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턴 부인, 그대의 푸르른 산비탈에 둘러싸여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2023.7.24.월. 여성 세미나 박은희
하이 스미스 글은 재미있다. 이야기가 평범하게 흘러가는 것 같지만 끝 부분에서는 반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유적인 표현이 찰떡이다. 뉴욕의 뜨거운 여름날 오후 교통체증을 ‘흐름을 잃은 굼뜬 냇물과 같았다. 앞으로 흐르는지 뒤로 흐르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라고 표현하다니. 이 표현은 우리가 가끔 만나는 삶이기도 하다. 삶이 이럴 때 지치기도 하고 우울해지고 불안해한다. 힘들다. 쉬고 싶다. 잘하고 있나? 앞으로 어떻게 될까? 쉬고 싶은데 쉬어도 되나?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지는 않을까? 점점 더 일을 못하게 되면 어쩌지? 등등 머릿속이 온갖 상념으로 가득 찬다. 그럴 때 매력적인 누군가를 만나면 끌리게 된다.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환상일지라도. 불안에서 떨림으로 전환된다.
바우어 박사는 정신분석 전문의다. 현재 루틴에 따라 열심히 일하지만 주도적 의욕을 모조리 앗아가 버린 엄청난 속도와 야망의 도시 뉴욕. 뉴욕에서는 열심히 일한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지만 빈이나 파리에서는 일을 하고 삶을 살았다. 저녁이면 아내와 친구들과 마음 편히 즐기며 에너지를 얻어 이른 새벽까지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읽을 수 있었다.
삶이 없는 일을 반복하다보면 불안하고 우울해진다. 삶은 사람이라고 했다. 사람이 없는 삶. 일만 있는 생활? 사람은 일만 하면 안 되나 보다. 일이 삶이고 삶이 일일 수는 없을까? 나는? 일이 너무 많다. 그것이 나의 삶이기도 하다. 몸은 피곤하지만 우울하거나 불안하지 않다. 그 와중에 매력적인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삶에 활력이 생긴다.
바우어 박사는 유럽의 저녁들과 겹치고 자기 동력으로 움직이는 존재 같은 애프턴 부인을 만나면서 생기가 도는 것 같다. 만나면 기분 좋아지는 여성. 그녀가 투영하는 삶의 방식이 연금술처럼 세계를 완전히 딴판으로, 훨씬 더 아름다운 공간으로 바꿔 버린다. 흐름을 잃은 굼뜬 냇물과 같은 바우어의 세계를 천국처럼 시원하게 만드는 여자.
행복을 위해 태어나고 길러진 여자가 행복을 거부해버린 남자에게 묶여 살고 있는 여자. 파리를 떠올리게 만드는 아름다운 애프터부인은 바우어 박사에게 매번 운동에 집착하는 자신의 남편 상담을 하러 온다. 남편은 의사를 신뢰하지 못하며 의처증도 있다. 남편이 자신을 불륜으로 의심하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달려간 바우어 박사는 곧 그녀에겐 남편이 없으며, 이름 역시 애프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애프턴, 아니 프랜시스 고럼이 왜 애프턴이라는 거짓의 삶을 시작하는지는 다루어지지 않는다. 바우어 박사는 애프턴 부인과 잡혀있는 예약을 취소하지도 않는다. 다만 예약자 명을 고럼으로 바꿀 뿐이다.
거짓말과 비밀. 비밀이 있다는 건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 거짓말로 생긴 환상. 거짓말을 통한 행복. 그 행복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그 거짓말에 속는 사람. 사람들은 왜 거짓말을 할까? 아이들은 혼나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한다. 나이가 더 어릴 때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라면서 현실을 인식하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을 배우면서 점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아가 어린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거짓말을 하게 된다. 나는 언제 거짓말을 했지? 어렸을 때 걸레로 방청소하라고 했는데 하지 않았다. 금방 들통 났지만. 엄마는 변함이 없는 걸레를 보고 바로 알아채버렸다. 그 뒤로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강박적으로 노력했던 것 같다. 때로는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지나친 상상과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어 버리면 병증이 되는 것 같다. 애프턴 부인처럼.
미스 고럼으로 만나는 상담 장면은 어떻게 될까? 미스 고럼은 여전히 애프턴 부인으로 남편 이야기를 할 것 같고, 바우어 박사는 뉴욕의 뜨거운 여름날 오후와 겹치는 미스 고럼을 마주보고 일을 의식하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을까?
제목도 불안하다. 그대의 넓은 들판도 아니고 푸르른 산비탈. 푸르다는 것은 나무가 우거진 상태. 그 속에 숨은 산비탈은 위험해 보인다. 자칫 잘못하면 떨어질 수 있으니. 불안으로 둘러싸인 애프턴 부인. 불안을 감추기 위해 행복으로 둘러싸인 미스 고럼. 그 시대는 남편이 없는 여자가 살기에 많이 불안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없는 남편을 만들고 상상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지 않았을까? 그래서 정신분석 전문의를 찾아 간 것 같다. ‘내가 말하는 것은 모두 사실이에요. 그러니 직접 와서 남편을 만나 봐요.’ 하지만 진짜 남편은 없으니 불안하고 또 거짓말을 만들고.
이 소설에서 남는 단어는 거짓말, 행복, 불안이지만 더 깊이 있는 내용은 잘 모르겠다. 질문만 생각난다. 거짓말은 꼭 나쁜 건가? 거짓말과 환상과 상상의 관계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행복한 건가? 남편이 없으면 불행한 건가? 불안이 없을 수 있을까? 불안할 때 왜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나? 불안을 그대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불안은 없어야 하나? 불안할 때 어떻게 하나? 불안을 사랑할 수 없나? 불안은 누가 만드나?
이혁진 작가가 쓴 <사랑의 이해> 라는 책에 행복과 거짓말에 대한 문장이 생각났다.
‘행복에는 늘 거짓이 그림자처럼 드리우기 마련인 듯했다. 아니, 어쩌면 거짓은 조명일지도 몰랐다. 행복이라는 마네킹을 비추는 밝고 좁은 조명.’
정말 그런가? 투명 봉지 같은 나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도 행복하기 위해 거짓을 조명으로 사용한 적이 있었겠지만 기억을 못하는 건지 무의식적으로 억압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없거나 찾지 못했을 수도.
소설을 세 번이나 읽었지만 정리가 잘 안 된다. 어렵고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답답하다. 그래서 이 글도 불안하다.
첫댓글 '불안에서 떨림으로 전환된다.' 이미 소설을 자신의 방식대로 잘 읽어내고도 불안해 하시는 글이 더 매력적으로 읽힙니다. 인간의 불안이 숙명 같은 것이라면, 그 불안을 떨림으로 바꿔내는 일이야말로 주어진 숙명을 내가 선택하는 운명으로 변화시키는 일일 듯해요. 애프턴 부인이 미스 고럼으로 바뀌었을 때, 바우어 박사도 더 이상 예전의 바우어로 살아갈 수는 없을 듯해요. 내가 매력을 느끼던 환자가 늘 호소하던 그녀의 문제적 남편이 실은 '부재'한다는 걸 알았을 때, 바우어 박사는 그 공백에서 다른 걸 만나게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막힘이 흐름으로, 불안이 떨림으로, 권태가 몰입으로... 어떤 작은 사건 하나가 그것과 연루된 큰 맥락을 뒤집어 놓는다면, 그 '뒤집힐' 가능성을 늘 열어놓는다면, 모든 만남이 갖는 불안은 언제 어느 때 떨림으로 전환될지 모른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두근거리는 일일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