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 문학관은 서정시인으로 손꼽히는 박재삼의 시 세계와 문단의 평가 등에 대한 정보를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또한 시인의 연보, 시를 시작하게 된 동기와 소박하고 정 많은 시인의 성품과 다양한 인간관계 등의 생활상을 통해 인간 박재삼을 만날 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규모 : 대지 6,695㎡, 연면적 645,2㎡, 3층건물
이용시간 : 09:00 ~ 18:00
1층 : 안내공간과 전시관
2층 : 다목적실, 창작실, 소장도서 열람실, 탁본
3층 : 어린이 도서관 및 휴게 공간
박재삼문학관 소개
1층
서정시의 정통 계보를 잇는 박재삼 시인의 시문학 세계와 정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박재삼 연보
박재삼과 사람들
시 낭송하기
작품 전시관
시어 이어달기
박재삼문학관 소개
2층 & 3층
다목적홀에서 박재삼의 시를 통한 시인의 일대기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박재삼 소장도서열람 및 시 탁본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3층에는 어린이 도서관 및 휴게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삼천포항의 전경을 볼 수 있습니다.
2층 : 영상시설이 완비된 다목적실
2층 : 박재삼 소장도서열람
2층 : 시 탁본 체험
3층 : 어린이 도서관
3층 : 옥외 휴게실
박재삼은?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네 살때 경상남도 삼천포로 이사를 와 그곳에서 자랐다. 삼천포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수학했다.
1953년 시조 〈강물에서〉를 모윤숙 추천으로 《문예》 11월호에 발표했고, 1955년 《현대문학》에 유치환 추천으로 〈섭리〉를, 서정주 추천으로 〈정숙〉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62년에 첫 시집 《춘향이 마음》(신구문화사)을 낸 이래 시선집을 포함하여 열대여섯 권의 시집을 세상에 펴냈다.
1955∼1964년 월간 《현대문학사》 기자를 거쳐서 1965∼1968년 《대한일보》 기자, 1969∼1972년 《삼성출판사》 편집부장, 월간 《바둑》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1974년에 한국시인협회 사무국장과 1993년에 새로이 창간된 계간《한겨레문학》 초대편집위원을 역임했다. 1997년 지병에 시달리다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1933년 4월 10일 아버지 박찬홍(朴贊洪)과 어머니 김어지(金於之)의 차남으로 일본 동경부(東京府) 도남다마군(稻南多摩郡) 성촌실야구(城村失野口) 1004번지에서 출생. 아버지는 모래 채취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형과 누이동생 둘이 있다.
1936년 4세 때 가족이 모두 귀국하여 어머니의 고향인 경남 삼천포시 서금동 72번지에 정착했고, 이곳에서 성장함.
1937년 누이 동생 순애 출생.
1940년 삼천포 히노데(日出)국민학교에 입학함. 이 학교는 뒤에 수남(洙南)국민학교로 개칭했고, 현재는 삼천포초등학교임.
1942년 누이 동생 순엽 출생.
1946년 수남국민학교 졸업 후, 3천 원이 없어 신설된 삼천포중학교에 진학을 못하고 신문배달을 하던 중 삼천포여자중학교의 가사 담당 여선생의 도움으로 그 학교 사환으로 들어감. 그때 삼천포여자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시조시인 김상옥 선생을 만나 감화를 받고 시를 쓸 결심을 굳혔음.
1947년 삼천포중학 병설 야간중학교에 입학, 낮에는 여중에서 급사로 일하고 밤에는 수업을 들음. 성적은 전교 수석. 김상옥 선생의 첫 시조집 “초적(草笛)”을 살 돈이 없어, 그것을 공책에 베껴 애송하는 등 시에 더욱 심취하였음.
1948년 교내신문 “삼중(三中)” 창간호에 동요 ‘강아지’, 시조 ‘해인사’ 발표.
1949년 경영부진으로 야간 중학교가 폐쇄되어 주간 중학교로 흡수됨. 이때 야간 중학교에서 전교 수석을 한 덕택으로 학비를 면제받고 주간 중학교 학생이 되었음. 제1회 영남예술제 ‘한글시 백일장’에서 시조 ‘촉석루’가 차상으로 입상. 당시 장원이던 이형기와 친교를 맺음.
