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 성도에게 원하시는 것은? / 호 6:1-11
구약에 등장하는 대개의 예언자들은 고독하게 살았습니다. 아마 엘리야가 대표적이겠습니다만, 그 이외의 예언자들도 거의 같았습니다. 부르거만이 ‘예언자적 상상력’이라는 책에서 말했듯이, 예언자들이 왕들과 경쟁관계에 있었다는 점만이 아니라, 그들의 예언이 대중적이지 못했다는 점이 바로 그 이유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언자들의 말을 듣기 싫어했습니다. 예언자들의 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행위 앞에서도, 그들의 믿음은 별로 자라지 않았습니다. 단적인 예로 온 천하가 떠들썩한 출애굽 사건이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크고 작은 시련이 닥치자 곧 불평불만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도우심으로 가나안에 입성한 이후로도, 그들은 곧잘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바알을 섬기고 이방인들의 풍속을 따랐습니다. 이런 예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아마 구약 성서 전체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앙에 대한 경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호세아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치실 때, 얼마나 아픈지 느끼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지만, 아직 생계에 위협을 받지 않고 있으니까, 회개할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고, 심령은 찢어질 대로 찢어져 있는데도, 아직 밥 먹을 수 있고, 어느 정도의 수입이 있으니까,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보다 더 답답한 노릇은 없습니다. 아직 이스라엘 백성은 완전히 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좀 어렵기는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먹고 살만 하고 견딜만합니다. 철저한 회개가 있기까지, 하나님은 그들을 방치해 놓으십니다. 아무리 고통소리와 신음소리가 커도, 하나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참된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현재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는 지금의 상황이 지극히 절망적이긴 해도,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고 있는, 소수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력하게 초청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만 희망이 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말은, 지역적인 이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장소를 바꾸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상태를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맘대로의 삶’에서, 이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 따로, 나 따로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 때문에 손해 볼 필요야 없지” 하는 생각에서, “주님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 돌이킴이 언제부터입니까? 망하고 나서입니다. 망해도 쫄딱 망하고 나서입니다. 찢어져도 완전히 찢어지고 나서입니다. 상처를 입어도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고 나서입니다. 제 힘으로 도저히 일어설 수 없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희망의 불빛이 희미하게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자기 내면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음성이 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걸.” 그때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이라도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사실 염치없는 일입니다. 부끄럽고 뻔뻔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찢으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찢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도로 낫게 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마음은 조금도 편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픈 마음으로 때로는 우리를 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싸매어 주시기 전에는, 주님의 가슴에 든 멍이 가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망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께로 돌이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물며 그의 자녀인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겠습니까? 매 맞고 꾸중 들으며 살지 않고, 하나님께 기쁨을 주는 자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처해 있는 형편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를 너무 고상하게 믿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어린 아이를 안으시고,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게 순수하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 붙들고 우는 신앙, 하나님 한 분에게만 매달리는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십니까?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살리시는 분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언제? 이틀 후에 살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죄로 인해 파괴된 이 땅을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그것도 며칠 만에? 삼일 만에. 하나님은 단 삼일 만에 완전히 회복시킬 수 있는 분입니다. 자고로 하나님은 살리시는 데는 성격이 급하십니다. 살리시는 일이라면 불같습니다. 이틀 사흘이 우리에게는 한없이 길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틀 후 사흘”을 “얼마 있지 않아서”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 있지 않아서” 우리의 어려운 상황을 반전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변하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변화란 회개를 말합니다. 사실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은,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회개하는 과정은 더 없이 고통스럽습니다. 회개하는 것이 그토록 고통스럽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죄를 쉽게 지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틀 후에 살리신다고 하니까, 우리가 대수롭지 않은 상태에 놓여 있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가망 없는 상태입니다.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누가 찢고, 누가 치셨습니까? 하나님이 찢으시고, 하나님이 치셨습니다. 누구라도 이걸 보고는 살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듭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동안의 삶이 어떠했는지 보다,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
물론 우리는 과거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과거 따로, 현재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과거가 좋은 현재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위해서라도 오늘을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럼 형편없었던 우리의 과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은 진정 과거에 대해 자유합니까? 여러분의 지난날들은 지금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삶이었습니까? 우리는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과거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 때문에 현재의 삶을 그르친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사람도 없습니다. 더러운 과거를 묻어둔 채, 현재를 아름답게 수놓을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게 과거를 청산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과거를 청산해야만 과거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지는 모르지만, 결코 잊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과거는 청산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과거 청산을 성경은 뭐라고 표현합니까? “회개”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가, 당장은 편해 보이고, 당장은 무엇인가를 아끼는 것 같습니다. 양이 목자를 떠나면, 처음에는 세상 편한 것 같습니다. 간섭이나 통제에서 벗어나, 맘껏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떤가요? 죽음입니다.
