 이곳에 송시열의 祠宇를 건립하도록 한 것이다. 정조가 사우의 건설을 허락한 것은 국왕이 된 이후 최초의 일이었다. 또한 정조는 병자호란 이후 斥和하고 死節한 사람의 자손으로 여주에 거주하던 副司直 洪秉纘, 司果 洪秉殷 등 9명을 만나보기도 했다. 여주와 대명의리론을 연결시키는 상징적 만남이었다. 정조가 송시열을 현창한 것은 국왕이 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1774년(영조 50)에 세손 정조가 편찬한 兩賢傳心錄이 그것인데, 정조는 서문에서 유학의 정통이 공자→주자→송시열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천도에 순환하는 이치가 있어 국가의 운세가 크게 밝아지는 시기에 이르렀다. 우리 조선에 尤庵 宋선생이 나타나자 인륜이 밝아지고 천리가 확고히 섰으니, 그가 지킨 것은 주자의 大義이고, 그가 가르친 것은 주자의 大道이다. 주자가 떠나간 후 다시 주자가 태어난 셈이니, 훤히 빛나는 저 물속의 달도 바로 하늘에 떠있는 달과 동일한 빛인 것이다.
정조는 국왕이 된 이후에도 송시열에 대한 평가를 높여 나갔다. 1776년(정조 즉위년) 5월에 정조는 송시열을 효종의 공신으로 종묘에 배향했고, 10월에는 승지 金鍾秀를 화양동에 파견하여 萬東廟에 어필 현판을 걸게 했다. 1779년 능행이 끝난 후에는 송시열의 墓碑銘을 짓고 大字 어필을 썼으며, 1785년에 여주에 서원을 세우고 ‘大老祠’란 賜額을 내렸다. 1787년(정조 11) 9월, 정조는 평양감영에서 宋子大全을 간행하게 했고, 10월에는 大老祠 廟庭碑文을 짓고 ‘大老祠碑’의 大字와 본문을 어필로 써서 내렸다. 1787년 11월 12일, 정조는 대로사에 香祝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이 날은 송시열이 탄생한지 3周甲이 되는 날이었다. 대명의리론을 강조하고 송시열을 현창하는 정조의 조치는 노론 산림의 초빙으로 이어졌다.
앞서 보았듯이 정조는 노론 산림인 송덕상과 김양행을 초빙하기 위해 禮를 갖추었고, 자신의 정국 운영에 대한 자문을 들으려 했다. 그러나 정조의 노론 산림의 대한 우대는 형식적인 측면이 많았는데, 이는 산림들의 건의에 대한 대응 조치를 보면 잘 나타난다. 다음은 송덕상과 김양행이 정조에게 건의한 내용과 정조의 조치를 정리한 것이다.
1. 寧陵에 祭享할 때 祝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말 것(송덕상)→수용
2. 文廟의 祝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말 것(송덕상, 김양행)→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거절
3. 과거제도와 토지제도에 대한 건의(송덕상)→廟堂에 의논하게 했으나 대책 없음
4. 臨漳書院에 송시열 배향, 安東 鶴駕山에 金尙憲의 서원 세울 것 건의(송덕상)→여주의 송시열과 다르다는 취지에서 거절
5. 宋의 유민으로 元에 벼슬한 許衡을 文廟 配享에서 黜享할 것(송덕상, 김양행)→영조대의 정책을 내세워 거절
6. 洪樂任을 비롯한 역적의 懲討를 마무리할 것(김양행)→慈宮을 거론하며 완곡한 거절
7. 朴世采를 문묘 종사에서 내칠 것(김양행)→영조의 禁典을 들어 거절
8. 南九萬, 尹趾完, 崔錫鼎을 肅宗 공신에서 黜享할 것(김양행)→영조의 敎示를 들어 거절
이를 보면 노론 산림들은 대명의리론을 실천하고 노론계의 명분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중에서 許衡의 黜享과 박세채 건은 송시열이 추진한 적이 있었고, 文廟의 축문에 관한 건은 金壽興이 요청했다는 명분도 있는 사안이었는데, 정조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조가 송시열을 현창하고 노론 산림을 초빙한 것은 집권 기반이 취약했던 초기 정국에서 가장 유력한 정치세력이던 노론계를 위무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강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정조의 이러한 의도는 훗날 나타나는데, 노론계의 명분을 견지하면서도 홍국영의 권세를 무시했던 김양행이 사망했을 때는 산림의 禮葬을 거행하게 했으나, 홍국영의 권세에 합류하여 왕권에 도전했던 송덕상에 대해서는 강한 비판을 했다.
