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서양의 정신병자 수용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사진으로 보는 서양 정신의학의 역사
정신의학의 역사는 일반적인 의학사와는 다른 맥락에 위치한다. 질병의 극복과 새로운 치료법의 개발 같은 영웅담으로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면서도 가장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은 광인들, 끔찍하고 치욕적인 수용소, 냉온수 마찰과 전기충격, 각종 쇼크요법 등 저급하고 비인간적인 치료법까지, 인간에 대한 의학의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분야가 바로 정신의학이다.
18세기의 광인 수용소부터 20세기 어느 개업의의 진료소까지, 정신의학의 역사를 사회사적 시각으로 살핀 세계적인 의학사학자 에드워드 쇼터의 《정신의학의 역사》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1997년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정신의학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 매김해 왔다. 또한 단순히 정신의학 전공자를 위한 역사 교재가 아니라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인간 정신의 실존적 고통에 대한 의료화의 추이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사회적 의미를 지닌 책으로도 평가 받아 왔다.
18세기 말 치료적 수용소의 풍경에서 시작된 이 책의 이야기는 20세기 말 정신과 개업의의 조용한 진료실에서 끝난다. 푸코의 ‘대감금’ 주장에 대한 반박, 초기 수용소의 끔찍한 상황, 프로이트에 대한 혹평 등 이 책에는 우리가 전혀 몰랐거나 일면만 알고 있던 사실들에 대한 반전으로 가득하다. 또한 최근 거대 제약회사들이 벌이는 정신이상의 의료화 음모에까지 파고들면서 정신의학의 미래는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누군가는 "사죄의 역사"라 말하고, 정신분석을 정신의학의 정점으로 일컫는 누군가는 "고난의 역사"라고 말하는 정신의학의 역사. 책에 실린 사진을 바탕으로 정신의학의 역사를 살펴 보자.
18세기 말 이전까지 전문 의학분야로서의 정신과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 이전 광인은 각 가정이나 마을에서 알아서 “처리”되었고, 17세기 이후에야 등장한 정신의학은 ‘대감금’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며 그 첫발을 내딛었다. 중세시대의 의사들은 광인의 머리 속에 "광기의 돌"이 있다고 믿었다. 얀 산데르스 반 헤메센, <수술>, 1555
광인과 광기에 대한 전형적인 묘사는 이런 그림이다. 영국에서 알코올중독이 넘쳐나는 현상을 값싼 술인 진에 절은 거리로 묘사했다. 아이들은 방기되고 온갖 범죄와 타락이 그려져 있다. 윌리엄 호가스, <진 거리>, 1750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정신병원은 베들렘Bethlem이다. 13세기에 베들렘Bethlehem의 작은 성모 수도원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곳인데, 1403년 귀화인을 수용하면서 6명의 광인도 함께 입소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수용인 대부분이 광인으로 바뀌고, 이름도 와전되면서 "대혼란, 미친 곳bedlam"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위 그림은 윌리엄 호가스의 1733년 작 8부작 <레이크의 인생변천>의 마지막 그림이다. 머릿니 예방을 위해 삭발을 당한 채 쇠고랑으로 바닥에 묶여 있다. 이런 그림을 통해 베들렘의 무시무시한 이미지가 각인되었다.
"구빈원을 찾아온 관림객들이 창문 쇠창살 사이로 들여다보고 손가락질하며 환자를 자극해서 놀리고, 작은 창을 던져 묶여 있는 환자의 발가락 사이를 맞추며 손재주를 뽐내는 등 볼 만한 대중 스포츠거리를 만들어낸다"(윌리엄 퍼펙트, 1787)
근대 초기 광인 수용소는 시체공시소인 모르그와 더불어 당시 대중들의 오락거리 중 하나였다. 그림은 19세기 미국 펜셀베이니아 정신병원의 모습이다.(뉴욕 학술원 의학도서관 소장)
치료효과를 기대한 것일까? 초기 광인 수용소의 치료법 중 하나였다. 왼쪽 그림은 둥근 원통 안에 환자를 앉혀 놓고 돌리는 회전의자다. 오른쪽은 찬물과 뜨거운 물을 번갈아가며 환자의 머리 위에 쏟아 붓는 치료법(?)이다. 일종의 고문과도 같은 방식으로 정신질환자를 치료하려 했다. 조세프 귀슬랭, <정신질환자를 취급하는 오래된 방법>, 1826
1793년, 프랑스의 자코뱅 정부는 38세의 젊은 의사 필립 피넬에게 비세트르 호스피스의 운영을 맡긴다. 계몽주의와 사회진보철학에 고취된 피넬은 비세트르에서 정신질환의 치유 가능성과 인도주의적 돌봄이라는 개혁주의적 이상을 발휘한다. 필립 피넬의 주장은 명료했다. 수용소 감금은 치료적으로 이용되어야 하며, 수용소의 본질은 심리적 치료를 하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환자들과 친밀했고, 따듯한 목욕으로 환자를 안정시켰으며, 환자들은 부지런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했다. 필립 피넬이 광인을 해방시키는 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그림이다.
