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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소유권은 원래 하나님에게 있다.
경제 가치의 모든 소유권은 생산자에게 있다.
경제에 필요한 모든 재화나 서비스의 소유권은 그 가치를 생산한 자에게 있다. 갑이 일하여 생산한 사과는 갑의 것이고, 을이 투자하여 생산한 컴퓨터는 을의 것이다. 병이 가수 활동으로 번 수입도 병의 것이다. 이것이 경제 질서의 뿌리이고,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필수 수단이다.
하나님은 주민이 이미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 일곱(또는 여섯) 족속을 몰아내고 그 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올 김용옥 씨의 생각처럼 하나님은 “사막의 깡패”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메시아라고 하면서 로마에 빼앗긴 주권과 영토를 찾아주지도 못하고,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마구간의 거지”라고 한 말도, 과연 그러한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야 지금 가나안 땅에 벌어지고 있는 하마스와 이스라엘, 이스라엘 민족과 아랍인들의 분쟁에 대해서도 우리가 문제의 본질을 찾아낼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땅은 누가 만들었는가? 땅은 사람이 생산하지 않았다.
사람은 땅이 없이 생존할 수가 있는가? 사람은 땅이 없으면 숨을 쉬지 못하여 바로 죽는다. 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가 없고, 사람은 땅을 떠나 존재할 수가 없다. 경제생활에서 필요한 일터는 땅이 없이 존재할 수 있는가? 없다. 그런데 그런 인간의 생존과 정상 생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땅이 없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이런 인간 생존에 필수재가 땅이며, 생활에 필요한 일터의 존립에도 땅은 필수물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생존과 생활,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데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땅은 사람이 생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그 물질을 생산한 생산자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땅을 생산한 사실이 없으므로, 사람이 땅에 대한 소유권을 가질 수가 없다.
지금 이 진술은 사람이 생활에서 지켜야 할 윤리적, 법적, 경제적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은 땅에 대한 소유권이 없다”라는 진술은 경제생활에서 실제로 적용, 실천되어야 하는 말이다. 흔히 하는 생각처럼 땅을 영적인 측면에서만 보게 되면, 이 말은 종교적 영역인 신앙고백의 차원을 넘지 못한다. 그러면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 말하는 토지주인과 청지기에 대한 인간의 역사는 신화나 소설처럼 여겨질 수가 있다.
그러면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땅과 생활에서 필수품인 땅을 창세기부터 놓쳐 버리고 계시록까지 가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보아도 땅이 없는 성경 풀이, 땅이 없는 세상 이해, 땅이 없는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며 살게 된다. 지금의 중동의 문제는 여기서 생겼으며, 생겨난 문제는 인간 스스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도 쉽지가 않다.
경제활동에서 땅은 하나님이 생산자다.
성경은 성경 첫 문장에서 땅의 생산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성경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1:1). 땅의 생산자는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지은 땅은 천지창조 3일째 되는 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사람이 먹고살 수 있는 온갖 먹거리를 생산하고 있다(창 1:11,12). 우리가 먹고살아야 할 양식도 사람이 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땅이 생산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렇게 땅부터 생산하여 사람이 먹고살 수 있도록 하여놓고 비로소 사람을 창조한다. 이것이 천지창조 6일째다(창 1:27). 사람을 창조한 이유도 하나님이 지으신 땅과 그 땅의 생물과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창 1:26). 그러므로 사람은 땅을 다스리기 위해서 태어났다(창조되었다). 사람은 땅을 다스리는 수고의 대가로, 땅은 먹고 살 수 있는 양식을 내어 보답한다(창 1:11). 하나님은 땅에 비를 내리게 하여 초목과 채소가 자라게 한다(창 2:5). 생명체는 초목과 채소가 자라야 살아갈 수가 있다.