‘선비를 숭상하고 도를 중하게 여기는[崇儒重道]’ 네 글자는 우리 조정의 법으로 列聖들이 서로 계승하여 교화와 정치가 아름답고 밝았다. (중략) 그런데 송덕상은 先正(송시열)의 후손으로 선비라는 이름을 훔쳤기 때문에 朱色과 紫色을 분간하지 못했고, 잘못 그를 불렀다가 필경에는 여지없이 낭패를 당하고 말았으니, 통탄을 금할 수 있겠는가? 당초 그를 부른 의도는 그가 어진 이의 후손이었기 때문인데, 속이고 훔친 사실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있을까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조정에 나온 뒤에 비루하고 어긋난 양상이 하나도 남김없이 나왔으니 말하기에도 부끄럽다. 세력과 이익만 쫓아가고 권력있는 간사한 사람들과 체결하여, 안팎으로 내통하여 스스로 큰 죄에 빠지고 말았다. 그가 이처럼 빌붙고 돼지처럼 머뭇거리자, 사방에서 침을 뱉고 욕을 했다. 자신을 아꼈던 人士도 그와 함께 벼슬하기를 부끄러워했으니, 고 참판 金亮行이 결연히 물러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 누가 선비를 숭상하는 일이 도리어 도를 해치고 말 줄을 알았겠는가?
이상은 정조의 발언인데, 그는 국왕은 산림을 예우하고, 산림은 국왕에게 나와 원론적 건의를 함으로써 君臣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물러나기를 희망했음을 알 수 있다.
3) 남한산성의 육성
남한산성을 수축하자는 논의는 임진왜란이 마무리된 직후부터 시작되었는데, 宣祖는 廣州가 경기도의 巨鎭이고 南道를 왕래하는 요충지이므로, 수원의 독산산성처럼 남한산성을 쌓고 군대가 지키게 하면 서울을 보호하고 여러 陣들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일찍이 남한산성의 형세가 우리나라의 으뜸이라고 들었다. 廣州는 畿甸의 巨鎭으로 남도를 왕래하는데 있어 요충이 되는 곳이다. 만약 이곳에 산성을 수축한 다음 禿城처럼 군사를 조련하고 수령을 골라 지키게 한다면, 안으로는 京都의 保障이 되고, 밖으로는 諸陣을 控制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선조는 산성을 쌓을 곳의 지형도를 그려오게 했지만, 산성을 수축하지는 못했다. 남한산성이 수축된 것은 인조 대였다. 1624년(인조 2) 李曙의 지휘 아래 실제 공사는 승려 覺性이 八道都摠攝이 되어 진행했고, 1626년에 축성 공사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얼마 후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인조가 이곳에서 抗戰하다가 청에 항복하면서 남한산성은 대명의리론의 상징물이 되었다. 숙종대 이후 남한산성은 수리가 계속되었는데, 이곳은 도성의 남방 방어거점이었기 때문이다.
