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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金殷鎬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우리 시조 사랑 ・ 2024. 10. 22.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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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金殷鎬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시대 : 근현대기
출생-사망1892. 6. 24. ~ 1979. 2. 7.
분야일반회화
직업화가
근현대기에 활동한 화가이다. 호는 이당(以堂), 아명은 양은(良殷), 본관은 상산(商山)이다.
1892년 인천시 문학산 밑 향교리현1)에서 비교적 부농(富農)인 상산 김씨 2대 독자로 출생하였다. 조부는 김용익(金容益), 부친은 김기일(金基一), 모친은 의성(義城) 김씨이다.
어린 시절에 글방에서 한문을 배우며 성장하였는데 이때부터 신당(神堂)의 탱화를 모사하는 등 그림에 재주를 보였지만 화가가 되는 것을 반대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신학문의 습득에 관심을 두었다.
1906년에 새로 생긴 인천관립일어학교에 입학하였지만 1907년에 인척이 저지른 사주전사건(私鑄錢事件)에 부친이 연루되어 재산을 몰수당하고 집안이 몰락해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 후 사립인천인흥학교(私立仁川仁興學校) 측량과에 입학하여 1908년 12월에 단기로 소정의 과정을 마쳤지만 이듬해에 부친이 사망하자 절망에 빠졌고 가장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가산을 정리해서 조부와 모친, 부인경주 이씨와 함께 인천에서 서울로 이주를 하였지만 곧 조부가 별세하였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궁핍하여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21세 되던 1912년 여름, 영풍서관(永豊書館) 주인의 부탁으로 고서(古書)를 세필로 베끼고 있는 것이 우연히 중추원 참의였던 김교성(金敎聲)과 장안의 명사 현채(玄采)의 눈에 띄어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김교성의 소개 편지로 당시 백목다리 근처2)에 있던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의 화과에 편입학하여 본격적인 회화수업을 받기 시작하면서 화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당시 서화계에 쌍벽을 이루었던 안중식과 조석진의 문하에서 전통화법을 배웠다. 교수진으로는 정대유 · 강진희 · 김응원 ·
강필주, 그리고 조교급으로 이도영이 있었다.
김은호는 제1기로 입학한 오일영 · 이용우에 이어 제2기로 화과에 편입학하여 3년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1915년에 졸업했다. 이 즈음에 김은호는 '양은(良殷)'이라는 초명 대신 '은호(殷鎬)'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초기 화풍은 스승인 안중식의 사의적(寫意的) 산수화풍을 충실히 보여주며, 조선 말기 화단을 계승한 연장선상에 있었다. 김은호는 세필의 정교한 묘사력으로 그린 초상화로도 널리 알려졌다.
화과를 졸업한 후 이어서 서과에 다시 편입학하여 1917년에 졸업하면서 서화적 기량을 두루 겸비한 화가로 성장하였다.
김은호의 회고록에 의하면, 1912년 서화미술회에 들어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순종의 어진을 그릴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이 때 안중식으로부터 '이당(以堂)'이라는 호를 받았다. 대원수복 차림의 순종어진은 1913년에 완성되었는데, 창덕궁 대조전에 걸렸다가 1917년 11월에 있었던 대화재로 대조전이 전소되면서 불타 버렸다고 한다.
김은호, 순종어진 유지초본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순종어진>유지초본은 그 제작시기를 두고 1912~13년설, 1915~16년설이 제기되고 있다.
김은호가 정식으로 순종 어진을 제작한 시기는 1916년 7월 매일신보의 보도와 1916년 10월 순종실록을 통해 확인되는데 특히 후자에는 김은호가 어진제작에 대한 댓가로 300원을 받았다고 기록되었다.