여기서 세상은 땅의 생산자요 주인이신 하나님, 사람이 먹을 양식을 내는 땅, 그리고 그 땅과 땅이 낸 모든 것을 다스릴 사람이 필요하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늘, 땅, 사람 사이의 삼수 관계다. 또 세상이 존재하는 구조와 성경의 구성 체계는 삼수 구조다.
그러므로 땅의 주인은 하나님, 사람은 그 땅의 관리자일 뿐이다. 이것이 세상 질서의 기초이고, 경제생활의 필수적 관계이다. 그런데 이런 경제생활에서 관리자가 주인 형세를 하게 되면, 그 사회는 창조질서, 세상 질서, 그리고 시장질서를 기초에서 흔들게 되는 것이다.
땅을 다스리는 경제생활, 인간의 과오와 반역의 역사다.
하나님은 땅을 *경제적으로 생산한 후, 땅을 사람을 지어서 *경제적으로 다스리게 맡겼다. 땅의 다스림을 맡긴기 자는 위탁자 또는 신탁자가 되고, 땅의 다스림을 위탁 받은 사람은 수탁자가 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땅을 다스리도록 맡길 때는 몇 가지 조건을 먼저 정하여 맡겼다. 이것이 하나님이 위탁자(신탁자)로서 수탁자인 사람에게 제시한 언약(조건부 위탁)이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 간에 맺어진 최초의 언약이자, *경제법이었다.
그런데 수탁자가 *경제법을 어기므로 땅의 다스림을 위탁한 하나님은 수탁자를 바꾸어야 했고, 위탁 조건도 시간이 흐를수록 바꾸거나 더하여야 했었다. 언약의 갱신과 추가가 필요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위탁자와 수탁자의 관계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새로운 수탁자로 다시 세울 때까지의 과정를 그 요지만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 땅의 다스림을 최초로 위임받은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첫 언약을 위반한다. 먹지 못하게 한 열매를 아담 부부는 먹어버린다(창 3:6). 아담은 금지된 물질에 대한 탐심을 가졌고(보암직, 먹음직, 지혜롭고 탐스러움직), 이런 탐심을 알고 있던 뱀이 아담을 유혹하여 일어난 최초의 범죄가 *경제법 위반 사건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경제법을 위반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한다. 언약대로 아담 부부는 죽을 죄를 지었다. 그러나 살려준다. 그 대신 죄가 없는 짐승이 피를 흘려서 죽었고,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아담에게 입혔다(창 3:21).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 동산 밖으로 내어보내서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신다. 주인은 이렇게 사람에게 다시 땅을 관리(경작)하게 맡겼다(창 3:23).
(2) 아담은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을 낳았는데 형이 아우를 죽이는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이 살인사건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받아주고, 가인의 제물은 받아주지 않은 데 대한 가인의 노여움에서 발생하였다. 곧 가인은 아벨처럼 믿음으로 첫 새끼를 제물로 올리는 제사를 드리지 못했다(히 11:4). 가인의 이런 믿음은 잘못된 경제생활에서 기인한다.
경제생활에서 가인은 농업을, 아벨은 양을 치는 분업을 하게 된다. 농업은 특정 지역에 정착하는 직업이고, 목축업은 풀을 따라 떠도는 생활을 하게 된다. 가인은 아버지를 따라 정착한 토지에서 경제활동을 하면서 장남의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양은 식용할 수 없고(창 9:4), 제물을 드리거나 가죽옷만 지어 입을 수 있다. 그러므로 형제의 분업에서는 가인 곡식과 아벨의 양이 서로 나누어져야 한다. 이것이 분업 경제에 필요한 물물교환이다. 그런데 가인은 제물을 교환하지 않고, 자기가 생산한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다. 가인은 직업상 필요하고, 또 동생 아벨의 생존에도 필요한 물자교환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인도 아버지처럼 *경제법을 어겼다. 하나님은 경제법을 어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았고(창 4:5), 그를 놋 땅으로 추방하게 된다(창 4:16).