1779년 능행에서 정조는 7박 8일 가운데 4박 5일을 남한산성에서 보냈다. 영릉을 참배하기 위해 이동한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남한산성에서 보냈던 것이다. 정조가 남한산성에 행차한 목적은 수도를 방어하는 산성의 관리 상태를 확인하고 군사 조련을 참관하여 환난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이 우리 조정에 있어 긴요하고 중대한 것은 漢나라 三輔와 唐나라 兩衛와 같을 뿐만이 아니다. 태평한 날이 오래되어 軍務가 폐기되고 해이해져, 병사는 환난을 대비하기에 부족하고 성곽은 보루가 되기에 부족하다. 생각에 여기에 미치자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내가 왕릉을 전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여러 날의 수고로움을 피하지 않고, 반드시 조련하는 것을 직접 보려고 한 것이다. 이는 편안하고 즐거운데 길들여진 將卒들에게 떨치고 일어나는 부지런한 뜻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남한산성은 정조가 방문하기 직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하였다. 이는 수어사의 지휘 하에 1779년 3월부터 6월까지 진행되었는데, 정조는 남한산성이 수도의 保障處임을 강조하며 보수 공사의 유공자를 포상했다. 또한 남한산성의 서리들이 4천石이나 되는 곡식을 逋欠했을 때도 그 부담이 백성들에게 돌아가지 않게 하여 수도를 보위하는 백성들을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남한산성이 도성의 외곽 방어기지임을 거듭 확인한 것이다.
정조는 보수 공사가 끝난 남한산성에 행차하여 산성 곳곳을 둘러보며 현장을 확인했다. 이 때 정조는 사전 학습을 통해 남한산성 및 인근 지역의 연혁, 병자호란 당시의 戰況을 상세하게 파악하였는데, 이를 현장에서 확인하며 산성을 돌았다. 다음은 정조가 남한산성에 머무는 동안 남한산성, 수어청, 광주부에 관해 언급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는 신료들의 답변도 함께 정리했다.
1. 南漢山城
○ 南門 : 편액은 서명응 글씨. 병자호란 때 金瑬 등이 江都(강화도)로 옮길 것을 요청하여 聖祖(인조)가 밤에 南門을 나갔는데, 빙판 길에 길까지 험하여 말을 버리고 걷는 지경이 되자 어가를 돌려 성으로 돌아왔음. 당시 남문은 具宏이 지켰는데 싸워서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적이 많았음. 성 아래 골짜기에서는 鐵丸 箭鏃이 나오고 있음
○ 北門 : 병자호란 때 청나라 병사가 특히 많이 모여있던 곳. 金鎏가 성안에서 싸움을 독려하다가 적에게 속아 경솔하게 御營軍 300인을 이끌고 출병했다가 全軍이 패망하는 지경에 이름. 북문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음. 성 아래 산골짜기에서 전쟁에서 죽은 사람을 致祭함. 북문 밖 큰 길의 왼편은 金陽洞, 오른편은 馬跟洞이라 함
○ 行宮 正堂 :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행차했을 때 汗軍이 漢峯에서 대포를 쏘아 기둥을 맞춘 건물인가를 물음
○ 廣州府尹의 거처 : 여름에는 행궁 正堂에 거처하고 겨울에는 鍊兵館 안채로 옮겨 거처함
