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플래쉬>를 보고
송하연
미국 명문 셰이퍼 음악학교 신입생 앤드류는 인정 욕구에 불타는 청년이다. 위대한 뮤지션을 꿈꾸며 밤마다 드럼 연습에 매진한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버벅대는 실력이라고 욕을 먹는 보조 드러머에 불과하다. 아버지는 드럼 때문에 고통받는 아들을 보며 인생에 다른 길도 많다고 조언하지만, 그것은 그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다. 한때 작가를 꿈꿨으나 실패하고 교사가 된 아버지. 친척들이 무례하게 굴어도 사람 좋게 웃으며 넘어가는 아버지. 앤드류는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이때 제2의 찰리 파커를 길러내고 싶어 하는 플레처 교수가 그를 자신의 스튜디오 밴드에 발탁한다. 전설적인 지휘자의 눈에 든 데 고무되어 지켜만 보던 영화관 알바생에게 데이트까지 신청했건만, 이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찰리 파커가 ‘버드’가 된 건 존스가 머리에 던진 심벌즈 때문이라고 굳게 믿는 플레처는 자기 박자를 지키지 못했다고 학생에게 의자를 날리는 막장 선생이었다. 그럼에도 앤드류는 그에게 인정받고, 자신의 기량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단원들 앞에서 가정사가 들춰지고 따귀를 맞아도 피를 떨궈가며 발악하듯 드럼을 연습한다.
“서두를 거야, 질질 끌 거야, 내 박자에 맞출 거야?” 앤드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플레처의 박자를 맞추는 길밖에 없다. 플레처는 그의 음악적 생사여탈권을 쥔 사람이다. 그가 요구하는 더블 타임 스윙의 극단적인 박자를 맞추기 위해 여자 친구를 잔인하게 버리고, 교통사고가 난 몸을 이끌고 경연장에 오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미한 몸으로 경연을 망치자 플레처에게 최후통첩을 듣는다. 그날 배신감에 정신이 나간 앤드류는 교수를 때려눕혔다가 폭행죄로 제적당한다.
영화 후반부, 앤드류는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플레처의 잔인한 함정에 빠진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커리어가 끝장날 수 있는 중요한 무대에서 혼자만 틀린 악보를 전달받은 것이다. 결국 플레처의 계획대로 첫곡을 완전히 망친다. 풀죽은 채 아버지와 함께 돌아갈 것 같던 앤드류는 돌연 무대로 되돌아오더니 플레처를 망신 주려는 듯 독단적인 연주를 시작한다. 지휘자를 대신해 자신이 신호를 주겠다고까지 선언하며 무대의 주도권을 빼앗는다. 분노한 플레처의 위협에도 “fuck you”를 날리면서 자신의 템포를 밀어붙인다. 휘어잡으려는 스승과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제자가 정면으로 충돌하며 숨도 못 쉴 만큼 매혹적인 연주가 탄생한다. 영화는 두 사람의 웃는 듯한 얼굴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예술에 대한 고민을 담아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예술은 가볍고 즐거워야 하는가, 아니면 예술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는가. 고교 시절 음악을 할 때마다 늘 이 사이에서 고민했는데, <위플래쉬>를 완성한 후에도 결론을 못 내렸단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 갈리는 것 같다.
취준생의 입장에서 보니 유독 감상이 삼천포로 빠진다. 예술에 대한 셔젤 감독의 생각에 대해서도 그렇다. 사람의 마음에 두 가지가 다 있는 것 같다. 플레처가 앤드류의 늦은 밤 드럼 연습이 유령처럼 불러낸 또 다른 자아로 보이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임용 공부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가볍고 간단하게 발제문을 적으려다가 몇 번이나 글을 뜯어고쳤다. 글만 쓰면 좀 더 정확하고 완벽한 문장이나 글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강박이 솟는다.
<위플래쉬>를 보고 난 뒤 복잡한 여운에 며칠을 허덕였다. 몸치에 박치인데다 소심하고 생각 많은 성격인 내게 이 영화는 스릴러의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살면서 제때 맞춰야 할 박자들을 번번이 놓쳐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가장 두려웠던 것도 운동회 때마다 돌아오는 반별 단체 줄넘기 시간이었다. 영화에서 박자가 빨랐는지 느렸는지 추궁할 때마다 좌불안석이 됐었다. 그런데 다 보고 나니 이제는 무섭기보다 배알이 더 꼴렸다. 앤드류에게 큰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놈이 혼자 득도한 듯 떠나버려서다.
고등학생 시절에 <위플래쉬>를 봤을 때는 막연히 부럽기만 했다. 그때 느낀 정신 나간 감상이 아직 기억난다. 가슴 뛰는 것도 없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으니, 내 안의 무언가를 보고 대신 답을 주는 플레처 같은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의 앤드류가 되어주겠다는 생각이었다.
어영부영 스물다섯이 됐지만 지금도 상황은 비슷하다. 뭐라도 해야 할 나이에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게 너무 어렵다. 원망할 사람 하나 없이 결정도 책임도 나 혼자 져야 한다는 게 공포스럽다. 앤드류의 허들이 높았다는 점만 절절히 깨닫고 있다.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앤드류가 서른 초반쯤 자살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앤드류가 부럽다. 결국 자기만의 박자를 쳐본 사람이 아닌가. 북 치는 원숭이 인형의 단계를 벗어났으니, 플레처와 비슷하다고 할지라도 플레처와는 다른 길을 걸을 수도 있지 않을까.
첫댓글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글이 너무 안 써지는데 완벽하게 쓰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어서 올리는 게 망설여졌네요. 수정하고 싶은 마음 뿐이지만 더 늦기 전에 그냥 올립니다. 다음 글은 조금 더 일찍 올릴게요. ㅠㅠ
발제문 잘 읽었습니다. 플레처와 앤드류 사이에서 주체가 흔들리고,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의 주체까지 붙잡느라 며칠을 고생하셨을 것 같네요. 그럼에도 한 편의 완성도 높은 발제문이 나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체적으로 아주 훌륭하고, 많은 고민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품행제로>와 <밀양>에는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아요. 반면 <위플래쉬>와 다음 주에 볼 <싸움의 기술>에는 마치 닮은 꼴처럼 두 아버지가 등장하죠. 생물학적인 아버지와 상징적인 아버지. 합리적이고 관용적이지만 아들이 뭘 원하는지 모르는 아버지와 아들의 욕망을 정확히 알고 있는, 유능하지만 폭력적이고 무법적인 아버지. 무엇을 '해라, 마라' 선 그어주는 아버지가 부재할 때 주인공은 처음부터 길을 잃거나(밀양) 길을 벗어나 있어요(품행제로). 하지만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무조건 이렇게 하라' 밀어붙이는 권위적인 아버지가 등장할 때 주인공은 그 길에 갇혀버립니다. 잃을 것인가, 갇힐 것인가, 양자택일을 넘어서는 길은 단선적이지 않아요. 하지만 결국 '그만하면 됐다, 다른 길도 많다, 집에 가자'고 말하는 아버지의 품에 안기기보다, 자신을 모욕하고 조롱하면서까지 한계와 마찰하게 하는 아버지를 따를 때, 비로소 그 아버지를 밟고 넘어설 수 있는 길도 열립니다. 앤드류가 한밤중 유령처럼 홀로 드럼을 친 건 스스로 자신을 이끌어줄 스승을 호출하는 행위였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발견해 줄 사람은 저절로 등장하지 않아요. 아들(딸)이 자신의 욕망으로 부를 때 등장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