(3) 아담은 다시 셋을 낳았고, 셋이 아담의 손자 에노스를 낳았다. 이때야 비로소 하나님을 불렀다(창 4:26). 이것이 땅의 주인 하나님과 그 관리를 위탁받은 사람과의 관계가 비로소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회복한 기간이 약 1천년 기간, 아담에서 노아까지 10대의 대수가 흘러간다. 지구촌은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이 불어나고 있다. 그러자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서로 혼음 상태에 빠져들며 온갖 죄를 짓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고, 땅 위에 사람을 지은 것에 대해 한탄하며 근심하게 된다(창 12:5,6). 수탁자가 위탁자의 영적, 경제적인 관계를 이렇게 어지럽혔다. 하나님은 그래서 홍수의 심판을 내리는 데 이것이 노아의 홍수 사건이다. 홍수 심판에는 노아의 세 아들인 셈, 함, 야벳과 배우자를 포함하여 가족 8명이 살아남는다. 노아 가족은 홍수 이후에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9:20).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은 채로 잠들었고, 여기서 함의 불손한 행위가 있었다. 함의 불손 행위 이후 낳은 막내 아들이 가나안인데(창 9:18,25), 이들이 훗날 가나안 땅에서 살면서 범죄에 빠지게 된다.
(4) 노아의 세 아들이 시날 땅에 모여서 살았고, 거기서 바벨탑을 쌓는다(창 10:10, 11:2). 이곳이 비옥한 곡창지대로 세계의 문명이 제일 먼저 발생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다. 그들은 거기서 바벨탑을 쌓고, 땅의 주인 하나님을 반역하며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있다(창 11:4). 하나님은 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과 함께 자신의 땅을 가득 채우라는 당부도 함께 하였다(창 9:1). 그러나 노아의 후손들은 시날 땅에 모여서 흩어지지 않으려고 바벨탑을 쌓으며, 하나님의 당부를 어겼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탑을 무너지게 하고, 언어를 혼잡케 하였다(창 11:7). 이것이 바벨탑 사건이다. 바벨탑 사건은 땅의 관리를 위임받은 사람들이 다시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않고 땅을 채우라는 경제법을 어긴 데 대한 징계이었다.
(5) 이렇게 하여 흩어진 인류는 세상으로 흩어져 살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다시 범죄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갈대아 우르는 노아의 셋째 아들 셈의 후손이 살았고, 가나안 땅은 노아의 차남인 함의 후손, 곧 가나안 족속들이 살았다. 그런데 모두 우상을 섬기며 살았다.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도 우상을 섬겼다(수 24:2). 하나님을 두고도 우상을 섬기는 것은 탐심을 채우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의 관리를 맡기면서 사람이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계명을 주고 있다. 그래서 그 조건대로 땅을 관리하려면 땅은 경작을 해야 하고, 주어진 조건들을 지키면 탐심을 채우기가 어렵다.
그러나 우상은 땅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조건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의무가 없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면, 사람들이 추구하는 탐심을 채우기가 쉽다. 이렇게 하여 사람들은 수탁자의 책임을 져버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다. 이것이 그동안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을 지은 이래 5회째 계속되고 있는 생활법규를 위반한 각종의 행위들이다.
주)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스메르인이 살았고, 갈대아 우르가 우상을 섬기는 지역으로 확인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땅을 맡기려고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살아온 인간의 역사다. 땅의 관리자, 위탁자, 청지기로 지음 받은 사람이 지구상에서 살아온 모습이다. 천지창조에서부터 주인과 관리자, 곧 주인과 청지기 사이는 지켜야 할 도리와 조건이 있다. 그것이 위탁자와 수탁자의 기본질서다.