1913년에 순종 어진을 완성했을 때 왕실로부터 4천원이란 거금을 받았다는 김은호의 증언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
김은호의 또 다른 회고에는 1913년 순종어진 제작에 이어 1914년에는 고종어진(곤룡포 상)도 제작하였다고 했는데 이 역시 창덕궁 선원전에 봉안되었다가 6 · 25전쟁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후 또 다시 순종어진을 그리게 되었는데, 1928년에 순종의 승하 후 진영을 창덕궁 선원전에 봉안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1935년 4월부터 1936년 1월까지 만9개월에 걸쳐 세조(世祖)와 원종(元宗)의 어진도 모사했음을 『선원전영정모사등록(璿源殿影幀摹寫騰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화가로 입문한 초기부터 어진화가로서 주목을 받았으며 처음 순종어진을 제작하는 와중에 천도교의 일파인 시천교(侍天敎)의 교주 김연국(金演局)의 요청으로 교당에 모실 3대 교주의 초상도 그렸다.
교조 최제우(崔濟愚), 2대 최시형(崔時亨), 그리고 김연국 자신의 초상화까지 3점의 초상화는 현재 계룡산 구암(龜菴) 김연국의 문중에 전해지며, 사진처럼 정교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이 일로 김은호는 오랜 가난에서 벗어나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었고, 어용화사라는 명성을 배경으로 상류 귀족계층의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미인화를 비롯한 극채색 인물화로 대중적인 인기도 누릴 수 있었다.
1915년 일제의 식민통치 5주년을 기념하는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 약칭 공진회]에 <조선의 가정>이란 작품을 출품해서 포상을 받았다.
이어서 1918년에는 바로 전 해에 훙서한 고종의 조카 이준용(李埈鎔)의 사우(祠宇)에 봉안할 영정을 그렸고, 이지용(李址鎔) 등 귀족들과 함께 금강산 여행을 다녀오며 교류의 폭을 넓혔다.
이 해 말에 첫 부인인 이씨가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고, 그 이듬 해에는 기미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천주교인이 찍어낸 독립신문을 배포한 일로 서대문 감옥에 6개월 정도 투옥되었다.
1920년에 서화계의 중진과 신진화가들이 동원되어 새로 중건된 창덕궁 내전의 벽화를 제작한 사업에 참여하여 화려한 채색의 궁중장식화이자 부벽화(付壁畵)인 <백학도(白鶴圖)>를 그렸다.
1918년에 당대 서화가들의 모임인 서화협회(書畵協會)가 발족되자 정회원으로 참여하였고, 1921년 제1회 서화협회전에 <축접미인도(逐蝶美人圖)>와 <애련미인도(愛蓮美人圖)>를 출품하여 주목받았다.
서화협회전에는 고희동과의 불화로 1926년부터 1929년까지 불참하였지만 1929년 임시총회에서 15인의 간사진에 들면서 1930년부터 다시 참여하여 마지막 전시였던 1936년 제15회까지 출품하였다.
서화협회전과 더불어 총독부가 주관한 관설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약칭 조선미전]의 제1회(1922)에는 <미인승무도(美人僧舞圖)>를 출품하여 4등상을 수상하였다.
조선미전에는 제3회(1924)에 <부활후(復活後)> 3등상, 제6회(1927) <부감(俯瞰)> 특선, 제7회(1928) <북경소견(北京所見)> 특선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제8회전에는 출품작 모두 입선에 그쳐 이후 더 이상 출품하지 않고 서화협회전에만 출품하거나 후학양성에 힘썼다.
1923년에는 서양화가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고려미술회(高麗美術會)의 전람회에 찬조출품하였고, 명칭이 고려미술원으로 개칭된 후 연구회를 운영하게 되었을 때는 이병직(李秉直)과 함께 서화 지도를 하였다.
고려미술원의 조력자였던 이용문(李容汶)은 이 때의 인연으로 후일 김은호에게 유학에 필요한 일체의 여비를 부담하는 파격적인 대우로 일본행을 권유하였다.
