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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판단기준 / 겔 30:1-9, 고후 5:8-17
지난 주 김영삼 대통령의 담화문은 많은 생각을 하면서 발표한 것이었다. 한보사태의 파장을 줄이려는 고심이 엿보였다. 아들인 김현철이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국정에 관여를 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김현철에게 잘 보여야 높은 자리에도 올라갈 수 있었고, 기업이 성장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안기부 고위직 직원이 김현철의 명에 의하여 담당했다는 것이다. 한보그룹이 5조원 이상을 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았는데, 검찰에서는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넘어갔다. 우리나라가 생긴 이래 최대의 경제사건이다. 그런데 대학교가 개학을 하면 학생들이 한보사건을 들고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학생들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한보가 융자받은 것 중에서 1조 2천억원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들어갔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지나 25일 발표한 사과문은 국민을 기만한 것임에 분명하다. 이런 사건들로 인해 국민들만 손해를 본다. 왜냐하면 물가가 오르기 때문에 국민들의 호주머니만 더 얄팍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올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지도자를 어떤 사람을 뿝느냐에 따라서 국민의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처음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이 나타났을 때 그들는 당시 사람들에게 과연 어떻게 보였을까? 이것은 매우 흥미롭고도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놀라운 사실은 당시 세계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인들이 혁명가로 보였다는 것이다. 행 17장을 보면, 바울 일행이 희랍의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였을 때 그곳에 살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적대시하고 이들을 붙들어 당국에 끌고가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이라고 고발했다. 여기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이라고 번역한 이 원문은 ‘세상을 거꾸로 뒤집어 엎는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곧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혁명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라고 고발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당시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혁명가라고 규탄한 것이 하나의 오해이거나 과장 또는 근거없는 중상모략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말을 들을만 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저는 처음 그리스도인들이 혁명가로 보인 것은 결코 오해나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오해나 오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이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였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아무 이유없이 혁명가로 비쳐진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것을 좋아하지, 결코 혁명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이 혁명이란 말에 지나치게 신경과민의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이 말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비판받았던대로 과연 혁명적인 종교인가 하는 질문은 우리가 결코 회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특히 국내적으로나 세계적으로 볼 때 혁명적인 상황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 질문은 특히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 질문을 답하기 전에 먼저 혁명이란 말을 잠깐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보통 혁명이라고 하면 정치적 의미로만 생각한다. 더욱이 그것도 진정한 정치에 있어서의 혁명보다는 적나라한 힘의 정치, 폭력정치를 연상한다. 그래서 우리는 혁명이란 말을 싫어하는데, 이것은 사실 이해가 자는 현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혁명, 제가 오늘 말하려고 하는 혁명은 그런 뜻이 아니다.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혁명은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 혁명이란 ‘어떤 사물이 완전히 한바퀴 도는 것, 또는 돌리는 것, 완전히 뒤집어 엎는 것, 어떤 생각이나 질서로 완전히 뒤집어 엎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곧 혁명은 종전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질서로 바꾸는 것을 뜻한다고 하겠다.
오늘 읽은 고후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데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혁명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1. 바울은 인간은 자연인 그대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혁명적인 주장이다. 사실 그 당시 종교와 인간관에 비추어 ‘한 사람의 존재는 온 천하보다 귀중하다’라는 주장도 혁명적인 주장임에 틀림없다. 기독교는 어느 철학이나 종교보다 인권의 존엄성을 더 강조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이 이처럼 귀중한 존재일지라도 자연인 그대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곧 옛 것, 옛 피조물 그대로 있어서는 인간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어디서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혁명적인 주장이다.
2. 새로운 존재로 변화된다는 것은 교육이나 수양, 어떠한 인간적 노력으로 될 수 없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선만 가능하다는 것이 혁명적인 주장이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 의로운 존재로 변화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존재로 변화받아야 한다는 바울의 말은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말씀, 곧 중생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곧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뜻은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혁명이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고 영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변하여 새로운 존재가 되면 이전의 존재와 어떻게 달라질까?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4:17-24절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렇게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생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혁명적인 변화를 거친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삶, 곧 혁명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세상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것이다. 혁명적인 새로운 삶, 이것을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롬 6:4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은 무엇을 뜻하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문화와 관습과 풍조를 따라서 살아서는 안되고 신앙으로, 새로움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유명한 롬 12:2절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구절은 혁명적인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는 현상질서, 지배문화, 세상풍조를 받아들이지 말고, 이것을 거부하고 변혁, 혁명을 추구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개인적, 영적, 고립적 신앙을 주장한 것으로 보는 시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햑명을 말하고 있다.
3. 기독교의 혁명의 내용은 지금 말한 둘째 요소인 신앙으로, 새로움으로 살아야 한다는 내용과 관련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3.1정신을 실천한다는 의미를 몇가지를 제안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