주) 청지기는 구약에서 애굽의 총리, 요셉의 시종으로 처음 등장한다(창 43:16,17). 신약에서 청지기(steward)는 문자적으로 ‘집을 지키는 자’이며, 주인의 시중을 드는 종, 신하, 주인의 고용인이기도 하다. 맡은 업무는 주인이 위임한 조건과 범위 안에서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독자적인 권한을 갖는다. 예수님은 주인의 재산을 맡아서 관리하는 자를 청지기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눅 16:1, 마 20:8). 필자는 하나님의 땅을 관리해야 하는 사람의 역할을 모두 이 청지기의 직분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활에서 이렇게 기본질서인 법과 도리를 지키지 않는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의 범죄, 가인의 살인 행위, 노아 시대의 음란 행위와 홍수 사건, 그리고 바벨탑 사건 등으로 크게 네 번이나 청지기의 직분을 위반하였다. 그런데 사람은 다시 비옥한 초승달 지역 메소포타피아는 각지에서 토지주인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 사람이 땅의 주인이 만든 법과 질서를 어긴 사례가 이번이 다섯 번째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지상의 사람들에게 노아의 홍수처럼 벌을 내릴 수도 있었으나, 홍수로 인류를 전멸시키는 심판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도 하였다(창 9:11). 하나님은 홍수 이후 노아의 여덟 가족에게 긍휼을 베풀어 미래에 복을 주는 언약을 수차례 하였다(창 8:17, 9:1,17).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우상을 섬기며, 청지기 직분에 빗나간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모두 벌하는 대신, 그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하여 구원을 베풀고, 땅을 다시 맡기려고 한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셈족의 직계 후손인 아브라함이 선택을 받았다(창 12:1, 수 24:3).
가나안 땅에 사는 함의 후손, 곧 가나안 땅의 여러 족속들은 이미 하나님이 그 미래를 예언한 바가 있다. 함이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는 행동으로 저주를 받았다. 그 저주에서 구체적 대상이 가나안 족속으로 드러나고 있다(창 9:25). 이들은 시날 땅에서 니므롯과 함께 바벨탑을 쌓기를 사실상 주도하였고, 가나안 땅에서는 사악한 우상, 바알을 섬기고 있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은 함족의 후손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복을 약속돤 셈족의 후손들에게 주려는 것이다(창 9:26).
하나님은 징계와 구원의 방식을 바꾸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불러내고 가나안 땅을 맡기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금까지 행하여 오신 심판과 구원의 방식과는 방식이 다르다. 지금까지는 죄를 범한 아담, 가인, 그리고 홍수심판의 대상자들, 그리고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이 모두 징벌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징벌을 직접 내리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상숭배를 하는 집단은 그대로 두고 사람을 선택하여 구원을 베풀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선택한 구원자와 함께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다른 민족을 징벌하면서 새 땅을 맡기려고 한다. 이렇게 범죄에 대한 징벌은 가능한 희생자의 수를 줄이려고 한다. 죄를 지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주고자 하는 배려다. 그런데 이렇게 징벌과 구원의 방식을 바꾸면, 사람들이 돌이키는 회개에 시간이 걸리므로 장기적인 구원 계획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을 숭배하는 갈대아 우르에서 모든 사람을 쓸어버리는 징계는 하지 않고,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불러내었다. 그리고 지금도 같은 우상을 섬기고 있는 가나안 족들을 쫓아내고 그 가나안 땅의 관리를 맡기려고 한다. 가나안 족속이 이런 범죄로 징벌을 받는 것은 이미 노아로부터 예언되어 있었던 사건이다(창 9:25, 왕상 9:21,22).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통하여 중동지방은 물론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베풀려고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천지창조의 목적이었던 하나님과 사람, 신탁자의 수탁자, 주인과 청지기 사이에 지켜야 할 기본질서를 가르쳐 주고 있다.
