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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희망 / 시 2:1-12, 고후 4:16-18
사도 바울의 서신이 신약성서 로마서부터 빌레몬서까지 13권이나 된다. 오늘 우리가 읽은 책인 고후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기록한 특징이 있다. 그가 개인적인 생활을 소개했다고 할 때에 그의 기쁨이나 행복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의 고난과 아픔과 슬픔 그리고 환난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고후에서 그는 항의섞인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또한 고난에 관하여 변명조로 말하고 있다. 11장에서는 그의 환난당한 사실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변명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진실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하여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생활을 보여주고자 하는 자신의 간증임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오늘 본문은 그의 생애를 비교하면서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갈파하고 있다. 동시에 그의 체험적인 생활을 당파가 심하고 물질에 치우치고, 우상숭배에 기울어져 있는 고린도교회 이방인들에게 교훈한다. 이렇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간직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는 호소력있게 고백하는 내용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설복시켰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고난에서 여호와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신 분이다. 또한 그에게서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같은 열매를 맺기 원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은혜의 말씀으로 사도 바울처럼, 고린도교회 모든 성도들처럼 우리들도 체험하기를 원한다. 오늘 본문 속에서 3가지 대조적인 말씀을 하고 있다.
1. 겉사람과 속사람
겉사람은 무엇이며 속사람은 무엇인가? 내 얼굴에 표면적으로 나타나 있는 가면은 무엇이며, 그 가면을 벗기면 무엇이 나타나느냐 하는 사실이다. 이러한 표현은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법을 다른 곳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롬 7:22절에서는 속사람, 엡 4:22-24절에서는 옛사람과 새사람이 나온다. 그리고 베드로는 벧전 3:4절에서 마음에 숨은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그의 몸이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낡아져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늙어가고 있다는 말이고,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연의 원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비과학적인 사람들이다. 결국은 사람이 죽어간다. 인간의 몸은 결국 썩는 물질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 가운데 인생은 허무한 존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인생이 늙어가고, 죽음에 가까워지고, 썩을 수밖에 없으니 이 인생의 무상함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가? 인간에게는 그래서 이 허무함을 시로 읊고, 소설로 표현하고, 노래를 부르며 그림으로 그리는 허무적인 예술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한 나머지 어떤 철학자는 ‘자살은 인간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찬양했다.
여기에 비교해 볼 때 그리스도인들도 허무주의임에 틀림이 없다. 왜? 인생은 죽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겉사람은 죽어가지만 속사람은 점점 더 새로워져 가고 있다는 면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인생의 참된 진리를 알려고 하는 사람은 영원한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한다. 인간의 참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영적인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인데, 그것은 인간의 속사람을 찾아내는 것이다. 사람의 겉모양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인간의 맑고도 깨끗한 그 속에서는 하나님이 본래 자신의 모습을 낳어주신 그 형상을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의 겉모양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니의 형상은 인간의 그 깊은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이 모습이다. 거듭난 존재를 의미한다. 영적으로 새로워진 존재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드 안에서 사는 인간을 말한다. 이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새로워진다는 의미는 개혁한다는 것이며,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며, 갱신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날로 새로워지는 인간을 원하신다. 그 사람은 영원한 기업을 받을 영혼이다. 이것은 지극히 분명한 진리이다. 땅에 심은 씨앗이 썩어짐으로 인하여 그 속에서 새싹이 움터 나오는 것과, 열매가 익어갈 때 겉은 물러지고 그속에 있는 씨앗은 굳어지는 것과, 큰 대리석의 껍질이 까질 때 그속에서 아름다운 조각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과 같다. 새 집을 건축할 때 새로운 모양이 점점 이루어져 가면, 짓기 위하여 세웠던 오름대나 붙었던 껍데기들은 걷어내야만 한다. 겉은 낡아지지만 속은 새로워지는 이 인간의 원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인 빅토르 위고가 80세에 한 말이 있다. ‘나의 낡은 몸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터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진리이냐?’라고 했다. 그의 나이 80세가 되어 죽을 날이 가까웠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나오고 있다니 참으로 아름다운 진리를 깨달았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속사람이 바울에게서 나타난 것 같이 새로워질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면 신앙의 정상적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 우리들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야 할 때가 왔다. 하나님의 형상을 날로날로 회복하여 가는 생활을 해야 한다.