○ 溫祚王廟 : 西門 안에 위치. 병조호란 때 인조의 꿈에 溫祚王이 나타나 적병이 성에 오른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깨어나 정탐하게 하여 적을 물리침. 인조는 還都 후 溫祚廟를 세워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함
○ 顯節祠 : 東門 안에 위치. 병자호란 때 斥和臣인 金尙憲, 鄭蘊, 洪翼漢, 尹集, 吳達濟의 신위를 모심
○ 地水堂 : 사면에 池水가 있어 諸軍이 해갈할 수 있음. 1672년(현종 13)에 李世華가 건립. 周易 師卦의 “땅속의 물은 병사가 많다는 것이다. 노성한 사람이어야 길하다(地水師 大人吉之)”에서 뜻을 취한 것임
○ 人和館 : 客舍로 사용함. 목사 柳琳이 처음 지었고, 이름은 목사 李泰淵이 지어 건 것
○ 西將臺 : 병자호란 때 賊兵이 밤에 널빤지를 지고 성에 오르는 것을 보고 아군이 끓인 물을 부어 물리친 곳임
○ 南漢山城 : 성 안의 둘레가 6,297보, 성 밖의 둘레가 7,295보. 1624년(인조 2) 완풍부원군 李曙가 성을 쌓기 시작하여 1626년까지 쌓음. 영조 때 수어사 閔應洙가 성을 중수하면서 벽돌을 철거하고 기와를 덮었으며, 趙觀彬이 후임이 되어 성 쌓는 일을 마침. 이번에 서명응이 수리하면서 기와를 철거하고 벽돌을 덮음
○ 汗峯城 : 1693년(숙종 19) 수어사 吳時福이 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1705년(숙종 31) 수어사 閔鎭厚가 훼철했다가, 1739년(영조 15) 趙顯命이 개축함. 병자호란 때 청나라 사람이 봉우리에 올라 대포를 쏘았던 곳임. 병자호란 이전에 漢峯이라는 명칭이 있었음
○ 梨峴山 : 병자호란 때 金藎國, 鄭蘊 등이 400명의 군사로 이곳을 점거하여 三南과 연락하기를 청했지만 體察府에서 들어주지 않음. 적이 이곳을 점거하여 삼남과의 소식이 끊어짐. 산성에서 14里가 되며, 三南의 여러 길과 통함
○ 南格臺 : 이번에 수축함. 남한산성의 주봉이고 요해가 되는 곳. 남한산성과 상응하여 적을 견제하는 형세가 되며, 이곳에 오르면 남한산성 안의 형편을 굽어볼 수 있음. 閔鎭厚가 성을 쌓을 것을 건의했지만 중간에 폐기되었고, 1725년(영조 28)에 유수 李箕鎭이 筵席에서 건의하여 두 墩臺를 쌓음. 병자호란 때 일부 軍兵으로 이곳을 막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적이 이곳을 점거한 뒤 성안과 성밖의 소식이 단절됨. 溫祚王의 성터가 봉우리 위에 남아 있음
○ 黔丹山 : 성에서 15리가 됨. 병자호란 때 原州營將 權正吉에 勤王兵을 이끌고 여기에 이르렀으나 적에게 막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봉화를 올려 서로 응함. 성안 사람들이 바라보고 구원병이 있는 줄 알고 뛸 듯이 기뻐함○ 天柱寺 : 天柱峯 아래 숲 사이에 드러남
○ 國淸寺 : 서문 안에 있음. 1624년(인조 2) 覺性이 성을 쌓을 때 맨 먼저 두 절을 지어 國淸寺, 漢興寺라 함.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다가 병자호란 이후에 漢이 汗과 음이 같고, 金國이 이 해에 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을 깨달음
○ 枕戈亭 : 옛 軍器所 자리. 편액은 유수 이기진의 글씨. 1624년(인조 2) 完豊府院君 李曙가 성을 쌓을 때 이 정자를 찾아냈지만 연대를 알 수 없는데, 邑誌에는 溫祚王이 세운 것이라 기록함. 명의 副摠管 程龍이 벽에 난초 몇 떨기와 용을 그렸는데, 비가 내리려고 하면 그 사이에서 항상 구름이 나오고, 비가 내리기를 빌면 응험이 있었다고 함. 병자호란 때 청의 砲丸이 행궁으로 날아들자 인조가 이 정자로 옮김. 1688년(숙종 14)에 숙종이 행행했을 때에도 이곳에 들림