지금까지 창세기 1~11장까지의 역사를 길게 설명한 것은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을 불러서 가나안 땅을 주려고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고 있다. 지금 이스라엘과 아랍인의 분쟁에서 근본 원인이 되는 가나안 땅의 소유권의 문제는 그 뿌리를 이렇게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백성과 이스라엘 땅을 선택하여 오게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도 가나안 땅의 진정한 주인과 관리자는 누구?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도올 김용욕 씨는 하나님은 ‘사막의 깡패’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광야로 불러내어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을 점령하여 살도록 했다는 것이다. 필자도 성경을 처음 접하였을 때는 김용욕 씨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가나안 땅을 진입할 때는 그곳의 생명은 가축이라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헤렘”이라고 하는데, ‘제물을 불살라 온전히 받치는 행위’를 뜻한다. 그러면 선택된 희생 제물에게만 헤렘을 적용해야지, 왜 살아있는 생명 모두를, 이토록 잔인하게 진멸하라고 하는가 말이다. “사랑을 강조하는 하나님이 왜 이렇게 잔인한 명령을 했을까?” 이것은 저자인 모세가 아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빼앗고 점령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거짓 구실을 붙이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성경을 더 깊이 파고들면 필자의 생각이 잘못이었음 알 수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창세기의 천지창조부터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 청지기인 사람 간의 구체적인 언약(계약) 관계를 밝혀가면서 그 연유를 설명해 오고 있다. 땅은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고, 사람은 땅의 청지기일 뿐이라는 말이다. 청지기는 주인과의 언약이나 계약을 따라서 수탁받은 계약대로 땅을 관리할 뿐이다. 그런데 청지기가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는 않고, 주인을 배반하여 우상을 섬기고 있다. 이 우상을 섬기는 행위에는 인신을 제물로 희생시키는 사악한 범죄까지 저질렀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더럽히고 있는 족속들을 모두 없애버려야 했다. 이것이 가나안 7족속을 진멸해야 할 하나님의 “헤렘”이었다.
그런데도 필자의 논증에 수긍하기 어렵다면, 이렇게 한번 더 생각하여 보자. 다음 말하는 트럭의 주인과 운전기사의 예로 주인과 수탁자(주인과 고용인, 주인과 청지기, 위탁자와 수탁자) 간에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어떤 것인지를 찾아 보자는 것이다.
-트럭 주인과 운전기사-
[누가 영업용 트럭 몇 대를 직접 만들었고, 그 트럭의 운행을 위해서 운전기사 몇 사람을 채용했다고 하자(또는 주인이 트럭의 관리를 위탁하거나 임대했다). 트럭을 운전할 기사들은 면허증이 있어야 한다. 차주는 기사들과는 일정한 조건이 제시된 고용 계약을 맺는다. 기사들은 주인의 차를 운전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으며 살고 있다. 여기서 트럭의 생산자는 소유자이며, 운전기사는 소유자에 대해서는 고용인의 신분이다(트럭을 위탁했다면, 수탁 관리자).
그런데 기사가 운전을 직업으로 삼고 살면서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는다. 도로에 설치된 교통 신호도 지키지 않는다. 차선도 지키지 않고, 심지어 역주행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동차는 잦은 사고를 내어서 문제가 생기고, 피해도 크다.
그러면서 이 기사는 차 안에 우상인 드라빔을 장착하여 두고(창 31:35, 삿 18:4), 이 드라빔이 운전 중에도 사고를 막아줄 것으로 믿는다. 그래도 잘못된 운전으로 사고가 줄어들지 않으니 이제는 점을 치러 다니고, 무당을 불러서 굿도 한다(사 2:6). 이처럼 운전기사는 우상숭배로 혼을 빼앗기고 있다. 그래도 주인은 이 기사에게 우상숭배를 경고하고, 바른 운전을 주문하고 앞으로는 나아질 것을 기대하고 다시 트럭 운전을 맡겼다.
그런데 이 기사가 주인에 대한 불순종과 교통법규의 위반은 그침이 없이 계속되고 있다. 이제는 트럭을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 이름으로 소유권 등기를 한다. 그래서 자기 필요를 따라서 트럭을 잡히고, 돈은 빌려 쓰기도 한다. 이제 그 트럭을 팔아먹기도 한다. 트럭을 팔아보니 오랫 동안 트럭을 굴려야만 벌어드릴 수 있는 거액의 수입이 한꺼번에 내 것이 된다. 트럭 기사는 이제 트럭 사용료로 받아도 그 수익금을 모두를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가져간다.
