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242. 2024년 9월 21일
전남여고 문인회 부여 나들이
밤새 내린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새벽이 되어서도 억수같이 내렸다. 이 빗속을 뚫고 버스를 타러 가는 것이 심란하였지만, 나는 작업실을 나섰다. 공항철도를 타기 위해 버스를 타러 가다가 운동화와 바지가 내리는 비에 흠뻑 젖어 다시 작업실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샌들로 바꿔 신고 갔다.
고속터미널까지 가야 하는 여정이 시작부터 만만하지 않아서 오늘 일정이 은근히 걱정되었다.
오래전에 계획된 전남여고 문인회 정기 답사인데 나는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서먹하고 전시 작업해야 되어서 부담스러워 망설였다. 광주에 있는 친구가 참여한다며 함께하자고 하여 신청했었다.
부여에 있는 신동엽 문학관, 부여 박물관을 관람하고 구드레 나루터에서 황포 돛배를 타고 고란사, 낙화암을 구경하기 위한 일정이다. 서울에 있는 선‧후배 5명과 일찍 광주에서 관광버스로 출발해 올라오는 선‧후배, 동창들, 16명이 공주 터미널에서 9시 50분 합류하기로 하였다.
운무에 가린 산과 들이 서서히 여명을 뚫고 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후배와 이야기하는 동안 버스는 달려서 공주 터미널에 도착했다. 비는 서울보다 훨씬 잦아들어서 부여 박물관에 갔을 때는 거의 멎었다.
박물관 안 로비에 앉아 디지털 영상으로 백제명품, 백제문양전을 보고 전시실에 들어가 백제 선사 문화를 비롯하여 중기, 청동기시대 유물을 들러 보았다. 보고 싶었던 실물 백제금동대향로를 봤다. 그 옛날 도구도 변변찮았을 것인데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든 장인의 놀라운 솜씨를 눈으로 확인하며 인간의 창조성은 어디까지인가? 생각도 해보았다.
소박하면서 기품이 깃든 사비 백제의 문화와 불교문화를 보면서 화려한 신라시대의 문화와는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자세하게 보고 싶었으나 둘러보니 일행이 없어 허겁지겁 나오니 모두 버스에 올라 기다리고 있었다.
구드레 나루터가 가까이 있고, 부소산 근처인 식당에 가서 점심으로 연잎 떡갈비 정식을 먹었다. 부여가 자랑하는 연잎밥에 한 상 가득 차려진 반찬과 소고기, 돼지고기로 만든 떡갈비는 짭조름한 된장찌개와 잘 어울려 맛이 있었다.
비가 와서 황토물로 변한 백마강의 구드레 나루터에 있는 황포 돛배는 모두 묶여 있었다. 부소산에 있는 고란사와 낙화암은 걸을 수 없어 포기했다.
그 옛날 교과서에서 읽었던 관광지를 찾아보려 했는데 아쉬웠다. 신동엽 문학관에 찾아가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며 많은 자료와 박꽃이 초가지붕 위로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생가, 전시된 조형물들을 둘러보았다.
39세란 짧은 생애를 살고 갔지만, 시인의 아버지가 모아놓은 어린 시절의 자료와 부인의 수집에 대한 열정과 정리를 한 추진력에 힘입어 오늘날 신동엽 문학관이 생겼음을 보면서 자료정리의 중요성을 다시 깨달았다.
부인인 인 병선은 혜화동에 있는 짚풀생활사 박물관을 만든 사람임을 알고 놀랐다. 나는 대바구니 자료를 모으고 생활 도구를 보기 위해 혜화동으로 옮기기 전 강남에 있을 때, 몇 번이나 찾아가서 사진을 찍으며 수집한 사람의 열정에 놀라워했었다.
낯익은 이름을 뜻밖에도 문학관에서 발견하고 한 시대를 파란만장하게 살아오면서, 시대정신이 살아있는 시인이며 예술가로 살아 온 사람의 아내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짚풀생활사 박물관에 수장(收臟) 된 자료들을 생각하며 그분이기에 이 많은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부인은 세상이 설명하는 행복을 어떤 조건에서 채워지는 것을 찾지 않고, 남편과 짧은 인연을 조그만 것도 놓치지 않고 수집하고 정리함으로써 사랑하고 받은 시간에 대한 기쁨을 채워갔으리라 생각했다.
짧은 결혼 생활에 대한 미련을 비우는 마음이 짚풀생활사 박물관을 만들고, 남편 생애의 자료를 훌륭하게 보존하여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마음의 가난에 있지 않았나 싶었다.
백제문화단지에 갔다. 1400년 전 우수한 문화를 꽃피었던 고대 왕국인 백제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문화관을 관람하고 사비 시대의 왕궁을 재현한 사비궁과 5층 목조탑이 있는 능사를 거닐었다.
상영관에 가서 애니메이션 사비의 꽃(사비 국을 지켜주는 사비화를 지키는 궁녀와 마술사의 주술에 괴물 병사로 분한 남자의 비극적인 사랑과 사비 국의 운명을 표현한)을 관람했다.
영상을 본 후 우린 그 자리에 앉아, 하 선배님의 20대 시절 공주에서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의 이야기를 시로 써서 낭랑한 목소리로 읊어 주셨을 때, 한 편의 시가 그림이 되어 내 머리에 스쳐 지나는 것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보다 더 감동이었다.
버스는 볼거리가 많은 세계문화유산인 부여 번화가를 지나 공주 터미널에 도착해 서울팀을 내려놓고 광주로 출발했다.
우린 차 시간을 기다리며 찻집에 앉아 수다를 떨다가 임 후배의 핸드폰 (광주 가는 차에 두고 내려 )사건을 수습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다행히 다음날 수원으로 오시는 선배님이 계셔서 만나서 찾기로 하고 말로만 듣던 프리미엄 버스에 올라 편안하게 서울에 왔다. 어두컴컴한 서울의 하늘은 언제 비가 그렇게 쏟아졌는지 모를 만큼 말짱하고 청량했다.