30대 초반인 1925년에 이용문의 재정적 후원으로 변관식과 함께 일본 도쿄로 3년간 유학을 다녀왔고 이 경험은 한국화단에서 김은호의 입지를 대내외적으로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유키 소메이(結城素明)에게 사사했으며,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의 수업을 청강하면서 일본화의 채색감각을 본격적으로 익혔다.
유학 중에는 일본 최초의 미술관인 동경도미술관(東京都美術館)의 개관전으로 열린 성덕태자봉찬미술전람회(聖德太子奉讚美術展覽會)에 <승무복(僧舞服)>(1926)을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일본의 대표적인 관전인 제국미술원전람회(帝國美術院展覽會)에 두 차례나 연이어 입선하는 등 주로 채색미인화로 이름을 날렸다.
김은호(金殷鎬), 간성(看星)
1927년, 비단에 채색, 138×86.5cm, 삼성미술관리움
유학 중 잠시 서울에 들러 그린 <간성(看星)>(1927)은 제6회 조선미전에 입선하였다. 일본에서 익힌 신감각의 미인화풍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1920년대 초에 그린 <애련미인도>나 <축접미인도>와 비교해 보면 그 변화를 뚜렷히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대 다른 화가들처럼 어느 특정 화목(畵目)을 집중해서 그리기 보다는 인물 · 산수 · 화조 · 영모 등 다양한 화목의 그림을 그렸고 인물화도 초상화 · 미인화 · 역사인물화 · 고사인물화 등을 폭넓게 소화하였다.
한편 김은호는 화가로서 뿐 아니라 미술교육자로서도 활발히 활동하였다.
1930년대 중반부터 와룡동 낙청헌(絡靑軒) 화실에서 김은호의 지도를 받은 백윤문 · 김기창 · 장우성 · 한유동 · 조중현 · 이석호 · 조용승 · 장운봉(張德)으로 개명 · 이유태 등이 조선미전에 등단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1936년에 후소회(後素會)를 조직하여 1943년까지 6회의 전시회를 가졌다.
해방 직전까지는 정홍거 · 정완섭 · 김화경 · 배정례 · 허민 · 안동숙 · 이규옥 · 김학수 · 김재배 · 이남호 등이 모여 약 30명에 이르렀다.
같은 해에 허백련 · 박광진 · 김복진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미술연구소로 조선미술원(朝鮮美術院)을 개설하고 역시 연구생을 모집하며 후학양성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화단에서의 입지를 생각해서인지 그동안 외면했던 조선미전으로부터 제16회전(1937)부터 새로 신설한 '참여' 제도에 따라 한국작가로서는 처음 심사참여작가로 추대되어 마지막인 제23회(1944)까지 출품하였다.
1940년에는 낙청헌 화실 외에 '이묵헌(以墨軒)'이란 당호가 붙은 화실을 따로 개설하여 서화애호가들의 교양취미를 즐기는 교류의 장소로 이용하도록 하였고, 1941년에는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회원서화전을 열었다.
1940년 5월에는 동아일보사 학예부가 후원하고 조선미술관(朝鮮美術館)이 주최한 10대가 산수풍경화전(十大家山水風景畵展)에 고희동 · 허백련 · 이상범 · 박승무 · 이한복 · 최우석 · 노수현 · 변관식 · 이용우와 함께 초대되었다.
매년 개최하려던 계획은 1회전으로 그쳤지만, 여기에 선정된 10대가는 주최측에 의해 모두 엄격한 추천과 전형을 통과한 화가들로 해방 후까지 동양화단을 대표하였다.
문화예술계에서의 영향력이 컸던 만큼 일제의 중일전쟁(1937) · 태평양전쟁(1945) 등 전쟁을 옹호하고, 선동하는 정치적 목적에 동원되는 일이 많았다.
