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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소 인근에 있는 환승센터(아귀디미디 케이블카 사이트 인근)
여기에서 우슈 행 버스(1번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면 된다
샤모니에서 숙박했다는 증거(티켓)가 있으면 버스는 공짜(우리는 없었는데 확인은 하지 않음)
▲ 유수에 있는 케이블카 정거장
여기서 니데글까지 가는 왕복표를 구입하면 됨 (가격은 41.5유로). 이층으로 올라가서 캐이블카를 탄다.
밸뷔(산악열차 정거장)까지 케이블카로 가서 거기서 니데글역(산악열차 종점)까지 산악열차를 타고 가게 된다
▲ 밸뷔 역에서 산악열차 기다리는 중
산악열차는 차 선로 가운데 톱니바퀴가 있어 높은 경사도의 산길도 거침없이 오르지만 속도는 느림
▲ 밸류 케이블카 정류장에 있는 이정표.
주로 트레킹 족을 위해 설치되어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남은 거리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소요시간을 표시하고 있다.
고도차가 심한 이곳에서는 거리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후 산악열차 정거장 까지 150미터 정도 평지를 걸어야 함
▲ 하산 때를 대비해서 열차 시간표를 찍어놓았다.
니데글역에 18:30분까지는 도착해야 무사히 숙소로 갈 수 있다. 일정상 그 시간에 도착이 어려우면 무리하지 말고 구테 산장이나 떼떼산장에서 하루밤을 더 묵어야 한다. (돈이 좀 더 든다 ^^)
▲ 니데글 역(해발고도 2,372미터)
편한 여정은 여기서 끝. 이제부터 구테 산장까지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 등반객이 많이 보인다
▲ 처음에는 완만한 경사에 잡석이 많은 너덜길.
이정표는 없고 희미하게 나 있는 길을 걸으면 된다.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 등반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무인산장이 나타났다 (이름은 모름).
트레킹 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여기까지 올라 온 후 니데글 역으로 발길을 돌림.
▲ 한 시간 반 쯤 편한길을 걸으면 본격적으로 경사가 세진다.
스틱을 이용하면 매우 편리하다. 저 밑에 우리가 걸어온 길이 꼬불꼬불 보인다.
▲ 알프스 산양.
가끔 산양이 발견되지만 사람이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 않는다. 우리를 얒잡아 보는 듯....
(사진 찍는 분은 진지한데, 산양은 덤덤한 표정이다.)
▲ 브레방 방면.
잠시 쉬면서 뒤돌아 보니 맞은편 (브레방 쪽) 산 군이 아름답다. 일행 중 한명이 파노라마 기능을 사용하여 촬영했다.
▲ 고도가 올라가면서 이틀 전 우리가 고산적응 훈련을 했던 애귀디미디 봉이 보인다
이때까지만 해도 날씨가 맑아서 애귀디미디 봉우리사이에 설치된 구름다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 왼쪽으로 당귀미디, 그랑 조라스, 드류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 떼떼산장 근처에 있는 빙하지대와 낙석지대
크램폰 없이도 건널 수 있는 완만한 빙하지대 이지만 오늘은 산행시간이 여유가 있어 안전을 위해 크램폰을 착용했다.
낙석지대는 신속히 지나는데 오전이라 그런지 낙석이 심하지는 않다
(그러나 하산할 때에는 수박만한 낙석이 수시로 떨어지는데 굴러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고속으로 튕겨지면서 떨어진다)
멀리 맞은편에 브레방 봉우리 뒷편의 산군들이 보인다.
▲ 떼떼산장
일부 등반객은 여기에서 비박을 한 후 정상도전을 한다. (구테 산장 이용요금이 워낙 비싸서...)
그러나 여기서 꾸테산장까지 3시간 남짓 더 올라가야 하므로 다음날 시간과 체력에 많은 부담을 준다.
현지에서 만난 한국등반팀도 여기에서 비박 후 정상도전 했으나 정상오 오르지 못한 듯....(발루산장 이후로는 못 봤음)
▲ 본격적인 바위 루트.
