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尹愭), <호서기행>(湖西紀行 一百韻)
·=> 서울에서 출발해 충남 해미로 친척을 만나러 가는 여행기를 적은 장시이다. 작자 윤기(1741-1826)는 1792년(정조 16)에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다. 읽어 보면, 정조가 1793년부터 몇 년 동안 수원성을 쌓아 도시를 다시 만들고, 1800년 세상을 떠난 사이에 여행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200년쯤 지난 지금 고향을 찾는 것 같은 여행을 다시 하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자.
湖西海美縣 호서의 해미현은
去京三百里 서울에서 삼백 리.
=> “海美縣”은 지금의 서산시 해미면이다.
再從四昆季 재종들 네 형제가
竝居一壑裏 한 마을에 산다네.
而我獨離索 나만 홀로 외떨어져,
悵望隔山水 산과 물 막혀 슬퍼하네.
爾來數十年 지난 세월 수십 년 동안,
欲往貧無以 가난 탓에 갈 수 없었다.
今春得歸便 올 봄에 기회를 얻어,
勇决不移晷 과감하게 길을 나섰네.
身外更無物 몸에 지닌 것 없도록,
蕭然謝行李 숙연하게 행장을 사양했네.
=> 노자가 없어 가능하지 않았던 여행을 관직에 진출한 다음 할 수 있는 여유를 얻고 기회가 생겨 과감하게 나서면서, 최대한 단출하게 하고, 남의 도움은 사양했다. 그러나 걷지 않고 말을 타고 간 것이 다음 대목에서 드러난다.
晡渡銅雀津 저녁나절 동작나루 건너고
暮宿栗林趾 저물어 율림지에서 묵었다.
=> “銅雀津”는 지금의 동작동에 있는 나루이다. 배를 타고 건넌 것이 오늘날과 다르다. “栗林”는 지금의 과천이라고 생각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과천은 고구려 “栗木郡”이었다고 했다. “栗木”이나 “栗林”은 “밤나무골”의 한자 표기라고 생각된다.
凌晨策羸馬 새벽부터 말을 달리니.
川谷互靡靡 시냇물과 골짜기 서로 쓰러뜨리네.
華城忽入矚 화성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더니,
粉堞列千雉 흰 성벽에 성가퀴 늘어섰네.
逶迤萬石渠 길게 두른 만석거에는,
盈陂水浩瀰 물이 가득 넘실거린다.
=> 세차게 달리는 것을 보니 좋은 말을 탔다. “萬石渠”는 1795년(정조 19)에 만든 저수지이다.
前臨大有坪 앞으로 대유평을 바라보니,
御路平如砥 거동 길이 숫돌처럼 평평하네.
=> “大有坪”은 만석거 근처 새로 개간한 들판이다. 정조 임금의 행차로였다.
荷洞挹幽香 기하동에선 그윽한 향기 맡고
梅橋訪新蘂 매교에선 새로 핀 봄꽃 구경했다.
=> “(芰)荷洞”은 없어진 지명이고, “梅橋”는 지금도 있는 다리이다.
蒼梧霱雲橫 창오엔 오색구름 비꼈고
松栢鬱乎美 송백이 울창해 아름답구나.
=> “蒼梧”는 중국 순(舜)임금이 죽은 곳인데,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隆陵)을 지칭하는 말로 썼다.
聖孝卓百王 성상의 효성이 백왕의 으뜸이라,
諸臣承明旨 뭇 신하들 밝은 뜻을 받드네.
橋舟歲一幸 배다리 놓고 해마다 한신 행차
于今十餘禩 지금까지 십여 년이다.
經營壯關防 방비시설 웅장하게 이룩하고,
形勝聞遠邇 빼어난 경치 원근에 들렸다.
北聳長安闉 북쪽에는 장안문이 솟았고.
南通八達軌 남쪽으론 팔달로 뚫렸네.