이것만이 아니다. 이 운전기사는 더 많은 돈을 벌려는 탐욕을 품고 우상을 더 강하게 섬긴다. 그래서 효녀 심청을 임당수에 수장하듯이 사람을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기도 한다.]
트럭 주인에 대한 운전기사의 행동은 이러했다. 그러면 차주는 [ ] 안의 행위를 반복하는 운전기사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물음에 대하여 하나님을 “깡패”라고 한 김용옥 씨는 한번 답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사정이 이렇더라도 그 기사에게 차를 계속하여 몰도록 맡긴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는가?
트럭을 몰면서 우상을 섬기고, 운전 법규도 지키지 않고, 남의 차를 자기 차라고 하면서 저당을 잡혀서 빚을 내고, 팔아먹기도 하고, 내어야 할 사용료(또는 수익금)도 내지 않는다. 더구나 자기를 위하여 섬기는 우상에게 사람의 생명을 인신 제물로 드리기까지 하면서 사악한 행동을 하고 있다. 트럭 주인은 이 운전기사를 어떻게 해야 할까?
땅의 주인 하나님과 가나안 땅에 살았던 7족속들에 대한 토지주인의 징계는 바로 이 트럭 주인과 불량한 운전기사의 사이에서 나타나는 불의 또는 범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살면서 사악한 우상을 섬기며, 그 땅의 주인을 부정해온 가나안 7족속을 멸하라고 한 것이다. 땅의 관리를 주인이 제시한 조건대로 하지 않고, 여기에 사악한 우상을 섬기기까지 하는 배은망득한 자를 약속을 따라 처단한 주인의 조치는 지극히 당연하다고 해야 한다. 토지주이에 대한 가나안 7족속의 삶은 이러했었다.
가나안 족속들, 우상숭배 다시 한번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사는 7족속을 쫒아내고,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들은 땅의 주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겼으며, 심지어 우상에 바치는 제물은 인신을 바치기도 했었던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께서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들의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자기들의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들에게 드렸느니라(신 12:31)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신 18:10~12)
고대 사회에는 여러 형태의 인신 제사가 관습적으로 있었다. 신에게 살아있는 사람을 바침으로써 신의 진노를 풀거나 복을 얻으려는 의식이다. 보통은 전쟁 포로나 종을 그 대상으로 한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왕의 신하나 귀족의 딸, 궁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바쳐지기도 한다. 우상을 섬기는 제사 의식에서 남성과 여성 간의 혼음 행위로 태어나는 자녀를 불살라 받치기도 하였다. 성경에도 바알과 몰록 등 우상 숭배자들이 자녀를 불사라 받치는 인신 제사가 있었다
예레미야 19:5절에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고하였다. 이런 인신제사는 우상숭배가 심했던 메소포타미아에도 있었고, 바알 우상을 섬겼던 가나안 족속들에게도 있었다.
이런 제사의 방법은 성경이 말하는 희생 제사에 그 근본을 달리한다. 성경의 제사나 제물은 지은 죄를 대신하는 대속의 제사이고 제물이지만, 우상의 제물은 그 제물이 신의 진노를 풀거나 신을 기쁘게 하는 예물이나 공물(貢物)이다. 이와 같이 제물이 속죄물이 아니고, 신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봉헌물의 성격을 가진다. 성경에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나 봉헌물이 있지만, 이것과는 달리 드리는 제물은 속죄에 필요한 대속물이다. 이 대속물은 죄의 경중에 따라 제물에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고, 죄를 용서해 주는 하나의 의식이다. 죄는 심령의 회개로 용서를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제물은 모든 사람에게 죄의 경중에 관계없이 사함을 받는다. 큰 죄는 큰 것을 받쳐야 그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인신이 제물로 받쳐지는 사악한 우상숭배가 풍습이 되어가는 것에 대하여 노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낳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을 한 적이 있다(창 22:1). 그러나 이삭을 제물로 희생시키지는 않으셨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는 믿음과 순종의 자세만 보고 제사를 멈추고, 준비해 둔 양을 잡아서 제사를 대신 드리도록 했었다(창 22:12,13). 이것이 대속(代贖)의 제물이다.
