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일이다. 어느날 서울역에 시골의 친구가 얼굴좀보재서 만나러 갔다. 친구와나는 삼겹살 집으로 갔고 술
잔을 기울이며 예전 일들을 추억하며 기억해냈다.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었고 둘은 술에 취해 노래방도 갔다.실
컷 노래를 부르고 2차를 갔다. 만신창이가 되어 친구를직에 재우겠노라 이야길 했는데 내일 급한 일이 있어서 찜질방에서 자고 새벽에 가야 한단다. 친구는 찜질방으로 보내고 나혼자 술에 비틀거리며 서울역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다가 헛디뎌서 계단에 구르고 말았다. 오른쪽 발목이 부러지고 온 몸이 안아픈데가 없었다. 그겨울... 주저앉아 걷지도 못하고 지하도에 주저앉
아 날을 샛다. 그날 아침에서울역 다시서기 센터를 통하여 서울의료원으로 수술을 하러 갔다. 아홉시간의 수술 후 겨우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마취가 조금씩 풀리더니 다리의 고통이 대단했다. 진통제 링게루를 맞으며 겨우 누워 숨을 쉰다. 발목에 쇠파이프를 대고 수술을 해놔서 내 살 같지가 않 았다. 한 달이 지나 의사가 목발을 사용해 보란다. 목발을 짚고 공원도 왔다갔다 했
다. 두 달이 지나서 퇴원할 수 있었다. 절뚝거리며 서울역에 사고난 곳을 다시 가보았다. 때는 2003년 봄 4월 이었다. 매주 화요일엔 음성꽃동네에서 버스로 사람을 태우러 온다고 한다. 그순간도 나는 술이 떡이 되어 실신 상태로 있었다. 버스가 오고 수사님이 내리고 의사수녀님이 내렸다. 수사님이"형제님 약주를 많이 드셨네요, 형제님 같이 꽃동네 한번 가보시지 않을래요?" 이
경희 의사 수녀님이 달려와서 날 살피더니 수사한테 가서 소주 두병만 사오라고 시키셨다. 귀신이 아른거리고 헛오바이트가 쏠려서 도저히 버스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사가 사온 소주두병을 들이키고 나서야 버스에 올라탔다. 눈을 따보니 '아나빔의 집'(가난한 사람들의 집)이었다. 한 형제가 내 온 몸을 샤워시키고 새옷을 가져다 놓았다. 복지사와상담을 하고 아나빔의 집에
어 계속 생활했다. 여름엔 고추를 따서 말리고 종이 박스 접는 일도 했다. 아나빔의 형제들은 다들 노숙자 출신이다. 자의적으로 온 사람은 몇명 없다. 식구들은 150명 쯤 되었고 주일마다대성당에 미사를 갔는데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몇명 없다
큰 주방에서 음식을 날라와 끼니 때마다 식구들의 밥을 배식하였다. 아나빔의 집에도 주방이 있는데 내가 주방장을 하였다. 화요일마다 서울역으로 올라가는 버스에 토스트와 삶은계란 빵등 만들어서 실려 보냈다. 버스가 서울역에 도착하면 같이 간 형제들이 길벗들에게 나누어 주고 꽃동네에 오실 사람들도 알아보았다. 다리에 철심을 박아 저린데도 그런 봉사가 싫지 않았다. 2년 넘게
봉사를 했고 1층부터 4층까지 매일 쓸고 닦고 정리를 했다. 멀리서 지켜보시던 사도 요한 수녀님이 아나빔의시구들을 관리하셨는데 대뜸 "형제님, 세례 한번 받아보지 않으실래요?" "네 받고 싶어요. 수녀님" 일주일에 한 번씩 자기에게 오라는 것이다. 수녀님께 직접 교리를 받고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대성전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때에 견진도 같이 받았다. '마티아와 생일이 같다고 '마티아'라는 세례명을 주셨다. 작은 손묵주를 선물해주셨다. 그날 이후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대성당 새벽미사를 나갔다. 갔