1950년 진주 농림에 다니던 김재섭(金載燮), 김동일(金棟日)과 함께 동인지 “군상(群像) 펴냄.
1951년 4년제 중학 졸업 후 삼천포고등학교 2년에 편입학함. 이때 처음으로 술을 시작함.
1953년 삼천포고등학교를 수석 졸업(제1회). 이때가 가장 부지런히 시작을 한 시기였음. 모윤숙 추천으로 시조 ‘강물에서’가 “문예”지 11월호에 발표됨. 피난지 부산 동광동 3가 8에서 제2대 민의원이었고 중학교 시절 교장이었던 정헌주(鄭憲住) 선생의 집에서 식객노릇을 함.
1954년 은사 김상옥 선생의 소개로 현대문학사에 취직, 창간 준비를 시작함. 당시 주간은 조연현, 편집장은 오영수, 편집사원으로는 임상순, 김구용이 있었음.
1955년 “현대문학”에 ‘시조 섭리'(6월호, 유치환), ‘시 정적'(11월호, 서정주)으로 추천을 완료, 김관식, 신동준 등과 함께 등단함. 이해에 고려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함(3년 중퇴).
1957년 시 ‘춘향이 마음’을 발표하고 현대문학사 제정 제2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함. 고려대학교를 3년 중퇴하고 “문예춘추”와 “대한일보” 기자로 활동 시작함.
1958년 육군 입대. 1년 6개월 근무하고 예비역으로 편입됨.
1961년 구자운, 박성룡, 박희진, 성찬경 등과 함께 “60년대사화집” 동인으로 활동.
1962년 김정립 여사와 결혼. 하숙을 하던 서울 종로구 누상동 166의 20번지에서 신접살림을 차림.
1962년 처녀시집 “春香이 마음” 출간(신구문화사).
1963년 장녀 소영(召英) 출생.
1964년 “현대문학사”를 그만두고 상중당에 입사하여 “문학춘추” 창간에 참여, 1년 근무(“문학춘추”의 판권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자 퇴사함).
1965년 경우당(景友堂) 발행의 월간 “바둑”지 편집장으로 입사했다가 6개월만에 그만두고 “대한일보” 기자로 입사, 3년 근무.
1966년 장남 상하(祥夏) 출생.
1967년 남정현의 ‘분지’ 사건 공판을 처음 보고 충격을 받아 고혈압으로 쓰러져 6개월 가량 입원. “대한일보”에서 퇴사함.
1967년 문교부 주관 문예상 수상.
1969년 삼성출판사 입사.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 11-83번지에 처음으로 집을 마련함. 다시 고혈압으로 쓰러짐. 이때의 고통과 이 고통에서 벗어난 기쁨을 시로 엮은 것이 제2시집 “햇빛 속에서”임.
1970년 한국시인협회 주관으로 제2시집 “햇빛 속에서” 출간(문원사). 이때부터 “서울 신문”, “대한일보”, 국제신보” 등에 바둑 관전기를 쓰기 시작함.
970년 차남 상규(祥圭) 출생. 이듬해(1971년) 상규가 뇌막염으로 메디칼 센터에 입원했다가 17일만에 퇴원함.
1972년 직장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나 홀가분한 자유인이 됨. 산문 등의 원고료로 생활비 충당함.
1973년 일본어를 번역하여 생활을 꾸려감.
1974년 한국시인협회 사무국장으로 피선됨.
1975년 제3시집 “천년의 바람” 출간(민음사). 대한기원 이사가 됨.
1976년 제4시집 “어린 것들 옆에서” 가 국민학교 동창 김욱상의 도움으로 출간(현현각)됨.
1977년 제9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제1수필집 “슬퍼서 아름다운 이야기” 출간(경미문화사). 서울 묵동 177의 3번지로 이사함.
1978년 제2수필집 “빛과 소리의 풀밭” 출간(고려원).
1979년 제5시집 “뜨거운 달” 출간(근역서재).
1980년 제3수필집 “노래는 참말입니다.” 출간(열쇠). 위궤양으로 한양대학병원에 약 보름간 입원.
1981년 제6시집 “비 듣는 가을나무” 출간(동화출판공사). 고혈압, 위궤양으로 40여일간 한양대학병원에 다시 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