그런 사람이 꼭 교회 밖에만 있다고 생각해선 안됩니다. 얼마든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이 병들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돼지 우리에 살면서도, 자기 처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참 답답할 노릇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알려줘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당신이 암이라고 가르쳐줘도, 지금이라도 수술하면 살 수 있다고 말해줘도, 기어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회개만이 우리가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회개한 사람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설령 사람에게서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진짜 사는 것인 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다가 사람 앞에서는 왕따를 당해도,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이 진짜 축복입니다. 이 땅에서 사람 앞에서 죽어지내는 기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습니다. 곧 끝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분 앞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목적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서 회복을 받은 사람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내가 그분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그렇습니다. 집안일을 해도 그렇습니다. 돈버는 일을 해도 그렇습니다. 길을 걸을 때도, 운전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숨가쁜 초청에 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않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안다”는 단어 속에, “인정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알고 보니, 그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인정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나님의 임하심이 두 가지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나오심을 새벽 빛에 비유했습니다. 밤이 깊어질 때면, 다시는 새벽이 올 것 같지 않고 영원히 밤만 계속될 것만 같습니다. 실제로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깜깜합니다. 그러나 흑암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의 형틀이 우리를 계속하여 묶어 둘 수 없습니다. 고통의 터널은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새벽 빛같이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비칠 때, 우리의 고통의 밤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새벽 빛같이 임하시기를 원합니까? 우리의 삶에서 고난의 그림자를 몰아내고 싶습니까?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알고, 그분을 인정하기 바랍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임하심을 늦은 비에 비유했습니다. 밭이 타들어 가는 것을 보며, 비가 오지 않음에 농부가 절망하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특히 이른 비에 비해 늦은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입니다. 농부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적셔주는 시원한 비입니다. 하나님은 늦은 비같이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으며 부끄럽지 않게 하십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고생하는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이 늦은 비같이 임하시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알고, 그분을 인정하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새벽 빛같이 예고없이 오십니다. 그러나 그냥 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오시기 전에 인간의 애태움이 있었습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애태움이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늦은 비같이 갑자기 오십니다. 그러나 늦은 비가 오기 전의 농부와 땅의 애태움이 있었습니다. 쩍쩍 갈라지는 땅을 보며, 농부가 얼마나 비를 애타게 기다리겠습니까? 땅이 타들어간다는 말보다, 농부의 마음이 타들어간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원하되, 이렇게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되 이렇게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예수를 가벼운 마음으로 믿는 것 같습니다. “내가 기어이 하나님을 만나고 말겠다”는, 절박함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신앙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광신자라는 말을 들을까봐 겁부터 냅니다. 군대 용어로 몸을 사립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하여, 손해라도 좀 볼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렇게 믿으면, 백날 믿어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은 당시에도 많았습니다. 노아 시대에도 많았고, 모세 시대에도 많았고, 엘리야 시대에도 많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당시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지 못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사회로부터 무시를 당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자기 자신조차도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4절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이런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신앙을 보시면서, 한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도대체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말입니다.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배여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보통 사람 같으면, 화병이 나서 죽어도 진즉 죽었을 것입니다. 속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지금 몇 번째입니까?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들의 다짐은 아침의 구름 같았고, 쉬 없어지는 이슬 같았습니다. 가뭄이 심할 때, 아침에 구름이 잔뜩 끼어있으면, 사람들은 소망을 가집니다. 그러나 해가 뜨자 구름은 금방 사라져 버립니다. 기대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실망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뉘우치는 모습을 보시면서,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나겠구나” 하셨는데, 그냥 그 말로 끝입니다. 통성으로 막 소리지르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오, 이번에는 틀림 없구나” 했는데, 그것으로 끝입니다.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입니다.
5절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보다 못한 하나님이 어떤 조치를 취하십니까?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선지자를 보내어 칩니다. 하나님의 대변자인 종들을 보내어 말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그런데도 미적거리고 있으면, 어떻게 심판하십니까? 심판이 빛처럼 나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갑자기 임한다는 것입니다. 예기치 못한 날 급작스럽게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심판이 멀었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있을 때, 홀연히 임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 앞에 설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힘들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독하게 마음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고, 경쟁사회에서 양보하면 늘 손해 볼뿐더러, 살아남기도 어렵다는 것도 잘 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 말씀을 보면서 “아하,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구나” 하면, 성경을 잘못 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만일 제사가 정상적으로 드려졌다면, 6절 말씀은 굳이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이용해 먹었습니다. 설사 죄를 짓는다 해도, 제사 드리면 그만이니까, 맘 놓고 죄를 지었습니다. 제사 따로, 생활 따로였던 것입니다. 예배와 생활이 분리된 이중적인 삶이었습니다. 실제 생활에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다가, 교회에 와서는 “주여! 주여!” 하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는 하나님과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끌지도 못합니다. 이건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해서 드리는 종교놀음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인애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예배자의 생활 속에서, 인애가 구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애와 예배가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 대상이 분명히 다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고, 인애는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번제 이전에 하나님을 알아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일순간이 아닌 지속적으로 말입니다. 