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노트 35 – 내가 있어서 보는 것이 아니고 조건이 성숙되어서 보는 것
< 수행 노트는 1996년도부터 미얀마에서 마하시 선원장과 한국인 수행자들의 수행면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참고는 수행자를 돕기 위한 묘원의 글입니다. >
1997년 9월
질문 : 대상을 볼 때 내가 보는가, 아니면 과연 누가 보는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답변 : 대상을 볼 때 내가 보는 것이 아니다. 볼 때는 네 가지의 요인이 결합해서 보는 것이 성립된다. 네 가지가 조건은 눈, 대상, 빛, 마음이 결합해서 보는 것이다. 모든 현상은 원인에 의한 결과지 나의 의한 것이 아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다른 성자와 다른 것이 바로 무아다. 모든 착각은 내 것,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머리카락, 코, 침이 내 몸에 있을 때는 내 것이니까 불결하게 느끼지 않지만 몸에서 떨어지면 더럽고 불결하게 느낀다.
< 참고 >
대상을 볼 때 내가 보는 것이 아니고 네 가지 조건이 결합해야 보는 것이 성립됩니다. 네 가지 조건이란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결합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안, 이, 비, 설, 신, 의가 여섯 가지 감각대상인 색, 성, 향, 미, 촉, 법과 접촉해서 아는 것이 성립됩니다. 이것을 십이처라고 합니다. 십이처는 열두 가지 장소라는 뜻으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 내처와 여섯 가지 감각대상인 육 외처의 결합니다. 이처럼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해서 아는 마음이 성립되는 것이지 내가 있어서 전부 주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을 볼 때 눈이, 대상을, 빛에 의해서 보고, 아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때 네 가지 조건 중에 하나만 없어도 보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보는 것이 아니고 네 가지 조건에 의해 보는 것입니다. 대상을 보고 아는 마음은 감각기관 중의 하나지 내가 아닙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단지 부르기 위한 명칭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닌 관념입니다. 내가 본다고 했을 때의 진실은 내가 아니고 이러한 네 가지 조건의 결합이 있어서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보는 것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네 가지 조건이 원인이고 보고 아는 것이 결과입니다. 다시 수행자는 네 가지 조건으로 아는 것이 원인이고 알아차림이 있는 것이 결과입니다. 알아차림이 있는 결과가 바로 수행입니다.
소리를 들을 때 귀, 소리, 장애물 없음, 아는 마음이 있어야 소리를 듣는 것이 성립됩니다. 이때 네 가지 조건 중에서 하나만 없어도 소리를 듣는 것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듣는 것이 아니고 네 가지 조건에 의해 듣는 것입니다. 냄새를 맡을 때 코, 냄새, 공기, 아는 마음이 있어야 냄새를 맡는 것이 성립됩니다. 이때 네 가지 조건 중에 하나만 없어도 냄새를 맡는 것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냄새를 맡는 것이 아니고 네 가지 조건에 의해 냄새를 맡는 것입니다.
맛을 알 때 혀, 맛, 침, 아는 마음이 있어야 맛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네 가지 조건 중에 하나만 없어도 맛을 아는 것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침이라는 타액이 없어도 맛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맛을 아는 것이 아니고 네 가지 조건에 의해 맛을 알 수 있습니다. 몸이 대상과 부딪칠 때 몸, 대상, 접촉, 아는 마음이 있어야 몸이 접촉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네 가지 조건 중에 하나만 없어도 접촉하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접촉하는 것이 아니고 네 가지 조건에 의해 접촉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대상을 알 때 마음, 대상, 접촉, 아는 마음이 있어야 마음이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네 가지 조건 중에 하나만 없어도 아는 마음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는 것이 아니고 네 가지 조건에 의해 마음이 알 수 있습니다. 이때의 마음조차도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연속되기 때문에 조금 전의 마음과 현재의 마음과 조금 이후의 마음은 모두 다른 마음입니다. 그래서 어느 것을 나의 마음이라고 할 수 없어 무아입니다.
이처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알고, 몸이 접촉하고, 마음이 아는 것이 모두 원인이고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결과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눈여겨 볼 때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어서 생긴다는 진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생기기 않습니다. 똑같이 인간의 태어남도 과거의 원인으로 인해서 생긴 결과지 내가 있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날 원인이 없으면 태어나는 결과가 없습니다. 무상, 고, 무아의 깨달음을 얻어 집착이 소멸하면 다시 태어날 원인이 없어서 태어나는 결과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거 생의 내가 있어서 현생의 나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원인이 성숙되어서 태어나는 결과가 있을 뿐이지 여기에 나는 없습니다. 이때의 원인을 조건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로 회전하는 것을 연기라고 하며 이것을 윤회라고도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면 연기의 회전을 알 수 있습니다. 연기가 회전하는 원인과 결과를 알면 내가 회전하는 것이 아니고 조건이 회전하는 것을 아는 지혜가 납니다. 이때의 지혜가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입니다. 이런 지혜가 나면 내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고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알아 의심에서 해방됩니다. 이 단계에서 의심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위빠사나 수행을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연기를 기본도라고 합니다.