2. 守禦廳
○ 五營 : 左營 右營에는 別將을 두고 京營의 장관이 맡음, 前營은 廣州, 後營은 竹山, 中營은 楊州가 담당함
○ 軍摠 : 총 군총은 15,714명, 본영의 군총은 2,814명
○ 조련 장소 : 조련할 때 左營은 東將臺, 右營은 西將臺, 前營은 南將臺, 中營은 北將臺, 後營은 東將臺에 진을 쳐 성을 엄중히 경비함. 中將臺가 없는 것은 지형 때문임
○ 조련 방법 : 본영의 조련은 해마다 五營이 한 차례씩 輪操하고, 3년에 한번 五營이 合操를 함. 私操와 正操의 법은 1일째에 모이면, 2일째에 私操, 3일째에 正操, 4일째에 晝操와 夜操, 5일째에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고 활쏘기와 총쏘기 시험, 6일째에 훈련을 마치고 군병을 되돌려 보냄
○ 僧軍 :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쌓을 대부터 설치함, 당시 異僧 覺性을 팔도도총섭을 삼아 성을 쌓게 했다가 僧軍을 불러 모아 軍伍를 만들고 각 사찰에 나누어 살게 함
○ 屯田 : 총 29곳, 廣州 6, 果川 1, 龍仁 3, 陽智 1, 永平 1, 利川 1, 砥平 1, 原州 1, 洪川 1, 平澤 1, 忠州 1, 金海 1, 昌原 1, 扶安 1, 長興 1, 海州 1, 定州 1, 稷山 1, 振威 1, 永同 1, 載寧 1, 橫城 1. 재령 둔전은 1776년 서명선이 수어사로 있을 때 정조가 수어청 본청에 붙여주었으며, 둔전에서 나오는 세금이 1,000金을 넘어 둑을 막고 배를 띄우는 비용에 쓰임
○ 軍餉穀 : 청성부원군 金錫冑가 저장한 餉穀이 가장 많고, 京營의 別備는 판서 趙觀彬이 마련한 것. 환곡으로 사용하는 쌀이 25,040石, 나머지 각종 곡식 3만石을 합하여 57,790石이나 折米했으므로 44,800석에 불과함. 그 중 15,000석은 還穀으로 민간에 나누어 주고, 창고에 남은 것은 29,800石임
○ 軍餉 창고 : 稤倉, 僧倉, 松坡倉 3곳인데, 한 창고에 2천~5천石씩 비축함. 稤倉은 祭享 賑恤 人夫 刷馬의 삯이 나오는 것으로 잡곡을 합하여 4천석. 僧倉은 수어사 李世白이 공명첩으로 운영한 것으로 잡곡을 합하여 2천석이 있음
○ 수입 : 儲胥所 본전이 16,000兩인데 1761년(영조 37) 將臣의 요청으로 이자를 면제하고 내외 각 청에 빌려줌, 京營의 別備錢은 2,700냥이고 기타 7,000냥인데, 1년 경비를 제하면 수천냥에 불과함
3. 廣州府
○ 戶口 : 남한산성 안의 民戶는 1,114戶, 남자 2,041명 여자 2,300명임. 광주부 전체의 民戶는 10,663戶, 인구 48,018명임. 성안의 인구가 1천 호에 불과한 것은 성안의 지형이 본래 좁기 때문임
○ 忠臣 : 병자호란 때 徐欣男은 私奴였지만 단신으로 청나라 군사의 세 겹 포위를 뚫고 나가 三南에 명을 전했고, 孟元賓은 閑散人이었지만 인조가 행행했을 때 말을 바쳐 무사히 입성하게 했으며, 軍官 朴震龜는 金瑬에게 자신을 발탁할 것을 요청했지만 김류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함. 고려의 金邦慶, 趙狷이 이곳에서 나옴.
○ 창고 : 곡식창고 11곳, 무기창고 7곳
○ 田結 : 6,075결
○ 面 : 上道, 中道, 下道에 모두 23개면이 있음
○ 農土 : 四門 밖 두어 마장의 땅은 산이 평평하고 들이 없어 성안의 백성이 여기서 경작함. 동문 밖에 전답은 司饔院 柴場이었다가 효종 대에 수어사 李時昉의 요청으로 조세를 면제하고 성안의 民戶를 소속시켜 경작하게 함. 1738년(영조 14) 부윤 沈聖希가 다시 조세를 거두어 연말에 쌀 1말씩 성안 백성들에게 나누어 줌.