2. 환난과 영광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특별한 환난을 주제로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생애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으리만큼 중요한 주제임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서 자랑으로 하지 않고 자신의 생활을 거울로 삼아서 다른 성도들의 생활을 바르게 이끌어 가고자 하였다. 그는 많은 환난을 당했다. 11장에 보면 그의 깊은 고난의 이야기가 14가지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어서 성밖에 내다 던진바 된 일도 있다. 40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태장을 세 번 맞았다. 바다의 위험을 당하고, 민족의 위험과 이방인이나 짐승의 위험과 밤의 위험은 물론이고 추워서 떨었고, 자지 못했고, 굶주렸고 헐벗었으며, 나의 모든 생애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까지 나의 당한 고난을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람이 환난을 당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떤 짧은 이야기 속에 있는 내용이다. 남미의 한 가난한 마을이었다. 노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었다. 그런데 항상 가난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풍년이 들어도 그들은 여유있는 곡식을 얻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남의 땅을 빌려서 일을 하는 소작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다가 흉년이 들었다. 그러니 더욱 먹을 것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먹을 양식을 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근심과 걱정이 많았다. 어느날 저녁에 밖에 나갔다. 밭을 거닐다 보니까 무를 뽑다가 남은 몇 개가 보였다. 그것을 뽑아서 그 자리에서 먹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면서 우박이 쏟아진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남의 밭에서 무를 먹어서 벌을 내리신다고 여겼다. 그 노부부는 땅에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기도한다. ‘하나님, 너무하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먹을 것이 없어서 굶다가 밭에서 다 뽑고 남은 찌끄러기를 먹었는데 이것이 죄라고 이렇게 벌하십니까? 하나님이여, 어찌 나의 고난이 이렇게 심합니까?’ 너무 고난이 심하면 우리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인간의 고난이 아무리 심하고 인생의 광풍이 제 아무리 강해도 밤이 지나고 먼동이 터 오면 그날은 밝게 마련이다. 이 환난은 잠깐동안 받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회개한 이후 죽는 날까지 환난을 벗어난 일이 없다. 이것이 어찌 잠깐이라 할 수 있는가? 바울의 온 생애가 환난이었는데, 온 생애가 박해였는데, 온 생애가 굶주리고 헐벗고 잠 못이루는 밤이었는데, 이것이 어찌 잠깐이겠나? 그러나 이 시간이 개념은 영원과 비교할 때 조금도 비교될 만한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이 고난을 받을 때 하루가 천년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군대 갔다온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제대를 앞두고 내무반에서 제대 날짜를 기다리면 왜 그렇게 시간이 안가는지 답답하다. 하루가 다른 날보다 몇배나 더 길게 느껴진다. 교도소에서 석방 날짜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너무나 날짜가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한다. 사도 바울의 고난이 쉬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짧은 인생의 고난은 영원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이므로 참고 견디어야겠다고 고백했다. 보통 사람들이 당하는 환난은 자신을 위하고, 가정을 위하고, 명예와 권세를 위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이 당한 이 고난은 그리스도 예수, 나의 영혼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영원한 나의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다. 그러니 내가 잠깐 당하는 것으로 어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대로 갚을 수 있겠나?
가시에 찔리면 피가 난다. 고난은 아픈 것이다. 태장에 맞으면 피가 흐른다. 돌에 맞으면 살이 찢어진다. 일본 사람이면서도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한 전영복 목사님이 한번은 감옥에 들어갔다. 일본은 전쟁을 일으켰다.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이다. 한국의 기독교를 박해했다고 하니까 감옥에 가두었다. 전 목사님은 천정에 3일 동안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힘든 고난인가? 그러나 이것을 잠깐동안의 고난으로 참을 수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롬 8:18절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바울은 고백했다. 인간으로 사는 동안의 고난은 영원한 생명의 원인이 된다. 낮에 말할 수 없는 수고를 한 사람이 밤이 되어 편하게 잘 수 있다면,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 현재 당하는 아픔, 현재 당하는 이 슬픔이 영원의 세계에 갈 수 있는 동기가 될 수 있다.