만약 대상을 볼 때 ‘보는 이놈은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때 보는 이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네 가지 조건에 의해 보는 것이 성립되는 것이며 여기에 어떤 자아가 없습니다. 보는 이놈이란 바로 네 가지 조건입니다. 네 가지 조건은 어떤 인격체가 아니도 단지 감각기관과 감각대상과 빛의 조건입니다. ‘보는 이놈’을 인격체로 생각하면 영원히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질문이 실체가 있는 어떤 자아를 찾는다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이 실체가 있는 인간으로 바뀌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있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의문을 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의문을 풀려면 그냥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적절한 지혜가 나야 비로소 바른 견해가 생깁니다. 생각으로는 존재의 실체를 알 수 없고 오직 통찰지혜로써만이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누가 보는가?’라는 의문이 들었을 때는 답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지금 누가 보는가, 라는 의문이 들었네’ 하고 의문이 든 사실을 대상으로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생각으로는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적절한 통찰지혜만이 의문을 해결해줄 것입니다. 그래서 의문도 하나의 알아차릴 대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인간의 시작과 끝은 자기 몸과 마음에 있습니다. 시작도 몸과 마음이고 끝도 몸과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 관한 해답은 오직 몸과 마음이 아닌 것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시작과 끝은 원인과 결과입니다. 원인과 결과가 지속되는 것이 윤회입니다. 아라한이 되어 원인이 사라졌을 때 결과가 없어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태어남은 바라는 마음이 원인이 되어 정신과 물질이 재생되는 결과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 관한 의문은 일단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생긴 지혜가 아니면 답을 얻을 수 없다고 알아야 합니다.
2. 질문 : 내 몸과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 지혜라고 하는데 이런 지혜가 오히려 두려움을 줍니다.
답변 : 어제의 몸과 마음과 지금의 몸과 마음은 다르다. 몸과 마음은 매순간 빠르게 변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고통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좋다고 느끼는 것은 집착하기 때문이다. 붓다께서는 이 집착을 버렸기 때문에 유일하게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신다. 모든 일들은 조건에 의해서 생긴 원인과 결과라는 현상의 결과일 뿐이다.
내가 만든 것이라거나, 나의 것이라거나, 나의 생각이라고 할 때 이것들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모든 현상을 보면 나라고 할 것이 없으며 나의 뜻에 의해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모두 원인과 결과에 의한 현상일 뿐이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모두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머리카락, 손톱, 코, 침이 내 몸에 있을 때는 좋지만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 혐오감을 준다.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이런 착각과 같은 것이다.
< 참고 >
연기가 회전하고 윤회의 흐름이 지속되는 근본원인은 무명과 갈애다. 하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 접근해보면 무명과 갈애를 조종하는 것이 유신견이다. 완두콩만한 유신견이 있어도 열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유신견 보다 더 큰 해악은 없다. 몸이 있다는 유신(有身)은 있다. 하지만 이 몸이 나의 몸이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몸이고. 내가 소유할 수 있는 몸은 아니다. 그럼에도 내 몸이라고 할 때를 유신견이라고 한다. 유신은 있지만 유신견은 잘못된 견해다. 몸은 있지만 나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다. 몸과 마음은 단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연속적 현상만 있다. 유신견은 단지 몸만을 의미하지 않고 마음까지를 포함해서 내 마음이라고 아는 견해다.
지금까지 내 몸과 마음이라고 알고 살았는데 내 몸과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에 혼란을 느끼고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내 몸과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은 지혜가 나야 알 수 있는 진실이다. 완전한 지혜가 나기 전에 단계적 과정의 지혜에서는 내 몸과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이 두려움을 줄 수 있다. 이때 두렵기 때문에 진실을 덮을 것이 아니고 두려움이 있어도 계속해서 알아차려야 한다. 두려움은 지혜가 성숙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지혜의 단계다. 불안함과 두려움 없이 유신견이 소멸할 수 없다.
두려울 때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또 ‘지금 두려워하고 있네’하고 두려움을 대상으로 알아차려도 좋다. 그런 뒤에 가슴에서 느낌을 알아차리거나 호흡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생각에 빠진다. 무엇이나 나타난 것은 모두 알아차릴 대상이다. 수행 중에 어떤 답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모두 알아차려야 한다. 답은 지혜가 날 때 저절로 알 수 있다. 지혜로 알기 전에 생각으로 답을 얻으려고 하면 지혜가 계발되지 않는다. 수행은 나타난 모든 대상을 단지 알아차리는 것으로 그쳐야지 한다. 답을 얻으려고 하는 순간 생각에 빠져 알아차림이 사라진다.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와 내 몸과 마음이라고 알아차릴 때는 다르다. 몸과 마음을 선입관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몸과 마음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발견한다. 그러나 내 몸과 마음이라고 알면 자기 것을 집착하기 때문에 대상이 가지고 있는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알지 못한다. 이런 차이가 범부와 성자의 차이다. 범부는 내 몸과 마음이라고 알아 집착해서 괴로움을 끌어들인다. 성자는 내 몸과 마음이 아니므로 집착할 것이 없어 하등에 괴로울 일이 없다. 이것이 윤회의 흐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 윤회가 끊어지는 해탈의 차이다.
첫댓글 修行問答(위빠싸나) - 35-1. 내가 보는 것이 아니고 條件이 成熟되어 봄이 成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