○ 還穀 : 1년에 나누어 주는 것이 15,000石
정조가 남한산성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는지는 다음 자료를 검토하면 잘 나타난다. 다음은 정조가 이천에 관해 언급한 사항을 정리한 것인데, 남한산성에 비해 관심의 정도가 훨씬 낮았음을 알 수 있다.
4. 利川縣
○ 戶口 : 5000여 호
○ 結數 : 3,042결
○ 楊根까지 거리 : 수십리
○ 都護府가 된 이유 : 토지가 비옥하고 백성이 많지만 廣州의 屬邑이 되었기 때문
○ 이천 지명의 유래 : 본래 南川縣이었는데, 고려 때 백성들이 太祖를 인도하여 건너가기 편리하게 해 주었기 때문에 ‘利’라는 지명을 하사함
○ 愛蓮亭 : 이천 행궁에 위치. 邑倅 李世珤가 정자를 처음 건립했고 申叔舟가 편액을 씀. 월산대군(李婷)의 風月亭集에 나오는 “새 연못을 파고 연을 심으니, 풍류 사랑스럽고 주인 어질다(鑿得新塘又種蓮 風流可愛主人賢)”는 구절의 정자
○ 행궁의 以于斯 편액 : 禮記 「檀弓下」의 “여기에서 노래한다(歌于斯)”는 구절에서 따온 것임
○ 雙嶺川 가 : 병자호란 때 兩南의 군사가 전사한 곳
정조는 남한산성의 시설을 둘러보고 군량미 비축분을 확인한 다음, 군사들의 조련 상태를 점검했다. 정조는 남한산성에 소속된 僧軍들의 陣法을 참관하고, 明末 袁崇煥이 寧遠에서 시험한 紅夷砲의 遺制로 알려진 埋火砲의 위력 시험을 했으며, 수어청 소속 군사들의 晝操와 夜操를 참관했다. 정조가 남한산성에서 시행한 조치들은 남한산성의 방어력을 강화하는데 집중되었는데, 이는 1795년(정조 19) 8월에 廣州留守府를 설치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4) 서명응의 활약
1779년 능행에서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한 인물은 수어사 서명응(1716∼1787)이었다. 서명응은 1779년 1월 12일에 수어사로 임명되었는데, 남한산성의 보수를 총지휘하고, 정조의 능행 중 남한산성에서 거행된 일체의 행사를 주도했다. 가령 그는 정조가 한강을 건너면서부터 수어청 군사를 거느리고 행렬의 앞에 섰고, 국왕의 행차가 여주, 이천으로 이동할 때에도 행렬의 앞에서 인도했다. 또한 국왕이 남한산성에 머무는 동안 4개 城門 및 13개 暗門의 관리를 주관했고, 수어청 군대를 조련하거나 무과 별시를 치를 때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정조는 능행이 끝난 이후 능행 관련 자료를 정리한 배종록과 지리지 南漢山城誌의 편찬을 서명응에게 일임했다. 서명응의 학문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어찌 뒷날의 禍亂을 미리 대비하는 것뿐이겠는가? 御駕가 도착한 날 邑誌를 가져다 보았는데, 모호하고 소략하여 증거로 삼기에 부족하니 흠이 되는 일이다. 게다가 南漢山城과 北漢山城은 다같이 나라의 保障인데, 북한산성은 誌도 있고, 刊本도 있지만, 남한산성만은 이것이 없다고 한다. 경은 일찍이 典考에 뜻을 둔 적이 있는데, 옛 事績에 뒤섞여 나오는 見聞을 분류하여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라. 오래 전해지는 방법도 되고 문헌을 숭상하는 일단도 될 것이니, 경이 이 편수 작업을 수행하라.
정조와 서명응의 인연은 1772년 서명응이 世孫右賓客에 임명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서명응은 세손 정조의 교육을 위해 많은 교재들을 편찬했고, 이는 청년기 정조의 학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면서 奎章閣을 건립했고, 서명응을 규장각 提學으로 임명하여 국가적 편찬 사업을 이끌게 했다.