1942년 10월에는 수익금을 국방기금으로 헌납할 목적으로 마련된 조선남화연맹전에 노수현 · 허백련 · 이상범 · 이응로 · 배렴 · 윤희순 · 김기창과 함께 지명출품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제1회전을 가진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은 총독부 정보과와 국민총력 조선연맹이 주최하고 조선미술협회가 후원한 전람회로 1944년까지 3회 열렸는데 이 때 이상범과 함께 전람회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조선미전의 참여작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해방후 화단은 식민잔재의 청산과 새로운 한국화풍의 수립이라는 당면 과제가 부각되었고 이로 인해 조선미술건설본부로부터 친일미술가로 지목되어 해방 후 화단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식민잔재의 청산이라는 과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좌우익의 대립이라는 이념적 문제가 대두되면서 흐지부지되었고 1946년 1월에 열린 두방전(斗方展)에 출품을 요청받아 이상범과 함께 출품하였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추천작가로 활동을 재개하였다. 한때 고희동과의 미묘한 대립으로 2, 3회전에 불참하였지만 4회전부터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유려한 필선과 치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채색 미인화와 신선도, 화조도를 선보였다.
이 시기에 순천 충무사에 봉안할 <이충무공 영정(李忠武公影幀)>(1945~1950) 제작에 몰두하였다.
당시 화단의 분위기가 채색화를 일본화와 동일시하여 경계하는 상황이었으므로 1950년대에는 수묵담채의 신선도나 화조화를 그려 전통적인 문인화풍의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김은호(金殷鎬), 신선도(神仙圖)
1918년, 비단에 채색, 각 159.5×52.0cm, 국립고궁박물관
1950년에는 해방전에 6회로 그쳤던 후소회전이 다시 열렸지만 곧 6 · 25전쟁이 일어나 김은호는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
이 때 변관식 · 김학수와 함께 도자기 접시에 그림을 그리며 연명하였는데, 1952년 7월에 <이당 김은호선생 작품 감상회>를 후원받아 개최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당시 국회의장이던 신익희의 의뢰로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의 대관식 때에 선물할 초상화를 그렸다.
이 외에 진주의 논개사당에 봉안된 <의기 논개상(義妓論介像)>(1955), <춘향상>(1960), 강릉 오죽헌의 <신사임당상>(1965), <이율곡상>(1965), 밀양 영남루의 <아랑상(阿娘像)>(1965),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영정(1967), 전주 이영남장군사당(李英男將軍祠堂)의 영정(1970년 무렵), 그리고 간디의 초상화(1966) 등 역사 인물상을 제작하였다.
1961년 제10회 국전부터 새로 편성된 고문에 추대되었고, 1964년부터 1967년까지 다시 추천작가로 계속해서 출품하였다.
1960년대부터 만년기에는 채색산수화로 새로운 화풍의 변화를 시도하였고, 1970년대에는 보다 강렬한 채색의 현대적 풍경화로 변화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수묵담채의 화조영모화나 신선도, 그리고 전통적 주제의 산수화를 그려 회고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1962년에 예술업적과 화단활동으로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고, 1968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6년 민족문화상 학예부문 본상을 수상하였다.
서울시문화상 미술부문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66년 75세로 수도여자사범대학의 명예교수로 초빙되어 만년기에도 후학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71년에 서울신문사 주최로 열린 동양화 6대가전에 출품하였다. 1968년에 평전 『화단일경(畵壇一境)』이 간행되었고 화가로서의 삶을 정리한 자서전인 『서화백년(書畵百年)』을 출간하였다.
후소회는 오늘날까지 명맥을 잇고 있으며 2006년에 70주년을 기념하는 세미나와 전람회가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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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강민기(일반회화)주요 작품순종어진 유지초본(1912~1913 또는 1915~1916) , 侍天敎三代敎主肖像 , 白鶴圖(1920) , 初冬(1926) , 看星(1927) , 春香像(1960, 원화는 1939년 제작) , 이충무공영정(1962) , 秋景山水圖(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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