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목공소 찾아가기
8. 곡목 공소 - 창원시 동읍 화양리 화양 본동(꽃목)
창원시 동읍 화양리, 본동을 "곡목", 또는 "화목"이라 하였고, 옛날에는 화정(花頂)이라 하였으며 "마을에 꽃나무가 많아서 “꽃목"이라 하였는데, 한자말로 고치면서 "곡목" 으로 불렸다.
낙동강을 따라 내려오던 피난교우들은 창녕의 모래늪 공소, 칠원의 죽청공소, 길곡의 시렴공소, 마천공소를 세웠다. 하지만 그들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더욱 안전하고 살기 좋은 새로운 곳을 찾아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위에 나열한 공소들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모래늪 공소는 강성삼 신부가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이후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죽청 공소 역시 1900년 이후 강성삼 신부의 방문 이후 기록에서 사라졌고, 길곡의 시렴공소, 마천공소 역시 1902년 강성삼 신부의 마지막 기록으로 더 이상 나타나고 있지 않다.
특히 길곡의 시렴 공소는 1902년 총교우 22명에 그해 판공성사를 본 교우는 6명으로 나타나 교우들의 계속된 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교적은 있으나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창원의 곡목 공소에는 길곡의 시렴공소에서 왔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그러면 창원의 곡목 공소에 대해서 살펴보자. 곡목 공소가 처음 등장한 것은 로베르 신부의 1884년 보고서이다. 당시 총교우수는 38명이고 30명이 판공성사를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곡목 공소는 1890년까지 로베르 신부가 담당하였고 총교우수가 60명이나 되었다. 1891년부터는 죠조 신부가 1893년까지 3년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1894년부터 1898년까지 5년간 우도 신부가 1899년엔 타케 신부가 담당하였다.
강성삼 신부는 1900년에 방문하여 1903년 선종하기 전까지 방문한 기록이 부산 교세 통계표에 잘 나타나 있다. 곡목 공소는 1895년 우도 신부 때 총교우수가 70명에 달했으나 점차 줄어들어 1902년 강상삼 신부의 년 말 보고서에는 55명으로 나타나 있다.
병인 박해 중인 1870년 곡목 사는 강시몬 이라는 사람이 명례로 이사 오면서 명례 마을의 김상연, 김우연 바스지아노 형제를 입교 시켰고, 다시 명례에 공소가 재건되었다고 한다. 1879년 김우연 바스지아노 집을 공소로(명례리 1204번지) 대구에 사는 로베르 신부가 공소를 세웠다고 한다.
곡목 공소는 1890년 부산본당이 신설되자 부산본당 소속이 되었고, 1897년 명례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하면서 1903년까지 명례본당의 공소가 되었으며, 1904년부터는 마산본당의 공소가, 1925년 명례가 재건본당이 되자 다시 명례본당의 공소로 되었다가 3년 뒤 명례본당이 삼량진으로 이사를 가자 삼량진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
1935년 진영본당이 설립되자 진영본당 소속이 되었다. 이때 공소를 곡목에서 북면면소재지(현재 원 탕 자리)로 옮기고 북면 공소라 하였다. 1971년 창원본당(현, 중동성당)이 설립되자 북면 공소는 창원 소속이 되었다.
현재, 동읍 화양리 곡목마을에는 천주교우를 찾을 수가 없으며 공소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번창했던 공소시절 피난교우들의 교우촌을 머릿속에서 그려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