주) 우리는 간혹, 사사시대에 사사인 입다의 딸이 제물로 받쳐져서 죽은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삿 11:31). 그러나 이것은 번제물은 반드시 태워드리는 제물로만 생각한 오해로 빚어진 것이다. 본문에는 입다의 딸이 죽었다는 구절이 없다. 사사기 11:37,38은 입다의 딸이 “처녀 됨을(킹제임스성경 삿 11:37,38)”이라고 하였으나, 번역은 “처녀로 죽음을(개역개정 성경 산 11:37,38)”이라고 하여서 생겨난 오해다. 입다의 딸은 아버지의 서원을 따라 일생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하나님께 헌신했던 것을 말한다. 성경상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인신 제물로 받은 적이 없다.
하나님은 우상을 섬겨서 그 신에게 인신을 제물로 올리고 있는 가나안 7족속들을 모두 멸하라고 한 것이다. 지극히 정당한 것이다. 이것이 어찌 김용옥 씨가 말한 것처럼 깡패 짓이 될 수 있는가 말이다. 이런 주인의 정당한 소유권 행사와 악을 행한 자들에 대한 정당한 조치를 깡패 행위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토지주인이 땅을 주어 사람을 먹여살리는 베품과 은혜도 모르는 청지기의 배신을 어떻게 그냥 방치할 수가 있겠는가? 그들이 탐욕을 채우기 위해 인신을 제물로 바치는 사악한 제사를 계속하여 자행할 것인데 어찌 싹을 잘라버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우리가 겉보기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헤렘(진멸)”의 진실이다.
그래서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사악한 무리들을 진멸하고 그들은 대신하여 다시 가나안 땅을 맡길 청지기로 선택한 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다.
천지창조 이래 하나님은 땅의 청지기를 맡은 사람들이 행한 우상숭배와 수탁자로서의 반역 행위를 5차례나 겪었다. 더구나 가나안 땅에서 드리는 인신 제사는 더 참을 수가 없는 악행이다. 이들은 자기들의 탐욕을 위해서는 인명 살상과 전쟁 등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집단이다. 이런 범죄 행위는 뿌리부터 잘라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리 예언한 대로 가나안 땅에 사는 가나안 7족속을 모두 몰아내고,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맡기려고 한다(창 9:25,26).
가나안의 땅에 대한 약속은 구속사에서 연대를 정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주전 2082년경의 횃불언약이다. 그런데 이 언약은 400년 이후에 성취될 것이라고 한다(창 15:13). 그만큼 가나안 땅에서 7족속을 쫓아내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그 땅을 차지하기까지는 이처럼 오랜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만큼 약속의 땅은 어렵고 험난하다는 것을 미리 알려준 언약이다.
그런데 천지창조 이후 그동안 4회에 걸쳐 있었던 인류의 범죄와 그에 대한 징계와 구원은 하나님이 직접 하셨다. 그래서 그 징계의 범위가 공동체 전체 또는 모든 지역에서 일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징계나 구원의 기간을 길게 잡으신다. 그동안 지구상에는 인구수가 많아지고, 범법자의 수도 많아졌다. 그래서 그때마다 징계를 하게 되면 희생자의 수가 많아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의 방식을 바꾸어 공동체 전체에 대한 징계는 유보하고, 범죄자 집단에서 사람을 구해내어(선택하여) 구원을 베풀고 땅을 맡기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후손들이 수가 적고 보잘것없어서(대상 16:19), 자손이 번성하여 수가 많아지고, 영적 훈련으로 성장시킨 후에 견고한 나라를 세우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부터 시킨다. 400년(400년, 430년, 490년)간 혹독한 애굽 종살이를 겪게 하여 땅이 없는 백성들이 당해야 할 고통을 실감하게 한다. 한 공동체가 생존할 수 있고, 자유롭게 되는 것은 독립된 주권과 땅이 있어야 하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횃불언약대로 400여 년의 시간이 지난 다음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너게 하였고, 여호수아를 통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졌고, 토지를 백성들에게 분배하였다. 이때가 주전 1396년 경이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소유인가?