낙석지대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경사가 심해져서 안자일렌으로 서로 묶은 후 등반을 함. 이렇게 네발로 2시간 이상 올라 간 듯..
▲ 드디어 옛 구테 산장에 도착.
새로운 구테 산장은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이 최신식으로 새로 지었다. 여기서 새 구테산장까지는 설산 능선을 따라가 하므로 크램폰을 착용해야 한다
▲ 구테산장으로 가는 나이프 릿지.
많은 등반객으로 인해 길이 잘 나있어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양쪽 모두 급경사라 심리적으로 긴장된다.
▲ 새로지은 구테산장(3,817미터)
부러울 정도로 멋진 산장이다. 우리나라에서 호텔로 불리는 연화봉대피소(소백산) 정도라야 시설 면에서만 비교라도 시도해 볼 정도이고, 운영면에서는 우리나라 국립공원 산장은 미얀하지만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개인이 적극적으로 운영하는 것과 봉급쟁이가 타성적으로 운영하는게 이렇게 차이가 나는가 싶다)
▲ 구테산장 내부
일단 산장안에 들어서면 크램폰 벋는 곳이 있는데 슬리퍼가 준비되어 있다
빙벽화를 벋어 왼쪽 빈칸에 넣어서 말리고, 각종 장비를 풀어서 우측의 걸이에 걸어서 놓고 슬리퍼를 신고 내부 공간으로 들어간다
▲ 혹시나.... 없어지지 않을까 잠시 고민을 해 본 결과
기우다. 않없어 진다. 여기까지 올라올려면 일단 본인들의 장비를 갖고 왔을 것인데, 남의 것 탐나서 하나 더 챙긴 들 뭣하랴... 내 몸하나 가누기 힘든 4,000미터 고지에서는 짐이 될께 뻔할 꺼라는 결론에 도달.
▲ 체크 인
산장예약을 못하고 무작정 올라간 우리는 침상이 없다. 최악의 경우 식당에서 밤을 샐 요량으로 올라갔더니 오늘은 날씨가 좋지않아서 캔슬이 많은가 보다. 19시에 취소된 공간이 있으면 배정해 주겠단다
(내가 영어가 짦아서 반복해서 질문을 하니 담당자가 얼른 인터넷으로 구글검색기를 실행시키는 센스를 발휘, 나 같은 놈이 한둘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 식당내부.
4유로를 주고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저녁시간이 되길 기다린다(우리일행)
피자도 팔고 .... 거의 없는게 없다
▲ 산장 메뉴판
18:30분 저녁식사 30유로, 내일새벽 2시 아침식사 16유로.
맥주도 파는데 한 잔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지만 내일아침 정상등정을 위해 꾸~욱 참았다
▲ 드디어 식사시간
우리 테이블에 우리팀 말고 외국인이 여섯 분 더 앉아 있는데 식사가 서빙되기 시작한다
▲ 에피타이저
치즈를 넣은 수프인데 치즈가 우리예상 보다는 딱딱해서 자르는데 애를 먹었다.
▲ 메인
닭다리 치고는 심하게 큰 다리 하나에 날라다니는 라이스. 양은 충분하다. 식사하는 내내 닭 다리다? 오리 다리다? 심지어는 칠면조 다리다? 라고 서로 주장하면서 먹는다. 쌀 속에 보이는 검은 것은 우리가 가지고 간 비장의 김 부스러기... 탁월한 선택이였다.
▲ 디저트
초코케익이다. 이정도 고도까지 가지고 온 물류비용과 매우 친절한 서비스를 감안하면 30유로가 그닥 비싸지는 않은 것 같다.
하여 숙박비 포함 총 비용은 1인당 19만원 정도
(중청대피소는 8,000원인 점을 감안하면 부가가치 창출에 거의 달인 수준이다)
▲ 침상
기본구조는 우리나라 국립공원 대피소와 비슷하지만 폭이 상당히 넓고 아래에 메트가 깔려있고 이불도 두텁다. 각 층마다 실내에 화장실이 있으며 세면이 가능하다. 난방도 최적,
▲ 정상으로..