정신의학의 초기 온천에서의 휴식이 치료효과가 있다는 유행이 번졌다.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중산층은 정신적 이상을 호소하면서 곳곳의 온천으로 휴식 여행을 떠났다. 잉글랜드의 바스, 스위스의 리기-칼트바트, 독일의 비스바덴, 프랑스의 플롱비에르 등이 대표적이었다. 온천에서 정신질환자를 맡던 의사들은 흔히 '온천 의사'라고 불렸다. 사진은 퇴플리츠의 온천에서 환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는 모습이다. 쇠뿔을 이용해 부항과 방혈을 하는 고대의 요법을 시행하고 있다. 런던 웰컴 라이브러리
정신질환자를 감금하고 보호하기만 하던 정신의학에 과학의 바람이 불어왔다. 19세기 과학혁명의 물결은 틀이 잡혀 가던 정신의학에도 흘러 들어왔다. 1세대 생물정신의학자들은 정신질환이 운명이 아니라 뇌의 질병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대학과 연계되어 연구에 박차를 가했으나 빈약한 근거와 퇴행이론 등은 자가당착에 빠지고 정치적으로 악용되면서 생물정신의학은 막을 내린다. 왼쪽은 베를린 대학 정신과 교수(1865-1868)였던 "1세대 생물정신의학"의 창시자 빌헬름 그리징거. 오른쪽은 라이프치히 대학 정신과 교수(1877-1921)였던 파울 플레치흐이다. 파울 플레치흐는 뇌 피질이 부위에 따라 각기 다른 기능을 담당한다는 "뇌 지도"의 선구자로 꼽힌다 하지만, 환자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정신의학은 수용소와 함께 대중으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어 갔다 .1세대 생물정신의학의 유산인 유전적 숙명을 뜻하는 광기의 오명을 피하기 위해. 정신의학은 '신경성'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수용소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환자와 대중의 혐오를 피하고 부자 환자를 유치하려는 의사가 공모해 '신경성'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신경성 환자를 유치하기 위한 온갖 치료법이 난문하던 이 시기 드디어 심리적 치료의 싹이 텄다. 그러나 여전히 물리치료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안절부절못하는 환자를 달랠 수 있는 방법은 수치료법을 포함해서 몇 종류 되지 않았다. 1920년 화이트필드에 있던 미시시피 주립병원의 수치료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정신의학의 역사상 반세기에 이르는 커다란 ‘단절’이었다. 정신분석이 정신의학계를 지배한 몇 십 년 동안 정신의학은 일반의학으로부터 멀어지고, 과학적 발전은 오랫동안 침체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 단절이 정신의학계에 미친 파장은 엄청났다.
정신분석에 대한 기존 정신의학계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성이 정신질환의 원인이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주류 정신과 의사들은 “프로이트 식 사교에는 구역질이 난다”거나 “경험 많은 정신과 의사가 역겨움을 느끼지 않고 프로이트를 읽을 수는 없다”고 반응했다.
이와 같은 학계의 부정적인 반응과 달리, 중산층 사회는 프로이트에 열광한다. 이러한 열광의 배경에는 정신적 고통을 안고 있는 고학력의 중산층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가 ‘광인의 수용소’에 갇혀야 하는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련된 상담실에서 두어 시간의 상담으로 해결될 수 있는 비교적 ‘멋져 보이는’ 문제로 치환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정신분석은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유태계 정신분석가들로 인해 독일뿐 아니라 미국의 정신의학을 고스란히 점령하게 된다.
20세기 초 정신분석과 수용소라는 두 갈림길 사이에서 어느 쪽도 마음에 끌리지 않았던 정신과 의사들은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신경매독의 열치료법과 수면연장법 등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약물혁명을 예고했는가 하면, 전기충격요법과 뇌엽절제술은 격렬한 반 정신의학 운동을 야기했다. 1930년대에는 인슐린으로 혼수상태에 빠뜨렸다가 깨어나게 하는 인슐린 혼수요법, 메트라졸을 주입하여 경련을 유도해 증상을 개선하려는 메트라졸 경련요법 같은 치료법 들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그다음을 이은 것이 로마 대학의 우고 체를레티가 1938년에 처음 사용한 전기충격요법(ECT)이었다.