雷動四方民 사방의 백성들 들썩이고 ,
輻湊百貨市 온갖 물건 시장에 모여드네.
虎鶡列健校 맹수 같은 장교들이 늘어섰고,
綺羅炫遊妓 비단옷 입은 기녀들 현란해라.
雕樓與畫閣 아로새긴 누각, 그림 그린 전각,
顧眄勞點指 헤아리기 힘들 만큼 늘어섰다.
行出柳川歧 유천에서 갈라지는 길로 나서
遲遲如將竢 무언가 기다리듯 천천히 가며
緬焉懷聖德 아련히 성덕을 생각하니,
灑涕不自已 흐르는 눈물 멈추지 않네.
山川漸遞易 산천 모습 점점 바뀌는데,
回首惜移跬 돌아보니 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越畿遂入湖 경기를 넘어 호서로 들어와,
曉發昏則止 새벽에 길을 나서 저녁에 멈추었다.
野曠渡略彴 넓은 들은 외나무다리인 듯 가로지르니,
岸疊凌峛崺 첩첩 벼랑이 빙 둘러 험하구나.
新院苔碑蒼 신원의 비석에는 이끼 푸르고,
霅橋瀦土紫 삽교 황토 웅덩이 붉구나.
=> “新院”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목천현(木川縣, 지금의 목천읍) “고을 남쪽 5리에 있다”고 했다. 숙박업소가 있던 곳이다. “霅橋”는 예산군 삽교(삽다리)이다.
夜雨響崇朝 밤비는 아침나절까지 내리고,
獰飈仍怒起 광풍이 뒤이어 거세게 일어나네.
谷巖吼方裂 바위 골짜기 찢어질 듯 울부짖고,
卉草戰欲死 꽃이나 풀은 죽겠다고 벌벌 떠네.
松橡相摩戛 솔방울과 상수리 문지르고 부딪쳐,
亂鳴雜宮徵 이 소리 저 소리 어지럽게 섞인다.
有嶺入雲矗 층층 구름에 들어 있는 재마루,
其名曰大峙 그 이름을 일컬어 대치라 하네.
=> “大峙”는 예산군 덕산면 남쪽의 덕숭산(德崇山)과 북쪽의 가야산(伽倻山) 사이에 있는 고개이며, 지금은 45번 국도가 나 있다.
穹石懸絶壑 활 같은 바위 벼랑에 매달려 있고,
飛瀑穿縈藟 긴 폭포는 등나무 얽힌 데로 떨어진다.
危磴幾百折 백 굽이나 돌아가는 험준한 돌길,
羊腸無乃是 이곳이 바로 구절양장이 아니랴.
攀援步步囏 부여잡고 걸음걸음 힘들게 가니.
骨節覺骫骳 뼈마디가 굽어지는 느낌이다.
披藤輒長嘯 덩굴 헤치고 올라가 숨을 길게 쉬고,
遇嵒頻蹔倚 바위를 만나 잠시 기대고 있다.
况復遡孔僾 거센 바람 맞아 숨 쉬기 어려운데
吹倒失冠履 갓과 신발을 날려버리기까지 했다.
昏黑到上頭 땅거미 질 무렵 꼭대기에 당도하니
逆旅幸在此 숙박할 주막이 있어 다행이구나.
=> 험한 고개를 힘들게 넘어가자 꼭대기에 숙박할 주막이 있어, 고진감래의 교훈을 주는 것 같다.
呼酒解飢渴 술을 청해 허기와 갈증 풀고,
頹卧萬慮弛 쓰러져 누우니 온갖 근심 사라진다.
商賈集如蝟 장사꾼들 고슴도치처럼 모여들어
無禮何誅爾 무례한들 어찌 나무라겠나.
諧謔間謳謠 농지거리 사이에 노래도 불러,
亦可徵俗俚 민간 풍속을 알아볼 수 있다.
=> 주막 풍속을 흥미롭게 그렸다.