다와서 배식을 하고 성경책을 보았다. 많은 기도문을 외우고 외우다 보니까 이젠 입에서 술술 나왔다. 아나빔큰방에 전체가 모여 저녁마다 기도를 하는데 내가 선봉으로 기도를 시작했다. 개신교만 알았던 나는 그곳에 살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용서하는 법을 알았고 위령성월엔 식구들을 위하여 제사도 모셨다. "마티아 형제님,'부활의 집'에 주방에서 일 할 사람을 뽑는데 형제님이 하시면 어떨까요?" "네, 제가 할게요" 바로 다음 날 아침 '부활의 집'에 출근했다. 어르신들이 위 경관식을 하시고 누워서 볼일을 다 보신
다. 음식은 일반식이 있고, 다진 찬이 있고, 믹서기로 간 죽이 있다, 위경관식을 하시는 어르신은 콧줄로 뉴케어를 드린다. 음식은 늘 정성을 다하여 깨끗하게 만들었다. 그곳에서 월급도 탔고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땄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산 꼭대기에 있는 대성당에 새벽길을 오르면서 묵주기도를 바쳤다. 서울 집으로 가려는 마음이 올라왔다. 수녀님과 주임 신부님께 인사를 하고 영등포 집으로 왔다영등포 성당으로 교적을 옮기고 열심히 다녔다. 문제는아직도 술이었다. 혼자 있는게 외로워서 매일 술을 찾았다. 지금의 영등포 '사랑의 집'이 있는 곳, 그 언저리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데아는 형님이 스타렉스를 몰고와 내게 "규수야 강화도 병원에 함께 가지 않을래?"그곳이 어딘지는 몰랐지만 술을 끊을 수 있다면 못 할일도 없었다. "그래요, 가요 형" 뒷좌석에 앉아 졸다보니강화도에 도착했다. '베스트병원'이라고 씌어 있었다.바닷가 옆이고 공기도 좋았다. 원장을 만나고 간호조무사
와 보호사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내 침상으로 갔다. 그곳은 오픈한지 2년 채 안되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려왔는지 모두 알콜중독자다. 많이 본 사람도 있었고 죽었다고 생각한 친분 있던 사람도 만났다. 나는 자유의지로 술을 끊으려고 왔지만 나머지는 노숙이나 가정의 파탄, 식구들이 강제로 집어넣은 경우도 많았다. 난 하루에 한 번씩 외출을 허락 받았지만 강제로식구들의 손으로 집어넣은 사람은 그 외출도 보호자없이는 할 수 없었다. 난 바닷가를 거닐며 갈매기들을 바라다보고 백사장에 낙서도 해본다. 아버지,엄마,큰누나의 이름을 써내려 갔고, 잘 살고 있을 큰형과 작은형 작은 누나를 생각해 보고 손주들도 생각해냈다. 외출했디가 들어갈 때에는 참외나 수박을 사서 5호실 내방 형제들과 나누어 먹었다. 여자 목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나를 콕 찍더니 지하 사무실에서 자기를 좀 도와달라셨다. 일요일마다 여목사는 형제들을 불러모아 놓고 찬양과 설교를 하신다. 9호실에서 어떤 한 형제가 가족과 함께 외출을 했는데 저녁술에 취해 비틀대며 들어왔다. 보호사 둘이 달려들어 독방의 침대에 팔다리를 묶
어 놓고 그대로 문을 잠갔다다음날 아침 식사시간에 꺼내준다. 말 그대로 '정신병원'이었다. 외출나간 어떤 형제는 4층 병실에서 실을 꼬아 만든 줄을 창문밖으로늘어지게 매어 놓고 돌아올때에 소주 대병을 사와서 꼭다리 부분에 실줄로 묶은 뒤병실에 올라와서 당긴다. 다음날 아침 식사시간이 되자난리가 났다. 보호사가 병실로 갔더니 다들 술냄새가 풀풀 풍기며 자고 있는 것을 알이버렸다. 소주병도 미처 감추지 못해 들키고 말았다. 다들 되방으로 들어가 팔다리가 묶이었다. 범인을 잡았고 그 형제는 세달 간 외출 금지령이 떨어졌다.