위왼쪽: 벨기에 닥터 귀슬랭 수용소에 있던 수도사 2명이 인슐린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의 코에 연결된 튜브로 포도당 용액을 투여하고 있다. 닥터 귀슬랭 박물관
위가운데: 1941년 미국의 정신병원에서 환자를 묶지 않은 채 메트라졸 경련요법을 하는 장면. 라디슬라스 폰 메두나가 1934년에 발명한 메트라졸 요법은 세계 최초의 실질적 경련 요법이다. <미국 정신의학 저널 97(1941)
위오른쪽: 워싱턴 대학병원 신경과 의사로서 미국에 뇌절제술을 보편화 시킨 월너 프리먼, 1949년 환자의 전두엽을 파괴하기 위해 환자의 눈꺼풀 아래로 절제용 기계를 망치로 두드려 삽입하는 장면이다. UPI/Corbis-Bettmann
아래: 전기경련 요법을 시행하는 모습. 레어나드 로이 프랭크, <쇼크치료법의 역사>, 1978
전기충격요법(ECT)은 전기적 충격을 뇌까지 도달하게 하여 경련발작을 일으키는 방법으로, 1938년 로마 대학의 우고 체를레티가 처음 사용했다. 전기충격요법은 분명 정신분열증의 완치법이 아니었지만, 곧 전 세계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1959년이 되자 전기충격요법은 조울증 환자와 주요 우울증 환자에게 “필수적인 치료법”이 되었다. 그것은 효과적이고 신속했으며, 환자들도 싫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기충격요법은 정신의학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1975년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한 장면, 영화 속에서 전기충격요법은 일탈 행동에 가하는 처벌로 묘사되어 당시 ECT에 대한 반감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전학과 약물학이라는 두 날개로 2세대 생물정신의학은 비상하기 시작한다. 초기의 정신약물은 단순한 신경안정의 기능을 담당했다. 그러나 뇌과학의 성과와 약리학의 발전에 힘입어 정신약물학은 선택적 치료가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새로운 약물은 거대한 수용소에 있던 환자를 사회로 쏟아냈고, 이들은 모두 거대 제약회사의 고객으로 포섭되었다.
왼쪽: 몬트리올 버던 기독병원에서 1953년 처음으로 북아메리카에 클로르프로마진을 소개한 하인츠 레만.
오른쪽: 리오 스턴바크가 1950년대 말 벤조디아제핀 신경안정체를 처음으로 합성하면서, 뉴저지 니틀리에 있는 로쉐 실험실에서 작업하는 모습이다. 바리움은 이 사진이 찍인 다음 해인 1963년부터 판매되었다.
미국 대중이 열광한 첫 번째 정신과 약은 ‘밀타운’이라는 신경안정제였다. ‘행복의 약’ ‘마음의 평화를 위한 약’이라는 기사로 소개된 이약은 순식간에 미국을 휩쓸었다. 1956년의 조사에서는 미국인 20명 중 1명이 그 약을 복용했다. 1970년에는 미국 여성 5명 중 1명, 남성 13명 중 1명이 ‘가벼운 신경안정제와 진정제’를 복용했다. 이후 정신약물 처방은 갈수록 늘어 1975년에는 진료소당 25.2%의 환자가 약 처방을 받았다면, 1990년에는 50.2%의 환자가 처방전을 받아 갔다.
이후 프로작을 위시한 일련의 정신약물은 제약회사의 마케팅력에 힘입어 그 세력을 더욱 확장하게 된다. 1960년대 이후 미국 정신의학은 단순한 불행감, 식욕감퇴, 수면장애 등을 모두 우울증으로 정의하였고, 우울증 진단은 어린 아이에게도 내려지기 시작했다. 사내아이들의 떠들썩한 행동은 ‘과잉행동 증후군’(ADHD)으로 정의되었고, ‘리탈린’이라는 약물이 처방되었다. 심지어 아이들이 흔히 겪는 유령 공포 따위에도 정신과 진단명이 붙여졌고, 약이 처방되었다.
왼쪽: 프랑크 베르거가 개발한 약 "밀타운" 광고 포스터(1959). 이 약은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약으로 순식간에 미국을 휩쓸었다.
가운데: 자낙스 광고 포스터. 1981년 업존 사에서 개발해 판매한 자낙스는 "공황장애"에 특효를 가진 약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자낙스는 1990년대 초 정신의학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약이 되었으며, 정신의학계 내부에서는 공황장애를 "업존 병"으로 부르기도 했다.
오른쪽: 프로작 광고 포스터.
프로작으로 대표되는 정신약물의 등장은 ‘미용 정신약물학cosmetic psychopharmacology’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정신이상에 씌워진 오명을 없애 주었다. 이제 도시의 중산층들은 자신의 심리적 고통과 실존적 고뇌를 숨기려 하지 않았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자신들의 ‘프로작 경험’을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P’로 시작하는 단어는 더 이상 정신분석psychoanalysis이 아니라 이제 프로작prozac이 되었다.
내용 및 사진 출처: <정신의학의 역사>, 에드워드 쇼터 지음, 최보문 옮김, 바다출판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