3.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람은 눈을 갖고 있다. 이 눈은 정말 보배이다. 우리의 시력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 시력이 좋아서 잘 보는 사람도 있고, 시력이 나빠서 안경을 쓰는 사람도 있다. 콘텍트 렌즈를 끼면 좋은 눈을 가진 사람처러 보인다. 이렇게 할 때 우리가 무엇을 볼 수 있나? 눈은 너무 가까운 것도 볼 수 없고, 너무 먼 것도 볼 수 없다. 너무 작은 것도 볼 수 없고 너무 큰 것도 볼 수 없다. 적당한 거리에 적당한 크기여야 볼 수 있다. 본문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먼데 있는 것이나 더 가까이 있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영원한 영적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행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영의 눈을 통해서 자기의 전도여행을 바꾸게 되었던 사실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마게도냐로 건너갔다. 하나님이 그에게 영적인 눈을 주셔서 일하게 하셨다. 불수레를 타고 자기를 둘러서서 옹위하여 지켜주는 그 수많은 하늘의 군대를 엘리사는 보면서 적군의 힘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의 순간에도 그의 눈 앞 저 먼 곳에는 하나님 나라의 문이 활짝 열려져 있다는 것을 보는 영광의 꿈을 꾸면서 그 고난을 참으셨다. 스데반도 성령이 충만하여 영적인 눈을 뜨고 하늘을 보니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오늘 우리들이 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하는 이 사실에 대해서 분명한 진리를 깨닫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눈은 매우 부정확하다. 신라시대에 원효라는 대사가 있었다. 더 많은 불법을 알기 위하여 당나라로 떠났다. 먼 여행을 하다가 어떤 굴 속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하루종일 걸었으니 피곤하기도 하지만 목이 타서 물을 좀 먹으려고 했으나 어두워서 나갈 곳도 보이지 않았다. 더듬다가 보니 한 표주박에 물이 담겨잇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마셨다. 피곤을 풀고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마신 물그릇이 표주박이 아니라 바로 사람의 해골이었다. 그러니 자기가 마신 것은 시원한 물이 아니라 해골에 고여 있던 사람의 썩은 물이었다. 거기서 그는 새로운 진리의 방법을 깨달았다고 한다. 관념론 철학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프랑스의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으로 시작하는 학문의 방법을 정하였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방법으로 시작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길을 가는 그의 앞에 뱀이 가로막고 있었다. 무서운 마음이 들어서 지나간 다음에 가려고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조금 가까이 가보니 뱀이 아니라 밧줄이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부정확한가? 그는 여기서 그의 학문의 방법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들의 눈은 정확하지 못하다. 사람의 눈만 아니라 생각도 그러하다. 우리는 영원한 것과 이 세상의 것을 바꿀 수도 없고, 비교할 수도 없다. 이것이 우리들 안에서 나오는 영원한 신앙인데, 우리가 영원한 영적인 세계를 사모할 때,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을 마음에 받아들여야 진정한 희망이 그에게 이루어진다. 희망은 지금이 이야기가 아니다. 희망은 내일의 이야기요, 내년에 올 이야기요, 미래의 이야기이다. 그러면 지금의 것은 모두 없애버리자 할 수 있나? 지금의 것까지는 모두 희망의 내용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오늘 이 순간부터 영원한 순간의 희망이 시작된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 희망을 가질 수 있나? 지금은 영원의 시작이다. 우리는 현재 문제를 소홀히 취급해서는 안된다. 나에게 지금 닥쳐있는 문제를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에 이어지도록 해결해야 한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영원한 오늘’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렇다. 오늘은 영원까지 계속된다. 영원의 문턱이 지금 나의 앞에서 시작되고 있다. 이 시간을 거짓으로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자세로 섬기는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희망이다. 갈보리교회 성도들은 영원한 희망을 가슴 속에 품고 하루하루를 그리스도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8-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