서명응을 지지해 준 또 하나의 인물은 동생 徐命善(1728~1791)이었다. 서명선은 1775년(영조 51) 세손의 대리청정에 반대하는 洪麟漢・鄭厚謙 일파에 맞서 정조를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이후 영조와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국가의 요직을 차지했다. 1779년 능행 당시 서명선은 좌의정이란 중책을 맡았고, 서명응 형제의 위상을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서명응은 수어사로 있는 동안에도 규장각 제학을 겸했으며, 능행이 마무리되자 정조와 서명응의 관심은 奎章閣을 발전시키는 방안으로 옮겨갔다. 8월 24일, 정조는 서명응에게 남한산성지의 진척 정도를 물으면서 자신이 지은 奎章閣志 序文의 초고를 검토하라고 했고, 얼마 후 서명응에게 규장각 檢書官의 節目을 정해 올리라고 했다. 11월 24일, 서명응은 홍문관 대제학에 임명되었고, 김종수가 수어사에 임명되었다. 이 때 서명선은 영의정이었으므로, 서명응 형제는 중앙 정계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5. 맺음말
정조가 즉위한 시기는 정치적 격변기였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핵심 세력들을 처형하고 名義錄을 편찬했다. 그렇지만 정조의 政敵 제거는 철저하지 못했고, 思悼世子에서 이어지는 자신의 정통성은 여전히 위협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조는 7박 8일의 여주 능행을 기획하고 실천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120주기를 맞은 효종의 영릉을 참배하는 것이었다. 국왕의 능행은 왕실의 孝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관례적으로 거행되던 행사였고, 숙종과 영조도 여주 능행을 하였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정조는 능행 중 대부분의 시간을 남한산성에 머물면서 산성의 시설물을 점검하고, 승군 및 수어청 소속 군사들의 조련을 참관했으며, 백성들의 민원을 해결하고 경제적 혜택을 주었다.
정조가 들렀던 남한산성이나 여주는 인조의 抗淸, 효종의 北伐論과 밀접한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정조는 조선의 對明義理論을 재천명하고 대명의리론의 상징적 인물인 송시열을 현창했으며, 송시열을 계승한 노론계 산림인 송덕상과 김양행을 초빙하여 자문을 요청했다. 정조가 노론 산림을 우대한 것은 가장 강력한 정치세력이던 노론을 의식한 정치적 조치였다. 당시 정조는 영조대 후반에 일어난 척족 세력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소수의 친위세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능행 중 정조는 王統의 정통성과 軍令의 확립을 강조했는데, 이는 국왕의 권위를 과시하고 통치력을 장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정조가 집권 기반이 취약하던 시기에 爲民 정치를 부각시키고, 백성들을 위한 조치들을 과감하게 시행한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남한산성 백성들의 채무를 탕감하고 文券을 불태운 것은 전격적인 조치라 할 수 있는데, 김양행의 말처럼 大族들이 많이 다치고 人心이 안정되지 않은 시기에 民心을 확보하는 것이 정조로서는 절실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1779년 능행을 통해 정조는 자신이 구상하는 정책 방안을 보여주기도 했다. 인재 활용에 있어 소론계 인사인 서명응을 적극 활용한 것이 그것인데, 정조는 남한산성의 수리, 능행 중의 행사, 행사 마무리에 이르는 일체의 과정을 서명응에게 집행하게 했다. 정조가 김양행을 초빙하여 자문을 받은 것과 서명응을 활용하여 실무를 담당하게 한 것은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데, 향후 정국에서 소론계가 일정한 역할을 할 것임을 예고하는 조치였다.
남한산성을 육성시키는 조치에도 정조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정조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이 도성을 남북에서 방어하는 군사적 거점임을 분명히 했다. 게다가 남한산성은 수도권의 주요 교통로인 한강을 끼고 松坡倉을 관할하는 경제적 거점이기도 했다. 남한산성을 육성하려는 정조의 의도는 廣州留守府를 설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779년의 능행은 권력 기반이 취약하던 집권 초기의 정조가 다양한 의도를 가지고 기획했던 특별한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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