새벽 1시 조금넘어 기상하여 2시에 아침(빵 위주의 부폐식)을 제공받은 후 3시 15분 산장을 나왔다.
▲ 정상으로 출발하는데 바람이 매우 심하다(시속 60~70키로미터)
현지 가이드들은 강풍을 원인으로 정상출발을 미루고 있으나 개인적으로 온 팀들은 정상으로 출발한다. 캄캄해서 앞이 보이지 않으나 랜턴 행열을 따라가면 된다.
특이한 점은 날씨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산행통제를 하지 않는 것이다. 각 개인의 책임하에 도전을 하고 그 결과를 겸허히 본인이 수용하는 등반문화가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르다.
뻑하면 날씨 않좋다고 입산통제, 대피소 예약이 되지 않았다고 입산통제(대피소는 8천원을 포기하고 올라오지 않은 자들 때문에 텅텅비고), 산에서 사고나면 국립공원한테 관리소홀 소송하는 등반객.. 등등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 강풍과 짙은 가스.
날이 밝았지만 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가스가 심해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강풍에 어름가루가 날린다. 얼굴은 돌리면 되지만 허벅지는 따끔따끔한 통증이 느겨진다
▲ 안자일렌 등반
2~3인씩 자일로 묶어 등반을 하는데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 앞서간 사람의 발자욱을 따라 간다
▲ 발루산장 ~ 정상 구간.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온이 점차 낮아져서 옷이며 장비에 얼음이 달리기 시작한다
내가 입은 오버자켓은 고어자켓이 아니다. 고도 3,500미터 이상에서는 비가 올 일이 없기 때문에 바람만 막아주면 될 것 같아서 시험적으로 일반 방풍자켓을 입었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귀국전 몽블랑 등반기념으로 마무트 자켓을 구입했는데 고어텍스를 포기했더니 그 차액으로 베낭, 기타 기념품을 구입하고도 돈이 남는다 ^^
▲ 드디어 정상.
바람이 심해 몸을 가누기도 힘들다. 처절하다
▲ 한국등산학교 74기 미니 현수막 들고 인증샷
내가 지금 여기에 서 있는 것은 한국등산학교 74기 졸업이 계기가 되어 산을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멋진 정상샷을 찍을려고 준비했는데 가스가 심하고 카메라 랜즈에 성애가 끼는 바람에 선명한 사진을 얻지 못했다.
상관없다. 몽블랑 정상이 나를 받아 준 것에 감사할 뿐이다.
▲ 하산길.
날씨가 개이고 있다. 정확히는 우리가 구름아래로 내려 온 것이다.
▲ 멀리 애귀디미디가 눈 높이 조금 아래로 보인다. 4,000미터 정도까지 하산한 듯 하다
▲ 가스가 걷히는 듯 하다가도 어느새 다시 시야를 가리기를 반복한다.
▲ "이 능선만 통과하면 구테 산장이 보일꺼다."
맘 속으로 나를 격려해 보지만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 지고....
▲ 이제 저 아래 빙하도 선명히 보인다.
빙하가 부러지면서 두부모 처럼 갈라져 있다.
▲ 빙하지대를 다시 건너고..
▲ 바위지대와 너덜지대를 아무 생각없이 내려간다.
행여 발생할 지도 모르는 추락에 대비해서 서로 로프를 묶고...
▲ 드디어 니데글 역이 보인다.
저기까지 도착하고 우측에 보이는 굴로 기차가 들어오면 몽블랑 등반이 종료된다 ^^
역무원한테 물으니 니데글 역에는 매점이 없단다. 대신 역 건물 안에 비치된 물통에서 물은 공짜로 가져가란다.
날진 물통에 물을 가득받아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니 조금 정신이 든다.
새벽 3시 15분 부터 시작한 등반이 오후 5시 30분에 끝이 났다
옛날 옛적에..