어떤 일을 한두 번 하는 것은 쉽습니다. 한두 번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한두 번은 참을 수 있습니다. 한두 번은 환란 가운데서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도, 한두 번은 몰라도 꾸준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일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데, 저 일에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작은 돈에서는 십일조를 떼는데, 큰돈에서는 십일조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어떤 자리에서든지 지속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7절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할 때 어떻게 됩니까? 먼저 개인이 하나님의 언약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언약이 어디 보통 언약입니까? 영원한 생명이 걸린 언약입니다. 영생을 약속한 말씀을 그는 너무 가볍게 여겼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언약은 무리한 것이 아닙니다. 불평등 조약이 아닙니다. 누가 봐도 아담이 충분히 지킬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담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스스로 파기했습니다. 파기한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지식적으로 명백히 알았음에도 언약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어기다”는 말은 ‘경계를 함부로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경계”를 지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답답해 보임으로 경계를 맘대로 넘나듭니다. 말씀에 전적으로 불순종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말씀만 지킵니다. 자기 기호에 따라 말씀을 골라잡습니다. 더 나아가 경계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까지 혼동을 초래하게 합니다.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남까지도 망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두 사람이 그러면 금방 표가 납니다. 쉽게 눈에 띄게 됩니다. 확연히 죄인으로 분류됩니다. 문제는 만연된 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죄가 만연되어서 죄를 죄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8절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할 때 어떻게 됩니까? 다음은 신앙 공동체의 오염입니다. 길르앗은 도피성이 있는 곳입니다. 길르앗은 요단 동편에 있는 도피성 세 개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지불식간에 살인한 자의 생명을 지켜주시기 위해 피할 성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큰 배려입니다. 그런데 이 마을이 지금 어떻게 불립니까? 피 발자취가 가득한 행악자의 고을이라고 불립니다. 더 이상 은혜의 성이 아닌 악인의 성이 되었습니다. 자기들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하나님이 악인의 성이라고 평가합니다. “그 정도 죄를 가지고 그러느냐? 다른 성은 더 그렇다”고 항변해도 소용없습니다. 길르앗은 도피성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성보다 도피성은 달라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교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바된 교회인 우리에게 특별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세상을 이기는 탁월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모인 신앙공동체 안에, 거룩함과 자비로움이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공동체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9절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할 때 어떻게 됩니까?그 다음은 지도자의 타락입니다. 하나님은 지도자를 특별히 눈 여겨 보십니다. 지도자가 미치는 영향 때문입니다. 당시 백성의 죄가 만연하여 느끼지 못했다면, 지도자의 죄는 워낙 교활하여 발견되기 어려웠습니다.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기에 쿠데타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정치적 싸움에서 밀린 사람들은 보복을 피해 도피성으로 피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피한 사람들이 이상하게 하나 둘 죽었습니다. 알고 보니 제사장들이 살인을 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왜 죽는지 알턱이 없습니다. 설마 제사장이 살인할 것이라고는 꿈엔들 생각할 수 있겠습니가?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의 교활한 죄상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제사장은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편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 느끼며 중보기도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로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렵고 힘들어하는 이들의 편은 못들망정, 힘께나 쓴다는 자들과 짜고 살인을 하는 게 말이 됩니까? 종교 지도자가 타락하면 여간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지도자가 사람 차별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더럽히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 지도자, 더 나아가 노회 총회 지도자들을 위해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10절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할 때 어떻게 됩니까? 마지막으로 성전에서의 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 집이 어딥니까?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전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사람들이 행하는 음란한 의식을 그대로 배워와, 이제는 성전에서도 그 못된 짓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대해서, 특별히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죄라고까지 여기지 않았습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고 합리화했습니다. 이런 꼴을 지켜보아야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당신의 속마음을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이 시간 찬찬히 헤아려 보기 바랍니다.
11절 ‘또한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부터 먼저 추수하겠지만, 유다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부터 심판하겠지만, 유다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상대적으로 이스라엘보다 조금 나을 뿐이지, 크게 나을게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낫다고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더욱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 합니다. 또한 유다는 이스라엘이 사로잡힐 때, 함께 아파하기는커녕 입방아를 찧었습니다. “그따위로 신앙생활을 하니까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남이 잘못된 것을 보고 박수치면 안 됩니다. 말이라도 위로는 못해줄망정, 욥의 세 친구처럼 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친 상처에 약은 발라 주지 못할 바에, 상처를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남의 고통과 아픔을 마치 내가 당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울며 흐느끼는 중보기도자가 돼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을 아는 자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이 충실한 사랑을 하나님은 목말라 하십니다.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남은 자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시대에 영합하거나 대세에 따르지 아니하고,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 남은 자들이고,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위기가 있습니다. 우리 가정적으로, 우리 교회적으로, 우리 사회적으로, 그러나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는한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너무나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회는 갈갈이 찢겨있고, 상처투성입니다. 우리의 삶은 곤고합니다. 그 어느때보다도 기도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기도만이 아니라, 회개의 삶, 말씀의 삶, 주님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의 삶을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구하는 모든 것들에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주님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단해 보면서, 영적인 건강상태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진정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게 하옵소서. 힘써 하나님을 알아가는 새로운 출발과 결단을 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오로지 하나님을 제대로 알다가 죽는 것이 나의 소원이 되게 하옵소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누리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영생에 이르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