그런데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민족의 소유물이 아니다. 가나안 땅의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주어도, 계명과 규례를 정하여 가나안 땅을 맡기게 된다. 그러면서 계명에는 “땅은 다 나의 것이다(레 25:23).”라는 소유권의 명시를 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조건부로 가나안 땅을 맡기게 된다. 이것은 신앙고백과 별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제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지키도록 만들어준 법이었다.
그리고 조건부라는 사실에 대한 사전 이해가 필요하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우상을 섬겨서 기본질서를 어긴 것은 모든 사람이지만, 그중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량한 백성이거나 특별한 신분을 가진 자라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 민족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구속사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 민족 중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여 장차 모든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오게 되는 구속사를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천지창조의 목적대로 사람들이 땅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도록 보여주고, 가르쳐주려는 것이다.
여기서 조건부란 이스라엘 민족에게 땅을 맡길 때에는 사전 언약이 있었다는 뜻이다(레 26:1,21,33).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계명의 준수이다. 지금도 가나안의 땅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이 계명의 준수 여부가 관건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전 1406년부터 가나안 땅에 진입, 정복하여 1396년 첫 희년을 맞는다. 그 정복한 땅을 백성들에게 분배하고, 각자 기업으로 돌아갔었다. 이때부터 가나안 땅은 토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맡기게 된 것이다. 가나안 땅은 이때부터 남유다가 패망한 주전 586년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땅이었다. 약 800년 기간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 땅에서 범죄를 저지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7족속들이 섬겨온 바알신을 섬멸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바알신을 섬기게 된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삿 10:6)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건축하였으며 자기들의 아들들과 딸들을 몰렉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하여 유다로 범죄하게 한 것은 내가 명령한 것도 아니요 내 마음에 둔 것도 아니니라(렘 32:35)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시대는 농경신 바알, 왕정시대는 상업신 바알을 섬긴다. 농경신 바알은 가나안 토속신이며, 상업신은 악녀 이세벨이 페니키아에서 수입한 신이다. 이들이 섬긴 바알은 풍요와 다산의 신이다. 바알신은 재물에 복을 주고, 자식들에게 복을 주는 신이다. 이러한 바알신을 섬기면, 이 바알신은 인간의 탐욕을 채워주는 신이기 때문에 나의 사생활은 자유롭지만, 공동체는 생활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 문제는 하나님과 사람, 주인과 청지기, 수탁자와 위탁자의 신분에서 지켜져야 할 위계질서와 시장질서를 어긴 데에서 온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땅에서 징벌을 받게 된다. 이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직접 응징하지 않으신다. 주위에 힘을 가진 여러 제국을 등장시켜서 이스라엘을 치도록 하였다. 하나님을 따라서 사악한 범죄를 행한 가나안 일곱 족속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내세워서 징벌하게 한 것과 방식이 같다. 여기서 이스라엘을 치게 한 제국들이 앗수르(아시리아), 바벨론, 바사(페르시아), 헬라, 로마 제국들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영토는 이 오랜 기간 제국들의 참략에 짓밟혀 초토화되었고, 나라는 식민지, 백성들은 식민 통치 하에 굴욕적인 삶을 살거나, 포로로 잡혀가서 종이 되거나, 세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살아야만 했다.
주후 14세기부터 20세기 초엽(1923년)까지 동방에 기원을 둔 오스만 제국이 들어와서 가나안 땅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때에 많은 이슬람 종교를 가진 아랍인들이 대거 들어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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