지금부터 약 250년 전인 1,760년 어느날. 한 사람이 사모니 북쪽기슭에 있는 브레방(2,526미터)에 올랐다가 맞은편에 우뚝 솟아있는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의 장엄함에 감동하고 만다. 그는 제네바의 자연과학자 소쉬르이다.
그는 몽블랑을 오르겠다고 결심한 후 몇 차례 도전 하였으나 실패한 후, 몽블랑을 처음 오르는 자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현상금을 걸었다.
그 당시에는 산을 도전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시대이고 심지어는 악마가 살고 있어서 올라가면 않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였다
샤모니의 의사 미셀 가브리엘 빠가르.
소쉬르가 현상금을 건 지 23년 후에 빠가르가 정상 도전에 나선다. 두 차례의 도전에 실패한 후 1,786년 8월 8일 농부이면서 수정 채취꾼인 자크 발마를 포터로 고용하여 드디어 몽블랑 초등에 성공한다.
소쉬르가 현상금을 건지 26년만의 일이다.
현재 샤모니 광장에는 몽블랑 초등을 기념하는 동상이 있다. 한 사람은 오른 팔을 뻗어 손가락 끝으로 몽블랑 정상을 가리키고 있고 다른 사람은 진지하게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 중 누구도 빠가르가 아니다. 손가락으로 몽블랑을 기리키는 발마와 그 방향을 응시하는 소쉬르.
빠가르와 발마가 함께 몽블랑을 초등하였으나 발마만 초등에 성공하고 빠가르는 설맹으로 인해 정상 직전에서 포기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번져 나갔다.
욕심이 많고 약삭빠른(내 생각 ^^) 발마가 초등의 영예와 현상금을 독차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퍼트린 소문이 기정사실화 되어가는 분위기에서 빠가르가 본인의 등정성공을 주장했으나 민중들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당시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3년전이였으므로 민중들의 상류사회에 대한 불만이 터지기 일보직전인 시기였다.
지식인이고 상류계층 의사인 빠가르를 민중들은 싫어 했다. 반면 발마는 가난한 농부이고 산에서 수정을 캐서 먹고사는 사람이였으므로 발마의 주장을 믿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소쉬르의 손자에 의해 빠가르도 초등에 성공했었음이 증명되었지만 동상이 세워질 당시만 해도 몽블랑 초등의 영웅은 도전의 불씨를 당긴 소쉬르와 초등에 성공한 발마 뿐이였고 빠가르는 철저히 소외되었다.
두 사람의 동상으로 부터 약간 떨어진 뒷 쪽에는 또 한 사람이 긴 막대기를 쥐고 앉아서 몽블랑 정상을 바라보고 있다.
훗 날 초등이 증명된 빠가르의 동상이다. 후대의 사람들이 빠가르의 초등을 기리기 위해 추가로 건립한 것이다.
미얀함의 보상일까 후대의 사람들은 빠가르가 앉아 있는 거리를 빠가르스트리트라고 명명해 주었다.
소쉬르도 이듬해에 발마와 여러명의 짐꾼을 대동하고 몽블랑 정상에 오른다.
이 전까지의 산은 도전의 대상이 아니였다. 악마가 살고 있고 신앙의 대상이며 생업을 위해 목숨을 걸고 오르는 곳이였는데 소쉬르에 의해 오로지 정상에 오르고 싶은 욕망과 위험에 굴하지 않는 도전정신 만으로 등반을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후 알프스의 고봉들은 빠른 속도로 초등되어 졌으며, 몽블랑 등정으로 말미암아 근대 등반개념이 정립되었고 소쉬르는 '근대 등산의 아버지" 라고 불리게 된다.
드디어 알피니즘이란 용어가 탄생하였다.
Benedict de Saussure & Jacque Balmar Michel Gabriel Paccard
몽블랑 등정 다음날 소쉬르가 느꼈던 몽블랑의 장엄함을 나도 느끼고 싶어 맞은편 봉우리인 브레방에 올랐으나.
몽블랑 정상은 구름속에 가려 있었다.
또 다음날 브레방 옆 봉우리인 락블랑에 올랐더니 몽블랑 정상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장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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