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사람 / 복향옥
추석 즈음에 받은 선물 보따리 중에 작은 쇼핑백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복향옥’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교회 또래들이 모여 봉사하는 모임에서 준 가방이다. 나눌 인원이 워낙 많아 ‘집사’니 ‘권사’니 하는 호칭어는 생략했을 터이니 이상할 게 없는데, 피식 웃음이 나온다. 간단명료하게 ‘복향옥’이라고만 적힌 글자 한 자 한 자가 너무 반듯해서였을까, 문득 음식점 이름 같다며 놀리던 사람들이 생각난 것이다. 그러면서 이름 때문에 벌어졌던 몇 가지 일들이 꼬리를 물고 따라온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가끔 ‘향단이’로 불린 적이 있다. 별명이라기보다는 짓궂은 남자아이 두엇이 나를 놀리고 싶을 때 써먹는 무기로 사용되곤 했다. 내게 ‘향단이’는 아킬레스건 같은 거였다. 웬만한 일에는 흥분하지 않는 나를 아는 녀석들은 마지막 카드로 “향단아!”를 외쳤다. 이어 “메롱.”을 덧붙이며 도망갔다. 다행히 그때는 녀석들보다 내 다리가 조금 더 길었으므로 금세 붙잡았을 수 있었다. 곧바로 치고받는 싸움으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같이 복도 끝에서 무릎 꿇고 앉아 두 손 높이 드는 걸로 마무리가 됐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웃고 넘어갈 일이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향단이’라고 불리는 게 싫었을까. 어쩌면 춘향이가 아니라 향단이어서 더 맘이 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 이름자가 싫었던 첫 번째 기억이다.
초등학교 때에는 ‘복’가 성을 가진 아이들이 많아서 그랬는지 내 이름이나 성씨를 언급한 선생님은 없었다. 그랬는데, 중학교에 입학한 후 며칠간은 매시간 긴장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이름 부르기가 어렵다, 이런 성씨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이 주변에 많으냐, 본관(本貫)이 어디냐 등등 출석 체크하면서 그냥 넘어가는 선생님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제대로 걸린 건 체육 첫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출석부에 시선을 둔 채 줄줄 이름만 불렀다. 그러다 내 이름 뒤에서 그 리듬이 끊겼다. “복향옥이 누구야? 어디야? 손들어 봐.” 순식간에 낯선 아이들 시선이 내게 쏠렸다. 이래저래 간이 콩알만 해져서는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빤히 바라보던 그가 툭 한마디 던졌다. “복영옥 동생이야?” 이미 중학교를 졸업한 셋째 언니의 이름을 거기서 듣게 될 줄이야. 잠깐 썰렁했던 분위기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선생님들로부터 인정받는 학생 중 하나였던 셋째 언니 덕분에, 내 중등 시절은 다소 무난하게 시작됐다. 그때를 지내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 이름자가 사람들 뇌리에 잘 박히는 글자들로 이뤄졌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차츰 재미없는 모범생이 돼가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이 돼서는 수학 시간에 수난을 겪었다. 출석부와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이름 부르던 수학 선생님은 나를 호명한 후에, 특이하게 행동했다. 아주 잠깐 묘한 웃음을 짓는가 싶더니 칠판을 향해 돌아서서는 아무 말 없이 물고기 한 마리를 그렸다. 배가 불룩한 게 내가 아는 붕어하고는 딴판이었다. 시장에서도 그런 요상한 물고기를 본 적 없던 충청도 산골 아이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칠판을 탕탕탕 두드렸다. 그것은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게 아니라 물고기 등에 점을 찍느라 낸 소리였다. 교실은 다시 수런거렸고, 그런 분위기를 정돈하듯 그가 질문을 던졌다. “이 물고기 이름 아는 사람!”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 그가 곧 스스로 답했다. “얘 이름은 복쟁이다. 복어 새끼를 말한다.” 동시에 교실은 웃음바다가 됐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내게 몰렸다. 그다음부터 그는 나를 ‘복쟁이’로 불렀다. 그 사건은 내가 수학에 애정을 갖지 못한 타당한 이유가 됐다.