平明據山頂 아침에 산정에 올라보니
四郊入俯視 사방이 발아래 굽어보인다.
=> 근처의 큰 산 해발 677.6m 가야산 정상에서는 너무 멀어 해미가 보이지 않는다. 해미 근처 작은 산에 올라간 것 같다.
萬象駭心目 갖가지 장관이 눈을 놀라게 하고,
浩蕩何戢孴 호탕한 광경이 어찌 이리 모였는가.
偉哉造化翁 위대하다, 조화옹이여,
遊戱恣譎詭 기이한 것들로 장난을 치네.
邑號信不爽 고을 이름이 잘못 되지 않아,
有城環以枳 성곽에다 탱자울타리 둘렀다
=> “枳”은 “탱자 지”자이다. 해미읍성 둘레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둘려 있어 “탱자나무성”[枳城]이라고도 했다. 지금은 성 밖에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볼 수 없고 안쪽에만 길게 있다.
穰穰赴虛人 많고 많은 살고 있는 사람들
爭先誰所使 누가 시킨 듯 다투어 모여든다.
負戴事亂聒 이고지고 와서는 요란하게 떠들어
騙刁期倍蓰 간사하게 속이며 몇 갑절 남긴다.
齊民固有欲 백성들은 본디 고유한 욕심 있어
各自圖生理 저마다 각기 생계를 도모한다.
覽玆悟物情 이걸 보고서 세상 물정 깨달아,
因以忘憂悝 까닭이 있기에 근심 걱정 잊노라.
=> 해미 고을 좁은 곳에서 장사가 이렇게까지 번성한 것은 놀랄 일이다. 복원해서 잘 보전하고 있는 지금의 해미읍성 안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跋涉甘辛苦 갖은 고생 감수하며 산 넘고 물 건너,
迂回任邐迆 구불구불 이어진 길 휘돌아왔구나.
他鄕花樹會 타향에서 일가친척 모이니,
相看面面喜 만나는 사람마다 반가운 얼굴.
親朋多逢迎 친지들 여럿 반갑게 맞이하고,
兒童能拜跪 아이들은 공손히 절을 한다.
歡笑眉蹔伸 환하게 웃으며 얼굴을 잠시 펴고,
談論掌頻抵 이야기 나누며 손바닥 자주 치네.
海近亦山深 바다 가까우면서 산이 깊고,
=> 해미에서 친척들을 만난 즐거움을 이렇게 말했다.
烟霞似散綺 노을은 비단을 깐 듯 아름답네,
平塢樹戟攢 언덕엔 나무들 빽빽하고.
長郊村櫛比 들녘엔 촌락이 즐비하다.
暮筐收溪簌 저녁 광주리에 통발 걷어
朝市買江鯉 아침 시장에서 잉어를 판다.
競邀歸其家 집에 돌아오면 다투어 맞이해
肆筵或設几 잔치 열듯이 상을 차린다.
=> 해미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 이렇게 말했다.
遊衍竟日夕 날이 저물도록 즐거이 노닐며,
兄弟序以齒 형제들 나이 순서대로 앉았구나,
愴舊含凄其 옛일 생각하니 마음이 서글프지만,
綏履勉樂只 편안히 지내면서 즐거움 누리라네.
=> 육촌 형제들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이렇게 말했다. 이 뒤에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양자를 얻어 데리고 가는 사연이 길게 이어져 생략한다.
* 성―가퀴 (城―)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몸을 숨겨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는 곳》. 성첩(城堞). 여장(女墻).
* 오늘부터 충남문화 찾아가기 탑재 시작합니다. 위 윤기의 시는 충남 문화 전체를 비교적 잘 보여주는 글이어서 <충남문화 찾아가기> 서두에 올립니다. 연경 주 2018.2.4.
* 수원 융건릉
* 예산 예당저수지
* 예산 수덕사
* 서산 해미읍성 동헌
* 서산 해미읍성 내 군관회의
* 서산 해미읍성
* 서산 해미읍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