수원에 도착해 제부도 물 빠지는 시간에 버스를 타고 출발해 제부도에 다았다. 선장과 사모님들을 만났고 함께일하러 간 두명의 형제들도서로 인사 하였다. "자네들 먼길을 오느라 수고했네. 봄까지만 잘 부탁하네." "김 팔리는 양에 따라 보합제로 하세"... 때는 늦가을이다. 아침밥을 먹고 하우스로 간다.큰 하우스 안에서 김발을 100m가량 늘여놓고 전복껍데기에 김씨를 붙여 김발
에 매는 작업이다. 동네 아주머니도 와서 일을 하고 우리도 함께 한다. 김씨를 다 붙인 김발을 둘둘말아 배에다 옮기는 작업은 남자들의 몫이다. 120kg정도 나가는김발을 두사람이 나한테 지워주면 나는 덜렁 메고 배로 옮겨 실는다. 새참이 나왔다. 선장 마누라가 해산물과 밥과 국, 소주를 들고 들어 오셨다. "아저씨들, 힘들죠?" 연신 땀을 닦아내며 싱싱한 해산물과 소주를 컵으
로 마셔댔다. 내일은 바다로 나가서 일을 해야 한다.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선장과우리 셋은 배에 올랐다. 20분쯤 가더니 멈추었다. 작년에 김공장으로 들어가고 밧줄이 그대로 논처럼 이어져 있는데 밧줄이 보이지 않도록 밧줄이 가라 앉아 있었다. 원인은 홍합이다. 홍합이 25mm밧줄에 한아름씩 매달려 있어 밧줄을 물위로 띄어주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둘은 밧줄을 "영차,영
차"당기고 나는 세파이프로 홍합과 밧줄을 때려 털어버리는 작업을 해댔다. 김양식은 농사의 논과 같은 이치이다. 늦가을이라 먹을만큼 큰홍합들을 양동이에 받아 집에 가져 갔고 그날도 수고를했다며 선장이 "소주에 홍합국을 끓여 대접으로 퍼먹었
다. 알이 꽉찬게 일품이었다이렇게 저렇게 시간이 흘러겨울이 왔다. 본격적으로 양식일에 뛰어들었다. 배에다 염산을 열동이정도 쏟아붙고 김발을 당기며 염산에 닿게하고 뒤로 넘긴다. 이 염산 처리는 파래는 죽고 김만살기 때문이다. 숭어떼들이 입을 뻐끔뻐끔대며 김씨앗들을 쪼아먹는다. 쇠파이프로 몇대 두드리니 숭어 두마리가 동동 배를 세우고 떴다
염산처리를 잘못하다가 한 형제는 눈에 튀었다. 실명이될 수도 있다. 한 형제는 낫으로 얽힌 밧줄을 자르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내장화는 빵구가 나서 발에 염산이 들이찼다. 난 얼른 미끌미끌한 장화를 벗어버리고 발을 닦고 다른 장화로 갈아신었다.
한 형제는 병원에 가고 한 형제는 물로 눈을 헹구고 괜찮다고 한다. 김이 검으스름하게 잘 피었다. 이른 봄에 기계로 김 체취를 하여 선주의 공장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공장엔 아줌마들이 잔뜩 있었고 힘든 일을 하는 남자들은 몇 되지 않았다. 완연한 봄이 오고 김철이 지나가려한다. 제부도 김과 전라도 김이 합쳐져야 제대로 김노릇을 한단다. 제부도김은 물결이 잔잔하여 김이 곱고 전라도 김은 바디가 거칠어서 너무 거칠다. 그래서 섞어서 김발에 말린다. ㅡㅡ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여
다 내게로 와서 쉬어라' 선주도 사모님들도 마진이 크게 남았다며 기뻐했고 우리 셋도 통장 가득 돈을 모아서 기뻤다. 선장내외와 올 가을에 다시 올것을 기약하고 서울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