그 일들 말고도 이름 때문에 빚어진 일들이 많다. 대학교 다닐 때 어떤 교수님이 “자네 집에는 가야금이 많은가?” 하길래, “저, 국악과 학생 아닌데요?”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조선옥이나 명동옥 같은 요정(料亭. 고급 요릿집. 혹은 한때 음주가무가 이뤄지던 음식점을 뜻하기도 한다) 이름 같아서 농담한 거였다. 또, 방송인 임국희 씨와 엠비씨 라디오에서 ‘여성살롱’을 할 때였는데, 그녀의 집으로 전화했더니 남편이 받았다. 나는 분명히, “...저는 복향옥이라고 하는데요.”로 시작해서 용건을 잘 전달했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생방송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폭소했다. 피디(PD)와 엔지니어들이 의아해하자 계속 깔깔거리면서 “어젯밤에 남편이 그러더라고. <복향옥>에서 전화 왔었다고.” 하는 것이다. 덕분에 방송은 즐겁게 시작됐지만, 내 마음은 그다지 가볍지 않았다. 가수 이택림 씨는 나를 볼 때마다 “오늘은 복어를 먹을까, 향어를 먹을까?” 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곧 “둘 다 드세요.” 하고 화답하는 처세술을 배웠다.
그러다 어른이 됐고, 교회에 다니면서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그들의 반응은 달랐다. 이름이 참 예쁘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어느 작은 교회 목사님은 내 이름을 삼행시처럼 정리해서 보내주셨다. 복 있는 사람, 향기로운 사람, 옥구슬 같은 사람. 처음엔 민망하고 황송했지만, 그렇게 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안 될 때가 훨씬 많을지라도 날마다 반성하며 그런 삶 꾸려가려 애쓴다. 또, 이름 덕분에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더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좋다. 교회에서 만나는 이에게는 능청이 는다. ‘권사’라는 직분 때문이다.
“저 부르실 땐 띄어쓰기를 잘하셔야 해요. 복권 사, 아니고 복권사! 하셔야 해요.”
첫댓글 이름 때문에 이런저런 사건들이 많았네요. 나는 처음 선생님 이름을 들었을 때
재물이 많이 붙을 이름이구나 했어요.하하. 언제 방송국 일도 하셨네요.
하하하 재물욕심이 없어 자꾸 가세가 기울어가요. 하하
향기로운 복향옥님!재미있어서 여러번 읽었습니다. 특히 '선생님이 칠판을 탕탕 두드렸다~물고기에 점을 찍느라 낸 소리였다.'
너무 생생하게 그려졌어요.
저도 어린 시절 '수캐'. '허수아비'로 불리우며 속상해 울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흐억... 조선시대 왕비님 같은 이름을 그런 험악한 소리로 부르다니.
저런 나쁜 녀석들을 봤나! (이럴 때 사람들은 시베리안 허스키를 부르더라구요. 하하)
성과 이름이 독특해서 부럽습니다.
하하하 그만큼 고초를 당했다는.
선생님 이름은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 못하죠. 하하. 그러나 선생님을 잊지 못하게 하는 건 꼭 이름만이 아니란 거 아시죠?
울 미옥쌤은 항상 말도 이쁘게 해요. 얼굴도 이쁘지, 일도 잘하지, 글도 잘 쓰지, 말도 이쁘게 하지...
그 댁 남편은 진짜 복도 많어요. 하하
'향기'라는 글감을 듣고, 저도 제 이름 관련 글을 쓰려고 했거든요. 근데 썼으면 큰일날 뻔 했어요. 비교돼서요. 하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은 정말 송송 향기나는 사연 있을 것 같아요. 별명도 이쁠 것 같고요. 하하
선생님 이름도 장난 아니게 이뻐요.
글도 재밌게 써질 것 같아요.
기대하고 있으렵니다.
저는 방송에서 복스럽게 산다는 그 말이 참 좋습니다.
향옥이라는 이름도 참 예쁘고요.
담에 또 오시면 그땐 커피 말고 몸에 좋은 차 대접할게요.하하
아이고, 제 이름에 대면 정말 멋진 이름입니다.
복 씨 네 자매가 봉강을 주름잡고 있는 것, 제가 다 알잖아요. 하하.
아닌 게 아니라, 이 여름 고생좀 했더니 주름이 훅 늘었어요. 하하하
'따로 또 같이, 행복한 우리가족, 광양 하조마을 복씨 자매들' 다시 보고 옵니다. 이름 참 좋아요. 복, 향, 옥 진짜배기 세개가 모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